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8SZKNcMfqXA?si=YSh8XxDSCgRqI_XI
* 열반에 이르는 7청정(七淸淨)의 로드맵(2부)-심청정(2025.04.26) 아짠 빤냐와로
"위빳사나 수행에서 4선정까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은 두 번째 시간, 심청정이죠. 마음의 청정인데, 마음의 청정은 뭘 얘기할까요?
마음이 깨끗한 거? 뭐 그걸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사마디(samādhi)를 얘기합니다. 삼매. 불교 경전에서 삼매에 대한 얘기들을 부처님이 참 자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요성을 많이 얘기를 했죠.
삼매에 들어본 사람 있어요? 유사하게는 들어봤겠지.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삼매에 들지를 않죠?
계속 변하는 것들을 봐야 되기 때문에 삼매에 들 수는 없습니다. 1선정까지는 가능하죠. 1선정은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려가지고 거기에 딱 고정돼 있다시피 해서 대상이 변하는 것들을 그대로 보면 일선정이 되기 때문에.
사실은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심청정은 그 1선정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이제 사마타 수행에서는 4선정까지 다 해야 됩니다.
뭐 어쨌든 1선정에서 끝나든 4선정까지 가든 어쨌든 선정이 되게 중요하다는 거는 틀림없는데, 왜 부처님이 강조했을까?
이 칠청정을 얘기를 하면서까지 심청정을 왜 얘기해 놨을까?
보통 인간들은 집중 잘 못하겠죠. 집중해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 보면 마음이 오만 데 다 돌아다니고 있거든. 몸은 여기 있지마는 집중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사띠하는 것도 자꾸 끊어지고, 그리고 사띠가 끊어지니까 당연히 이제 도와 과를 이루는 건 더 힘들어져 버리게 되는 거죠.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에서는 1선정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위빳사나에도 자나(Jhān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1, 2, 3, 4 자나(jhāna)까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게 가능할까? 사마타 수행에서의 1, 2, 3, 4 선정하고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는 위빳사나 선정이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1선정은 보통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 심사)
음, 심사(尋伺), 또? (수행자 대답 : 끊어지고...)
심사가 끊어져? 심사가 뚜렷해야 되지!
쉽게 말하면 여기 이렇게 진동하는 볼이 있다. 그럼 요걸 갖다가 잘 잡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손을 요렇게 딱 가져가가지고 요놈 볼을 갖다가 딱 잡고 있어야 되겠죠. 그리 해도 안에서는 이렇게 막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잘 이렇게 힘을 조절을 잘 해야 되지, 안 그러면 꽉 잡아서 못 움직이게 한다든지, 그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빠져나가 버린다든지, 이렇게 돼버리죠.
그래서 여기에 움직이는 볼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거기에다가 손을 갖다 잘 가져다 대는 걸 '심(尋, vitakka)'이라 그러죠.
그러면 탁 가져다 댔는데 한 번만 하는 게 아니고, 요 그대로 계속 있어야 되죠. 그러면서 이게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손도 약간씩 움직여 줘야 되고, 그걸 인제 보통 '사(伺, vicāra)'라고 그럽니다.
심사(尋伺)만 있으면은 적어도 움직이는 볼은 내가 자유롭게 제어는 할 수가 있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 이거 잘 내가 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을 거 아니라. 그래서 기쁨이 일어나지게 되는 거고. 그러면서 그 속에는 다른 것들을 또 생각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심사가 끊어져 버리면서 이게 튀어나가 버리게 되죠.
그래서 여기 하나의 대상에만 계속 매여있게 되는 형태가 되게 됩니다. 사마타(samatha) 수행이든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든지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주부들 많으니깐 그릇 닦을 때 딱 생각하면 됩니다. 그릇 잘 잡아야 되고, 한쪽 손은 잘 닦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하면 그릇을 깰 수가 있거든요. 안 그러면 잘 안 닦이든지. 이게 심사라고 보면 됩니다. 잘 닦인 걸 갖다가 마지막까지 딱 확인하고 나면 ‘아, 기분 좋다’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라.
