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테라와다 불교사 총론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906-3

담마마-마까 2025. 1. 8. 18:59

https://youtu.be/x7nueKmydC4?si=fXuUc-dcHbVQsmb1

 

* 테라와다 불교사 총론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906-3

 

이번에 2학기 때 스님이 맡은 과목은 테라와다 불교사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스님은 똑 떠중이 인생 같애. 1학기 때도 내가 원하지 않는 과목 맡고, 2학기 때도 뭐 어쩔 수 없이 또 맡게 되고 이렇게 됐는데. 그래서 방학 동안에 원래 계획은 교재를 다 완성을 할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몸이 부실하다 보니까 다 하지 못하고 어쨌든 한 중간 정도까지는 교재를 해놔놨으니까 마칠 때가 되면 이제 다 완성이 되겠죠.

 

그러니까 이번 2학기 때도 어쩔 수 없이 교재를 한 번에 내주질 못하고 매번 할 때마다 프린트물을 대체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이제 1학기하고는 틀린 게 1학기 때는 준비할 기간이 보름도 안 됐었고 그래도 이번에는 한 달 반이라는 기간이 있으니까 목차라도 정했어. 이번에는 수업을 이렇게 진행하겠다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이제 잡아본 건데, 조금 부족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때그때 부족한 것들은 좀 해달라 할 것 같으면 그 부분을 첨가하도록 하고, 어차피 진행해야 될 과목이 그냥 불교사가 아니고,

 

테라와다 불교사이기 때문에 가장 테라와다적인 방식으로 여러분들에게 전해줄 겁니다.

기존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사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부파의 분포도라든지, 각각의 분열했던 그 근본분열 문제라든지, 그다음에 각각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대승불교권에서 접해왔던 교재들하고는 조금 차이가 난다는 것만 기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정설은 아닙니다. 그런데 각각의 테라와다 나라들에서 버마나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승가에서 이런 방식으로 스님들을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전통적인 방식의 테라와다 불교사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래서 그 방식으로 진행을 할 거니까 약간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을 미리 여러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뭘 편가르기 하기 위해서라든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고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니까, 비교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부분은 되도록이면 자제를 하고, 그 대신에 테라와다 불교사이기 때문에 테라와다의 관점에서 스님이 설명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해가 되겠죠?

 

이번 시간에는 아마 모르긴 해도 원래는 22시간이죠? 22강좌인데 중간중간에 빠지는 게 많습니다. 이번 달도 추석, 그죠? 빠져야 되거든요. 그때는 스님이 기차표를 예매할 방법이 없어요. 올라오지를 못해. 그럼 내 빠지면 다 빠져야 돼. 다른 도리가 없어. 그러니까 추석 빠지고 또 까티나 할 때 또 빠져야 되고, 그다음에 이번엔 또 11월 달 테라와다 세미나가 있습니다. 또 세미나에 빠지고, 그다음에 특강이 있는 때는 특강 스님에게 저희들이 양보를 하기로 했으니까 다른 좋은 스님들 모실 때는 그때 두 번인가 내가 빠지고, 이러니까 보통 22시간이 되는 게 아니고, 아마 15시간에서 17시간 그 정도 사이가 될 것 같더라고요.

거기에 맞춰서 편집을 했는데, 어떨 때는 프린트물이 좀 몇 페이지가 안 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한 20페이지 넘어 될 때가 있고 그럴 겁니다. 그럴 때는 그걸 다 설명을 못하니까 여러분들이 프린트물로 대체를 하고, 중요 부분만 잡아서 얘기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잡은 것이 「불교 개론」, 그다음에 「BC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이 두 번째로 들어가 있습니다.

불교 개론이라는 것은 불교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하고 대승불교죠? 그래서 이걸 바라보는 관점이 테라와다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과연 두 개의 흐름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고 오직 하나의 흐름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아마 오늘 해야 될 부분인 것 같고.

 

그다음에 BC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이라고 된 것은 어쨌든 부처님에 대해서는 알아야 되니까, 부처님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출가해서 어떻게 성도를 하고 어떻게 열반에 이르렀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걸 아마 대충적으로 얘기를 할 겁니다.

그러면서 그때 어떤 문화적인 배경으로 해서 이런 상황들이 됐는가? 어째서 출가하게 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이루었고, 또 열반할 때 왜 굳이 꾸시나가라 가서 열반에 들었을까? 하는 이런 문화적인 부분을 가지고 조명을 좀 할려고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일대기를 그래도 개략적으로 한번 살펴보는 시간들을 가지겠습니다.

