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0년 일상수행법문

나태와 게으름(thīna-middha) (2002 1215)

담마마-마까 2024. 9. 14. 17:11

https://youtu.be/8grLyMDizu0?si=pspoc6zOtxRkR0Jm

 

* 나태와 게으름(thīna-middha) (2002 1215)


우리 와 동갑이 친구는 안 왔나? 왜? 나태와 게으름 들을 거라고 해서 안 왔나? 잘 들으라고 그래.

 

그래 이번 시간에는 나태와 게으름 부분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살아오는 게 ‘게으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그래 그거는 뭐 그렇다 치자. 보통 평균적으로 ‘이 정도 하면 잘 살아왔다’ 하는 생각들이 많이 들 겁니다. ‘잘 못살아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봐. 그러면 이 세상 살아왔는데 만날 불행해가지고 마 ‘고통스러웠다’ 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그러면 뭐 ‘어느 정도 마 그냥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는 사람 손 들어봐요.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뭐라? (수행자 대답 ...) 음, 짬뽕돼가지고 살아왔어요?

 

그게 인제 보통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2가지 길들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불행하게 살아가는가' 그렇게들 얘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행복하길 바라지 불행하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뭐라고 그래요? "모든 존재들은 행복을 바란다. 모든 존재들은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행복하길 바라는데, 왜 그럼 불행한 사람들이 있느냐는 거라. 사람들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숨 쉬는 자들, 모든 숨 쉬는 것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길 바라듯이 남들도 다른 부류들도 행복하길 바라라" 하고 얘기를 했단 말이라요.

인제 그랬는데 왜 그러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사람 손들어 봐 하니까 한 2명 말고는 그냥 다 불행하게도 살아왔고 그랬단 말이라.

자,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이 세상 살아오면서 ‘나는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다’는 사람 한번 손 들어봐요. 이건 어떻게 사람이 많네? 확실해요? 열심히 살아왔어요? 그게 인제 자기는 바른 것이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그게 다 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길이다 하고 얘기는 못하죠?

 

그거는 뭐 항상 변해 나가는 것이고. 또 자기 기준이 남 기준하고 맞다고는 얘기를 다 못할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뭘 가지고 자기들이 열심히 살아왔다고 그러는 거라? 그냥 자기 기준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요? 그 기준도 변하는 건데.

이게 이제 사람들이 인제 ‘행복의 기준들 하고 그리고 또 행복하지 않았다, 불행했다고 하는 기준들을 어떻게 잡아야 될 것이냐?’ 또 그럼 그런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행복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해서 그랬는가?’ 하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질 않아서 사실은 그렇습니다.

이게 지금 오늘 이번 주 주제가 뭡니까? 나태와 게으름이죠.

티나-밋다(thīna-middha)라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른 말로 인제 티나-밋다죠. 티나하고 밋다는 어떤 말로는 동격입니다. 티나(thīna)라고 하는 것은 '무감각한 상태' 이런 걸 얘기하는 거고, 밋다(middha)라고 하는 것은 그 '무감각한 마음의 상태'를 총칭해서 밋다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뭐 우리나라 말로 그냥 그걸 굳이 붙이니까 '나태한 것이고, 게으른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뭐 나태해지니깐 당연히 어떻게 돼? 행동들이나 모든 것들이 게을러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렇게 얘기하는데, 보통 이제 티나밋다를 갖다 분리해서 보통 얘기들 안 합니다. 한 묶음으로써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그런 티나-밋다는 보통 '게으름이다'라고 그렇게 합니다.

빨리어로 인제 게으르다고 인제 얘기할 때 내가 티나-밋다를 안 쓰고,

우리가 지금 5가지 집착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다섯 가지에 대한 집착, 오늘 그 두 번째이죠. 두 번째 "나태와 게으름 부분으로 인해서 내가 바르게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물속에 잠기는 원인이 된다" 하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때 이제 5가지를 얘기할 때는 티나-밋다라는 용어를 안 쓰고, '아까리야'라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아, 아라시양(ālasiyaṁ), 라시양 보통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라시양이 게으르지 않다' 뭐 이런 건데 '아라시야(ālasiya)'라고 할 것 같으면 '게으름에 빠지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게으름으로 인해서 게으름이 집착이 되어서 물에 빠지는 결과가 낳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라시야라고 이렇게 빨리어 용어를 씁니다. 그래서 항상 쌍으로 이렇게 나타나게 돼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쌍으로 나타나듯이 내가 노력한다는 것과 게으름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쌍으로 항상 나타나게끔 돼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은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기 자신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다른 사람 기준으로 봤을 땐 그건 열심히 사는 게 아닌 것이 있거든. 근데 자기 자신은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공통적으로 부처님이 하는 얘기로 봐가지고는 그거는 열심히 산 게 아니고 게으름이다. 하고 이제 부처님이 판단한 경우들이 있단 말이라.

