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0년 일상수행법문

업이란 무엇인가 - 업의 개념 dhamma5 (2003)

담마마-마까 2024. 10. 24. 16:22

https://youtu.be/J9RDFrLicz8?si=CIvU5m1MrPv1AEEO

 

* 업이란 무엇인가 - 업의 개념 dhamma5 (2003)

 

업이란 무엇인가? 얘기해보지. 업이 뭐라? 업이 뭐라요? (수행자 대답 ...)
'자기가 지은 행위가 업이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지은 행위! 그럼 지은 행위가 다 업으로 되는 것은 아닐 거란 말이라. ... ... ...

이 차트 읽어 왔죠? 장봉갑 읽었어? 씩 웃지 말고.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잘못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고 또 잘 사용하고 있는 그런 부분들도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조금씩 교정해나가도록 해봅시다 이. 보통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업은, 업 짓는 걸 참 안 원하지. 업 짓는 거 원하는 사람 있습니까? 업 짓는 건 참 싫어한다고. 다 업 지으면 뭐 좀 잘못될까 해가지고 업을 되도록 안 지을려고 생각을 한단 말이라요. 업하고 죄하고는 사실은 틀린 건데 어쨌든 안 지으려교 하는데, 근데 죽고 나서 좋은 세상은 누구든지 또 태어날라고 한단 말이라. 죽고 나서 좋은 세상 안 태어나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죠!

근데 업을 지으면 윤회는 하게 됩니까? 그렇죠? 그럼 윤회할 것 같으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나쁜 세상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참 이게 모순이라.

 

업을 짓지 않으면 윤회는 안 하는 겁니다. 그렇죠? 아라한들은 업을 다시는 짓지 않는다고 했거든. 근데 우리는 업은 짓지 않기를 바라는데 윤회하기는 바라는 거와 마찬가지잖아요. 좋은 세상 태어나길 바라는 거는.

또 우리가 받아들이는 업이라는 거하고, 또 윤회라고 하는 것, 또 더 나아가서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좀 뭔가 개념을 잘못 정립을 하고 있다 하는 생각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그런 개념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삽니다. 그래서 좀 건강해지길 바라고, 또 남들보다도 돈을 좀 많이 모으고 싶어 하고, 또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가도록 지위 같은 게 조금 푹푹 올라갔으면 좋겠고, 이런 바람을 누구든지 가진단 말이라. 종교를 가지고 있든 안 가지고 있든 그거는 거의 비슷한 양상들을 띠고 있단 말이라.

 

그리한데 그리 하더라도 우리는 건강해지고, 좀 더 부유로워지고 또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을 뺏기려고는 안 한단 말이라. 좀 영원하게 누렸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들을 가진단 말이라. 어쨌든 인간의 삶은 한정돼 있으니까 어떻게 할 거라? 언젠가는 뭐 재물도 없어지게 되는 거고, 재물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죽고 나면 지 거 안되는 거거든. 명예도 마찬가지고 건강도 마찬가지라.

그러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좀 영원한 걸 찾으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 이 삶이 영원한 삶이 되기를 갖다가 희구하는 그런 것은 인류가 생겨나면서 발생한 것들이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 '나'라고 하는 개념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종교가 생겨나는 겁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종교가 사실은 생겨난 겁니다.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은 어쩌지를 못한단 말이라. 한 100년 살고 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는데, 죽고 나서 다음 사후세계는 그래서 사람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길 바라게 되는 거고, 또 이런 지옥 같은 데 떨어지질 않게 바라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사후세계도 사실은 그렇게 이등분 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좋고 행복한 세상이 있는 반면에 또 비천하고 고통스러운 그런 세상이 있게 돼있습니다. 살아있을 동안에도 누구든지 다 행복하고 좋은 지위나 재산을 누리기를 바라듯이 죽고 나서도 행복하고 영원할 것 같은 그런 세상에 태어나기를 우리는 바라게 돼 있다는 거라.