 

그다음이 세 번째가 부처님의 탄생 출가 성도 입멸 시기에 대한 것. 굉장히 이견들이 많고 각각의 학자들마다 이것들을 계산하는 방식이 다 틀립니다. 그래서 뭐 불기 올해 2557년입니까? 우리나라에서 57년인가 58년인가? (수행자 ...) 57년이에요? 그럼 태국이나 버마에서는 56년이라고 할 거란 말이라. 1956년에 "그때 불기 2500년으로 하자" 했는데도 한 50년도 안 흘렀는데 벌써 1년 차이가 났잖아. 그러니까 그 전에 거는 더 계산 차이가 많이 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탄생한 때가 뭐 634년 643년 될 때도 있고 644년 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300년까지 BC300년까지 이렇게 흘러가기도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걸 조금 살펴보고, 테라와다 입장에서는 어떤 것을 통일해서 쓰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제시를 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열반 한 해뿐 아니라 날짜까지 시간까지, 테라와다에는 시간하고 요일까지 다 나와 있어요. 그래서 그걸 일목요연하게 이렇게 제시를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해서 이렇게 제시가 됐다 하는 것들을 얘기를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아마 과정을 안 들어도 나중에 결과만 이렇게 보더라도 ‘아, 이게 테라와다에서 이런 방식이구나’ 하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있게끔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부처님 시대의 왕들 부분인데, 불교는 어찌 보면 출가자들이 거의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재가자들이 없었으면 출가자가 유지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의 왕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분들이 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상가라고 하는데에 어떤 역할들을 했는가? 하는 걸 아마 좀 돌아보는 시간들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 지금 「한국 테라와다 불교」 하면 「교단」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교단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가르침 이라는 교(敎),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는 출가자만 있는 건 아니죠. 재가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통 4부대중(四部大衆) 아니면 또 좀 넓게 얘기해서 7부대중(七部大衆)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재가자와 출가자가 다 포함되는 걸 교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이제 그렇지 않고 승단이라고 할 경우에는 출가한 스님만 해당이 되게 돼 있는 거죠?. 재가자가 포함이 안되고 출가한 비구 승단, 비구니 승단, 그렇게 얘기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비구니 승단이 지금 소멸되어 버렸죠? 그래서 비구 승단만 있기 때문에 보통 테라와다의 승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비구 승단을 얘기하게 되는 형태들이 되게 됩니다.

 

어쨌든 승단을 유지시켜주는 교단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쭉 그게 변함없이 흘러왔는데 이게 어떤 메커니즘을 가지고 이렇게 흘러오게 됐는가? 하는 걸 갖다가 부처님 당시 때 왕들을 비교를 해서 조금 살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가자가 해야 될 게 뭐고, 또 재가자가 해야 될 게 뭔가, 하는 걸 그래도 한 시간 안에 짧게라도 어렴풋이라도 좀 알 수 있는 방법을 택해보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제 부처님 당시 때까지 얘기고,

 

그다음에는 이제 1차 결집부터는 부처님 열반 후의 얘기입니다.

열반 후 3개월 후에 마하깟사빠 장로를 상수로 해서 7개월간 칠엽굴에서 제1차 결집을 하게 되죠. 그래서 그때 당시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지금 우리가 테라와다라고 불리게 됐는가? 하는 그 연원에 대해서 이렇게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 될 겁니다. 물론 테라와다의 기원을 어떤 학자들은 2차 결집부터, 어떤 학자들은 3차 결집부터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테라와다에서는 그렇게 얘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건 학자의 얘기고, 테라와다의 승단에서는 "1차 결집 때부터 연유가 되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테라와다, 테리아, 테리까,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1차 결집부터 시작이 됐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얘기들을 해드리면서, 1차 결집은 이런 비사들이 있었구나. 그래서 여기서 결집된 것이 이렇게 해서 2차 결집까지 가고 3차 결집까지 가고 해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는구나 하는 것들을 갖다가 살펴보도록 그렇게 할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2차 결집, 1차 결집이 지나고서 100년 뒤에 있게 되는데, 2차 결집 부분에는 1차 결집에서 끝나지 않고 왜 2차 결집이 일어나게 됐을까? 보통 그걸 '십사(十事) 논쟁'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됐는가? 그리고 1차 결집과 2차 결집에서 결집을 해서 뭔가를 이렇게 딱 다듬어 갖고 결정을 했을 건데 그 결정의 차이점이 뭔가? 차이점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왜 차이점이 없게 됐을까?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겁니다.

 

물론 2차 결집 부분은 테라와다에서 말하는 2차 결집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2차 결집의 이유는 틀립니다. 물론 그걸 비교를 해서 얘기를 하긴 할 겁니다.

근데 아마 시간적으로 왜 테라와다의 결집의 이유가 합당한가 하는 걸 갖다가 명확하게 제시할 시간은 아마 없을 것 같아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2차 결집의 이유가, 이것은 그 결집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걸 조목조목 얘기는 하겠지만은, 너무 또 그렇게 하면 내 보고 안 그래도 죽일 놈 살릴 놈 하는데, 저 죽일 놈 살릴놈 할까 봐서 좀 염려되긴 하는데, 그래도 어쨌든 비교를 조금 해서 바른 견해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택하도록 그렇게 할까 합니다.

 

그다음이 3차 결집, 아소카왕 때 있게 됐죠? 쭉 그렇게 내려오면서 3차 결집이 있게 된 배경, 그리고 전통이라고 하는, 테라와다가 뭐 1차 결집부터 시작이 됐다 하더라도 내려오면서 어떤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3차 결집에서 또 테라와다 스님들까지도 또 이렇게 쫓겨나는 신세가 됐을까를 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 테라와다가 좀 반성해야 될 부분은 뭔가? 하는 것들도 좀 살펴보고, 그래서 아마 3차 결집은 거기에 좀 비중을 두고 있을 겁니다.

