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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acārī(범행 수행자)와 Brahmacārinī(범행 수행녀)의 위치설정 (20150306)

담마마-마까 2021. 10. 24. 09:00

* Brahmacārī(범행 수행자)와 Brahmacārinī(범행 수행녀)의 위치설정 (20150306)

 

1. 수행자의 위치

 

①. 사회적인 입장에서의 위치설정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비구 상가

비구니 상가

재가의 남성 신도

재가의 여성 신도

 

②. 수행의 결과로부터 본 위치설정입니다.

 

아라한

불환자

일래자

예류자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아라한)의 입장으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들도 같은 수준의 최종 해탈을 한 자입니다.

최초로 깨달은 60명의 아라한들에게 전도 활동을 하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했을 때, 자신도 아라한의 한사람으로서 세었습니다.(이 세상에는 오직 61명의 아라한이 존재한다!) 그러나 붓다는 해탈의 선구자인 것입니다. 발견자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치는 최상의 지도자인 것입니다. 지도하는 능력, 설법하는 능력에 있어서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능력을 존경하기 위해서, 또한 최상의 지도자와 제자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붓다의 깨달음을 정자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③. 그 관례에 따라 위치설정을 해 보면,

 

정자각자

아라한

불환자

일래자

예류자

 

이것은 불교의 본래의 위치설정이지만, 후의 대승 불교에서는 아라한의 깨달음은 정자각자보다 뒤떨어지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완전인 깨달음을 이루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최초로 말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도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이었을까요? 그러나 만약 혼자일지라도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에 불만을 느낄 수 없습니다. 또 아라한보다 아래의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에게도 더욱 위의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을 트집 잡을 수 없습니다. 그 권리는 없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부처님의 제자들과 다르게 깨달음에 힘쓰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예류과에 이른 사람의 심경마저도 모를 것입니다.

어쨌든 타인의 깨달음의 경지에 트집 잡아 본 것만으로도, 이 논리가 성립되지 않

는다는 분명한 이유·근거가 됩니다.

 

하나 더 위치설정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이룰 목적으로 사람들은 수행해 나갑니다. 3귀의를 하거나 오계를 지키거나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출가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그 사람들의 위치설정도 필요하게 됩니다.

 

④. 수행의 진행정도를 가지고 위치설정을 해보면,

 

아라한향(깨달음의 최종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자)

불환향

일래향

예류향(깨달음의 최초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하는 자)

예류향의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않았습니다. 수행중입니다. 따라서 수행하는 모든 비구, 비구니, 재가의 남성, 재가의 여성은 이 4번째 예류향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것에 의하면, 3귀의한 것만으로도 예류향인 것입니다. 3귀의한 사람이 진실로 성실하게 깨달음을 목표로 노력한다면 그처럼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보 중의 상가라는 보물은 8종의 사람들(1.아라한 2.아라한향 3.불환자 4.불환향 5.일래자 6.일래향 7.예류자 8.예류향, 한역으로 4쌍8배)입니다.

 

그러면 3귀의한 것만으로 귀의할 수 있는 성스러운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되면 큰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고, 3귀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가족이 불교도이니까, 달리 신앙하는 종교가 없었으니까, 삼보에 귀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단 삼보에 귀의하지만, 타종교의 가르침도 신앙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종교라도 말하고 있는 진리는 같다고 생각해서 삼보에 귀의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수행에 전심전력해서 위빳사나의 지혜의 일정한 경지에 도달해서, 앞으로 멀지 않아 예류과의 깨달음을 이룰 사람만 예류향으로 설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만 3귀의한 것만으로, 출가한 것만으로는 예류향은 되지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참고해 보면, 3귀의의 대상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고 완전히 납득하여 확신하는 사람을 예류과로 여깁니다.

불교의 완전한 이해가 없이 3귀의만 한 자는 타인의 깨달음에 어떤 도움도 되어 주지 않기에 귀의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생각해 봅시다. 재가이든 출가이든 올바르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룹니다. 그러나 아라한과에 이른 성자에게 재가 생활은 무리입니다. 모든 집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집착조차 없기 때문에, 아마도 재가 생활을 지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재가자가 아라한에 이르렀다면, 출가하든지, 열반에 들든지 일 것입니다.

그래서 재가로 있다면 길어도 7일까지라고 테라와다의 스승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부왕도 임종 때 아라한과에 이르렀습니다. 또 다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여성 신도가 임종 때 아라한과에 이른 경우는 경전의 기록에는 없지만, 나는 이러한 분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 이외의 다른 7개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재가 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⑤. 이와 같은 여러 사항을 고려하여 수행의 과정과 결과에 근거해 정리할 수가 있

습니다.

