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5 일상수행법문

담마로 화합하라 - 담마와나선원 상가초청법회 법문 (20250706)

담마마-마까 2025. 7. 7. 14:07

https://youtu.be/LA1h-Ab0m78?si=tpSbe44SwOcFPyFj

 

* 담마로 화합하라 - 담마와나선원 상가초청법회- 아짠 빤냐와로스님 법문 (20250706)

<17:05 ~ 43:45초까지 법문이 설해집니다.>

 

오늘부터 안거 들어가죠. 근데 안거 들어가면 스님들도 포살을 해야 되는데, 재가자들도 안거 때는 일주일에 한번씩 팔계를 지켜야 됩니다. 그거는 항상 요일을 정해가지고 와가지고 스님한테 팔계를 받도록 해야 됩니다. 아직까지, 자기 스스로 팔계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른 나라들에서는 팔계는 직접 스님한테 받아야 되지 온라인으로는 안 돼.

그거는 허용이 아직 안 되는 거니까, 반드시 선원에 와가지고 스님한테 받도록 하십시오. 오늘 8계 할 줄 알았더니 오계하고 말아버리네. 저녁 먹으려고 그러네.

 

어쨌든 안거 때는 마음을 좀 달리해야 됩니다. 달리하고, 진짜 부처님 가르침 배우고, 그대로 또 실천해 나가고, 그거로 인해가지고 ‘내가 빨리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석 달이 짧은 것 같아도 그렇게 짧은 기간은 아닙니다. 하다 보면 또 실패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그것을 일단은 무조건 자기가 처음에 계획했던 시간을 꼬박꼬박 채울려고 노력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두 가지의 인간들은 참 드물다"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봉사하는 인간', 그다음에 두 번째는 '감사하는 인간'.

근데 스님은 출가자가 돼 가지고 봉사하는 걸 잘 몰라 솔직히. 근데 감사할 줄은 알아. 언제 감사하는 마음이 참 많이 드느냐면 안거 끝나고 나면은 스님들이 저지른 잘잘못에 대해서 참회하는 시간들을 가집니다.

큰스님을 뵙고 큰스님한테 “스님, 제가 안거 기간 동안에 잘못한 거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한 거 있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했을 때, 큰스님이 “그래. 잘못한 거 용서한다. 자네도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용서해 주게” 이렇게 합니다. 그럼 그 소리를 듣고 나면 그렇게 또 기분이 좋아. 평온하게

 

특히 이제 안거가 끝나고 나면 그래도 2년에 한 번씩, 어떨 때는 해마다 가기도 하는데, 그 압바나-마낫따(Abbhāna-(mānatta)라고 해가지고 스님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참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4바라이죄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전부 참회의 대상이거든. 그것으로 인해서 쫓아내는 대상이 아니고 참회의 대상입니다.

 

특히 이제 한국에 있다 보면은 뭐 잘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숱하게 있습니다.

우리 선원만 해도 아, 저기 풀 좀 내가 안 벴으면 좋겠는데 내가 안 베면 벨 사람이 없어 사람이. 재가자들이 매일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으면 내가 답답해서 내가 베야 돼. 그러면 ‘아이고, 중이 풀 베지 마라 했는데 또 벴네’ 하고 마음에 딱 담아둡니다. 그럼 이제 안거 끝나고 나서 태국에 가면 그 기간들에 자기가 원하는 곳에 찾아가서 설정(?)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대부분 한 보름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 스님이 올해로 이제 비구계를 받은 지가 38년 됐습니다. 남방 비구계를 받은 지가. 근데 이제 그리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가면은 인제 첫 출가한 스님, 자기 이름 외에는 잘 외울 줄 모르는 스님한테 가서 삼배를 꼬박 하고 “스님, 뭘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참회합니다.

