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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어디에 계시는가! (20090503. 붓다의 날)

담마마-마까 2021. 3. 2. 23:04

* 붓다는 어디에 계시는가! (20090503. 붓다의 날)

 

어떤 분들은 “붓다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런 붓다는 벌써 죽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예배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붓다는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다(삿타 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띠, Sattha deva-manussanaṁ buddho bhagava ti)」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은 우주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신께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은 붓다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신들도 그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는 항상 붓다께서 계신 곳에 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붓다는 무수한 생애에 걸쳐 윤회하는 동안 바라밀이라는 덕과 지혜, 위대한 특징을 모두 완성시킨 한 분의 인간입니다. 모든 선을 완성시키고, 우주의 법칙을 완전하게 이해해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붓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는 마음을 잘 알아차려 일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빨리어에 「인간」이라는 의미의 「마눗사, manussa」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나, mana」는 「마음」이라는 의미이기에, 「마눗사, manussa」는 「마음을 완전하게 증장시킬 수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가운데에서, 마음을 궁극의 곳까지 증장시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생명은 인간 이외에 없습니다. 신들조차도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는 곳까지는 마음을 증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신들은 기쁨이나 행복, 번영을 향유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뒤떨어지기에, 인간(manussa)만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붓다가 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붓다는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 신이 아니라, 신들의 스승인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은 신의 지위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붓다는 인간에게 신앙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pariyatti).

실천하는 것(patipatti)·

체험하는 것(pativeda)을 가르쳤습니다.

 

불교는 우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믿어선 안 됩니다.

붓다는 우선 이해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해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망상을 만들게 됩니다.

 

불교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은 올바른 이해, 올바른 견해라는 정견(sammaditthi)입니다. 붓다는 전도 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정견을 길러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배움과 이해하는 것에 의해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관해서 훌륭한 견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붓다는 올바르게 배우고 이해한 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실천하면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것이 진실하다」라고 알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붓다가 말한 길은 3가지입니다. 이해하는 것, 실천하는 것,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붓다는 신앙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서, 체험하라고 가르친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도는 「나는 붓다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Buddhaṁ saranaṁ gacchami)」라고 스스로 주창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 노력하는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의한다, 의지하여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학생이 되는 것이며,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을 결의하는 것입니다.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실천해서, 체험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신해서 실천해 주는 사람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붓다는 어디에 계십니까?」

 

붓다는 천국에 있다, 열반이라고 하는 장소에 있다, 어딘가 다른 장소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붓다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이와 같이 읊조렸습니다.

 

Ayaṁ antima jati natthidani punabbhavo....(아양 안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생이다. 다시 태어날 일은 없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윤회하는 고리를 끊어버렸다. 이제 괴로움을 소멸했다」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감정을 채우는 것만으로 곧바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즐기고 싶은데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는 불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신체적·정신적으로 괴로움·고민·아픔·곤란·불행·불만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에 만족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과 신체에 불평,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붓다는 이 불만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서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열반은 마음과 신체의 불만(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육체 혹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한, 마음과 신체의 괴로움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으면 최선의 방법은 「태어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다」는 일을 갈망합니다.

