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괴로움 - 윤회의 밑바탕 (20140408)

담마마-마까 2020. 12. 8. 13:11

https://youtu.be/JJio43ILYsQ

* 괴로움 - 윤회의 밑바탕 (20140408)

 

우리가 보통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선한 일을 짓기도 하고 악한 일을 짓기도 합니다. 시계의 균형추와 같이 있으면서 어느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이걸 보통 '마나시까라(manasikāra)'라고 그럽니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 이쪽이든 또 이쪽이든.

그래서 사실은 선하고 악한 일을 짓는 것들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이 '마나시까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갔다가도 반대로 돌릴 수는 있지만 참 힘이 듭니다. 대부분 한쪽으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방향으로 계속적으로 쭉 일어나서 그 행위들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그것으로 인해서 행위들을 지었으니까 지은 만큼 다시 결과들을 받아야 되니까 계속적으로 뺑뺑이를 돌게 돼있습니다.

 

행위를 짓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마나시까라 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윤회하는 밑바탕은 뭘까? 뭐 경전에서는 물론 무명이 원인이 되어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12연기를 얘기합니다.

 

윤회하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괴롭지 않으면 윤회를 안 합니다. 쉽게 말하면 안 괴로우면 됩니다. 호흡도 계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은 괴롭기 때문에 호흡을 계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밥을 제때 제때 먹는 것도 괴롭기 때문에 밥을 먹습니다. 물론 한번 먹고 몇시간 후에 또 한번 먹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보면 끊임없이 영양을 보충하는 겁니다. 한번 먹고 나서 그걸 가지고 계속적으로 쓰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부족하면 또 집어넣어야 되는 거고, 집어넣어야 되는 것은 안 넣으면 괴로우니까. 그래서 몸도 영양을 그렇게 보충을 해야만이 몸도 유지가 돼나가듯이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마음도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내고 생각을 해야만이 마음이 살아있게 됩니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괴롭기 때문에 망상을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괴롭지 않으면 망상 안 합니다. 편안한데 왜 망상을 하겠어?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을 가만히 뜯어놓고 보면 그 생명이 유지되도록 해서 계속적으로 윤회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윤회를 한다"하고 그렇게 쉽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물론 사는데 괴로움만 있겠어요? 즐거움도 있고 하지. 그런데 그 조그만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괴로운 시간들 괴로운 것들이 있어야지만 조금의 즐거움들을 얻게끔 됩니다. 오늘 한끼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몇시간 동안의 노동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집에서는 준비하는 기간들을 거쳐야 되는 것이고, 마치고 나서는 설거지 하는 시간을 거쳐야 되는 것이고, 그 모든 시간을 다 더하면 먹는데 일으키는 그 즐거움은 괴로운 것들 하고 비교가 될 정도로 짧습니다.

즐거움이 많을 거 같으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라. 괴로움이 작고 즐거움이 많을 거 같으면. 그런데 괴로움이 그거보다도 훨씬 많기 때문에 비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괴로움이 없다고 하면서 또 자기를 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즐거운 일이 많느냐, 괴로운 일이 많느냐 할 것 같으면 실제적으로는 괴로운 일이 훨씬 많았는데도 즐거운 게 많았다고 얘기합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속여버린 상태가 됩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 몸을 유지해주고 마음을 유지해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양분이 있기 때문에 유지가 돼나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극이 없으면 유지를 해나가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뭔가가 자극이 있어야만이 유지를 해나갑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이런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주 갑갑해합니다. 자극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그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영양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극이 영양분으로써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보고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즐겁다고 얘기를 하는 거고, 그리고 맛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고, 아름답다고 얘기를 하는 거고, 그리고 자기의 가치판단들을 세우는 것이고.

 

간사한 것들은 이런 자극이 사실은 끊임없이 유지를 해줘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데도 이것을 영양분으로 자꾸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한쪽으로 습관화돼버립니다.

마약하는 사람들은 마약이라는 자극이 없으면 괴로워서 못사는 거라. 술 먹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술을 안 먹으면 괴로워서 힘들어하는 거라.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빼먹으면 괴로워서 못견뎌 하는 거라. 자기 성향에 따라서 그것이 습관화돼버렸다는 거라. 자극한 것들에 따라서 습관은 형성이 돼나갑니다.

 

그게 자극하는 것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만 자극이 있겠어요?

의(意)라고 하는 것도 자극을 해서 습관화돼버립니다. 망상하는 것도 어떤 방향으로 망상할 거 같으면 그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는 좋은 방향으로 계획을 세운다고 할 거 같으면 살아가면서 만날 뭐가 있으면 실제적으로 뭘 할려고 하지 않고 부푼 꿈을 꾸어가지고 계획만 자꾸 합니다. 머릿속에서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 계속합니다.