물론 3차 결집도 이제 그때는 대중부가 완전히 생겨나기 시작한 태동이 되게 되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대중부 쪽에서 나중에 경전하고 율장이 생겨나면서 거기서 얘기하는 것과 또 테라와다 빨리 율장에서 말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비교는 하긴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반성의 시간을 가지는 그런 형태들로 3차 결집 부분에 진행이 될 것 같고.

 

그러고 나서 인도에서의 불교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물론 나중에 각국의 불교 개론 할 때 3차 결집 이후에 인도에 어떤 상황들이 쭉 전개됐는가? 뭐 스리랑카로 가버리고 뭐 버마나 태국으로 가버렸으면 저쪽에는 안 남아 있었는가? 그렇진 않다 하는 사실을 갖다가 얘기는 하긴 하겠지만, 이후부터는 인도가 아니라 무대가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됩니다.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처음 전한 마힌다 장로가 어떤 역할들을 하게 됐는가는 아마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될 거라. 야사니까, 이야기식으로 쭉 전개가 되니까, 디빠왕사 마하왕사 쭐라왕사라고 하는 스리랑카의 3대 역사서가 있습니다. 그것에 준거해가지고 쓴 부분이기는 하지만 때문에 꼭 “다 맞다” 하고는 얘기는 못 합니다.

일부 부분은 틀린 부분도 있겠죠. 그렇지만 어쨌든 테라와다에서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에 준거해서 조금 다른 시간보다도 이게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 아마 되지 않을까? 데와남삐야 왕이 어떻게 불교에 귀종하게 됐고, 그리고 그 왕과 불교하고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정립되게 되는가? 그게 지금까지 관계들로서 이렇게 설정돼서 현재까지도 유지되어 오는 형태들을 띠고 있다는 그런 부분들이 아마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홉 번째 BC 3세기부터 BC 1세기에 스리랑카 불교 발달사 부분들, 그러니까 아누라다뿌라 시대 때 어떤 불교들이 어떻게 발달을 했고 그리고 어떤 형태들로써 분파가 이루어질려고 하는 그런 조짐들이 있었는가 하는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이 될 겁니다.

 

그러고 나서 4차 결집. 처음으로 문자로 써지게 되는 거죠. 제4차 결집은 알루위하라라고 하는 장소에서 문자로 써지게 되는데, 그것의 폐해가 뭐고 구전으로 전승됐을 때 좋은 점이 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로 중심을 잡고 4차 결집 부분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다음에 열한 번째가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어와 주석서 문헌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의 동남아시아는 빨리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하나로서 통일되게 됐을까?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얘기하는 소의경전,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금강경이죠. 그리고 또 다른 종파에서는 소의경전이 보통 다른 경전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교조들도 석가모니불을 교조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이 조금씩 조금씩 틀립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는 그 많은 나라들이 왜 똑같은 형태들을 띠고 있게 될까?

교조도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그다음에 교의도 빨리 삼장이고, 그 외에는 일절 없고, 그리고 여기서 독경하는 거나 저 나라에서 독경하는 거나 똑같은 형태들을 띠고, 왜 이렇게 빨리어로서 이렇게 하나로서 이렇게 만들어지게 됐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아마 여기서는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의 중요성이 어떤 것이다.

조금 전에 우리 운영위원장님이 빨리어로 하지 말고 한글로 해주면 얼마나 좋겠노 이렇게 하는데 스님 입장에서는 그게 입에 더 익어. 빨리어 하도 해놔 놓으니까. 그래서 누가 인사하면 한글로 이렇게 먼저 말이 나오는 게 아니고 빨리어가 먼저 나와. 그거는 뭐냐면 테라와다 스님들은 그마만큼 빨리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거라. 그걸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거는 좀 이해를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그 중요성을 알 것 같으면 아 그래도 그걸 이해하려고 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그다음에 열두 번째가 동남아시아의 불교 전파 그렇게 해서 버마 태국 캄보디아 이런 쪽으로 쭉 불교가 퍼지게 되는 것들에 대한 얘기, 그러면서 각국의 관계에서 어떤 관계들로써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됐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불교가 퍼져나간 것들, 쿠차 왕국부터 해가지고 저 힌두쿠시까지, 이 테라와다 불교만 얘기하는 겁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어떻게 퍼져나가게 됐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이건 어느 나라 겁니까? (수행자: 파키스탄...) 어디?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이 중앙아시아죠? 거기도 테라와다 불교 유적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제 그런 부분까지 아울러 가지고 중앙아시아의 테라와다 불교가 어떻게 퍼져나가고 어떤 생활들을 하게 됐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그다음에 14번째 각국의 불교개론이 있는데, 사실은 이 부분의 자료가 최고 많습니다.

각각의 나라별로 테라와다 불교사를 적어야 되기 때문에. 근데 그렇게 하면 이게 스님이 돈이 부족할 것 같아가지고, 프린트물로 다 대체하지는 못하고 간단하게 적어 가지고 중요한 부분만 각 나라별로 한 두세 장씩 해가지고 대표적인 나라 한 다섯 나라 이렇게 해서, 불교 처음부터 도입해서 지금 현재까지 어떤 상황인가 하는 부분을 하고.