 

부처님은 그러면 그 게으르다고 하는 걸 갖다가 어떻게 판단을 했을까?

하는 겁니다. 경전 부분을 하나 일러드릴게요.

"아뚜라낭 히까닛다(Āturānañ hi kā niddā)" 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면 "앉아서 열심히 수행하라. 열심히 수행하라. 니가 지금 당장 화살을 맞아 가지고 고통에 빠져 있는데, 뭘 이것저것 따질 게 있느냐는 거라. 화살 맞아가지고 당장 내가 지금 괴로워가지고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데, 이거 뺄 생각부터 먼저 해야 되는 거지, 이렇게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절박하다는 거라. 근데 그렇게 절박한데 어떻게 니가 공부 안 하고 쉽게 말하면 흐리멍텅하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노력이라는 의미'를 그렇게 이제 부처님이 풀이를 해놨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그거 참 섬찟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력의 개념하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런 개념하고, 부처님 말한 개념하고는 엄격하게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행복을 바란다'라고 하는 '수카카마(sukhakāma)'라고 하는 것은 누든지 행복을 원하고 바라게끔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을 하죠. 그런 걸 보통 위리야(vīri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조금 전에 좌선을 이제 1시간 남짓 이렇게 했습니다. 다리가 구부러져 있으니까 고통스럽단 말이라. 불편하다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정주! 니가 잘 알지. 음? 어떻게 해? 구부려서 고통스러우니깐 이거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 다리를 펴는 거야. 다리 펴니깐 ‘아, 기분 좋다. 행복하다’고 하는 거라.

혹시 여러분들 수행 중에서는 그런 사람 없습니까? 이렇게 펴고 나니까 어떻게 돼? 다리가 펴고 나니까, 한동안은 고통스럽지 않고 불만족스럽지 않는 거라. 행복하니까 어떻게 돼? 고마 그렇게 좀 있고 싶거든. 그렇게 일정 부분을 지나는 시간을 지나는 거라고. 그러다가 다시 또 이제 다리 좀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니까 다시 또 다리를 오무리게 되는 거라. 뭐 그렇게 하다 보니까 뭐 1시간 넘어 훌쩍 지나가 버리거든.

여러분들 수행에서는 그렇게 안 할 것 같아요? 스님이 보통 얘기합니다.

"위리야(vīriya), 노력의 힘을 배가시켜라. 노력을 열심히 노력하라."

수행을 해나가면 수행이 잘 돼 나갑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 없어도 알아차려 나가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거든. 틀림없이 그럴 때는 노력의 힘이 배가 되지 않아도 안다고. 그러니까 우린 어떻게 해요?

그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노력의 힘이.

떨어지니까 어떻게 돼?

알아는 차리는데 진도가 안 나가는 거라.

편안하고 고요하기는 고요한데 그 이상 진도가 없는 거야. 넘어가지질 않아. 그냥 그 상태대로 그대로 쭉 흘러가는 거라.

그게 바로 게으름이라는 거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떻게 돼? 고요하고 평화로우니까 뭐 그 상태가 좋으니까 거기 그냥 머물고 즐기고 있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이제 어느 정도 지나고 스님한테 와서 “스님, 난 어떻게 하면, 참 좋긴 좋은데 진척이 없습니까?” 자기가 게으름에 빠진 줄을 생각을 못 한다는 거라.

부처님은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그렇게 표현해 놨거든.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걸 게으름이라고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부처님을 뭐라고 했어요?

'아뚜라낭 히까닛다' 라고 그랬다는 거라. 앉아서 수행하라. 니가 지금 당장 이익이 있는 게 뭐냐는 거라. 앉아서 수행하는 것 말고 이익이 있는 게 뭐냐는 거라. 당장 화살을 맞아 가지고 고통스러워 가지고 불만족스럽게 있는데, 니 공부 안 하고 뭐 할 거냐는 거라.