그럼 그 그런 스님 20명이 이렇게 모여 있어요. 스무 명이 모여 있는데 그 스님들이 합송을 하면서 “잘못한 걸 아십니까?” 물어보면 “예.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이제 용서를 해 주거든. 근데 인제 막 출가한 스님한테 그 소리를 듣는데도 너무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해져요.

 

그래서 감사할 줄 안다는 게, 사람은 자기만 잘나 가지고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잘하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 살아가면서 내가 누리는 혜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면은 그건 부처님이 "바르게 살아가지 못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봉사할 줄 아는 사람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참 드물다"하고 얘기는 했겠지.

 

기준점이 "바후자나 히따야(bahujanahitāya), 바후자나 수카야(bahujanasukhāya)" 하고 얘기합니다.

봉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도 그것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봉사를 하는 거고 감사를 하는 거라. 그 원칙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냥 봉사하는 것이 내가 시간이 남아서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감사하다고 얘기할 때 마음이 우러나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으로만 감사하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단이 어쨌든 움직이려고 하고 또 나아가게 되려면 어쩔 수 없이 봉사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 거고, 또 이끌고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 거고, 또 그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어야 되게 됩니다.

그런데 원칙은 항상 잊어버리지 마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이 그 속에 있느냐?" 하는 거라.

 

여기 선원만 해도 선원을 마련해 가지고 여러분들이 와서 편안하게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해나갑니다. 그럼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들을 가져야 돼.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일찍 왔다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청소를 하든지 하면서 봉사를 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봉사나 감사를 했을 때, 아까 스님이 뭐라 했죠?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내 마음이 진짜 행복해지고 평안해진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닙니다. 봉사나 감사라는 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거라. 자기가 좋아지는데 왜 그걸 안 하려고 하는데? 그걸 잊지 않도록 하고.

 

특히 오늘 같은 경우에는 스님이 여러분들한테 감사해야 됩니다. 이제 이사장 자리를 떼거든. 그래서 스님은 오늘이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는 몰라도 기쁩니다.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잘 이끌어 가야 되는데, 돌아온 시간들을 이렇게 돌아보면 뭐 그렇게 잘 이끌어가지 못했다, 물론 때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많았는데, 그래도 이제는 때가 이르른 시기가 됐다고 생각됐을 때는 그것을 내가 내려놓을 수가 있어서 스님은 기쁩니다.

그래서 다음에 맡는 분들이 누구가 될지 모르지만은 항상 봉사하고 감사할 때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먼저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프린트물을 내줬는데 "담마로 화합하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맨 처음에 보면은 '부처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이 보는 세상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지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라한에 이르를 때까지는 크든 작든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바른 견해가 생기는 때는, 물론 '대상이 변한다. 또 대상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그 대상 자체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나라는 것이 없다'는 걸 갖다가 어렴풋이 알게 되면은 사실은 견해는 생깁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면은 ‘아,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가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 하고 이제 이해를 하게끔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바른 견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실수를 하기는 합니다. 또 돌아가기도 하고. 그래서 괜히 고집부려 가지고 남하고 다투기도 하고, 그렇게는 합니다.

 

그리해도 점점 더 시간이 지나면서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에 이르렀을 때의 견해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정립이 되고,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의 견해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정립이 되고, 그렇게 점점 흘러가다가 아라한이 되었을 때는 견해 자체를 갖다가 버려 버리는 상태가 되기는 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른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누구든지 크고 작은 견해들은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근데 가지는 사람에게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은 서로 고집하다 보면 싸움밖에 안 나요.

 

그래서 경전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누가 잘못한 게 있는데 그걸 부처님 ‘이거 잘못했다.’ 하고 가르쳐 줘야 됩니까? 안 가르쳐 줘야 됩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이제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너희 마음속에 멧따와 까루나를 지니고 바르게 가르쳐 주어라. 그래서 ‘바른 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얘기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자비의 마음을 지니지 않는 상태에서 바른 것들을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도 없다는 얘깁니다.

 

“근데 부처님 멧따를 지니고 내가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럼 어찌해야 됩니까?”

