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EFW34qVVHZQ?si=YKge8WJRHC_wn7zI
* 재가자가 갖추어야 될 필수 조건 다섯 가지와 우빠산띠(upasanti) 20241207
엎질러진 물이네. 지금 정국이 그렇습니다. 왜들 여기 와 있어? 빨리 나가서 거리에 안나가고? 스님이 출가하지 않았으면 아마 나가 있겠지. 출가자들은 특히 이제 태국 같은 경우에는 일체 정치적인 활동이 금지돼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투표권도 없어요. 우리나라는 투표권도 있잖아. 투표권도 없어. 그러니까 종교적인 거 외에는 일절 정치적인 것은 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마 미얀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근데 이제 상가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행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습니다. '복발갈마'라고 해가지고 '바리때를 엎어버린다.' 쉽게 말하면 정치적으로 뭔가 잘못된 행위를 지었을 때는 '너한테는 보시 안 받는다' 하면서 일절 보시를 금해버립니다. 그걸 이제 상가 전체한테 공문을 딱 돌리게 돼요. 그러면 만약에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그 집단이 올리는 것들은 일절 아무 데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이나 그 집단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원천 봉쇄돼버리는 거라.
옛날에는 눈 밝은 스님들이 있어가지고 그런 경우가 역사상으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 쿠데타를 일으켰든지 그랬을 때는 그 정권이 결국엔 항복하고 말고, 하는 그런 경우들이 있었거든. 그런 거 외에는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근데 여러분은 틀리잖아. 재가자들인데 법을 듣는 게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여기에 왔다고 봅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해요. 잘못된 건 잘못했다고 할 줄 알아야 되지, 잘못된 걸 아무 소리 안 하는 것도 그것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만약에 죽음이 갑자기 탁 닥쳤다, 급작스러운 일로 인해가지고.
그랬을 때 불교를 믿어서 확신이 있는 사람하고 아니면 불교를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이나 확신이 들지 않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너한테 한번 물어볼게. 내가 너한테 차 가지고 와앙 와갖고 내가 너를 탁 덮치려고 한다. 그럼 너는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아? (어린이 대답: 무서워요.) 그렇지 무섭다는 생각, 두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근데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그래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니는 어떤 생각이 들을 것 같애? (수행자 대답: 관찰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관찰 할 정신이 없다. 관찰은 물론 하고 있겠지. 근데 그때는 어떤 생각이든 생각이 일어나게 돼있어. 대부분 그럴 경우에는 ‘어, 내가 지금 죽어가지고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래서 죽음은 어쩔 수가 없다고 여겼을 때, 그럴 때 ‘어, 내가 지금 죽어도 돼?’ 아니면 ‘죽고 나서 내가 사악처에 빠지진 않을까?’ 하고 돌아보게 된다는 겁니다. 자신 있어? 사악처에 안 빠질 자신이 있느냐고.
완전하게 확신이 들 것 같으면 ‘응 그래’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거고. 그런 확신이 완전하게 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얘와 같이 두려운 마음이 딱 그다음에 일어나는 거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거라. 그럼 그게 마지막 순간에 그런 마음이 들면은 그 사람은 어디에 갈지는 누구도 몰라. 사악처에 갈지 아니면 천상에 태어날지 어떨지는 그거는 업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근데 어쨌든 확신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은 죽음을 앞두고 ‘어?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 그래도 악처에는 안 빠질 것 같애’ 하는 마음이 들면은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누가 부처님한테 그렇게 물어봤을 때 부처님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경에는 그런 게 나옵니다. 마하나마 경이라고 하는 데 보면 뭐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삼보에 대한 믿음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 밖에 거리로 안 나가고 법 들으러 왔을 거 아니라. 믿음도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계도 잘 지켜나가고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법문 들으러 오고 수행을 하고 할 거라.