그래서 종교인들은 뭐라고 그럽니까? 그 사후세계를 보장들을 하죠.
기독교에서도 다음 세상을 얘기를 하는 거고, 불교에서도 또 다음 세상을 얘기하는 겁니다. 또 다른 종교에서도 그런 다음 세상들을 갖다가 얘기를 한단 말이라.

 

근데 보통 우리는 그런 행동들을 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규제가 없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재산을 많이 모으더라도 부정적인 방법으로 모을 수도 있는 거고, 내 건강 챙긴다고 다른 사람 건강을 해치기도 할 거고, 명예 높여준다 해가지고 다른 사람 밀어내고 올라가기도 할 겁니다. 그게 어떤 그런 콘트롤이 없을 것 같으면 사회의 기반 자체가 사실은 무너져버립니다.

근데 사후 세계는 보장해줘야 되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인간을 갖다가 그렇게 스스로의 규율에 맞게끔 콘트롤을 시켜줄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게 이제 종교가들이 가진 난점이라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그런 난점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실은 불교계 내에도 이런 업이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났다고 봐야 됩니다.

기독교에서 사후세계는 어떻게 합니까? 하느님의 명에 인해서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 세계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행위 행위 자체는 하느님의 말씀에 인해서 그 이후로 이루어지는 게 인간의 행위 부분이 있다는 거라. 사후 세계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불교계 내에서는 그런 자율적인 규율을 마련해 줄 필요성은 사실 있어 왔다 하는 겁니다. 있어 왔기 때문에 이런 업의 개념들이 태동을 하게끔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업(業)이다 하고 할 것 같으면 빨리어 원어로 뭐라 그럽니까?

깜마(kamma), 산스크리스어로는 까르마(karma)라고 그러죠. 깜마라는 게 무슨 뜻이라? 까르마, 까르마,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까르마죠? 까르마가 뭔 뜻입니까?
업이지 뭐라? 한자로 쓰면 업(業)이잖아.

근데 갈마(羯磨)라고 혹시 들어봤어요? 들어봤습니까? 출가자들이 아니니까 잘 모르겠구나. 스님들은 104갈마 102갈마 해가지고 그런 갈마들을 많이 합니다. 잘잘못이 있고 했을 때 반성을 하고 또 참회하고 하는 그런 의식들 그런 것들을 갖다가 갈마라고 그럽니다. 이 갈마라는 것도 사실은 이런 까르마를 갖다가 음사해 가서 쓴 게 갈마입니다.

까르마라고 할 것 같으면 의미 자체가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제사 지내고 의식하고 하는 것'이 원래의 뜻이라는 거라. 까르마라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겠어요?

내가 죽음 이후에 좀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게 있다고 그랬잖아. 그러면 그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요? 힌두교나 불교, 자이나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일회성입니다 죽음 이후는. 죽고 나서 다음 세상 천당에 가든 지옥에 가든 한번 가고 나면 영원히 거기 계속 있게 되는 거라. 변하질 않아요. 근데 힌두교나 불교 같은 경우에는 그 천당에 가더라도 어떻게 돼요? 다시 또 다른 윤회하는 세상으로 가게 되는 거라. 그런 차이가 있는 거라.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신이 주재해가지고 ‘니는 다음 세상에 천당에 가라, 지옥에 가라’ 하는 거거든. 하느님이 주재하는 거라. 또 힌두 신이 주재해서 여기 가고 저기 가고 결정을 한단 말이라.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못되는 거라. 단지 그 판단의 근거는 어떻게 돼요?

인간이 살아있을 때 행위! '잘살아왔는지 못살아 왔는지' 그걸 가지고 신이 있다고 한다며 그걸 판단한단 말이라.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겠어요? 열심히 잘 살아야 되겠고, 또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아야 되는 거라. 그래서 신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노여움 안 살려면? 때되면 꽃 바쳐야 되고, 또 동물 잡아서 바쳐 올려줘야 되고, 제사 지내고 의식을 해야 되고, 인간의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거는 그 이상은 없다는 거라.