“두 번 세 번 멧따와 까루나를 지닌 채 얘기를 하라.”

“그래도 안 들어요. 어쩌면 좋습니까?”

“네가 모시는 스님 있지? 그 스님한테 그 사실을 얘기해라. 그래서 그 스님이 멧따와 까루나를 지닌 채 그 사람에게 ‘진리는 이런 것이니까? 이렇게 따르십시오. 이것은 틀렸습니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게끔 하라.” 하고 애기합니다.

“근데 그 스님이 그리해도 안 되는데요. 어떡할까요?”

“또 다른 스님이 할 수 있도록 하라.”

“또 다른 스님이 해도 안 됩니다. 몇 명의 스님을 지나고나서 그래도 안 될 때는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그거는 놔두고 너나 멧따와 까루나를 지녀라.”하고 얘기합니다.

 

“이게 맞으니까? 이리 와!”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든지 멧따와 까루나를 지녀서 이런 방편들을 써서 여러 번을 얘기하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든 해서 바르게 인도해 줄 필요는 있지만, 지가 안 하는데 그걸 어떡할 거라.

쉽게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화합을 해치고 분쟁이 있게 되고 분란이 있게 돼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을 때는 “그냥 너라도 멧따와 까루나를 지녀라” 하고 얘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멧따와 까루나를 지닌 채 무언가를 했을 때는 올바른 봉사가 되고 올바른 감사함이 됩니다.

그거보다도 더 좋은 거는 어떤 걸까? 아라한이 되었을 경우 견해가 없습니다. 그거 같이 좋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면 될수록 되어가면 될수록 자기가 고집하는 견해들은 점점 더 엷어집니다. 그래서 그래. 뭐 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그렇게 이해하는 마음이 점점 더 생겨나게 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거잖아.

 

다툼을 만들려고 하지 마라. 어떠한 경우든지 화합해서 살아가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다툼을 만든다는 것은 진리 따라 살지 않는다는 뜻이라.

진리는 다툼이 없습니다.

진리는 1은 1인 것이지, 1-1이 될 수도 없고 2가 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분명한 겁니다. 그러면 다툼이 있을 때는 내가 진리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진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그럼 본인 스스로가 진리 따라 살려고 노력을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경전에 다 나와 있는 겁니다. 그걸 스님이 쉽게 풀어 놓은 것뿐입니다.

 

진리 따라 살기 위해서는 첫 번째, 부처님 가르침 배워라.

특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 배울 필요 없다’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뭐 여기 뭐 한국 조사선 하는 분들이 모여있는 것들이 아니잖아. 근데 왜 부처님 가르침을 안 배우려고 해? 스님 입장에서는 아직 젊었을 때는 빨리어도 배우고 그다음에 빨리어 삼장도 배우고 그렇게 좀 했으면 좋겠어. 근데 그럴 시간이 없다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가장 핵심 되는 부처님 가르침은 배워라는 거라.

 

담마빠다(Dhammapada)를 하든지 이띠윳따까(Itivuttaka)를 하든지 뭐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배우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고 그것으로 해서 가슴이 따뜻해지거든. 그거 배우라는 거라.

그냥 그 내용을 배우라는 것도 있지만은, 그 내용으로 인해 가지고 ‘아! 내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야지’ 하는 것들이 점점 굳건하게 다져지는 역할들을 하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담마빠다를 맨 처음 외우는데, 그것이 짧은 게송이지만 그걸 안 외우면 그날 수업을 못 해. 무조건 외워야만이 그 수업을 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스님들은 ‘배운다는 거는 외우는 것이다’하고 이해를 하는 스님들도 있기는 해요. 왜 그러냐면 그게 외워지지 않으면은 언젠가는 그 배운 거는 내가 아직 견해가 있기 때문에 잘못 해석을 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거라. 근데 외워진 것들은 몇십 년을 가거든.