마하나마도 그리했다는 거라. 평상시 때는 그리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성문에 와서 부처님 있는 데서 법문을 듣고 돌아가는데 그 뒤에서 난리가 난 거라. 요즘 같으면 이제 뭐 그런 쿠데타 같은 그런 것에 딱 맞닥뜨린 건데, 저쪽에서 막 군화발로 막 나에게 달려온다, 총을 딱 겨누고 온다 할 것 같으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때 마하나마가 마음에 ‘어 내가 죽고 나면 사악처에 떨어질까’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좋은 수행처에 가서 수행하고 또 수행처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선한 마음 일으켜가지고 그냥 잘 사띠하면서 이렇게 일반적으로 지낼 때는 몰랐는데, 집중 수행처에서 탁 나오고나서 집에 와보니깐 집은 개판돼 있지, 그러면 먼저 마음이 그 선한 마음이 먼저 안 일어나고 막 불선한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거라. 그리고 사띠를 잘하고 있다가도 급한 일에 탁 부딪치면 사띠는 어디 갔는지 없어져 버리고 당장 그것 먼저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마하나마는 분명히 그럴 때에도 마음이 쉽게 말하면 내가 이거 악한 마음이 일어났는가부터 먼저 보이고, 이대로 만약에 죽음을 맞이할 것 같으면 내가 나쁜 데 빠지지 않는가 하는 것부터 먼저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행하고 있을 때나 수행처에 있을 때는 대부분 그게 억눌러지고 그런 작용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잘 사띠하고 있는 것처럼. 근데 각 현실로 돌아오면 그게 깨져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거라. 그래서 악한 마음이 일어난 지조차도 모르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이거는 굉장히 경계를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사악처에 빠지는 거 아닌가 하는 것부터 먼저 생각이 들고, 그러고 나서 안심되는 마음이 일어났다, 또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런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 니 말대로 다. 니가 그래도 4가지를 잘 닦아왔기 때문에 그래서 너는 적어도 사악처에 안 빠지는 줄을 니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절대로 사악처에 빠지지 않고 선취에 태어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작용들이 일어났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무수하게 닦아서 그것들이 견고해졌을 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계 받았죠? 너도 받았지? 지킬 마음이 있어? (어린이: 예) 진짜? 그럼 거짓말하면 안 돼 오늘. 한번 더 물어볼게. 진짜 지킬 거야? (어린이: 예) 음. 이게 정직하다는 거라.
계라고 하는 것은 정직이 생명이고 계라고 하는 것은 계를 지킨다는 것은 진리를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진리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거라. 그러면 그 진리는 너를 보호해 줄 거라. 어길려는 상황이 될 것 같으면은 ‘음, 아니야. 이러면 안 돼’ 하면서 니가 그걸 피하게 되는 거라. 그게 진리가 너를 보호해주는 거라. 마음 단단히 먹어라 이. (어린이: 예)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재가자들은 오계입니다.
오계 안 어기고 살아갑니까?
그래서 내가 진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한국에 있는 테라와다 스님들한테 그런 얘기를 가끔씩 합니다.
매달리려고 하지 말고, 니가 그 배를 밀어줘라. 그래야 그 배는 나아간다. 맨날 매달려가지고 그것만 의지하려고 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그 배는 어디로 가겠어? 침몰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나아가지질 못하고 무거우니까 침몰해버리는 거라. 그래서 자꾸 상가 스님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빨리 니가 힘을 키워가지고 이 상가라고 하는 교단을 밀어줄 수 있는 힘들을 키워라 하는 얘기들을 가끔씩 합니다.
왜 그럴까? 이 상가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기본으로 해서 나아가는 집단입니다.
이 진리가 소중하다고 할 거 같으면 이것을 지켜야 되는 거라. 지키지 못하면 진리를 그냥 왜곡하고 틀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럼 가라앉게 되는 거라.
여러분이 계를 지킨다는 거는 그와 같습니다.
내가 진리를 지키는 거, 오늘 지켰다 내일 어겼다 할 거 같으면 반드시 마음속으로 참회하라는 거라. ‘아 내가 또 이거 잘못해가지고 어겼습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딱 강하게 가져야 되는 거라. 그렇게 매일매일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계는 지켜집니다. 이게 첫 번째라는 거라.
마하나마는 그렇게 해왔다는 거라. 그래서 마하나마는 어떻게 했어요?