그거 할 동안에는 마음은 어떻게 돼요? 집중 잘 되어 있는 상태고, 가끔씩은 습관 들다 보면 막 분노가 일어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보면 그거 할 동안에는 그래도 좋은 마음들을 가지고 그냥 그 좋고 싫고를 떠나서 그것들을 그냥 하게끔 되는 거죠.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심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몸으로 치면 계청정과 마찬가지로 심청정은 '양 발과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양 발이 있어야 잘 걸어가듯이, 심청정만 있어가지고는 안 되고, 계청정만 있어가지고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탐, 진, 치라고 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상태가 마음이 깨끗한 상태가 된다는 거라.
계로 인해서 탐, 진은 눌러둘 수 있을지 몰라도 치까지 할 수가 없어. 그리고 탐, 진을 눌러둘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들이 튀어나오는 것들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그래서 계를 지킬 때 용을 쓴다고 그러죠. 용을 쓰는 이유가 튀어나오지 못하게끔 하는 거라.
근데 만약에 마음이 탐심과 진심은 아예 안 일어나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될까?
이게 없어지진 않았는데, 이것들이 튀어나오는 것들은 안 한다는 거라. 내가 화내는 마음이 없는데 화를 낼 수는 없죠.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발의 양 발과 같다. "계청정과 심청정은 양 발과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계청정이 어느 정도 돼야만이 심청정이 가능하죠. 그리고 그다음에 견청정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칠각지도 마찬가지고 칠청정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이 말하는 수행의 단계는 점진적인 것이지, 한 번에 팍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계청정 심청정을 뛰어넘어서 깨달음을 이뤘다’, 그래서 가끔씩 한국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무위도인 어쩌고’ 하는 분들 있죠? 막행막식하는데 ‘나는 도인이다’ 하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냥 그거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무위를, 막행막식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도하고는 멀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계청정으로 어느 정도 억제할 건 억제하고 생활할 건 잘 생활하면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어 나갔을 때 마음도 깨끗해지는 상태를 만들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심청정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그러냐 하면, 마음만 먹으면 마음은 청정하게 할 수 있는 것 같거든. 근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수행자 대답 : 100% 불가능합니다.)
100% 불가능해요? 그 황 회장님이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해야지 뭐.
그래서 한번 봅시다. 지금은 사마타 수행을 설명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 4선정까지 어떻게 가능할까?
근데 아까 처음에 얘기했죠. "위빳사나 수행은 1선정에서 끝난다."
어떠한 경우든지 위딱까, 위짜라(vitakka, vicāra : 尋伺) 라고 하는 것은 4선정까지 가더라도 그게 지속적으로 있게끔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아, 잠깐만 저번에 숙제 내준 거 있죠. 그 호흡 누가 관찰해 온 사람 있어요? 얘기해 봐요.
(수행자 대답 : 매일 그냥 호흡을 보고 변하고 사라지는 거 보고, 그냥 사띠를 한 1시간 정도..)
그 변하고 사라질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든가 하는 걸 얘기를 해야 ‘아, 수행했다’ 하고 얘기가 되는 거지, 뭐 ‘나 이래 했다’ 하면 그걸 누가 믿을 수 있나.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어요?
(수행자 : 특별한 현상은 일어나지는 않는데 그냥 차분해지고...)
대상이 그대로 그냥 호흡만 알아차리고 있던가요? 생각 안 일어나고?
(수행자 : 잘 안 일어납니다.) 잘 안 일어나고, 가끔씩은 일어나고?
만약에 수행을 해나가는데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면 호흡만 계속 관찰되는 사람은 참 드물죠? 근데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그냥 ‘들이쉼, 내쉼’으로만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으로 빠지는데, 들이쉬고 내쉴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면서 그것들이 변하는 것들이 보인다고 할 것 같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정확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으면 이 변하는 것들이 보여집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아, 똑같은 것은 아니네’, 조금 전에 들이쉬던 호흡하고 그 뒤에 다시 또 내쉬고 나서 다시 들이쉬는 호흡은 ‘이게 똑같은 것은 아니네’ 하고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럼 그 사람은 적어도 제1선정에는 들은 상태입니다.
그거는 충분히 가능하죠? 여러분들.
근데 그 짧은 찰나지만 3점 몇 초에 들이쉬고 내쉬고를 하는데, 그 뒤에 다시 들이쉬고 내쉬고를 하려면 한 7초 정도는 그 대상에 머물러야 되는데, 가능할 것 같아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근데 적어도 그 정도 7초까지는 마음이 딴 생각 안 하고, 망상 안 하고, 다른 대상 눈에 눈 뜨고 있어도 보이지도 않고, 그냥 호흡이 변하는 것들만 보인다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진짜 잘하고 있는 것이죠.
