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Ⅵ장. 37 조도품 [법문교재]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법[bodhipakkhiyā dhammā 三十七助道]
" 비구들이여, 이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의 개발 수행법은 나에 의해서 매우 잘 설명된 것이며 가르쳐진 것이다. 그러하니 이 수행법을 잘 받아들여 따르고 실천 수행하며 개발하여 감으로써 나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이 세상에 빛을 내게 되며, 나의 제자들의 성스러운 종교 수행 생활이 지속될 것이며, 이로써 자비에 의한 이 세상의 이익됨과 발전을 가져오게 되어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불교 수행법에는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법[bodhipakkhiyā dhammā, 三十七助道]이 있습니다. 수행의 항목 수가 37가지이지만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14가지 덕목이 됩니다.
(1) 사념처(四念處)
(2) 사정근(四正勤), 사정단(四正斷)
(3) 사신족(四神足)
(4) 오근(五根)
(5) 오력(五力)
(6) 칠각지(七覺支)
(7) 팔지성도(八支聖道), 팔정도(八正道)입니다.
[1]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
먼저 사념처를 닦아야 하는 이유는
다섯 가지 지녀야 할 도덕적 행위[(오계)五戒: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음주하지 않는 것]의 확립을 위해서,
다섯 가지 장애[오개(五蓋): 감각적 욕망, 악의,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를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 감각적인 즐거움[오욕락(五欲樂): 눈, 귀, 코, 혀, 몸의 욕락]을 끊기 위해서,
다섯 무더기에 대한 집착[오취온(五取蘊): 몸, 느낌, 지각, 의도, 의식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 욕계(欲界)의 속박(오하분결 五下分結)을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 윤회의 세계[지옥 niraya(니라야), 축생 tiracchānayoni(띠랏차나요니), 아귀 pittivisaya(삣띠위사야), 인간 manussa(마눗사), 천신 deva(데와)]를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에 대한 인색함[거처 āvāsa(아와사), 가족의 부양 kula(꿀라), 소득 lābha(라바), 칭찬 vaṇṇa(완나), 법 dhamma(담마)]을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 상계(上界= 色界, 無色界)의 속박( 오상분결 五上分結)을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 마음의 황폐함[cetokhila: 삼보인 스승(sattha 붓다), 가르침(dhamma), 상가(saṅgha)와 세 가지 배울 것(sikkhā 三學)을 의심하여(ka.gkhati vicikicchati na adhimuccati na sampasīdati), 마음을 기울여 노력하지 않는 것, 함께 수행하는 도반(sabrahmacārin)에게 화를 내고(kupita) 반기지 않는 것(anattamana)]을 끊기 위해서,
다섯 가지 수행자의 마음의 속박[cataso vinibandha: 감각적 욕망(kāma 까마)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함(avītarāga 아위따라가), 자신의 신체(kāya 까야)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함, 물질(rūpa 루빠) 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함, 음식과 세 가지 게으름을 즐기는 것, 계(sīla 실라)와 금기(vata 와따)와 고행(tapa 따빠)과 청정한 수행(brahmacariya 브라흐마짜리야)에 의해 천신(deva 데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 네 가지는 무엇인가?
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한 현상 관찰과 함께 깨어있는 마음, 알아차린 마음, 집중된 마음으로 머무는 것으로
몸이라는 것은 앉고, 걷고, 서있고, 누워있을 때 항상 마음이 지금 현재 상태에 집중되어 알아차리고 깨어있어 자기 자신의 위치가 마음과 함께 있는 것.
느낌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 어떤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느낌의 성질을 즉시 마음으로 하여금 깨닫고 알아차리며 집중하여 느낌의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차고, 더운 것, 부드럽고 거칠은 것, 거칠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느낌.
마음에 대해서는 마음의 상태를 즉시 파악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방황하지 않도록 언제나 몸의 움직임 혹은 느낌, 마음의 움직임 등을 순간순간 포착하여 잠시라도 지금 현재 진행되는 동작이나 느낌에서 떠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느낌과 마음이 곧 함께하는 것.