열심히 화살을 뽑듯이 그렇게 노력하라는 거라.

그걸 갖다가 '노력'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보면 누구든지 행복을 바라보고 행복을 성취하고 싶어 하듯이 행복을 성취할려면 반드시 스스로 노력해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노력의 힘은 강하지를 않다는 거라.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 노력의 힘이 떨어질 것 같으면 당연히 게으름에 빠지게끔 되는 거라. 수행상에서도 이렇게 게으름에 빠집니다.

그래서 노력을 그리하더라도 이게 ‘아, 이거 내가 지금 계속 수행을 하다 보니까 고요하고 평화롭기는 평화로운데 이게 오토매틱으로 돼 나가는구나. 강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차려지는데, 그 알아차림을 중단하더라도 마음 상태가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구나’

그건 오토메틱이거든. 틀림없이 알아차림을 갖다가 중단할 것 같으면 마음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다든지 변해 나가야 되는데, 변해 나가지도 않고 이동도 안 하면서 평화롭고 고요하게 돼 있다. 그럼 내 자신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라. 고요해지고 평화로운 데 머물러 가지고 게으름에 빠졌기 때문에.

 

그럼 퍼뜩 알아차리고 다시 노력의 힘을 배가를 시킬 것 같으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또 공부를 더 해나갈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하면 화학 작용에서 이 위리야라고 하는 것이 촉매 역할을 한다는 거라. 순수한 물에다가 우리가 잉크 방울을 하나 탁 떨어뜨리면 그 잉크 방울로 인해서 물 전체가 잉크색이 되는 거하고 마찬가지라. 촉매 역할이라는 거라. 그 노력의 힘으로 인해서 알아차림이 성성하게 무르익어 가고 더욱더 세밀하게 돼 나가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거라.

근데 이제 그렇게 돼 나가지 못하고 그냥 그 상태에서 게으름에 빠져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 수행의 진척이 없어지는 거라. 그래서 보통 게으름에 빠진다고 하는 걸 갖다가 부처님은 어디에다 비유를 했느냐 하면 '바이러스'라고 그럽니다. 바이러스!

우리도 여기 정선생도 있으니까 그 바이러스 부분은 나보다 더 잘 알 겁니다. 웬만한 바이러스들은 몸에 침투되면 몸 자체에서 항체가 생겨나서 다스려 나갑니다. 내 몸이 극도로 나빠져 있다든지 아니면 뭐 이상반응을 일으킨다든지 이런 경우가 아닐 경우에는 몸이 스스로 그런 항체 반응을 합니다.

근데 참 안 다스려지는 게, 하기야 뭐 의사 선생님들도 그것 때문에 돈 벌어먹고 살겠지. 감기, 감기라고 하는 바이러스, 감기라고 하는 바이러스는 참 안 다스려져요. 그래서 내가 누누이 얘기 안 합니까? 감기가 이미 들어와가지고 중할 때가 될 것 같으면 수행으로써 다스리기 힘들다. 그래서 코끝을 살피면서 들어온 상태를 갖다 잘 관찰할 것 같으면 충분히 감기를 다스린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런 스님이 그런 얘기 했느냐 하면, 감기라고 하는 바이러스는 변화해 나갑니다. 바이러스 아마 감기 바이러스 종류만 해도 수백 수천 가지 아마 될 거라. 올해는 이 바이러스가 있을 것 같으면 내년에 또 다른 변종으로 들어온다는 거라.

게으름이라는 바이러스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부처님이.

종류를 자꾸 바꾸어가지고 나에게 침투하는 게 이 게으름이라는 겁니다. 그마만큼 게으름인 줄 모르고 우리는 살아가게끔 되고 그 게으름인 줄도 모르고 ‘내가 노력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거라. 행복하기를 다 바래야 되는데 왜 행복하지 않고 불행한 때가 있느냐는 거라. 자기 자신을 돌이켜봐야 된다는 거라.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닌가?