(수행자 질문 : 제가 할 때 귀도 막고 눈에 안대도 하고 하거든요. 호흡만 볼려고...)
뭐 할라고? 그 무문관 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 : 들어오는 것까지도 그러면 그냥 둔 상태에서 하는 게 좋을까요?)
그럼요. 장애를 가져올 수 있는 대상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들을 돌파했을 때 힘은 굉장히 커집니다. 근데 장애를 다 제거해버리고 나면 무문관에서는 깨달음을 이룰지 몰라도, 문을 나오자마자 그냥 깨져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렇게 한 7초 정도만 할 수 있다. 또 예를 들면 걷는 데서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또 뒤에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것도 보통 한 7초 정도 걸리겠죠.
그럼 앞발을 들 때 느낌하고 내릴 때의 느낌하고는 ‘어, 틀리네’, 또 나아갈 때 느낌하고 내려놓을 때의 느낌하고 틀리네, 내려놓을 때도 이만큼 내렸을 때의 느낌하고 가까이 땅에 닿았을 때의 느낌하고 틀리네, 하는 걸 알고 있는 상태가 된다, 오로지 그것만 알고 있다, 그래서 쭉 가다가 벽이 있으면 벽이 있는 줄도 모르고 퉁 부딪쳤다, 수행 잘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1선정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 마음은 어떨까?
(수행자 : 청정합니다.) 물론 청정은 하겠지 당연히.
근데 청정한 것보다는 ‘어, 내가 이거 했어’ 하는 마음 때문에 되게 기쁩니다. 되게 기쁩니다. 예. 그래서 몸이 어떨 때는 부르르 떨리기까지 할 정도가 됩니다.
그 짧은 7초인데 그거 못해? 간단하잖아.
그걸 '삼마사나 냐나(sammasana ñāṇa)'라고 그럽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든, 왼발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든, 뭔가를 대상에다 마음을 딱 밀착해가지고 그걸 있는 그대로 딱 보면서 그게 변하는 성품들을 갖다 분명하게 봤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제1선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에게는 그 짧은 7초 동안 할 동안에 마음에서는 굉장히 뿌듯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게 전체를 휘감아 버려가지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까먹어 버리는 경우들이 거의 태반입니다. 그정도는 돼야 됩니다.
그래서 삼마사나 냐나는 이해가 되죠? 그리고 1선정도 어떤지는 대충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에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보니까, 똑같은 3.3초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하는데, 들이쉬는 호흡에서 변하는 것들을 봤기 때문에 그 변하는 것이 빠르게 변하는 게 보인단 말이라.
들이쉴 때 뭔가 파도가 치듯이 툭 툭 툭 툭, 이렇게 한 다섯 번 치는 걸 봤다. 내쉴 때도 툭 툭 툭 툭, 툭툭툭 한다는 거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파도가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되듯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한 5번 봤다.
그럼 아까보다도 훨씬 많은 진전이 있는 상태라는 거라. 아까는 분명히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다르다는 걸 비교하는 것이 앞의 호흡하고 뒤의 호흡하고 틀리다는 걸 알았는데, 이제는 한 호흡에서 이미 변하는 현상들을 보게 되는 거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게 보이게 되는 거라.
이게 속도가 빠르면 얼마나 빠를까? 여러분들 마음이 변하는 걸 얼마나 많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셀 수도 없습니다. 셀 수도 없습니다. 나중에는 주체 못할 정도로 이게 빨라지거든.
그럼 적어도 한 호흡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변하는 걸 이번에는 한 5번 정도 봤다. 그럼 계속 하다 보니까 내일은 또 한 10번 보여진다, 그러면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거라.
속도가 빨라지면 기쁠까? (수행자 : 정신없을 거 같습니다.)
정신없습니다. 기쁨이 언제 일어날 시간이 있어? 그런데 몸은 편안하거든. 마음만 바쁘지 몸이 바쁜 게 아니거든. 몸은 똑같아요. 호흡하는 거, 걸어가는 거, 똑같은데 마음만 바쁩니다. 그러면 마음은 기뻐하는 현상들은 아예 일어날 새가 없어집니다.
그럼 기뻐하는 게 탁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그냥 편안합니다. 마음도 그냥 그거 5번이면 5번 그냥 알아차리는 거고, 10번이면 10번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라. 점점 더 빨라지면 빨라지는 대로 그걸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라.