법에 대해서는 마음과 몸 밖의 경계와 번뇌 등 육근의 대상으로써 물질, 소리, 냄새, 맛, 촉감, 인식 등의 현상이 일어났을 때 마음으로 하여금 관찰하여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대상이 되는 여섯 경계, 즉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총칭의 현상을 파악, 자연적 성품을 깨닫는 것.
이와 같이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 과거나 미래에 대한 환상과 번뇌가 스며들지 못하며, 자아, 나, 너의 주체가 존재치 않음을 깨닫게 되어 환상적 착각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수행의 기본 대상은 신‧수‧심‧법의 4념처이며, 이 사념처 수행의 기본 도구는 “지혜를 수반한 명료한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입니다. 이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수행자는 그 어느 현상에 대해서도 탐착과 혐오의 분별심(vineyya loke abhijjhā domanassaṃ)을 일으키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즉 현재 생겨난 현상에 sati(사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념처 수행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닦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 수행자의 근기와 성향에 맞추어 사념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서 닦기도 합니다. 열반을 향해 방향만 정확히 맞추어져 있다면 사념처 중에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그 결과는 같습니다. 따라서 네 가지를 제시한 이유는 각각 다른 대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이 넷은 모두 하나에 의존하며 하나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염처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몸, 느낌, 의식의 작용(마음), 마음의 대상(법)이라고 하는 4가지 있는 그대로의 발생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염처수행의 중심은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알아차려 관찰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통, 쑤심, 딱딱함이나 가려움 등의 불쾌한 감각이 있어도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허리나 무릎의 관절에 아픔을 느꼈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아픔을 무리하게 없애려고 해서도, 지워버리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아픈 느낌의 현상인, 미세한 특징으로부터 조잡한 특징까지도 그 「현상」을 알아차림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아픔은 여러분이 닙바나(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픔은 닙바나란 문의 열쇠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여러분이 아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행운입니다. 그 아픔이 여러분을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 것입니다. 아픔에 의해 여러분은 다섯 뿌리 가운데 하나를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느낌은 철저하게 인식되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진실이 철저하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아픔의 진실을「알아차림」하며 인식하면, 순간순간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1초라도 계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픔이나 감각의 집합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은 모든 번뇌의 소멸과 괴로움의 극복을 이루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아픔의 감각을 느낀다면 큰 행운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과「몸」의 작용을 함께 보고 관찰하여 인식할 찬스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 아픔이라는 것은 진실한 상태, 자연스러운 상태를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좋을 기회를 주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 닙바나로 이끄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사념처는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몸의 「미세한 특징」과 「조잡한 특징」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마음과 몸의 작용은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탐욕(lobha = 탐욕, 집착 등의 모든 욕구를 포함한다)을 아실 것입니다. 로바는 그것 자신 독자적인 것으로 다른 마음과 몸에 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좋은 차를 소유하고 싶은 미세한 욕망이 있다면 당신은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lobha입니다. lobha의 분명한 특징은 달라붙는 것, 밀착하는 것입니다.
분노(dosa)는 다릅니다. dosa는 조잡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lobha가 끌어 들이는 특징을 가지는데 반해, dosa는 혐오하고 거부하고 갈라놓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작용의 6가지 요소
신체와 정신의 작용은 지(pathavī-dhātu), 수(āpo-dhātu), 화(tejo-dhātu), 풍(vāyo-dhātu), 공간(ākāsa-dhātu), 의식(viññāṇa-dhātu)이라고 하는 6개의 요소에 의해 구성되어 있습니다.
pathavī는 땅의 요소이며 질량을 만드는 에너지로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은 땅의 요소에게만 속하고 있어 그 밖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āpo는 물의 요소이며 소립자를 이끌고 정리하는 에너지로 유동성과 결합력이라고 하는 명백한 특징이 있습니다.