그다음에 각국의 불교 개론 다음에는

 

현재의 테라와다 불교 그 불교가 지금 현재 동남아시아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도 오게 되고 일본에도 가게 되고 유럽으로도 가게 되고 미국으로도 가게 되고, 이렇게 그 불교가 퍼져있는 상황들에 대한 얘기들을 하고,

그리고 지금 현재 있는 테라와다 불교와 부처님 당시 때의 불교 테라와다 불교하고 어떤 차이점을 가지게 될까?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가 마지막에 조금 다루어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버마식 불교하고 테라와다 불교하고 같을까? 태국식 불교하고 테라와다 불교하고 같을까? 각국의 나라들은 다 테라와다 불교를 하고 있다는데 꼭 같지는 않겠죠? 뭐 정령 숭배사상, 낫 신앙, 그다음에 까티나 하면서 조금 기복적으로 흐르는 부분들 이런 부분들이 틀림없이 각국의 나라들에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에서는 테라와다 불교 뿌리내리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수용하지 말아야 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다는 들먹이지는 못하더라도 간헐적으로 들먹여서 조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한국에 어쨌든 한국에 있으면 한국식 테라와다가 존재를 해야 될 것 아니라? 코리아식이라 해야 되나, 뭐라 해야 되노? 한국식 테라와다, 물론 그것도 테라와다의 굴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테라와다는 전 세계에 퍼져있지만은 태국식이 있고 버마식이 있고 한국식이 있다는 거라.

 

그렇지만은 한국식과 태국식이나 버마식이 틀려서는 안 돼. 틀린 부분은 각각의 그 토착 신앙이나 민속 신앙이라 해서, 받아들인 부분에서는 틀린 부분이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본적인 토대까지도 무너뜨리는 정도가 되면 안 된다는 거라.

그렇지만은 한국에는 한국식의 테라와다가 틀림없이 존재할 필요성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가지고 마무리를 짓도록 그렇게 계획을 잡아놨습니다. 계획대로 될는지 어떨런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래서 오늘은 그렇게 테라와다 불교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덧붙여서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요렇게 테라와다 불교사를 해달라 하고 원하는 부분이 있으면 스님이 가고 나서라도 우리 사무장인 수마나에게 얘기를 해두십시오. 그러면 최대한 스님이 그것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테라와다 불교사 하고 영 관계없는 걸 해달라 할 것 같으면 이 시간에는 할 수 없고 다른 시간에 편성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관계되는 것이면 최대한 반영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그렇게 진행하겠다 하니까 괜찮아 보입니까? (예)

첫 시간이니까 너무 또 따분하게 하면 재미없어. 안 그래도 앞 시간에 우리 뿐냐디빠 스님이 열강을 하기는 하는데, 이건 마 혼자 열강을 하고 있는데, 딱딱하고, 솔직히 그렇지? (그렇습니다.) 뭐라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스님의 스타일이라. 뭐 진행하는 방식이 그런 걸 갖다가 어떡할 거야. 그거는 뭐 어쩌질 못하는 건데. 근데 인제 듣는 자의 입장에서는 ‘아이고, 스님’ 조금만 숨도 좀 쉬게 해주고 이렇게 뭔가 생각할 시간이 있도록 해줘야 되는데 마냥 집어넣으니까 용량이 안 따라가. 그런 부분이 있을 거고.

앞 시간에는 스님은 수행지도 했으니까 오히려 수행시간이 많이 늘어났으니까 여러분들한테는 조금 아마 유리할 겁니다. 그래서 조금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수행을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리해도 또 냐나로까 스님 스타일도 마찬가지야 그냥. 막 .. 이 스타일이 돼 가지고, 그래서 내까지 그러면 이제 아마 여기가 날아가야 될 거라.

 

어제 수마나 스님이 우리 선원을 왔었어요. 수마나 스님 알아요? 저기 있는 수마나 말고. 저기는 재가 수행자 수마나 우리 사무장이고, 출가하신 비구 스님인 수마나 스님이라고 있어요. 어제 전화가 와서 오늘 오겠다길래 오시오 그랬더니 왔어. 왔는데 가방을 이렇게 두 개를 이렇게 들고 왔는 거라. 뭔 가방을 스님이 욕심 많게 두 개나 들고 다녀? 내가 이러니까 씨익 웃으면서 앉아서 가방을 끌르는 거야.

끌르는데 보니까 요즘 이제 스님이 인제 허리 수술을 하고 허리가 안 좋으니까, 자기 딴에는 이게 스님한테 필요하겠다 싶어가지고, 온돌 돌덩이 같은 것에다가 전기를 꽂아가지고 따뜻하게 5분만 이렇게 충전하면 4시간을 쓸 수 있는 거라. 토르말린인가 뭔가도 나오고 하여튼 좋대. 그러면서 이걸 반드시 하루에 두 번씩, 복대까지 이렇게 돼있는 거라. 스님 이렇게 대가지고 앞에다 댔다가 뒤에도 댔다 이렇게 하라는 거라. 그래 잘 쓸게 하고 받았어요.

또 하나는 턱 끌렀는데 보니까 추을 거라고, 왜 스님들 겨울에 가사 이거까지 들면 삼의잖아요. 삼의로 가지고도 모자랄 경우에는 이렇게 조금 두껍게 만들어서 덮쳐 입는 게 있습니다.