 

왜? 신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신은 볼 수 있는 근거가 안 되는 거죠. 설혹 신이 있든 없든 간에 그것은 차후의 문제란 말이라. 그러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제사 지내고 의식 지내고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에 가면 어떻게 합니까? 희생제들 많이 하죠. 인도 가본 사람들이 있으니까, 목 탁 쳐가지고 목 쳐가지고 피 그 신에게 탁탁 묻혀주고 하잖아.

그게 인제 사실은 까르마, 갈마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맨 처음에 의미는 참으로 단순했던 거라. 그냥 제사 지내고 의식적인 거, 이런 것으로서 한정된 게 까르마입니다. 근데 이제 그런 의미 자체가 인제 자꾸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 그러면 신에게 제사 지내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라? 행동으로 나타내는 거거든. 세월이 지나면서 사상가들이 행동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도 해야 되고 말도 해야 되고 하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라.

그러니까 말하고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것, 이런 것 자체가 전부 행위로서 하나의 행위로 다 같은 행위로서 범주에 넣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그러죠? 불교에서.

 

그래서 전에는 행위 자체만 있었는데, 이제는 삼업(三業)이 분화가 됨으로 해서 어떤 결정이 생겨나는 거라? 생각하는 건 누가 생각하는 거라? 내가 생각하는 거라! 말하는 것도 내가 말하는 거고!

행동만 있었을 때는 누가 시키면 바로 하면 돼. 근데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은 자기 의지라는 거라. 그래서 자기 의지로 인해서 행위가 결정되게끔 바뀌어져 나옵니다. 곧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사후세계가 결정'되어 나가게끔 바뀌어져 나간다는 겁니다.

 

업이란 개념이 처음에는 이렇게 제사라는 것, 희생이라는 이런 의미에서 자유적인 의지로 인해서 일으키는 행동들로 바뀌어져 나왔다 하는 겁니다.

업이라는 게 그렇게만 바뀌어져 오는 것은 아니죠. 근본적으로 또 많이 바뀌어져 나옵니다. 어쨌든 크게 그렇게 바뀌어져 나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맨 처음 머리에 보면

착한 일을 하라 그러면 현재나 미래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반대로 나쁜 짓을 하면 현재나 미래에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다.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수확을 거두게 되고, 나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수확을 거두게 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 그러죠? "좋은 행위에 대해서는 좋은 결과를 받고, 나쁜 행위에 대해선 나쁜 결과를 받는다" 이런 사상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근데 이제 부처님은 뭐라고 했어요?

"선업선과 악업악과 외에 어떤 것도 인간의 운명을 -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힘이 없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보통 우린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해지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라. 근데 아까는 인간의 제도적인 카테고리 또 자율적으로 규제하기 위해서, 규제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희생제나 제사 같은 것이 생겨나지고, 그런 것이 인간의 자유적인 의지로서 발전되어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인간의 자유적인 의지로 인해서 발전되어 나온 업이라고 하더라도 절대자가 다음 세계를 좌우하게끔 결정하도록 그렇게 되어 왔단 말이라. 근데 부처님은 인간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어떤 힘도 없다고 그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라. 일반적인 종교인들이 얘기하는 부분하고는 많이 차이가 나죠?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할 것 같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불행하는 겁니다. 왜? 천국에 갈 수 없으니까. 하느님이 나를 선택했으니까 천국에 가는 것이고.

또 운명론자들은 뭐라 그럽니까? 행복과 불행은 무엇에 달려 있다고 그래요? 운에 달려있다고 그럽니다. 좋은 결과가 있고 나쁜 결과가 있고 그것은 운이 따르고 안 따르고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업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건 그렇게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거라.