tejo는 불의 요소이며 열에 의해 형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뜨거워지고 차가와진다고 하는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명상자가 마음의 깊은 집중에 이르면 그 마음은 정화됩니다. 그리고 그 명상자는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즉 배의 부풀어오름과 수축함을 진지하게 관찰해 나가면, 신체의 작용에 대한 집중력이 날카로워져 부풀어 오르고 줄어드는 움직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신체의 움직임에 의해 공기의 움직임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부풀음‧수축함의 움직임을 송곳처럼 정확하고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을 때는 신체나 배의 형태에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 때 당신은 「움직임」만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vāyo, 바람의 요소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바람의 요소는 갈라놓는 에너지로 이동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통찰의 지혜 1단계)
그 후 수행자는 통찰 지혜의 2단계로 나아갑니다. 알아차림에 의한 물질의 특징‧마음의 특징의 분별과 그 원인‧결과의 인식을 거치고 나서, 정신적‧물질적 현상에 공통되는 3개의 특징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3개의 특징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모든 마음의 현상과 신체의 현상의 관계는 이 3개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수행자가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어느 측면을 알아차리느냐에 따라 이 3개중 하나를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 통찰의 지혜를 가지는 것에 의해 모든 마음과 신체의 현상에 공통되는 특징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끈기 있게 자주 수행을 계속하여 하루 종일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자연스럽게 집중력을 길러 가면 통찰의 지혜가 성숙해 갑니다. 그리고 마음의 기능이 그치는 것을 바라게 됩니다. 이윽고 마음의 기능이 그치는 순간이 찾아와 닙바나에 도달합니다.
■괴로움이 끝날 때
거기서 이 순간 수행자는 모든 sankhāra 상카라(행‧형성력‧현상)가 소멸 상태에 들어갑니다. 수행자는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올바르고 완전하게 괴로움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이해했을 때 괴로움의 원인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진리의 길이 괴로움의 소멸을 이끌어 팔정도가 성장했습니다. sankhāra의 소멸에 도달한 수행자는 정견(正見. 통찰의 지혜 3단계)에 이릅니다. 그것이 사성제의 인식에 의한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순간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깨달아라. 신체와 마음에 무엇이 생기고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려라. 그러면 여러분은 중도에 의해 닙바나의 바다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다」
진실로 사념처 수행인 위빳사나는 자기 청정과 완전한 깨달음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여 둑카의 원인인 3가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몸은 부정하다, 느낌은 둑카다, 마음은 무상이다, 법은 무아다 라고 계속 관찰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연속」(santāna:「상속」이라고도 번역된다) 때문입니다. 육체도 마음도 항상 발생하면 소멸합니다(무상). 그러나 이 생멸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반복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해 버립니다. 정확히 영화 필름과 같이.
또한 우리의 몸은 편안하다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위의」(iriyāpatha:「처신의 방법」이라고도 번역된다), 행‧주‧좌‧와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 안에는 항상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자세로 좌선을 계속하고 있으면 고통이 생깁니다. 24시간 계속 달리면 고통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1주일간 침대에 누운 채로 있어도 또한 고통입니다. 사람은 같은 자세로 장시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몸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를 여러 가지로 바꾸는 것에 의해 몸이 편해집니다. 걸어가다 지쳤을 때 자리에 앉으면 편해지는 것과 같이 몸의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해소시켜 즐겁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위의, 자세입니다.
또 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두께」(ghana)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몇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3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놓았습니다. 이것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저것은 나의 것이라고 하나하나 집어 봐도 실제 나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를 결정하여 단단한「두께」가 느껴지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께」가 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연속」 「위의, 자세」 「단단한 두께」를 덮개(chadana)라고 합니다.