이것은 마음에 갈애와 집착이 강렬하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에는 괴로움·곤란함·아픔·병 등 다양한 문제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갈애와 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가 있지 않아도,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진리(Dhamma)는 항상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는 내가 만든 새로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간과하고, 잘못 해석하고, 멋대로의 망상으로 잘못된 개념을 만들고, 그 때문에 진정한 진리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전통이나 문화적 습관을 불교와 혼용해서 그것을 불교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해탈을 목표로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실천하고 있다면 붓다가 어디에 계시는지, 어디로 갔는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전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누가 전기를 발명했는지 알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다만 전기를 사용하면 됩니다. 원자력은 건설적인 목적으로도, 파괴적인 목적으로도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원자력을 올바른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누가 원자력을 발명했는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붓다는 어디에 계신가, 어디로 갔는지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가르침을 들을 수가 있어 이익이 있는 것이라면, 붓다가 어디에 계시는지 알 필요가 있을까요? 붓다는 우리를 천상에 데리고 가는 일도, 지옥에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해탈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붓다가 우주의 어디든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기분이 안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붓다가 살아 계시면 좋겠다!」라는 채워지지 않은 갈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신체와 마음의 괴로움을 소멸해서 열반에 이르러 해탈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효과가 있는 약을 개발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약으로 병이 나았다면, 약을 개발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도 살아있는지 라고 알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을 처방하여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붓다가 살아 계신지 아닌지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 행복이나 충만감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붓다의 가르침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이나 분별 능력을 사용해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를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 쇠퇴하지 않는 것, 소멸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변하지 않는 채 같은 상태로 계속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나 곤란에 부딪히게 될 때, 불만이나 괴로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변화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만이나 괴로움에 휩싸여 실망감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 현명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지 비는 것만으로는 괴로움을 없앨 수 없습니다. 문제나 곤란의 본질을 이해해서, 그 원인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서, 문제를 없앨 수가 있습니다.

 

붓다는 어디로 가셨는가라고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열반에 갔다고 하면, 열반이라고 하는 고정적인 장소가 있다고 오해합니다. 열반은 장소가 아니라, 해탈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붓다는 어디에 간 것도 아니고,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존재의 최종 목표인 열반에 도달해서 해탈하셨습니다.

 

그럼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봅시다.

붓다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은 「붓다는 궁극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며, 모든 생명의 이익과 행복을 바라며 설하신, 그 붓다의 가르침이 변함없이 이 땅에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붓다의 날 게송

 

① 우리는 붓다를 스승과 의지처로 믿고 따릅니다.

붓다의 담마는 우리들을 기쁘게 합니다.

 

② 붓다는 인도 북부 지방 성스러운 가문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나셨으며, 성은 고따마이시고 이름은 싯닷타였습니다.

 

③ 그 분은 석가종족의 고귀한 가문과 왕족이라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포기하시고, 출가 사문의 길을 택하시어, 신들과 마라, 범천, 범행수행자, 종교지도자, 왕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 중에서 으뜸가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④ 그 진리를 가르치는데 의심할 수 없이 능숙하신 붓다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지혜 덕행 두루 함께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스승,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입니다.

 

⑤ 그 진리는 존귀하신 분에 의해 잘 설해진 위없는 것으로,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 바로 나타나니, 와서 보라 초청하여, 열반으로 인도되는 진리이며, 지혜로운 이 스스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⑥ 그 제자들인 상가는 진지하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들인 상가이며, 정확하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들인 상가이며, 올바르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들인 상가이며, 여법하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들인 상가이니, 이분들은 네 쌍의 대장부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입니다.

 

⑦ 그러므로 이곳에 불상을 조성하여 모신 것은 그 존귀하신 분, 붓다를 기억하는 것으로 인해 생로병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과 마음의 평안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⑧-① (음력 4월 15일에 사용) 이제 저희들은 붓다께서 태어나시고 깨달으시고 열반에 드신 사월보름에 이곳에 함께 모여 붓다를 회상합니다.

 

⑧-② (음력 4월 8일에 사용) 이제 저희들은 4월 초파일에 이곳에 함께 모여 붓다를 회상합니다.

 

⑨ 이 성스러운 날에 저희들은 몸과 마음 다하여 예경 드리고 향과 꽃, 초들을 공양 올립니다.

 

⑩ 무릎 꿇고 그 존귀하신 분의 크신 덕을 회상하며 불상 앞에 삼배 드리고 저희들이 마련한 공양물을 올립니다.

 

⑪ 붓다는 비록 완전한 열반에 드신지 오래되었을지라도, 저희들은 그 붓다의 크신 덕을 기억하며 잘 알고 있습니다.

 

⑫ 참된 지혜와 자비, 청정함을 이루신 붓다께서는 저희들의 복덕이 증장되고 금생에서 행복하며 향상됨이 있도록 이 공양물을 기꺼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