죽을 때 물속에서 죽죠. 위두다바가 쳐들어와 가지고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 마하나마 왕이, “내가 이 물속에 들어가가지고 있을 동안에 물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그동안엔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게끔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 그렇게 했거든. 근데 사람이 물속에 참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어? 도망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근데 마하나마는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 머리를 거기다 묶어 버리는 거라.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안 나와, 마하나마가.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까 이미 마하나마는 죽어 있는데,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머리를 거기다 묶어가지고 죽어버린 거라. 그 모습을 보고 위두다빠도 석가족 남아 있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다 살려줍니다. 계를 지킬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면은 다른 사람이 계를 어기는 것도 싫어하고 피할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계를 자꾸 단련하고 학습하고 자꾸 훈련해가지고 그게 바로 내가 진리를 보호하는 길이고 진리가 나를 보호하는 길이다 하는 마음이 탁 들도록 만들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삼보에 대한 확신. 이거는 아마 완전하게 확신이 들기는 힘들 거라. 지금 당장이라도 뭐 종교 바꾸자고 누가 솔깃한 소리 할 것 같으면 홀라당 넘어가. 누군가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스승에 대해서 비난하는 말을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솔깃해져. 누군가가 “아이 뭐 그냥 법이라는 건 다 똑같지 뭐. 기독교든 뭐든 다 비슷비슷해” 그러면 그런 마음이 또 든다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하면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까? 자신이 체험해 보면 압니다. 지가 해보면 이거 외에는 없다는 걸 압니다.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4가지를 갖다가 불법승 삼보에 대한 거, 그다음에 계에 대한 것, 이걸 사불괴정(四不壞淨)이라고 얘기합니다. 4가지 무너지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일단은 재가자들은 어떤 경우든 이 4가지는 실천해가지고 견고하게 자꾸 만들어야 되는 거라. 이게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은 더 이상의 수행으로서 진척을 일으키기가 힘들다는 거라.
그다음에 이어서 해야 되는 게 여러분들이 잘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법을 자꾸 듣는 것. 그것도 그 법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이어야 되는 거라. 아무거나가 다 법문이 되고 법이 되는 게 아닙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지 않는 것, 이 세상뿐 아니라 다음 세상에라도 똑같은 법이 적용이 되는 것이 법이지, 이 시기나 다음 시기에 다르게 적용이 될 것 같으면 그거는 법칙이 되는 거지 법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법을 만났을 때는 그 법을 자주자주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걸 자주자주 익혀야 됩니다.
스님이 태국에 있을 때도 처음에는 법문 듣는 게 참 좋았어요. 그래서 법문 듣는 거를 막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들어보니까 틀린 것들이 막 나와. 그 뒤로는 되도록이면 법을 가려서 들었어요. 왜 그러냐면 거기 같은 경우에는 법납이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기 때문에 어린 스님들이 법을 설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가려서 듣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깐 법을 들으면서 그냥 그 소리를 그냥 사띠를 하는 거라.
법을 듣는 것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고 법을 실천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 법이 그냥 하나의 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여러분들도 법을 듣다가 마음이 고요해지면은 그냥 귀에다 마음을 두라는 거라. 스님이 말하는 이 소리에다가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소리에다가 마음을 둬보라는 거라. 그럼 들리는 것으로 인해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현상들이 분명하게 감지가 된다는 거라. 그러면 더욱더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는 부처님 법을 ‘아!’ 이해를 하게끔 되는 거라. 법을 듣는 것들을 점점 해오다 보면 그렇게도 바뀌어 나갑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래서 그 법을 듣는 것들이 숙련되게끔 되는 거라.
그게 인제 세 번째고, 삼보에 대한 것, 계에 대한 것, 그다음에는 이제 청법에 대한 것. 이것들이 자꾸 훈련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여러분은 말하고 행동할 때 자애를 지니고 하고 있습니까? 자애 없이는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고 행하고 하는 것들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자애를 지니지 않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말하고 행하는 것들은 불선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자애를 지니면은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것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짜가(cāga)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해야 될 것이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자기의 마음도 그것으로 인해서 불만족한 상황이 아니라 만족한 상황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걸 입고 먹고 하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됩니다. 마음을 자애의 마음을 지녀서 남을 볼 수 있는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이게 인제 네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자애는 어떻게 보면 예비 수행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여러분들은 뭐 해야 돼요? 위빳사나 수행해야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번뇌들을 끊어낼려고 할 것 같으면은 수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은 오랜 세월을 걸쳐서 해야 되는 거고, 오랜 세월 닦아나가야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닦아야만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그런 사건들을 만나더라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게 될까?