[2] 칠각지(satta sambojjhaṅgā 7가지 바른 깨달음의 길)
① sati-sambojjhaṅga(사띠 삼봇장가) 「念覺支 염각지」
사띠, 알아차림, 마음집중, 주의. 이것을 위빳사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무지를 깨부숩니다.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마음집중하여 염리‧이욕‧열반‧해탈로 이끄는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바른 노력」을 실천합니다. 이것은 「바른 깨달음의 길」입니다. 깨닫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사띠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지 생방송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황중계 하는 것에 의해 염리‧이욕‧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깨달음의 바른 노력」이 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무지해도 마음은 일시적으로 깨끗이 될 수 있지만, 현재 일어난 대상을 알아차리면 염리, 무집착 상태, 욕구로부터 멀어짐, 물건에 의존하지 않음,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되므로 실천하기가 쉽고 행하려는 의지도 일어납니다.
실제 걷고 있을 때는 걸을 때마다 「왼발 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오른발 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걸음을 알아차리며 걷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망상하고 있지도 않고,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알아차림」으로 「바른 깨달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띠는 깨달음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으로 깨달음이 시작됩니다.
지금 순간에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경험적으로 보게 됩니다.
지금 순간순간을 알아차림 하면 욕심이 일어나도, 분노가 일어나도 문제는 없습니다.
아, 이런 일로 인해 분노가, 욕심이 일어난다고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배에 아픔이 있다. 「아픔·아픔」이라고 알아차리면 나는 조금 속이 메스껍구나하고 알아차립니다. 「분노」도 있으면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신체에 무엇인가 조금 접촉한 것만으로 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 그것은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무엇으로 자아가 나오는 것인가! 어리석음, 무명이 보여 옵니다. 그렇게 깨달아 서서히 해탈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사띠를 실천하면 지혜가 향상됩니다.
수행자는 너무 좋은 인간이 되려고 힘쓰지 마십시오.
좋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순간 결과적으로 망상이 일어나기에 그것보다는 사띠를 끊임없이 실천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사띠야말로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② dhammavicaya-sambojjhaṅga(담마위짜야 삼봇장가)「擇法覺支 택법각지」
이것은 법에 대하여 조사확인하고 분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이치에 맞는 관찰에 의해 염리‧이욕‧열반‧해탈로 이끄는 「법의 탐구」라고 하는 「깨달음의 바른 노력」을 실천합니다.
「법의 선택」부처님도 극단적으로 말하면 분별자입니다. 구별합니다. 나누고 분해해 봅니다. 그 능력을 말합니다.
사띠를 실천하면 자동적으로 이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인지 몰라도 사띠하는 동안에 법에 대해 조사확인하게 됩니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현상을 철저하게 분석해 봅니다.
「아픔」을 관찰하면 왜 아픔이 있는지 철저하게 분석을 합니다. 그것을 머리로 하면 망상이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만 하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분석이 되어집니다. 순간적으로 보여집니다. 이른바 분석 능력이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③ viriya-sambojjhaṅga(위리야 삼봇장가)「精進覺支」
노력하는 것. 여기서 수행자는 법에 대해 조사 확인하여 분별하며 관찰함에 의해 염리‧이욕‧열반‧해탈로 이끄는 「정진, 노력」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바른 노력」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단지 정진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욕과 관계하지 않으면 견디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도 정진은 정진입니다. 누구나 정상을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러나 죽고 나서 염라대왕이 「이놈은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올랐으니까 천상에 보내라」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정진을 하는 경우는 염리‧이욕‧대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법에 대한 분석 능력이 붙으면 노력을 하고 싶어집니다. 보통 세계에서도 여러 가지 분석을 하게 되면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조사 확인하여 알게 되면 이러한 정진이 뒤따라옵니다.