 

근데 이제 부처님은 행복과 불행의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운도 아니고 또 어떤 절대자가 덥석 쥐어주는 것도 아니고 업이다. 업이 바로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하고 얘기를 한단 말이라. 왜 그렇게 첫머리에 그랬잖아. 행불행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것들도 어떤 힘도 없다고 얘기했어요. 단언을 했단 말이라.

왜 부처님은 그러면 이 업이란 게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고 얘기를 했을까?

당신 행복합니까? 행복하다 할 것 같으면 "과거전생부터 지어온 선근공덕이 많아서 이리 행복하다", 내가 좀 불행하다 할 것 같으면 뭐라 그럽니까? "죄가 많아서,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이제 업이라는 개념을 쓰는 데는 무언가 조금 나쁜 쪽으로 사실은 써오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은 업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나쁜 쪽으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는데, 나쁜 쪽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선업을 빨리어로 뭐라 그럽니까?

꾸살라 깜마(kusala kamma) 그럽니다. 악업을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 그렇게 얘기합니다. 꾸살라, 혹시 그 길상초라고 들어봤습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실 때 앉았던 풀이 그 길상초죠.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있을 때. 그 길상초를 갖다가 원어로 뭐라고 그래? 꾸사라, 꾸사! 꾸사풀이 무슨 풀같이 생겼냐면 우리 갈대 같애. 혹시 그 촌에서 사는 사람들은 갈대 이렇게 잡아 베다가 손 많이 베어 봤을 거라. 갈대 잘못 베면 손 베입니다. 갈대를 잘 알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손 안 베이는 거라.

꾸살라깜마라는 거는 뭐라? 선업이라는 것은? 내가 조심할 것 같으면 손 안 베이는 거와 마찬가지라. 내가 조심 안 하고 함부로 갈대를 베었을 때 손 베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꾸살라는 그와 마찬가지라. 선업 악업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거라. 내가 그것에 대해서 잘 알 것 같으면 그것이 선업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모를 경우에는 악업이 되는 거라. 원래 꾸사의 의미가 그런 겁니다. 꾸살라 라고 하는 게. 그 갈대에 대해서 갈대의 성질에 대해서 잘 알 것 같으면 갈대로 인해서 손을 베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상적으로 내가 이것은 해야 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나에게도 해롭고 다른 사람도 해로울 거 같으면 안 하지. 그럼 악업을 안 짓게 되는 거라. 근데 그런 생각 없이 하다 보면 탈이 생기고 그게 악한 일들이 되는 거라. 이게 원어 자체가 바로 그런 의미들을 담고 있는 거라.

 

근데 이 업이 부처님이 얘기했지만,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하고 얘기를 했는데, 과연 다른 종교들도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업이라고 할까? 그리 합니까?
길거리 나가서 한번, 10명 중에 아마 모르긴 해도 다섯 여섯 명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할 거라. ‘아, 내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 내가 이렇게 못 사는 것은 과거 전생에 업이 두터워 가지고 업이 많아서 이렇다.’ 다른 사람들한테 자꾸 ‘그런 거 같죠?’ 하고 얘기할 거 같으면 다 ‘그렇다’고 얘기할 거 같애? 절대 안 그렇다는 거라. 기독교인들은 달리 얘기하겠죠. 또 다른 종교들, 종교를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얘기할 거고. 단지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을 끄떡끄덕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러면 업이 궁극적인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게끔 돼 있다 하는 겁니다.

왜? 행복과 불행의 원인은 부처님은 '업'이라 했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달렸다'고 얘기했고, 또 운명론자들은 '운에 달렸다'고 그렇게 얘기했죠. 그 다른 것이 다 틀리고, 부처님이 말한 것이 맞다고 할 거 같으면 업이 어떤 조건들이 충족돼야만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그런 논리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잘 실천하고 잘 수행해가지고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니까. 또 다른 종교 기독교 같은 경우에는 "하느님 말씀 잘 좇고 하느님을 의지하여야만이 구원을 얻는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가 드러난 후에야만이 가능한 것이 기독교의 구원론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여러 종파로서 갈리게 된 것은 그런 구원론의 차이 때문에 갈려져 나갑니다. 각 파로 장로파니 무슨 파니 하는 것들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런 장로교파입니다.