추울 때 이렇게 덮쳐 있는 것을, 뭐로 만들었는지 하여튼 굉장히 두껍게 만들었어.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가져왔어요. 따뜻하게 해야 된다면서 그걸 가져온 거야.

 

나는 내가 아파도 그런 걸 장만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거든. 필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내 기준에서는 그게 필요하지 않는 것뿐이고, 그리고 그거 없어도 좀 아프면 조금 누워 있다가 또 조금 덜 아프면 또 앉아있다가 이러면 되지, 인제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

근데 하나 바뀐 게 그전에는 내 방에 내 방이 딱 스님 하나 자면 딱 맞을 방이라. 둘이도 못 자. 그 정도로 작아. 그런데 방에 이제 좌식으로 인제 책상을 놔놨는데 허리가 아프니까 잘 앉아 있지를 못해. 그래서 요번엔 큰 맘 먹고 인제 책상을 이렇게 하나 놨어. 그러니까 딱 그거 하나 바꿨지. 허리 아프면서. 그리고 다른 거는 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 수마나 스님이 그걸 가져왔다는 거라.

 

근데 그걸 받으면서 그렇게 물어봤어요. 그 돌은 스님 이거 스님 가지고 있느냐고, 스님도 필요한데 나한테 주는 거 아니냐고, 이렇게 하니까 자기도 똑같은 게 하나 있대. 응 그래? 그럴 것 같으면 받아도 되겠다 싶어서 받았어. 또 여기 덮쳐 입는 거는 그것도 물어봤어. 겨울에는 스님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님이 써라 하니까 자기도 똑같은 걸 하나 더 맞췄다는 거라. 그래서 두 개니까 걱정하지 말고 쓰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그걸 이제 받고 인제 스님들에 대한 염려들, 그다음에 테라와다 불교에 대한 얘기들, 이런 거를 하다가 나중에 저녁 때 돼 가지고 인제 돌아갔는데.

저녁에 이제 돌아가고 나서 스님이 그걸 이제 생각을 해봤어. 아, 그래도 참 테라와다 스님으로 살면서 참 그래도 이렇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도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수마나 스님이 꼭 나에게만 그래 하겠습니까? 다른 스님한테도 꼭 마찬가지겠지. 서로 위해주고 어려울 때 이렇게 도움을 줄 줄 알고,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할게요. 성내는 것을 없애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좋은 게 자애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애수행을 할 때 맨 처음에 ‘내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갖고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하면 행복해집니까? 물론 행복해지기는 합니다. 그때 일어나는 마음으로 인해서. 근데 그 행복해지는 것은 아마 오래 가지는 못할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원하고 그렇게 뭐가 되고 싶다, 뭐가 원하는 것을 해서 그것이 달성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지구상이 굉장히 복잡해질 겁니다. 우리나라의 각각의 사찰에서는 아침 저녁마다 남북 통일을 발원합니다. 스님들이 축원을 하면서. 그러면서 재난도 없고 건강하기를. 그래도 아직까지도 남북 통일이 안 되고 있고 아직까지도 재난은 나에게 닥치고 있고 나에게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 아닐까?

 

자애수행을 할 때도 이와 같은 방법을 동원을 해보면 조금 여러분들에게 유리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얘기를 해드릴게요.

스님같은 경우에는 아까 경험을 비춰봐가지고,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할 때 내가 행복하기를 하면서 떠올리는 것이 수마나 스님이 나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스님이 일으킨 마음에 대해서 내가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은 거기서 일어나는 행복은 조금 더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게송보다도 훨씬 더 오래 가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런 도반,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있어요? (수행자 ...) 왔다 좋다!

좋을 때 같이 기뻐하고 같이 행복해 하고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 어려울 때 그것으로 인해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특히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도반이면 더더욱 좋겠죠.

 

아마 그런 분이 있는 분들은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할 때는 그걸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자애가 형성되기 가장 좋은 것이 그겁니다. 자애는 친구에게 간에 일어나는 마음의 감정과 마찬가지라고 얘기를 합니다. 주석서에.

그런 친구가 없으면 그런 친구를 만들고, 또 그런 친구가 있어서 그런 일들이 있었으면 자애수행을 할 때는 그걸 먼저 떠올려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은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헤쳐 나가는 힘들이 생겨나갑니다.

그다음에 내가 몇 시까지 하게 돼 있죠? 내가 6시 50분이 기차 시간이거든. 일단 해봅시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자애는 펼쳐지는 게 아닙니다. 누누이 스님이 얘기를 하죠.

자애는 "내가 가득 차게 됐을 때 넘쳐나는 것이 자애"라고 이렇게 항상 얘기를 합니다.

 

다음에 두 번째가 스님은 아플 때 이 책상 하나 놓는 것으로 만족했거든. 그러고 나서 크게 불편한 줄을 몰랐어. 그런데 수마나 스님이 봤을 때는 부족한 거야 그것도. 그래서 그 스님이 만족하는 수준은 돌덩이하고 위에 옷 덮쳐 입는 것까지 갖춰야만이 좋은 거라.