그러나 깨닫기 위해서는 윤회를 탈출하고 싶다는 필사의 노력이 한층 더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 견뎌보겠다는 것만으로는 능숙하게 되지 않습니다. 윤회를 탈출하고 싶고, 해탈하고 싶고, 번뇌를 없게 하고 싶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제대로 끓어오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 나에게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질릴 만큼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무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따라 해보자.」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그런 용기가 있다면 알아차림(사띠)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분석 능력(담마위짜야)이 생기어 사물을 대할 때 「이것을 어떻게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정진(위리야)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노력이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④ pīti-sambojjhaṅga(삐띠 삼봇장가)「喜覺支 희각지」
여기서 수행자는 바른 알아차림에 의한 관찰로 염리‧이욕‧열반‧해탈로 이끄는 「기쁨」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바른 길」을 실천합니다.
다만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염리, 이욕 등과 관계있는 기쁨입니다. 아! 욕망을 멈추어서 좋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 좋았다고 하는 것과 돈이 없어서 좋았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돈이 없어서 좋다는 기분은 잘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의 기쁨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십시오.
보통 큰 집을 가졌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집이 없어서 좋다, 살 곳이 없어서 좋다고 기뻐한다. 그런 것입니다. 그 기분을 잘 모를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많이 저축했으니 나의 인생은 좋다고 기뻐하지만, 불도의 기쁨은 돈이 1원도 없어서 좋다고 하는 기쁨입니다.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고 잘 성장하여 좋다고 기뻐하지만, 가족도 없고 아이도 없어서 홀로 있어서 좋다고 하는 기쁨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기쁨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말만이라도 이해하십시오.
숫따니빠-따 「經集」에 소를 치는 다니야와 부처님이 대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그곳에서 세속의 기쁨과 불타의 기쁨은 반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홀로 강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니야는 소를 기르고 있습니다. 우기철이라 매우 강한 비가 내릴 것 같았습니다.
다니야가 게송을 읊기 시작합니다.
「나는 소를 전부 외양간에 들어놓았다. 송아지들도 일찍이 젖을 먹여놓았다. (아침에 어미 소의 젖을 짜야 하기에 밤에는 젖을 먹이지 않습니다.)
송아지들도 말뚝에 확실히 연결해 있기 때문에 괜찮다. 그러니 비가 내려도 나는 걱정할 일이 없다.」
부처님은 「나에게는 소가 없고, 송아지도 없다. 밥에 젖 먹을 걱정도 없기 때문에 비가 내려도 상관없다.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에 다니야가 「나의 작은 집은 창도 닫혀있고 지붕도 확실히 덮여있다. 큰 비가 내려도 괜찮다.」
부처님은 「나에게는 작은 집도 없고 살 곳도 없다. 그러니까 비가 내려도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니야는 「나에게는 온순한 아내가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즐겁다. 비를 내리고 싶으면 마음대로 내리라지.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 길러야 할 아이도 없다. 그래서 비가 내리려면 내려라.」라고.
다니야가 마지막으로 「나는 노동의 댓가로 생계를 이어간다. 누구에게도 메이지 않고 독립해 있다. 비가 내리고 싶으면 내리라.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자,
부처님은 「나는 누구에게도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해탈하여 자유롭게 다닌다. 비야 내리고 싶으면 내려라.」
다니야는 마지막에 부처님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해해서 「확실히 그대로입니다. 당신은 나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일을 인정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먹구름이 일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경전입니다. 그 경전에서 세속의 기쁨과 깨달음의 길로 생각하는 기쁨은 완전히 정반대임을 말합니다.
어떤 기쁨이 오래 갑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1000만원이 저축되어 있다고 해도 서서히 줄어들겠지요.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줄어들지 않겠지만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저축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요. 죽고 나서 누군가가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죽기 전에 그 사람에게 주면 기쁘지 않는가요. 그래서 저축이 있다고 해도 줄어듭니다. 덩달아 기쁨도 줄어듭니다. 돈이 없다고 하는 기쁨은 어디서 줄어드는 것입니까. 그 기쁨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기쁨이 증가할 뿐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길의 기쁨은 증가할 뿐 줄어드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속의 기쁨은 어떤 기쁨이라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놓는 것은 기쁨입니다.