왜? 집중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은 적어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변하는 성품들에서 한 단계 더 뛰어넘은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게 보통 "위빳사나 수행에서 2선정에 도달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 질문 : 삐띠, 수카 했을 때 삐띠...)
삐띠(pīti)를 넘어선 상태가 되는 거죠. 삐띠는 1선정에서 일어나지는 거고.
(수행자 질문 : 스님, 사유와 숙고가 사라지는 순간이 1선정에서 사라지고..)
안 사라집니다. 사유 숙고가 있습니다. 위빳사나에서는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게 보이면 마음은 되게 평화로운데 어떤 착각을 하게 될까?
빠른 게 보이는데 수월하게 볼 수 있어. 수월하게 볼 수 있어요. 그럼 어떤 상태가 될까? 대부분 착각하는 게 (수행자 : 도인 된 기분인가요?)
그렇죠. 도인 된 기분. 다른 사람들은 못 보던 것들을 나는 아주 수월하게 볼 수 있거든. 다른 사람하고 나는 틀린 거라. 그래서 도인 된 느낌이 탁 드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끊임없이 그렇게 빠르게 변해도 그걸 다 보고 있으니까, 보는 데도 마음은 아주 편안한 상태니까, 그래서 자신이 도인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게 인제 보통 제2선정, 위빳상나 수행에서 제2선정입니다.
근데 여기서 탁 끝나버리면 지가 도인이 되는데 안 그렇거든 이게.
근데 이게 호흡을 관찰하다 보니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게 보이는 게 아니고, 더 빨라지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못 따라갈 정도가 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따라가지는데, 못 따라갈 정도가 되면 어떻게 될까?
그냥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일어나는 것은 아예 보려고 해도 안 보이고, 그냥 계속 사라져. 계속 사라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뭐든지 일어났으면 사라지는 건데, 일어나는 것도 없는데 무조건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예를 들어서 뭔가 생각이 일어났는데 그 생각이 뭔지는 모르는데 마음속에서 팍 불이 나가듯이 탁 꺼지는 게 보인다, 그게 이제 '사라지는 것만 보인다'는 거거든요.
근데 그거는 분명히 뭔가 일어났기 때문에 사라진 건데, 일어나는 거는 내가 보지 못한 상태가 되는 거라. 아까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겠죠. 진행이 되는데 마음은 사라지는 것만 보이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은 여러분들 보고 만약에 계속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할 것 같으면 마음이 어떨 것 같아요?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조금 전에는 도인이었는데, 도인이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리면 그게 말이 될까? 그거 말이 안 되죠. 근데 어쨌든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데,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는 거라. 빠르게 휙휙 휙휙 사라져.
그렇게 되면 처음에 사라질 때는 굉장히 두렵고 벗어나고 싶고 고통스럽고 합니다.
그리해도 계속 볼 것 같으면 결국은 난 아직 안 죽고 있거든. 호흡하고 있거든.
단지 나는 호흡을 관찰하는데 계속 사라짐만 보이는 것뿐이라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편안하게 그냥 그 호흡을 보게 되는 거라. 사라짐이 아주 빠르게 진행돼도 그냥 그걸 보게 되는 거라.
그러면 이제 마음이 조금 전에 있었던 1선정 2선정에서 있었던, 기쁘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하는 그런 것들은 아예 없어져 버립니다. 그냥 고요합니다. 아예, 수카(sukha)를 넘어선 상태. 그래서 아주 고요한 상태가 돼버립니다.
이게 "위빳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3선정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지는 것도 지가 한계를 지니겠지, 계속 사라지기만 하겠어요? 사라지는 게 빠르게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안 보여버립니다. 대상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미 사라짐을 경험할 때 돼서는 몸의 느낌이나 이런 것들은 이미 사라지는 상태에서 마음만 지속적으로 계속 사라지는 게 보였는데, 이제는 마음조차도 못 찾게 되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탁 돼버립니다.
사띠는 분명히 하고 있는데, 뭔가를 대상이 있어야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데, 숨도 점점 느려졌고 가늘어지면서 숨도 그냥 거의 끊어져 버린 상태가 되고, 마음도 그걸 관찰하는 것이 빠르게 변하다가 사라짐만 보이다가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럼 마음이 뭐할까? 마음이 뭐 해야 돼요, 그러면?