물론 그런 얘기도 할 겁니다. “에이, 뭐 스님,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안 됩디다. 내 상사는 낼 밑 봐 가지고 나만 뭐 해간 거 했다 그러면 다 빠꾸시킵디다. 다른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훨씬 형편없는데, 그 상사는 그거는 뭐 잘 봐주고 내 거는 다 싫다고 그럽디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그 사람은 게으름에만 바이러스가 침투한 게 아니라 게으름으로 해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화'라고 하는 것까지 침투가 된 상태라. 적어도 나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상태라고 봐야 된다는 거라. 게으름만 침투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음, 내가 게을러서 그런 갑다’ 하고 말아버리든지 아니면 더욱더 노력하려고 하게 됩니다.

태국에서 스님이 공부를 할 때 1년에 계획을 어떻게 잡았느냐 하면 1년은 며칠입니까? 365일이죠. 스님한테는 1년이 300일이었어요. 1달이 며칠이라? 30일. 스님한테는 20일이라. 나머지 10일은 나에게 없습니다.
1달 중에 10일은 없고, 1년 중에 65일 70일은 나에게 없는 시간이라. 공부 안 하는 시간이라는 얘기라. 한창 공부할 때. 앉아서 공부한다고 있을 것 같으면 누가 와서 “스님 오늘 뭐 저쪽에 무슨 좋은 일이 있던데, 누가 불상 예쁜 그거 불상 조성한다는데 그거 구경 갑시다” “응 그래 가자.” 갑니다. “우리 오늘 도시락 싸가지고 저쪽 숙소에 가서 도시락 까먹읍시다.” “그래 갑시다.” “저 스님은 맨날 공부는 안 하고 놀러 댕기나?” 이게 스님이 계획을 잡은 겁니다. 1년 중에 65일은.

 

그렇다고 오늘은 공부하고 내일은 놀고 이렇게 짜는 건 없습니다. 형편 따라서 오늘 놀 일이 생겼고 밖에 나갈 일이 생길 때는 과감하게 버리고 나갑니다. 그리고 안에서 공부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할 때는 공부를 또 합니다. 그러니까 300일 동안은 공부를 하고 65일은 허송세월을 보내는 거라. 근데 남들이 보기에는 만날 놀러 다니는 것 같이 보이죠. “저 스님은 맨날 놀러 다녀도 어째 공부하는 거 보면 공부를 잘한단 말이라. 참 희한하다. 머리도 좋은 갑다” 천만의 말씀이라.

어떤 스님들은 “어디 유적지 좀 가보자.” 절대 안 갑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가. 맨날 손에는 책 들고 있는 거 같애. 근데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거든.

 

왜 그러냐는 거라.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거라? 그게 아니라. 책을 아무리 보고 있어도 이 책이 머릿속에 안 들어올 것 같으면 그 사람은 게으름에 빠진 거라. 공부하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할 때 얼마만큼 마음을 집중해서 노력을 하느냐, 그렇지 않고 건성건성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지, 어떤 시간의 차이 가지고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 대표적인 예로 여러분들 잠을 이렇게 잘 거라 밤에. 8시간 9시간 자도 맨날 피곤한 사람들도 있어요. 서너 시간 자도 아니면 두세 시간 자도 그다음 날 말끔하게 일상생활 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거라. 그건 잠의 질의 차이인 거라.

스님들은 다 그런 거는 아니겠지. 저 같은 경우는 그날의 노동량에 따라서 잠시간이 틀려집니다. 노동 양이 많았다고 그러면 좀 더 많이 잡니다. 노동 안 하고 있었다, 몸이 피곤하지 않은 상태다, 정신적으로 뭐 그렇게 피곤한 일이 없으니까. 몸이 덜 피곤하다, 그럴 것 같으면 잠을 적게 잡니다. 늦게까지 수행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합니다. 잠시간이라는 거는 그런 거거든. 얼마만큼 내가 편안하게 잘 자느냐에 따라서 그다음 날이 개운하고 안 개운하고 하는 차이가 나는 거라.

 

노력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들인 시간이 얼마였든지 간에 거기에 얼마만큼 내가 마음을 집중했느냐? 집중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는 거라.

상사에게 리포트를 써냈는데 내 거는 빠꾸 됐다. 뭔가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된다는 거라. ‘저 사람은 상사가 좋아해 하니까 막 그냥 봐줬고, 나는 싫어하니까 안 봐 줬겠지’ 이런 마음보다는 우선 ‘내가 얼마만큼 노력의 시간들을 갖다가 정확하게 마음을 쏟아서 했느냐에 따라서 판가름 났다’ 하고 스스로 판단들 해야 된다는 거라.