예를 들어 상처 입은 야생의 동물이나 새 등을 보고 가엾고 사랑스런 것들이라 돌보고 치료를 해 줍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얻겠지요. 이들이 먹을 것을 조사해서 먹이를 찾아 먹였더니 상처가 나았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게 자유롭게 놓아 줍니다.
이 놓아 주었을 때의 기쁨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 등을 생각해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놓는 편이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됩니다. 극단적인 기쁨이란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면 나오는 것입니다.
오감을 자극하는 기쁨은 괴로움에 연결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쁨은 오감을 자극하는 기쁨입니다.
욕구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순수하고 청정한 상태입니다. 욕구로부터 멀어지면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기쁨입니다. 기쁨도 깨끗합니다.
돈이 있는 것으로 인한 기쁨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고민이 생기고 저축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잡념이 끼어들어 오니까 많이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열반으로 이끄는 기쁨은 아름답습니다. 순수합니다. 「기쁨」은 그런 것입니다.
⑤ passaddhi-sambojjhaṅga(빳삿디 삼봇장가)「輕安覺支 경안각지」
차례대로 말하면, 분석능력이 붙는다, 분석능력이 붙으면 이것만은 버리게 되고 싶다고 원하여 「정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버려버림」 「아무것도 사로잡히지 않음」이라고 하는 마음이 되면 「기쁨」이 됩니다. 「기쁨」이 일어나면 신체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기분이 됩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편안하게 쉬지 않으면 효율적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즐거움이라는 안식의 기분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게 안 되면 이윽고 실천하여 멈추어 버립니다.
이 「경안」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느낌입니다. 그것이 일어나면 훨씬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면 「흥분」되는 버릇이 있습니다.
목적에 이를 때까지 신경을 피로하게 하고 경쟁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되돌아보지 않고 도전합니다.
전속력으로 노력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운 마음을 키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역효과가 됩니다. 너무 매달려 있으면 역효과입니다.
즉, 아직 이해도 하지 않았고 아직 그러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쨌든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만 앞서면 이것은 단순한 분노입니다. 깨닫고 싶다는 마음은 수행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래서 오만하게 노력하고 경쟁심과 분노로 수행하니 깨닫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쭉 번뇌를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길은 미묘하고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경안」이라고 하는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경안이 되어지면 어떤 편안함을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5번째가 된 사람은 6번째에 능숙해집니다.
⑥ samādhi-sambojjhaṅga(사마디 삼봇장가)「禪定覺支 선정각지」
여기서 수행자는 바른 알아차림에 의한 관찰로 염리‧이욕‧열반‧해탈로 이끄는 「선정」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바른길」을 실천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신통일, 선정삼매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가끔씩 수행하다 대상이 사라지면서 졸음에 떨어진 것을 자신은 사마디에 들었었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미지근한 사마디는 없습니다. 사마디는 집중력이 있고 에너지가 흘러넘쳐 저절로 다른 구별이 없어집니다.
기분으로는 굉장히 즐겁지만 다만 멍한 느낌은 아닙니다.
뿔뿔이 흩어져 일하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통일시켜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현미경으로 배율을 최대한 올려 무엇인가를 꿰뚫듯이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정신적으로 무엇인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바른 수행만이 잡념이 없어진 상태, 통일성이라는 6번째 선정각지에 이르게 됩니다.
⑦ upekkhā-sambojjhaṅga(우뻭카 삼봇장가)「平等覺支 평등각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는 「침착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침착하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길러 온 능력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균등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제껏 여러 가지 지혜‧능력을 길러 왔습니다. 1번째는 수행의 능력, 2번째는 지혜, 3번째는 노력정진입니다. 4번째는 경험된 결과입니다.
우뻭카가 되어지면 지금까지 얻은 것 전부를 균등하게 합니다.