그런 데다가 하나 또 숙제를 주는 게 뭐냐면, 스님 방에 바닥에 전기장판이 깔려져 있거든. 그게 더 몸에 안 좋다는 거라. 그러면서 스님 이거 당장 바꾸십시오. 온수 매트인가 하는 게 있대. 온수 매트로 바꾸래. 나 온수 매트까지는 바꿀 생각 없다. 그럼 자기가 하나 더 사주겠대.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어요. 그래서 됐으니까 온수매트는 내가 구입을 해놔 놓을게. 이제 얘기를 했어. 그러니까 다음에 올 때는 확인합니다 그렇게 얘기해요. 인제 나한테 임무가 떨어진 거라. 온수매트까지 구입을 해놔야 되는 거라.

 

어디까지가 만족하게 될까? 그전에는 그 스님이 오기 전에는 이 책상 하나만 있어도 나는 허리 아픈 것에 대해서 그냥 만족하고 그냥 지내게 됐는데, 이제는 조금 더 늘어났고 두 가지가 늘어났고, 또 인제 하나 더 늘어나게 될 판이 됐어. 이러다가 나중에는 방이 작으니까 방도 더 큰 데로 옮기라 하고, 뭐 이렇게 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많죠?

만족한다는 경계는 없습니다. 책상다리로서 만족할 수도 있고, 온수 매트까지 갖추었을 때가 만족할 수 있고, 단지 그것을 쓰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구로 쓰느냐? 이것이 내가 지금 조금 더 건강해지고, 또 내가 조금 더 몸을 추스르는데 이로운 것이다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그것을 도구로 쓰면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그 건강이 낫아지고 나면 누군가가 그 돌덩이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그 스님에게 또 주는 거라. 그럼 돌덩이를 사용했을 때까지도 만족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더 가지고 싶게 되고 이런 마음이 생겨나면 만족함이 끝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옷도 입어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합니다.

 

근데 과연 여러분들이 그것을 도구로 쓰고 있는가? 그것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쓰고 있는가? 자신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 없어요?
아무도 없어? 뻘쭉하게. 적어도 여러분들이 쓰고 있는 일용품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한계는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걸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하나를 얻고 나면 욕망이라는 놈이 하나 더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차는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가진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는 법들을 자꾸 배우려고 해야 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두 개가 있어도 똑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고, 세 개가 있어도 똑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또 그것이 세 개에서 또 하나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마음 상태가 될 수 있도록. 그게 만족할 줄 안다는 겁니다.

 

적어도 스님들은 그것까지는 할 줄 안다는 거라. 이게 있든 없든 필요한 도구로써 쓰고, 그리고 나서 필요한 도구만큼 쓰는 것은 무엇 때문에 써요? 왜 스님이 빨리 병을 나을려고 합니까? 병이 안 낫고 있으니깐 서울 올라와서 법문하고 싶어도 못해. 이번에는 토요일은 또 울산 대학원까지 지금 잡혔어. 하여튼 귀신같이들 알아. 조금 앓는 걸 보면, 갈래도 못 가는 거야. 드러누워 있어야 되니까.

스님들은 이 몸이라는 것도 도구로써 사용을 합니다. 도구로 쓸 수 있을 때 조금 더 부처님 법을 전할 수가 있고, 그리고 조금 더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터득할 수 있게끔 해주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몸을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나도 건강하게 해서 뭐 할 거라? 그거는 몸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거든. 지금도 여러분들도 그렇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런 옷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도구로 쓸 수 있도록 마음을 자꾸 먹으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도 없고, 또 그것에 대해서 없다고 하더라도 만족할 줄 안다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스님이 1학기 때는 누가 서울역에 마중을 나와 가지고 그 차로 와서 편하게 왔어요. 2학기가 되니까 이제 내가 셋째 시간이니까, 공부를 해야 되니까 오지를 못하거든. 그럼 이제 스님이 버스를 타고 이렇게 와야 돼. 근데 전혀 불편한 게 없는 거라. 교통적으로는 불편하고 뭐 하겠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불편함을 느끼질 않는 거라. 똑같은 마음의 상태로 오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여러분들 탁 보게 됐을 때 기쁨이 착 일어나게 되는 거라.

내가 사용하는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면 일어나는 것들은 반드시 마음이 행복해지고,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애 수행을 할 때 두 번째,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할 때 두 번째 떠오를 수 있는 대상들이 뭐냐면, 지금 내가 만족했던 일들에 대해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 변변찮은 음식도 아주 기쁘게 맛있게 먹었다. 그 얼마나 좋은 일이냐. 만족한 생활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애는 여러분들에게 점점 더 커지게끔 됩니다. 또 만족할 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의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여러분들 지금 똑딱똑딱하는 1분 동안 할 수 있는 건 딱 정해져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라서 똑딱똑딱 1분 동안에 그 사람은 스님 법문도 듣고 테레비도 보고 뭐도 보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도 똑같이 법문밖에 못 듣습니다. 똑같은 조건입니다. 1분 동안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숨 한 번 들이쉬고 한 번 내쉴 동안에 할 수 있는 것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대상이 일어났으면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것도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하든지 안 그러면 흐리멍텅하게 해가지고 그거 알아차림 못하든지 딱 정해져 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알아차림이 없는 것이고,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그 대상을 흐리멍텅하게 보지는 않는다는 거라. 딱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럼 적어도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만 있으면 만족한 생활들을 유지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조건이 되더라도 그 조건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가지지 않는 거라.