 

인간은 무지하다는 거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신이 아무나 선택할 수 있다는 거라 구원할 때는. 다 누구든지 무지하고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아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신이 무조건적으로 어느 누구 이놈 내가 선택하겠다는 게 아니고, 눈 감고 제비 뽑는 식으로 딱 뽑아가지고 요놈을 구원해 주고.

그렇게 구원해주기 위해서는 예수를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만 속죄하는 의식을 하게끔 하고, 또 그런 것을 넘어서서 인간은 신이 부여해주는 은총은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서 만들어 나갑니다. 그래서 그런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그런 모티브로써 구원론이 형성이 됩니다.

어떻게 말하면 자의적인 의지는 인간에겐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신의 뜻에 인해서 좌지우지되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 외적인 힘은 어디에도 작용을 못한다고 그렇게 얘기했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조건이 돼야 되느냐?

우리가 알고 있는 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지겠어요? 업이라고 하는 것이. 신의 의지가 있어야 됩니까?
자기의 의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지!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 뭐하지만 어쨌든 중생들 살아있는 것들 중생들의 의지가 가장 필수불가결한 전제 요건이다 하는 겁니다.

중생들의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의지만 있으면 뭐 할 거라? ‘아, 내가 밥을 먹고 싶은데’ 하고 있으면 뭐 할 거라? 밥 먹을 능력이 돼야 밥을 먹을 거 아니라. 땡전 한푼 없는데 밥 먹어? 못 먹는 거라. 중생의 의지력이 있어야 되지만은 중생의 능력이 돼야만이 밥을 먹는 거란 말이라. 그래서 할 수 있다는 능력이 있어야만이 가능한 것이 또 이 업이라는 거라.

그리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행해지게 됐을 때, 내 스스로 ‘아, 밥 먹으러 가야지’ 하고 가게 될 때, 이 집 갈까 저 집 갈까 하고 판단해가지고 선택할 수 있게 됐을 때. 밥집은 여러 군데 많아요.

그래서 판단하게 될 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또 돼야만 되고, 또 선택해 가지고 내가 먹었을 때 그것을 우리는 '밥을 먹었다'고 그러는 것이고. 또 그런 의지여야만이 "자유의지"라고 얘기하는 거라.

 

이런 업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보통 업이 행동이라고 그랬단 말이라.

그 행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된다는 거라.

이런 의지적인 행동에는 반드시 중생의 의지가 있어야 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자유 의지가 그 속에 포함돼야만이 일상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의지적인 행동"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 그런 의지적인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 ... ...

'내가 의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러면 그건 업이 안 된다는 얘기거든. 모르고 길을 지나가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다, 그거는 업이 됩니까? 이 4가지 조건에 충족이 안 되는 거라. 내가 의지를 안 일으키게 된 거라. 내가 모르고 하는 것들은 행위에는 들 지는 몰라도 업은 되지 않는다 하는 거라.

그렇게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요건 내가 어떻게 해야지’ 해가지고 일으키는 모든 것들, 이런 것들은 또 업이 되겠습니까? 업이 됩니까?

통상적으론 그걸 업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지금 얘기하는 업들은 "다음에 미칠 업"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게 마음속에 꺼림칙해 있을 것 같으면 그게 행동으로 나타나지고 말로써 나타나질 것 같은 건 업이 돼버리는데, 그렇지 않고 내적인 행동들 내적인 의지적인 행동들은 그것은 업으로서 치질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그래서 항상 외적으로 표출돼야만이 그것은 업으로써 간주를 한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인과의 법칙이 엄연하게 드러나게 될 때, 이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업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나쁜 말 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지는 거고, 나쁜 행동했으면 어떻게 나타나진.' 이런 인과의 법칙이 여실하게 드러나지게 될 때, 이런 외적인 행동들이 업으로서 간주가 돼 나갑니다. 마음속으로 꿍꿍이 속을 해가지고 ‘저놈 내가 어떻게 해야지’ 하고 있었던 거 표출이 안 되면 업으로서 작용이 안 된다는 얘기라.