 

적어도 그리 할 것 같으면 상사와 나와의 문제가 아니고 내 스스로의 문제가 되는 거라. 그럼 나하고만 싸우면 돼. 상사하고 굳이 싸울 필요가 없어. 그래서 이렇게 인제 "나태와 게으름은 스스로의 문제다" 하는 걸 갖다가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나태와 게으름의 형태들이 어떤 형태들로 나타납니까?

지선이 엄마? 어떤 걸 나태하고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겠어?

정선생? (수행자 대답 ....)

그건 조금 전에 스님이 얘기했고. 그거 말고, 수행 중이라 수행. 지금 조금 전에 일상생활의 것을 얘기했고 인제 수행 중에 얘기를 해야 될 거 아니라.

보통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게 졸음의 형태고,

그리고 앉아서 수행하면서 수행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망상 · 생각들이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마음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상태들.

또 뭐가 있습니까? 몸이 피곤하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자세를 자꾸 바꾸는 거라. 크게 봐가지고 이런 형태들로써 나타납니다.

앞으로는 그런 것이 나타난다면 ‘아이고, 내가 게으름 부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되겠지. (수행자 ...)

예. 내가 맨 처음 얘기했던 거. (수행자 ...)

어려운 용어 쓰지 마요. 괜히. '사정단' 해가지고 괜히 사람들 현혹시킨다고, 뭐 하러 그렇게 어려운 말로 쓰는지 몰라. 그러니까 "노력의 4가지 형태" 해가지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거는 일상적인 4가지 형태를 얘기하는 것이고, 수행상에서의 노력은 조금 틀립니다. 어쨌든 그런 형태들로 나타난다 할 것 같으면 분명하게 부처님이 그런 형태들에 대한 방어책들을 얘기를 해놨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런 부분들은 잘 알 겁니다. 스님도 누누이 또 얘기를 했고.

 

자, 그러면 하나씩 한번 봅시다.

앉아 수행하라 그럴 것 같으면 최고 먼저 하는 게 뭡니까?
자는 거지 뭐. 음? 정주야! 대외적으로 공포를 해놔야 앞으로는 안 졸지. 게을러서 자지? 음? 목갈라나가 그랬거든. 여러분들 부처님 양대 팔이죠. 목련존자! 그 목갈라나가 수행을 하고 있는데,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거든.

부처님이 가서 “니 와 조노?”

“부처님 나는 안 잤습니다.”
“분명히 니 머리를 꼬박꼬박 쪼부리던데 왜 안 잤다고 그러노?”

“부처님 나는 졸은 게 아니고 게으름에 빠져서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집어냈다는 거라. 목련존자가.

 

그런데 그렇게 게으름에 빠진 줄은 알겠는데, 어떻게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될 줄 모르겠습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님이 그럽니다. 니 마음이 게으름에 빠졌다 할 것 같으면,

게으름이 빠지는 건 뭡니까? 마음이 빠지는 것이지 몸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빠지고 나야, 몸이 게을러지니까 어떻게 돼? 몸이 게으르다면 하기 싫다는 얘기야. 하기 싫으니까 어떻게 돼? 몸 누가 이게 가만히 앉아가지고, 뻣뻣하게 서가지고 앉아 있기를 몸이 좋아합니까? 땅바닥에 등 딱 드러눕고 눕기를 좋아하지. 당연히 그런 거라. 하기 싫으니까 어떻게 돼? 가만히 앉아있기 싫으니깐 지가 몸이 자꾸 눕고 싶어 갖고 땅으로 꼬박꼬박 쳐박는 거라.

 

마음의 상태, 그런 마음의 상태를 먼저 바꿔라.”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바꿔야 됩니까? ‘졸고 있는 거 그냥 안 졸아야지’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되지. 졸고 있을 것 같으면. 그것도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거라.

근데 그것보다 중요한 거는 마음의 상태를 바꾸라 하는 것은, 졸음이 온다고 하는 것은, 게으름에 빠졌다는 거는 뭐라? 대상을 놓쳤다는 얘기거든.

즉각 내가 ‘아, 대상을 놓쳤구나’ 생각을 가지고 ‘일어남 사라짐’ 하면 돼. 그것도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거라. 근데 이놈은 ‘일어남 사라짐’ 하는 거는 단순하거든. 단순하니까 어떻게 돼? ‘일어남 사라짐’ 한 두 번 하다 또 조는 거라.