균등하게 되는 것과 동시 순식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릅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행이 무르익으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1번째 각지에서 7번째 각지까지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7번째 각지에 들어간 순간 「깨달음」에 이릅니다.
우뻭카는 사실상 한국어로 번역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어떤 용무가 있을 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 주십시오. 어딘지 모르게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 여행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었습니다. 여행계획, 비행기 티켓, 여권과 비자, 호텔 예약도 되어 있고 짐 꾸리기도 완료했습니다. 이러한 용의주도함으로 인해 침착해집니다. 초조해할 것도 없고, 긴장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놓이는 기분과는 조금 다르지만 무엇인가를 끝났을 때의 침착함이 있습니다.
이것 우뻭카는 필요한 것이 갖추어지고 나서의 침착성, 만사 OK라고 하는 침착성입니다.
「평등각지」로 6각지가 균등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우뻭카가 나타나면 다음 순간은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기다림이 없습니다.
사띠(첫번째)만을 실천해도, 2번째의 「택법」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두 번째 각지에서 단계적으로 올라가 7각지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7개의 깨달음의 차례, 「7각지」라고 말합니다.
⑧ 칠각지의 실천
수행에 힘쓰는 사람은 「사띠 각지」를 실천하면 좋습니다. 그 외의 각지는 자연스럽게 나타나옵니다.
지금까지 7가지를 설명하였지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 이 7가지를 금세기에는 깨달을 수 없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1가지만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 외는 천천히 나아갑니다.
사띠를 실천해도 다음 각지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일단 2번째 택법각지를 안내해서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개개별로 「7각지」의 능력이 있어도 균등하게 안 되는 한 마음은 해탈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지게 칠각지를 길러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뿔뿔이 흩어지게 마음대로 수행하면 망상을 일으키게 되어 능력이 균등하게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수행하면 됩니다.
이것저것 조사하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능숙하게 나아가지 않습니다. 7각지가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처님을 신뢰한다면 그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거짓일 수는 없을 것이며 잘 수행하면 분명하게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4개의 단계가 있는데 4번째 단계가 아라한입니다. 최종적인 해탈입니다.
제1 단계인 sotāpatti(예류과)에 이르는 것은 성자의 동참입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이르면 이제 성자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번뇌와 대결하는 방법(선원 위빳사나 수행방법 교제 참조)의 제1장 「관찰하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에 의해서도 「예류과」의 깨달음에 이릅니다. 번뇌와 대결하는 첫 번째 방법은 불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 바른 견해를 가지고 공부하여 알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이르면 「예류과」의 깨달음에 이릅니다.
아! 이것이 「진리」구나! 이것 이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다. 이렇게 납득하여 「예류과」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수행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명상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바뀌는 것이니까요. 진리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으로 제1의 벽인 번뇌의 벽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성자의 길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시 죽기 전에 완전하게 깨닫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면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번째, 3번째, 4번째 성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뭐 이것도 좋다고 멈추었다고 해도 반드시 7생 이내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에서 최종적인 해탈을 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행합니다.
그런 7각지의 실천 수행에 의해 번뇌는 완전하고 남김없이 두 번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번뇌」란 무지‧무명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1,510가지의 수많은 번뇌도 한마디로 말하면 「무지」입니다.
지혜가 나타나 진리를 발견하면 무지하고 저속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2는 4인 것을 알면 또다시 잊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번뇌는 「무지」이며 그런 무지가 천천히 천천히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끝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번뇌론입니다. 명확하고 정밀하게 심리학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번뇌를 없애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심플한 방법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노력하십시오.
* 37조도품_법문교재_03.아나빠나사띠와 칠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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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빠나 사띠와 7각지의 방식 (담마스쿨 법문교재 내용)
*** 아-나-빠-나 사띠 (담마스쿨 법문교재 내용) 7각지에 대해 수행하고 싶으면 우선 자-나(선정) 수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아-나-빠-나 명상에 의해 들어가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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