(수행자 : 마음이 텅 비어있어서...)
텅 비었으면 뭐가 돼요? (수행자 : 사념처를 해야 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려 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대상이 없으니깐 그냥 무기 상태로 멍하게 수행하다가, 1시간 동안 수행 열심히 해가지고 잘했는데, 1시간도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홱 지나갔다. 그렇게 보통 사람들이 얘기하니까 ‘저 사람은 삼매에 들었다’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서 대상하고 오롯하게 한 몸이 되어 있으니까 대상 자체가 없어져 버린 상태로 그냥 있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거는 쉽게 말하면 그냥 대상 자체를 잃어버리고 게으름에 빠져서 1시간 동안 그냥 잠잔 것과 마찬가지 상태로 있은 거지, 대상 자체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사마타 수행에서는 대상이 사라져버리는 때가 있는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이 없는 상태는 없습니다.
단지 대상이 뭐가 될까?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그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 아니라.
그 마음이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때는 진짜 그냥 적막강산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내 몸도 없고 마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런 상태로 있다는 마음만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그걸 보통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4선정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나누면 이렇게 위빳사나 수행도 사마타 수행과 마찬가지로 1, 2, 3, 4선정이 있습니다. 그 대신에 대상이 없었던 때는 없죠! 그리고 위딱까 위짜라가 없었던 때는 없죠! 어떠한 경우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 대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얼마만큼 일치해 있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청정해진 상태로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으로 올라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1선정 때는 아까 얘기했죠. 무상한 성품을 보는 상태. 그러니까 변하고 있다는 걸 갖다가 보는 상태.
그럼 2선정에서는 어디까지 올라갔을까? 위빳사나 수행에서. (수행자 : 기쁨을 넘어서서) 예.
2선정에서는 변하는 것들이 보이거든. 변하는 것들이 보이는 게 빠르게 변하고 있거든.
그러면 그걸 '우다얍바야(udayabbaya-ñāṇa)'라고 그럽니다. 생멸하는 게,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자 : 그걸 생멸지라고 그래요?) 그렇죠. '생멸지'.
2선정하고 3선정하고 생멸지는 똑같습니다.
근데 2선정에서는 생멸지가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는 상태가 되는 거고, 3선정에서의 생멸지는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2선정까지는 빠르게 변하는데 마음을 거의 많이 기울인 상태가 됩니다. 거의 자동화되다시피 했지만은 내가 관찰하기 싫으면 관찰을 안 할 수가 있는데,
3선정부터는 자동화해버립니다. 모든 일어나는 것들은 자동적으로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알아차려서 알아차리면 그것들은 생멸하는 것들, 빠르게 생멸하는 것들이 보여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3선정까지가 우다얍바야 2선정하고 3선정하고 똑같은데, 2선정하고 3선정하고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보통 부처님이 아침에 탁발 나가셨죠. 돌아와 가지고 법문하고 또 오후 되면 또 재가들한테 법을 설하고, 그때 사띠는 분명히 하고 있었겠죠.
그러면 자동화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는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법을 설하고 할 것 같으면 뭔가를 생각해가지고 법을 설해야 됩니다. 그래야 말이 조리가 있게끔 됩니다. 근데 3선정이 넘어가 버리면 자동화 돼버리는 거라. 이미 법을 설하는 것이 내가 법을 설하는 걸 인식만 하고 있어도 자동적으로 법을 설해지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자 질문 : 거기서는 우리가 보통 말을 하고 법문을 한다고 그럴 때 항상 자신의 의도가 개입이 되는데, 그런 상태가 되면은 의도와 관계없이...)
아니요. 의도는 어떠한 경우든지 있습니다.
의도가 있지 않으면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의도를 내고 말을 하고 하는 것들이 일체화돼서 바로 그냥 말을 내가 뭔 말을 하게 되는 걸 인식하면서 바로 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게 아니고, 오직 현재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를 하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에 그 우다얍바야를 지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굉장히 고통스러워진다고 그랬죠. 수행하기 싫어지고. 그래서 단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아니면 탈출해야 되겠다, 아니면 수행 때려치고 싶다. 이런 단계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이 단계를 다 밟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특정한 것들만 두드러지게 밟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공포지', 그다음에 '혐오지'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됩니다. 순차적으로 일어나지게 되고, 그것들이 관찰되지 않고 다른 혐오하는 마음이 커지면 혐오하는 것만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포기하려고 하는 마음까지도 일어나게 됩니다.