 

맨 첫 번째 전제적인 조건이 '의지적인 행동'이어야 되고,

두 번째가 이런 '인과율'이 나타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업을 보통 얘기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

"외적인 의지적인 행동"이라고 그렇게 얘기 하죠.

밖으로 표출될려고 할 것 같으면 뭐를 통해서 표출됩니까? 예? (수행자 대답 ...) 근데 보통 그게 뭘 통해서? 육근을 통해서 나오지.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육근을 통한 외적인 의지적인 행동이다" 하고 얘기를 한단 말이라.

 

인제 일반적으로 이렇게 하는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러면 진짜 막 다 죽어 가는 사람 물에 빠져가지고 허우적거리는 사람 구해준 것들 내 힘들여가지고, 이런 것도 업이 될까요? 그건 업이 안 됩니다!

내가 편하고자 일으켰을 때, 내가 편하고자 일으켰을 때 그것이 업이 된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을 통한 외적인 의도적인 의지적인 행동"을 갖다가 통상적으로 업이라고 얘기합니다.

편해지려고 하는 것은 뭐라?

'선악론'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이런 업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죽고 나서 다음에 받을 보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윤회론'이 형성이 되게 됐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업이라고 얘기를 한다는 거라.

그래서 업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맨 처음에 의지적인 행동이 있어야 되고,

두 번째가 인과율이 드러나야 되고,

세 번째가 선악론이 드러나야 되고,

네 번째가 윤회론이 형성이 돼야만이 그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업의 진리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그걸 요약을 해보면 "업이라고 하는 것은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외적인 의지적인 행동" 이것을 우리는 업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의지를 가지고 일으키는 행위다" ... 그래서 '의도된 행위'라고 얘기를 합니다. 의지를 가지고 일으키는 행위거든. 그래서 보통 통상적으로 업을 뭐라고 풀이하느냐 하면 "의도된 행위다" 하고 간단하게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해 놨던 것은,

'신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하는 그런 사상들과, 우연히 '우연히 이렇게 저렇게 됐다' 하는 사상들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됐다' 하는 운명론 이것을 다 혁파하는 그런 경우들입니다.

내가 나쁜 짓을 지었으니까 나쁜 과보를 받고 또 선한 짓을 지었으니까 선한 과보를 받고 이것은 누구든지 안다는 거라. 근데 나쁜 짓을 지어도 나쁜 과보를 안 받는 게 있거든. 좋은 일을 해도 좋은 거 앞으로 못 받는 게 있고, 그렇단 말이라. 그리고 깨달음을 이루었던 아라한들 아라한들도 업의 영향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단 말이라. 목련존자 같은 경우도 돌에 맞아 죽었단 말이라. 그거 왜 그러냐는 거라.

운명론이라고 할 것 같으면,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부처님한테 어느 바라문의 가서 물어봅니다.

“천신의 존재를 인정합니까?” 신의 존재를 인정하겠느냐는 거라 범천을. 부처님이 그럽니다. “니가 봤나 천신?” 천신 본 사람 있어요?
본 게 아니면 인정하지 말아라는 거라. 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신을 인정하느냐는 거라. 마찬가지로 내가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과거 전생에 ‘아이고, 업이 많아서 업보가 두터워갖고 요렇게 태어났지’ 자기가 과거 전생에 업보가 많았는지 많지 않았는지 봤어? 본 적 없을 때는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기득권자들이 만든 이론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노예로 태어났을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라. 어떻게 태어난지도 모르는데 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살아가는 것도 내 자유 의지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사람을 노예라고 그러는 거라.

