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마음들을 자꾸 가질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는 마음은 대상을 떨어뜨려놓아야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관찰을 해야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뭔가를 관찰하려고 한다. 아니면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려고 마음을 먹으면
이미 그 대상은 집착의 대상인 것이지 실제적인 수행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는 딱 수행을 중단하고 가볍게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대상,
손이 닿아있으면 ‘음, 닿아있네’ 하면서 가볍게 닿아있다고 알아야 됩니다.
집착함이 없이 그냥 그대로 보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해지고 평온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또 주대상에게 돌아가더라도 그 수행 대상이
집착함의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
사띠의 대상으로써만 다가와지게 돼버립니다.
사띠의 대상으로 다가와질 때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드러나지는 것이지,
자신이 그것을 볼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육근에서 일어나는 대상들도 집착해서도 안될 뿐아니라
이 몸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작용들도 집착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 좀 더 좋은 조건들이 되기를 바란다든지,
아니면 수행하기 싫어서 대상을 놓쳐버린다든지,
이런 것들도 집착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대상은 있는 그대로 봤을 때 드러나진다는 것을
명심을 하고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 20181208 담마스쿨(랏타빨라 스님의 네 가지 게송) 법문 中 마지막 부분 _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 정진 > 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른 삼매(Samādhi)를 개발하려면 (0) | 2021.06.13 |
---|---|
아침에 일어날 때 (0) | 2021.06.06 |
세 가지 갈애. 망상을 충동질하는 상카라. 오온. (0) | 2021.04.12 |
호흡 관찰하는 데서 일어나는 두 가지 잘못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0) | 2021.04.11 |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 상카라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려면 (0) | 2021.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