 

왜? 마음의 상태가 급격하게 전환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단순하게 전환됐으니까 다시 단순하게 다시 게으름으로 빠져버린다는 거라. 이럴 때는 마음의 상태를 전환을 시켜주는데, 좀 더 많이 전환을 시켜줘야 된다는 거라.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졸음이 자꾸 쏟아진다, 스님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일어남, 사라짐' 하지 말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을 하라.

그러면서 "닿음 포인트 8군데"를 이렇게 지정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왼쪽 엉덩이, 오른쪽 엉덩이 부터 해가지고 눈꺼풀, 입술 이런 식으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1번',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2번',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3번'

단순하게 '일어남, 사라짐' 하는 것보다 알아차려 나갈 포인트가 그마만큼 많아지거든. 많아지니까 어떻게 됩니까? 마음 상태가 전환이 된다는 거라.

 

단편적으로 얘기를 해가지고 아무 생각 없으면 꼬불꼬불 조불게 돼 있습니다. 오만 생각 다 굴리고 있을 것 같으면 잠이 안 와요. 잠이 안 와. 잘래야 잘 수가 없어. 여러분도 밤에 한번 보십시오. 오만 걱정 근심 걱정 다 하고 있을 것 같으면 밤에 잠 못 잡니다. 그와 마찬가지라.

수행의 대상을 놓쳤다고 할 것 같으면 놓쳐가지고 게으름에 빠졌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의 대상을 많이 잡아줘야 된다는 거라. 그걸 갖다가 "마음의 상태를 바꾸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항상 졸음이 올 때는 졸음이 오는 상태에서 마음의 상태를 전환시켜줘라. 그것이 맨 첫 번째 해야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해야 될 것이 그리 해도 마음 상태가 전환이 안 돼 나간다, 그럴 것 같으면 졸음이 오는 길들을 살펴라. 하고 얘기합니다.

 

'졸음, 졸음, 졸음' 그렇게 보통 얘기를 하죠. 앉아있으면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일어남, 생각이일어남, 생각이일어남' 하면서 관찰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데도 길이 있는 거고, 졸음이 오는 데도 길이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길을 따라서 관찰대상을 만들어내야 됩니다.

졸음이 온다는 것은 이미 내가 노력의 힘이 떨어졌다는 거라. 떨어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졸음 졸음 졸음' 해가지고 그 졸음이 극복이 돼 나가겠어요? 절대 안 돼 나갑니다. 졸음도 아까도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는 단순한 명칭에서 탈피해가지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이라고 하는 여러 포인트로 얘기했듯이, 졸음이 올 때도 졸음이 오는 것도 여러 상태들을 갖다가 상정을 해줘야 된다는 거라.

 

"졸음이 오는 길"을 여러분들에게 얘기했습니다.
"무거워지고, 더욱더 강하게 내려앉아지고, 강하게 내려앉아지면서 눈꺼풀이 따가워지고, 따가워지다가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파와지고, 아파와지는 것이 도가 지나칠 것 같으면 큰 바위덩어리로 눌리듯이 하는 느낌들이 오고, 그러다가 그런 아픔과 고통스러운 것이 더욱 더 강해질 것 같으면 어느 순간에 잠에 툭 떨어진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럴 거 같으면 알아차려서 나아가는 길들도 거기에 맞춰서 명칭을 부여해 줘야 됩니다. '졸음 졸음 졸음' 하지 말고 '눈꺼풀 닫힘 눈꺼풀 닫힘' '내려옴 내려옴' '닿음 닿음' '아픔 아픔' '무거움 무거움' '따가움 따가움' 이런 식으로 명칭을 자꾸 부여를 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거에 따라가지고.
그래야만이 그 졸음을 갖다가 단순화시켰던 졸음이 마음의 활력을 얻어서 변환을 시켜 나가줄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어떻게 돼? 그때는 대책이 없는 거라.

수행으로서 대책을 잡을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대책이 없다는 거는.

귀옥이, 평소에 누구 좋아하노? 남자친구 좋아하나? 안 그러면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 좋아하는 사람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거라. 아, 내가 그냥 그 사람만 생각할 것 같으면 그냥 입이 이만큼 찢어진다.

경전에는 "부처님을 회상하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한테 얘기하기는.

여러분들 부처님이 회상해가지고 입이 이만큼 찢어집니까? 안 찢어지지.