산띠의 상태가 돼야됩니다. 열반을 경험한 아라한의 상태만이 산띠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산띠라고 하는 것이 사마타라고 하는 상의 어근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이 상이라고 하는 거는 어떤 의미냐 하면 삼매를 사마디를 얘기합니다. 고요한 상태에 딱 들어가게 되면은 모든 번뇌들은 일단 일어나지 않고 끊어지진 않았지만 일어나지 않고 잠복해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가장 평화로운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보통 산띠를 얘기할 때 "사마디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하고 얘기도 합니다. 선정을 닦아서 생각과 망념이나 이런 것들이 모든 것이 끊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딱 도달하는 거라. 그것이 가장 평화롭고 고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도에 가면 대학의 산띠끼리라고 하는 데가 있습니다. 태국에도 종파가 하나 생긴 게 있는데, 산띠아속이라고 하는 종파가 하나 생긴 게 있어요. 그 장소와 그 그룹들을 보면은 그 지역 가면 굉장히 고요합니다. 아주 평화로워. 아무 생각이 안 일어나져.
그리고 산티아속에 우리가 있을 때도 있었는데, 산티아속에 가보면은 그때 당시에는 승복을 입고 있었어요. 인제는 이단으로 평가돼가지고 다 흰옷을 지금 입고 있는데, 어쨌든 스님이 받은 느낌은 거기 가면 너무너무 평화로워. 아무것도 없어요. 개인적인 꾸띠도 없고 그리고 소유하는 것들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평화롭게 지냅니다. 수행하고 싶은 사람은 수행하고 또 개인수행하고 싶으면 개인수행하고, 그리 한데 가진 게 없고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수행이 돼나가는 거라.
이 산띠라는 게 그런 개념으로 처음에는 많이 쓰였습니다.
여러분들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언제 그런 상태가 될까?
걸림이 없이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이 마음이 오롯하게 그냥 있는 상태가?
남이 비난하든 나를 칭찬하든, 아니면 내가 가진 게 있든 없든 전혀 문제되지 않는 상태?
상카루뻭카냐나, 적어도 거기에는 도달을 해야만이 그다음부터는 흔들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 보고 있고, 사라지는 게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보는 상태에서 탁 놓아버리면은 그냥 되는 상태라.
처음에 시발점들을 잘못 끼우기 때문에 자꾸 억지로 그걸 대상을 잡으려고 그러고 찾으려고 그러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지혜가 단련되어 나가는 과정들입니다. 그게 잘 단련되어 나갔을 때 그 뒤에 그 사람은 위험이나 아니면 어려움이나 죽음에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거라.
이게 5가지입니다.
이걸 부처님이 뭐라 했을까? "재가자가 갖추어야 될 필수 조건이다."
여러분은 그렇게 갖추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거기다가 더 덧붙여가지고 도와 과를 얻으려면 어떻게 할까?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여실지견을 자꾸 실천해나갑니다.
앞에 거는 사불괴정에 전부 포함이 되는 영역입니다. 억지로라도 할 수가 있어요. 근데 이제부터는 도와 과를 얻으려면 어떠한 경우든지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됩니다.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났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났으면 ‘선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아야 되는 거고. 대상을 놓쳤으면 ‘놓쳤다’고 알아야 되는 거지, 대상을 놓친 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 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놓쳤으면 그냥 놓친 거라. ‘놓쳤네’ 하고 나서 빨리 마음을 대상으로 돌리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볼 수가 있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사람은 정직하게 되는 거라. 수행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가장 정직해지지 않으면은 수행은 진척을 이룰 수가 없어.
여실지견이라는 것은 그게 선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들을 얘기합니다.
그럼 자기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할 줄 알아야 되는 거고, 없으면 없다고 얘기할 줄 알아야 되는 게 여실지견의 영역에 속한다는 겁니다. 자꾸 실천해 나가야 됩니다 여실지견을.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게 여실지견이 잘 실천됐다고 하고, 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여러분들은 도와 과를 이룰려고 해야 됩니다. 출세간의 도와 과를 이룰려고 해야 됩니다.