 

왜 이게 나쁜 습관들로써 형성되고, 좋은 습관들로써 형성되는 줄 뻔히 알면서 이걸 바꾸질 못할까?

습관으로 형성되어지면 참 안 바뀝니다. 그거는 안 바뀌는 게 아니고 바뀔 생각이 없다는 거라. 끊임없이 나는 자극을 구하고 있고 몸이든 마음이든 그런 자극들을 끊임없이 구하고 있기 때문에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라. 그러면 자기가 지금 형성되어 있는 습관들을 바꿀려고 할 것 같으면 자극해지는 것들을 없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맛있는 걸 찾아 먹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먼 곳이라도 찾아 먹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나쁜 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것을 찾아다니질 않습니다. 고기 먹는 습관이 들은 사람들이 어디로 어디로 맛있는 고깃집이 있다면 찾아다니다가 그 고기가 아주 몸에 나쁘다고 하고, 혹은 자기가 그걸 먹고 몸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을 경우에는 다시는 그 고기를 찾으러 안 다닙니다. 그렇게 됐을 때는 그 자극을 구할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러기 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 자극에 따라서 움직여진다는 거라. 자극이 없으면 괴롭기 때문에. 그런데 고기를 안 먹어보니까 몸이 편안하고 괜찮거든. 그러면 고기는 그 뒤부터는 안 찾게 되는 거라. 찾아도 조금만 찾게 되는 거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져 버릴 것 같으면 그런 습관지어진 것들은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습관지어진 것을 못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고칠 수 있는데 자기가 고칠 마음이 없는 거라. 마음이 없으니까 끊임없이 그 자극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는데 누구든지 죽는 줄 알면서 죽기 싫어합니다. 태어난 이상은 죽게 돼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안 죽을 것처럼 생각을 하게 돼있다는 거라. 생존할려고 하는 욕구는 어떤 생명체든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생명체도 생존하고 싶은 욕구는 가지고 있습니다.

왜?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 보는 것만 하더라도 그 죽음이 오는 공포심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존욕구는 죽음의 공포와 같이 맞물려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어떡하나? 그렇게 죽음이 공포스럽고 살고 싶어 한다고 하더라도 죽게 돼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걸 못 받아들이는 거라. 그러니까 더 살려고 하고 남의 것을 가져와서라도 내 몸에 넣어서 생명을 연장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은 그와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것인데, 그것도 생존욕구도 꼭 마찬가집니다.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더우 건강해질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더욱 더 젊어질려고 하는 거고, 죽지 않고 살려고 한다는 거라.

괴롭지 않을 거 같으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거라. 괴롭지 않으면 늙는 거 그냥 받아들입니다.

 

다리가 찢어져 가지고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게 그렇습니다. 이건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괴로움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크게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이 괴로운 것이지. 그럼 편한 상태에서 그냥 잠이 들 수가 있는 거라. 괴로움이 있다는 것만 받아들이더라도 생존욕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죽음의 공포로부터는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지 않듯이 괴로운 것으로부터 자꾸 벗어날려고 합니다. 그걸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고. 한번 받아들여 보라는 거라. 자기 몸에 생기는 괴로움들을 아,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겨난 것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자꾸 볼려고 해보라는 거라.

 

그래서 사람들은 더 살고 싶어하는 생존욕구가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자꾸 속일려고 한다는 거라.

건강하지 않는데도 건강한 것처럼 생각을 하고, 아름답지 않은데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자기 자신을 자꾸 감추고 속인다는 거라. 그러면서 지금 현재 내가 먹은 음식이 맛있는 것 즐거운 것이라고, 이 즐거움이 괴로움보다 훨씬 많다고 자기를 속이고 암시를 합니다. 그러니 그게 해결이 되겠어요?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윤회하고 싶어하지 않을 거 같으면 괴로움이 있다고 받아들여라는 거라.

윤회하는 근본 원인은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 실제로 “내가 언제든지 죽음이 와도 좋다” 하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죽음이 올 거 같으면 괴로워하고 공포스러워 한다는 거라. 그 생존욕구도 괴로움으로부터 온다는 거라. 몸의 영양 마음의 영양 이런 것들도 괴로움으로부터 오는 거라. 괴롭지 않으면 그 영양을 끊임없이 보충할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망상을 많이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거라.

 

짓는 행위가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는 것은 마음이 경사되는 것, 어느 쪽으로 경사되는 힘이 강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살아갈 때는 항상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가 일어나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선한 쪽으로 마음이 자꾸 일어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런데 윤회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움에 대해서 분명하게 파악을 할 거 같으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얘기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발견한 진리입니다.

 

여러분들도 윤회하지 않을려면 괴로움을 분명하게 알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기 위해서 '윤회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겪어야 된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들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