부처님 말고 그 사람만 생각할 것 같으면 기분이 좋아갖고 입이 이만큼 찢어지는 사람, 그 사람을 회상을 하라. 그게 오히려 더 현명하지 않을까? 안 그러면 아예 그 사람만 생각할 것 같으면 원수같이 생각되는 사람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로 인해서 뭐 화가 일어난다든지 이렇게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이. 잠을 쫓기 위한 방편이라.

 

그렇게 해서 잠을 몰아내도록 했는데, 그렇게 해도 안 될 때는,

평소 그분이 해왔던 말씀들 중에 기억할 만한 내용이나 아니면 불교 믿으니까 부처님 말씀 중에서 내 그 게송만 딱 들으면 온몸이 짜릿짜릿해지는 그런 게송들이 있습니다. 스님이 특히나 좋아하는 게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당 윈뉴히띠" 라.

이리 와서 확인해라. 조사 확인해라. 이 법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는 법이다. 그러니 조사 확인하라. 그래서 조사 확인해서 니 것을 만들어라. 니 것을 만들면 누구든지 다 칭찬한다. 그러니 어서 빨리 공부해라는 거라.

에히빳시꼬와 마찬가지로 '빳짯당 윈뉴히띠' 나는 그 게송만 탁 떠올리면 그냥 몸 안이 쫙 전율이 흘러. 그런 게송들이 이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평소에 내가 마음속에 확 와닿는 말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라는 거라. 왜 그렇게 하겠어요?

마음에 활력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리해도 안 될 경우에는 이제 앉아있을 필요가 없지. 음? 지선이 엄마같이 휘까닥 일어나야 돼. 앉아있어 봐야 인제는 도리가 없어.

그전에 인제 물론 불빛을 보기도 하고 눈을 깜빡거리기도 하고 손으로 비비기도 하고 이렇게들 행동들을 해야 되겠지.
근데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그런 것은 가급적이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은 행동들이 그마만큼 많아지게 될 것 같으면 많아지는 만큼 관찰해야 될 대상들이 많아지는데, 잠이 오는 상태에서는 관찰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일어서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경행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훨씬 효율적입니다. 지금 당장 잠이 와 죽겠는데 눈 비비면 내가 이거 지금 알아차립니까? 못 알아차립니다. 그 시간 다 흘러가 버립니다. 물론 잠을 깨기 위한 방편이라 할 것 같으면 할 말이 없지만은, 그리 안 해도 얼마든지 깰 수 있는 방편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방법보다는 차라리 경행을 시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로써 잠을 다스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정 안 될 때 어떻게 하라고? 그럴 때는 몸이 잠을 자야 될 실정이라. 잠을 자야 될 경우에는 조금 잠을 자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때 잠이 많이 오는지 압니까? 밥 먹고 나서.

밥 먹고 나서 왜 잠이 옵니까? 속이 비어 있을 것 같으면 잠 잘 안 오죠? 밥 먹고 나서는 잠 잘 오죠. 왜 그런지 알아요? 몸에 음식물이 차 있을 것 같으면 당연히 잠이 많이 옵니다. 위라고 하는 것이 활동을 어떻게 해야 돼요? 정신적인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소화하는 데 바쁘고 빼내려고 노력하는데 바쁩니다. 위장이라는 게. 그러니 모든 영역을 갖다가 수행하는 데 돌릴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 잠은 당연히 오게 되는 거라.

 

그러니 일반적인 사람보다 똥, 여기 똥 잘 못 싸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대변 잘 못 보는 사람, 대변 잘 못 보는 사람들은 더 잘 잡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난 앉았다 그럼 만날 잔다 그러면, 평소에 자기 몸 상태를 한번 보십시오. 그걸 변비에 걸렸다고 그러죠. 내가 변비 걸렸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똥구멍을 후벼내든지 장 세척하는 약을 먹든지 해가지고 장을 세척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래서 잠이 자꾸 오는 사람들은, 별다른 이상 없이 잠이 그렇게 많이 오는 사람들은 ‘아, 내가 몸 상태가 몸 안에 뭔가 많이 차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럴 때는 좀 빼내줄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들도 해도 될 겁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오늘 완전히 다 못 했습니다이.

다음 시간에 하고 다음 시간에 곁들여 가지고 도사(dosa) 부분을 하겠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