근데도 계속적으로 소멸하는 걸 보니까 어떻게 돼요? 나중에는 딱 그것조차도 정지되어 버리죠. 대상은 분명히 있는데, 그 알아차리는 마음이 대상이 되는 데도 마음은 흔들림이 없이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그걸 '행사지'라고 그럽니다.
"상카루뻭카 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그게 제4선정"에 들어갑니다.
여기까지가 되고 나면은, 적어도 이제는 어떤 조건이 오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 거라. 밖에서 나를 칭찬하든 욕을 하든 뭐, 오늘도 우리 선원에서 공양을 차려줬는데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아 가지고 밥을 반을 남겼어요. 그러니까 나는 내 상태 보고 밥을 반을 남긴 건데, 이 사람들은 걱정이 돼 가지고 “스님, 우리가 공양을 뭐 잘못해가지고 맛이 없었습니까?”
나는 맛보고 먹는 게 아닌데, 이걸 다 먹을 것 같으면 내가 소화를 못 시키고 힘들 것 같아 가지고 나는 반을 남긴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요 모습을 보는 거라. 쉽게 말하면 외부적인 자극이나 조건들로 인해서 흔들리는 마음이 생겨나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행사지까지 딱 도달하면 그런 것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아니면 밖에서의 자극이든 그것에 관계없이 평온한 상태를 그냥 그대로 유지를 해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크게 고함 지를 일도 없고 마음에서 탐, 진이 일어나는 일은 아예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거라. 누가 뭐 10원을 보시를 하든 누가 100원을 보시를 하든 똑같이 내 마음은 보시한 사람들에 대해서 ‘행복하고 빨리 깨달음 이루기를’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가 되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남편이 오늘부터 직장을 그만두었다 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래도 이런 마음들을 지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불교를 배우는 이유가 이런 수행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접목되기 때문에 "일상생활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은 열심히 잘하는데 집에가서는 영 엉뚱하게 한다, 그러면 수행 그건 못한 거라. 그거는 수행한다고 폼을 잡았다가 간 것이지, 수행을 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잘했으면 수행을 잘한 만큼 집에 가서도 내가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하나를 배웠으면 하나를 반드시 실천하게끔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실천되지 않는 배움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를 배우고 하나를 이해를 했으면 반드시 나는 그걸 실천하게끔 되기 때문에.
자,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1선정과 4선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이 전체가 다 심청정의 영역에 속합니다.
충분히 삼매에 들지 않고도 선정에서 누릴 수 있는 효과들은 충분히 위빳사나에서도 가져올 수가 있죠.
그런데 사마타 수행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수행자 :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 그렇죠.
산만한 사람들, 잘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근데 나이가 70, 80 다 되어 가는데 언제 그거 하고 있나?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으킬 수가 있어야 됩니다. 경각심이 없으면 70, 80이 돼도 사마타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당장 숨 쉬고 할 때 언제 이 숨이 탁 끊어질지 모른다는 경각심이 탁 일어나는 사람이면은 아무리 산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로 위빳사나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마타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경전 곳곳에서 사마타 수행의 이익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해놓은 겁니다.
그리해도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 사마타 수행에서의 삼매의 효과들을 충분히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자꾸 할 수 있도록 하면 적어도 마음의 청정은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마음의 청정을 얻고 나면 수행에 그래도 일정 단계까지는 올라서는 상태가 됩니다.
일정 단계라는 것은 뭘 의미할까? 떨어지지 않는 상태!
다시는 이것 말고 딴 거 하고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냥 요거 그냥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립니다. 적어도 그렇게는 해야 되지 않을까요?
부처님 제자인데, 부처님이 가르친 것들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해가지고 내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은, 오늘 죽어도 그래도 내가 나쁜 마음 안 먹고 쭉 살아왔기 때문에 적어도 윤회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라는 거라.
설혹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못 믿겠다’ 한다고 하더라도 이생에서 잘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호흡을 관찰하면서 죽을 수가 있다는 거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가 있다는 거라.
수행은 이익이 굉장히 많은 것들입니다.
단순하게 그냥 절에 가서 보시하고 내 몰라라 하고 그냥 내려오고, 그렇게 해서 나는 불교 믿는다 하고 얘기를 하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 그게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는 길이라는 걸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심청정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공부한 것들을 조금씩들 확인들을 해야 되는데 공부들을 안 해오는 건지, 하나만, 적어도 견청정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하나만 한번 해보십시오.