이렇게 자유 의지가 박탈됐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운명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그래요? 천신도 믿고 부처님도 믿고 하느님도 믿고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거라. 이걸 인제 부처님은 부정한 거라.

그래서 맨 첫 머리에 뭐라고 그랬어요?

업은 우리 행동에 따라서 작용하는 비인격적이며 자연적인 법칙이다.

음, 비인격적이라 하는 것은, 나도 지금 내용을 밑에 읽어봐야 되겠는데, 자연적인 법칙이라는 뜻인데, '인격적이다'고 하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란 뜻이거든요.
그럼 비인격적이라고 할 거 같으면 실제적이라는 그런 뜻이 되겠죠. '우리 행동에 따라서 작용하는 비인격적이다' 하는 것은 바로 선한 일은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일은 악한 과보를 받는다는 그런 걸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적인 것, 실제적이고 자연적인 법칙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대로 나타나지는 것이지, 어느 누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러나 행·불행이 운에 매어져서 아니면 정해진 법칙으로 인해서 살아가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우리는 그 운명을 바꿀 수가 없는 거라. 그 업을 바꿀 수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우리 불교 역사에는 그런 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나쁜 습관 나쁜 업을 지어온 자라고 하더라도 부처님에 인해서 아라한 과위에 올라서 열반을 성취했던 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고.

이 책에는 아쇼카왕하고 앙굴리말라를 대표적으로 표현을 해놨단 말이라.

자의지에 인해서 형성되게 되었을 때는 이런 운명론 자체를 갖다가 거부를 하고 바꾸어 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는 단순히 업을 하나의 법칙으로써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여러 가지 법칙(dhamma niyāma)들이 있습니다.

150페이지에 보면,

'계절의 변화에 관계하는 계절의 법칙', 이것은 비나 바람 같은 그런 것들을 얘기하죠. '우뚜 니야마(utu niyama)'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다음에 '생명이 커 나가는 그런 질서의 법칙', 비가 오고 하면 씨앗이 커서 나무가 되고 하는 그런 생물학적인 법칙, 그것을 보통 '비자 니야마(bīja niyam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행위의 결과에 따른 질서의 법칙, 깜마의 법칙', '깜마 니야마(kamma niyama)'라고 그러죠.

그다음 네 번째가 '전기력과 조수의 운동 등에 관계하는 정신적-자연적인 현상', 이것은 정신적인 게 아니고 자연적인 현상이죠. 자연적인 현상을 얘기합니다. '담마 니야마(dhamma niyam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 '의식의 과정을 통제하는 심리학적인 법칙'은 '찟따 니야마(citta niyam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각각의 법칙들이 있다는 겁니다.

 

각각의 법칙들이 있지만은 행위 결과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은 '깜마 니야마(kamma niyama)' 이 하나뿐이라는 거라.

나머지는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라. 이런 것들은 일상적으로 우리는 업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라. 단지 이런 일상적인 것들이 깜마를 도와주는 요인으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뿐이라는 얘기라.

 

마찬가지로 깜마가 업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운명론은 절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살고 못살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의 문제이고 스스로가 할려고 하는 의지의 문제인 것이고, 또 수행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들도 그것이 ‘내가 이런 조건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다’ 하는 그런 생각들은 피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이 업설을 갖다가 내세운 이유가 바로 근본적인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운명론적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어떤 절대자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해 줄 것이라는 것, 아니면 어떤 법칙도 없이 되는 대로 어떨 때는 운에 맡기고 어떨 때는 자기 능력에 맡기고 하는 그런 것들을 경계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인간의 의지적인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불교의 업설이다" 하는 생각들을 해야 됩니다.

 

이번 주에는 업이라는 것의 개념을 갖다가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업에 대한 얘기를 서두로써 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업의 의미가 있으면 업이 어떻게 작용을 하고 그 업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들을 하겠습니다. 아직 한 과가 안 끝났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