 

법문 듣다가도 누가 갑자기 “네 엄마가 돌아가셨다” 하고 듣더라도 그것뿐이라. 법문이 끝나기 전에는 내가 해야 될 거는 ‘아이고, 우리 어머니’ 하고 슬퍼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법문 듣는 것뿐이라. 2가지를 같이 할 수 없으니까. 그러면 그냥 법문 듣는 것뿐이라. 그리고 법문 듣고 나서 어머니 돌아가신 데 가서 바로 할 일들을 하면 되는 거라. 만족하는 생활들을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생활들이 자꾸 바뀌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60대 손 한번 들어봐요. 꽤 있네. 70대, 아무도 없어요? 60대가 그래도 최고 많은 나이네. 우리 만만한 게 운영위원장입니다.

“얼마나 당신은 덕을 쌓아왔습니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별로 안 행복하겠네. 큰일났다. 그럼 우짜노?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죽음은 언제든지 여러분들 곁에 찾아오는 것이고, 언제든지 오게 돼 있습니다. 내가 지금 죽음을 맞았다. 덕을 좀 많이 쌓은 사람은 그래도 편안할 거라. ‘아, 그래도 내가 참 잘 살아왔으니까’ 재산이 많고 명예가 높아진다 해서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아쉬운 것들이 많아집니다. 근데 공덕을 쌓아온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안해집니다. 내가 쌓아온 덕들이 많기 때문에.

 

과연 여러분들은 점점 더 한 살 한 살 많아지는데 점점 더 그렇게 공덕 쌓는 것들이 많아서 더 편안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있는가? 있어요? 예 해야지. (예) 그럼 여기 뭐하러 와서 배워? 만날 글로만 배우고 실천 안 할 것 같으면 그거 어디다 쓸 거라?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지금 눈앞에 죽음이 오더라도 여러분들은 후회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 2가지 중에 하나는 해야 될 거 아니라. 이 생에서 열반을 성취를 하든지,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지금 이 생에서라도 공덕이라도 쌓아서 좋은 조건에서 다음에라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될 거 아니라. 두 개 다 안 하면 뭐 어쩌겠다는 얘기라.

 

그러니까 불교를 배우는 거는 그겁니다. 그거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도 그거고, 불교를 배우는 것도 이 딱 두 가지 입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한 겁니다. 둘 중에 하나는 해라는 거라.

누가 발 느린 사람은 야구할 때 홈런 쳐버린다고 그러대. 공덕 쌓기 싫으면 빨리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 두 개는 같이 나가야 되겠지만은 명심해야 되는 건, 공덕 쌓는 일이 적어지면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것도 더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빨라지려면 요것도 많아져야 됩니다. 이거는 똑같이 갑니다.

교학을 배우는 거와 수행하는 것이 똑같이 양 바퀴로 흘러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완전한 깨달음이 얼마만큼 남았다, 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얼마만한 공덕을 쌓아서 얼마만큼 지금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누리는 게 많은가? 그걸 생각하면 ‘어, 내가 부자다’ 아니면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고 뭐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 운영위원장님 같이 ‘아이고’ 이렇게 해버리면 열반은 저 멀리 가 있다는 거라. 그걸 항상 명심을 하라는 거라.

 

지금 현재 죽음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공덕을 쌓도록 하라. 나이가 1살 많으면 많아질수록 공덕 쌓는 일들이 많아져서 그것으로 인해서 누리는 것들이 더 많아지게 해야 되는 거라.

오늘 끝나고 나서 공덕 2개 쌓았다. 5계 내 오늘 지켰다. 또 스님 법문 오늘 들었다. 2개는 했다. 다 머릿속에 넣고, 저녁에 잘 때 그 두 개만 생각해도 행복해.

내일 돼서는 뭔가 또 하나 더, 애들 뭐 누가 성질 건드리는데 화 안내고 꾹 참았다. 오늘은 3개 했다. 조금 조금씩 많아져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저녁이 됐을 때 ‘음, 잘 살았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면 내가 행복하기를하고 얘기를 하게 될 때 가슴이 벅차오르게 됩니다. 근데 그게 안 되면 공덕 짓는 게 없었다는 거라. 단순히 개념으로서만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것은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실제 여러분들이 행하는 것들이 얼마만큼 뒷받침이 되느냐 하는 것들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오늘은 폼이 테라와다 불교사는 못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같이 겸해서 하도록 할게요.

오늘 10시부터 온 사람들은 다리가 좀 많이 아프죠? 다리 한번 펴봐 봐. 좀 편해요? 그래야 되는 거라. 괜히 스님 앞이라고 다리 펴지도 못하고 이럴 것 같으면 갑갑해. 몸도 아프고 그로 인해서 마음도 꼬여져 있게 돼 있으니까 그 법문이 바로 안 들리게 되는 거라. 다리 한번 착 펴고 나니까 그 전에 듣는 스님 소리하고 지금 듣는 거 하고 조금 차이가 나버리게 되는 거라. 장애를 극복해 버리고 나면 그렇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것 어려운 일들을 경험을 하고 지나가 버리고 나면 참 편안해집니다. 똑같은 것들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여러분들은 심념처 수행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 자 사사나 스님 따르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봐. 아무도 없어? 그냥 뭐라 할까 봐가지고 그냥. 내가 언제 사사나 스님 뭐라 하더나? 심념처를 하지 마라고 그랬나?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는 부분은, 그냥 그 대상을 알아차려가지고는 극복하기가 힘이 듭니다.