 

그래서 짧은 게송들은 되도록이면 조금씩 외울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 빨리어를 외우면서 빨리어 자체에서 한글적인 의미들을 자꾸 떠올려야 됩니다. 그냥 빨리어가 뭔 뜻인지도 모르고 외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빨리어를 하면서 그 한글 의미가 탁 떠올랐을 때 가슴에 ‘아! 내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들이 생깁니다.

그게 이제 부처님이 원했던 첫 번째입니다. 진리 따라 살기 위한 첫 번째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뭘까? 수행하는 거.

아무리 배워도 수행 안 하면 그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을 자꾸 하려는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수행하라고 그럴 것 같으면 그냥 보통 용써가지고 하는 것처럼 아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마음이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것들을 그거 그냥 사띠하면 됩니다. 소리 들리면 ‘소리 들리네’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걸어가면 ‘아, 걸어가네’ 하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고요하게 있으니까 생각이 일어난다, ‘어, 생각이 일어나네’ 하고 그거 그냥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단지 그걸 하고 있을 때는 가만히 보면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하나가 일어났을 때는 그 하나가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따로 있고, 그 알아차린 마음은 그 딱 하나뿐이라는 거라. 다른 게 없다는 거라.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는 거구나 하는 것들을 알기만 하면은 수행 단추를 잘 끼우는 거라.

 

일상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면 시간이 좀 나면 좀 앉아 있는 시간을 좀 더 늘리고, 또 그러다 보니까 시간적인 여유가 좀 더 난다 할 것 같으면 집중 수행하러 가고,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또 실천하고 수행하다 보니까 ‘아, 부처님 가르침 대로 살고 싶다’ 싶으면은 부처님이 가르침 대로 내가 바라밀을 좀 더 쌓아야 되겠다면 바라밀을 쌓는 거라. 계를 좀 더 청정히 지켜야 되겠다면 계를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 거고, 내가 좀 고집스럽고 욕심이 많다 할 것 같으면 좀 베푸는 삶을 좀 실천하는 거고, 그러면서 자꾸 수행의 뒷받침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내가 부족한 것들은 배우고, 또 내가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알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담마따라 살아가는 겁니다.

 

한번 보십시오. 담마를 배울 때나 담마를 실천해서 수행할 때 다툼이 있어요? 자기가 다른 사람하고? 아니면 자기 자신하고 싸우는 게 있어요? 그거는 담마를 실천 안 하고 있을 때 마음에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자기 자신이랑 싸우는 것이지, 담마를 배우고 담마를 실천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탐·진·치가 없이 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다툼은 없다는 거라. 오히려 그 담마로 인해서 마음은 더욱더 자유로워진다는 거라.

 

점점 그렇게 쌓아가면 결국에는 담마가 내 것이 돼버린다는 거라. 도와 과에 이르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은 이제는 남하고 다툴 일이 없어. 욕심부릴 일도 없고. 오히려 그런 일이 있으면 피해 버려요. 설혹 그 사람이 담마따라 안 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관계가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하고 나서, 안 하는 걸 갖다 그걸 어떻게 하라고? 부처님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할 거라.

단지 마음으로 멧따(mettā)와 까루나(karuṇā)를 보내 주는 수밖에 없는 거라. 얼마나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얼마나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담 따라 사는 삶들을 살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 뒤에 어쨌든 적어 놓은 것들은 여러분들이 읽어 보면 알 겁니다.

적어도 이 모임에, 이 테라와다 교단의 출가자로서 재가자로서 모였다 할 것 같으면 가장 기본은 "다툼없이 화합되게 담마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고,

 

봉사를 해서 남을 이끌어가든 또 그것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지니든 그것은 자기 자신의 역량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고, 그 사람의 평등성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출가자든 재가자든 인도자든 아니면 따르는 사람들이든 똑같은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이를 수 있는 존재로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서 나아가면은, 더 좋은 모습으로 테라와다 불교가 이 나라에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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