 

아라한

아라한향

불환자

불환향

일래자

일래향

예류자

예류향

 

이 8종류의 불교도 중에는 출가의 비구나 비구니도, 재가의 남성이나 여성도,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2.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예류향의) 사람들

 

삼보에 귀의한다면 예류과를 목표로 해 힘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단 모두 「열반, 해탈, 아라한을 목표로 합니다.」라고 원하지만, 그것은 희망이며 구체적인 수행은 우선 예류과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류과를 목표로 하는 자에는 비구이든, 비구니이든, 재가의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수행의 출발은 계율로부터 시작됩니다. 출가와 재가의 구별은 계율에 있습니다. 출가는 가족을 가지지 않고, 대처하지 않는 것, 농사짓는 일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연히 밭일이나 장사 등의 경제활동도 멈추어야만 합니다. 재가의 보시로 생명을 유지시켜 주어 수행에 전념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계율·규칙이 무수하게 있습니다. 한 사람의 출가자를 비구, 비구니라고 합니다. 20살 이하의 출가자는 사미라고 합니다.(사미의 계율은 10가지이지만, 견습생이므로 비구의 규칙 등을 거의 지켜야 합니다.)

 

재가의 경우는 오계가 됩니다.

성실한 재가는 주 1회, 또는 월 2회나 1회는 팔계를 지킵니다.

8계의 경우 오계와 차이가 나는 것은, 그날 하루 동안 완전하게 성적인 행위를 멈추는 것, 문화예술을 즐기는 등의 오락도 멈추고, 오후의 식사도 멈춥니다. 이렇게 하루 24시간동안 실천하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음날부터 또 다시 오계가 됩니다. 어떤 경우는 8계를 받아 지니지 않고, 항상 오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재가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재가 불교도는 자유롭게 가족 등의 상황에 따라 8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날의 수를 늘릴 수도 있으므로, 7일간, 10일간, 1개월간, 1년간, 또는 전 생애 등의 시간을 결정해 팔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재가의 수행자인 것입니다.

 

3. 재가 불교도와 범행 수행자

 

8계에서 성행위를 금지하는 계율의 이름은 brahma cariyā sīla입니다. 그 의미는 「맑고 깨끗한 삶의 방법」이지만, 내용은 「성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서 8계 이상을 지키는 범행 수행자를 brahmacārī(남성, 범행 수행자)와 brahmacārinī(여성, 범행 수행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시대부터 많은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계를 지키는 불교도보다는 수행자의 위치에서 위입니다. 비구도, 비구니도 아닌 상태입니다.

출가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정식적으로 상가에서 출가의식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므로, 상가로부터 보면 재가입니다.

그러나 재가의 사람들로부터 보면, 가족 활동에는 참가하지 않고, 수행만 하고 있으므로,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재가의 누군가가 수행의 결과, 깨달음의 3번째의 단계인 불환과에 이르렀다면, 마음에서 욕구와 분노가 완전하게 사라집니다. 이들은 권리상 청정하다는 의미의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경우 성자로서 다시 태어날 권리를 얻었기에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가 됩니다. 진지하게 수행을 시작하고 싶은 분들은, 자신의 의지로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가 되어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4. 비구니 출가의식을 할 수 없는 이유

 

여성 출가에는 비구니 상가와 비구 상가 2번의 출가 의식을 실행하는 것으로 성립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에 의해 정해진 결정입니다. 따라서 현재 테라와다에는 비구니들이 없기 때문에 비구니 출가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가기 전에, 상가는 사소한 작은 계율·규칙을 개선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은 그 권리를 철폐하고, 부처님에 의해 말해진 계율의 모두를 그대로 지킬 것을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비구 상가가 계율을 개선할 권리는 없습니다.

만약 개선하려고 생각한다면 테라와다의 모든 비구 상가가 찬성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상가 안에서 서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일치하는 결론에는 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성 출가에 반대하는 승려는 아무도 없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비구니를 인정할 수 있는 출가 의식의 관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후 제1차 결집의 결정을 바꾸게 되면, 대부분의 승려는 반대합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여성이 수행해서 아라한과에 이르면, 생득권으로서 비구니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라한과에 이른 여성 수행자(비구니)가 다섯 명만 생겨난다면, 비구니 상가로서 출가자의 인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상태로서는 여성으로 재가 생활과 활동을 멈추어 수행에 전념하고 싶은 경우는 brahmacārinī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5. 중간으로서의 범행 수행자라고 하는 자연스러운 선택

 

붓다의 시대부터 brahmacārī(남성)와 brahmacārinī(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위치설정은 비구 상가와 재가 불교도의 중간입니다. 이것은 불교 사회의 위치설정입니다.

불교 교리의 위치설정은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로 결정됩니다. (아버지는 예류과이고, 딸은 일래과에 이르렀다면, 딸은 아버지를 「남동생」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와병 중의 부모가 있어 자신 이외에 돌볼 사람이 없다,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가 있는데 친척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자신은 수행에 힘써서 깨달음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중간 위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직업적으로 자신의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깨달음을 이루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중간 수행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출가 조직에 들어갈 수 없는 중성의 사람들, 손발 등이 절단된 사람들 등의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이 수행에 힘써서 깨달음을 이루고 싶다면 중간 위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가라고 하는 어느 특정 조직의 일원이 될 수 없어도, 진지하게 수행해서 깨닫는 것까지 금지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로는 될 수 있습니다.

 

brahmacārī와 brahmacārinī에 대해서 우리는 범행 수행자라는 역어를 사용했습니다.

한국의 문화에서는 brahmacārī도, brahmacārinī도 출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출가 상가라고 하는 조직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결정·규칙이 있기에 「출가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