이걸 이루기 위해서 앞에 것들이 쭉 연습되어 왔는 거라. 이 생에서 이루지 않으면 언제 이룰 것 같아요?
기회가 여러분들한테 그렇게 많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윤회하는 시간 동안에. 공부할 수 있을 때 공부를 해서 빨리 도와 과를 이룰려고 해야 됩니다.
우빠산띠(upasanti)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걸 보통 아라한과를 이룬 자인 부처님을 다르게 부르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우빠산띠라는 용어가. 근데 부처님은 어떤 분이죠? 몸과 말과 마음이 청정하신 분. 어떠한 경우도 고요하게 평화롭게 지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늙고 병든다고 그거 막을 수 없잖아. 그럼 그냥 받아들여. 말하는 거 좀 예쁜 말 하면 좋잖아. 그리고 마음도 고요하게 있으면 마음이 지가 뭔가를 할려고 하면 그거 그냥 알아차리면 돼.
몸과 말과 마음이 청정하다는 거는 바꿔 얘기할 것 같으면 지 할 일 대로 하는 걸 그냥 받아들이고 인식해 줘 버리면 되는 거라. 못 받아들이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 청정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은 그걸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걸 할려고 하면은 그것들을 갖다가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몸과 말은 어느 정도 된다고 하는데,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할려고 하지말아라는 거라. 마음은 그냥 내버려두면 지가 뭔가를 할려고 합니다. 왜? 살아있기 때문에! 마음이 죽을 수는 없거든.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럼 그냥 그 마음이 지가 하는 것들을 그냥 알아차리면 돼. 적어도 그렇게 알아차리면은 망상은 전혀 안 일어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아주 쉽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냥 ‘뭐하네’ 하면서 알면 됩니다. 망상할 틈이 없습니다. 그게 마음의 청정이라는 거라. 간단한 거니깐 너무 그렇게 어렵게 생각은 하지 마라 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수행했을까? 안 했을까? 했어요, 안 했어요? 누구 물어보면 나는 어디 가서 수행하고 있다고 얘기하라고 그랬잖아 부처님이. 부처님도 수행했습니다. 우빠 산띠에 도달했다 해가지고 수행 안 하는 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이 우빠 산띠라는 용어 자체는 미래형이기 때문에. 착각해버리면 안 됩니다. 적정한 상태에 그냥 머무르고 청정한 상태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걸 갖다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맛제 쩨노 가에사시 우빠 산또 짜 릿사-시" 그렇게 나옵니다.
"현재에 있어서 만약 어느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그대는 우빠산띠의 상태로서 계속 수행해나갈 것이다."
사띠를 유지한 상태에서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면 사실은 그게 우빠산띠입니다. 그게 부처님의 경지의 상태고.
그 상태로 계속 수행해나가면 되는 거라. 수행처에서 마음이 고요하다, 삼매에 들었다, 아니면 지금 내가 수행이 잘 돼놔가지고 그냥 열반과 같은 마음들이 일어났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 몸을 지니고 있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계속해서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설혹 그게 우빠산띠의 상태라고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거에 머물러 버리는 순간 우빠산띠는 깨져버립니다.
왜? 아직 도와 과를 통과해서 아라한이 되기 전이기 때문에 가짜였거든. 가짜로 내가 해탈하고 가짜로 내가 열반을 체험한 거였거든. 그래서 계속 수행을 안 해나가면 그냥 그냥 깨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우빠산띠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냥 고요한 사람이나 평화로운 사람으로서만 생각을 하지 말고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계속적으로 살아 나가야 되는 거라.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된다는 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 경에서는 이 우빠산띠(upasanti)를 오온의 소멸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걸 완전하게 이 몸을 버린 무여열반의 상태와 같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온의 소멸이라는 것은 오온을 집착하고 있는 상태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아 이것은 느낌이구나만 알아차리고, 아 이것은 상카라하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아 이것은 몸이구나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거는 오온이 소멸된 상태입니다. 분해돼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이 우빠 산띠에 해당된다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의 대상들을 자꾸, 나중에는 쪼개지고 빨라지게 되도록 됩니다. 그럼 그거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은 그런 것이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인제 스님이 태국을 갔다 오고 나면은 3월 셋째 주 토요일날 아마 법회가 시작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 그래도 열심히 좀 공부할 수 있도록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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