집중하는 힘이 부족하다, 그럼 이렇게 마음을 먹으십시오.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는 데까지는 내가 반드시 알아차리고 있겠다.'
그냥 들이쉬는 걸 알고 내쉬는 걸 알고 들이쉬는 걸 알고 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서 그때까지는 적어도 생각이나 망상하지 않고 다른 거 뭐 보이고 하는 것들을 아예 신경 쓰지 않고, 그것만 오로지 마음에 두겠다 하는 마음으로 한번 해보십시요.
집중력이 커져야만이 위빳사나 수행에서 심청정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꾸 해보십시오.
또 하나는 뭐냐면 '지금 여기, 지금 여기에만 머문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호흡에만 머물러라는 거라. 호흡 들이쉬고 있다, 들이쉬는 것만 알아차리려고 해보라는 거라.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이 저기 가 있으면 안 돼요.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하면 호흡을 알아차려야,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거.
걸어가고 있다 할 거 같으면 걸어가는 데만 알아차려야 되고,
발을 왼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뒤뚱뒤뚱하지 않을까?’ 요딴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라. 들어 올리는 데만 마음을 두라는 거라.
내려놓으면 내려놓는 데만 마음을 두어야 되는 거지, 힘을 갖다 조절해갖고 분배해 갖고 ‘이쪽에 반 가고 이쪽에 디디고 있는 발에 반 가고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냥 내릴 때는 내려놓는 데만 마음을 두라는 거라.
스님 말대로만 하면은 적어도 지금 여기에만 머물고 있을 것 같으면 절대 안 뒤뚱거려집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적어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집중하는 힘들도 커지고, 집중하는 힘이 커야만이 대상을 사띠하는 힘들도 커집니다. 요건 할 수 있겠죠? (예)
그거는 반드시 하고,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얘기를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근데 자꾸 숙제 주면 자꾸 안 나오던데. 그래도 자꾸 와서 한 자라도 듣는 게 여러분들한테는 이익입니다.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질문 있습니다.
명상을 하는데 시간을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편할 대로 하는 게 좋습니까? 하다 보면 몸도 아프고, 그럴 때는 시간을 정해놓으면 시간을 맞추려고 하다 보면은 몸도 극복하기 힘들고 또 지겨울 때도 있고 이럴 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본인이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서 틀려지는데요, 대부분 처음 수행할 때는 딱 시간 정해놓고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은 계속 게을러지게 되거든요. 무슨 핑계를 대든지 안 할려고 하게 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저녁에 자기 전에 한 시간' 이렇게 만약에 정해놨다, 그러면 그거는 철석같이 지키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물론 앉아 있으면 하기 싫고 하니까 오만 게 뒤틀리고 막 고통스럽고 하겠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있으라는 거라.
(수행자 질문 : 몸이 되게 아파가지고 못 견딜 정도로 그러면 그 상태를 조금 풀고 하는 게...)
아니요. 하지 마십시오. 스님도 고통스러운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3일 동안 안 움직이고 딱 몸 묶어놔 놓고 있어 봤는데요, 다리 병신 안 되더라고. 걱정하지 말고. 그냥 움직이지 말고 그냥 해보라는 거라.
그걸 극복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감이 더 훨씬 큽니다.
그래서 병신 안 되고 안 죽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쥐가 나고 뭘 하더라도, 망상이 떠오르고 하더라도, 안 일어난다 생각할 것 같으면 일어나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하라는 거라.
(수행자 질문 : 쥐가 딱 일어날 때 이렇게 쥐가 타고 가는 것도 보이더라구요. 그럴 때 그냥 보고만 있어야 됩니까? 알아차리면서...)
그렇죠. 사실은 쥐가 타고 가는 게 아니고 여기 일어나는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렸고, 그다음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렸고,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일어난 자리에서 반드시 사라집니다. 사라져야만이 그다음 것들이 일어납니다. 근데 이걸 못 보니까 사람들이 자꾸 쥐가 타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래요. 그거는 명확하게 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
실제로는 일어난 자리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조금 더 내가 집중을 해가지고 그놈 한 놈만 한번 본다 생각하고 한번 그 자리를 딱 보라고. 그러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그러면 쥐가 타고 가는 게 아니고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해보십시오.
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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