‘화가 일어났네’ 화가 일어난 거 알아차리고, 그로 인해가지고 내가 화가 일어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화가 일어난 마음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선한 마음으로 바뀌어서 화가 일어난 거하고 관계없이 마음은 고요해지고 편안해집니다. 그럼 화가 일어난 것이 쭉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난 것, 우리 한국 스님들 잘하는 거 있죠. ‘이 뭐꼬?’ ‘이놈이 이게 뭐꼬?’ 하고 그거 죽을 때까지 그거 파고 있는 거라. 방법이 잘못된 것뿐이지, 그 하는 열의라든지 이런 거는 굉장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해봐. 그 열의를 따라서, 화가 일어난 게 이놈이 왜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가? 이거 내가 끝까지 한번 봐가지고 그걸 느낌으로 보든지, 아니면 마음의 현상으로 보든지, 아니면 육체적인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담마의 현상으로 보든지 간에, 요걸 갖다 끝까지 쫓아가가지고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가지고 끝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확 보고 나면 그냥 뒤통수에서 바람이 불듯이 시원해져 버립니다.

하나를 극복하고 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은 것들이 닥쳤을 때는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누가 그걸 가지고 나를 건드려 가지고 화가 일어날 것 같죠? 안 일어나집니다. 정신이 바짝 들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버리게 됩니다.

 

닙비다(nibbidā)라고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더러운 것들 그것이 가진 것이 굉장히 부정하고 이건 내가 상종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그거로부터 엄마야 하고 그냥 발을 탁 빼는 거하고 마찬가지입니다. 팍 떨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떨어져버리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멀리 벗어나는 것 때문에 시원하게 탁 다가와지게 되는 거라.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날 때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한 번씩들은 강하게 한번 부딪혀 보십시오. 그래서 그 강하게 부딪쳐서 그것을 한번 넘어서 보십시오.

넘어서는 것이 없으면 똑같은 패턴으로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에서 크게 진척은 있지는 않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태국 갔을 때 그랬어요. 하도 수행이 안 되기에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으니까 안 돼. 뭘 대상을 이렇게 알아차리라고, 배를 알아차리라고 하고 있으면, 거기 가서 내가 머무르고 있는데 어떡할 거라. 한국 방식으로. 그러니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건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야. 아무것도 없어.

마음은 편안한 상태인데도 내가 뭐하고 있느냐는 거라. 이거.

그래서 하도 안 되기에 하루는 사람들에게 나를 좀 묶어라 그랬어. 그래서 딱 묶어가지고 3일을 있어 봤거든.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먹고 그냥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는 거라. 몸도 다 묶어 놨으니까. 그 느낌들이 오는 것들을 내가 안 알아차리려 해도 안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라.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냥 그거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라. 내가 다리를 풀 수가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감각이 없어졌다가 하루 지나니까 또 시원해졌다가 별 현상들이 다 일어납니다. 나중에는 무덤덤해지고.

 

그런데 진짜 강하게 온 걸 갖다가 그래 이왕 묶여 있는 거 한번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함 보자. 현상이 변하는 걸 갖다가 알아차려야만이 이게 뭔가 1단계 1단계 뛰어넘어갈 건데 무상한 성품을 갖다가 알지 못하면 일어남 사라짐 아무리 관찰해봐야 소용이 없는 거라.

그래서 그 느낌의 무상한 성품들이 그냥 부서지듯이 이렇게 일어나는 것들을 보고, 나중에는 3일 지나고 나니까 완전히 환하게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 아픔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대상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 보이는 대상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들리는 대상도 끊임없이, 그게 전에 알아차린 것보다도 훨씬 예리하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거라.

‘아 그래서 인제 됐다’ 해서 다리 묶은 걸 풀었어요. 묶여있는 거하고 푼 거 하고는 전혀 차이가 없어져 버립니다.

하나의 현상들을 탁 뛰어넘어 버리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그다음에는 조그만하게 뭐 통증 오고 뭐 하는 거 전혀 문제 안 됩니다.

다리를 베여가지고 누가 잘못해가지고 다리가 살덩이하고 이렇게 다 떨어져 나갔어. 그래서 44바늘을 기워야 되는데, 내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거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고, 끊임없이 통증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것만 알고 있으니까, 마음은 고요해지는 거라. 밤새 진통제 없이 있어도 전혀 아픈 줄을 몰라. 잘 시간 되면 그냥 자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그 다리 이렇게 돼 있는 거 보고 자기들은 잠을 못 자고 나는 잘 자고 있는 거라.

하나를 뛰어넘어버리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은 크게 문제가 안 돼.

 

여러분들도 그런 것들을 자꾸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려운 것들을 한 단계 반드시 뛰어넘어 봐라.

그러면은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게송을 암송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해지는 순간들이 분명하게 일어나면서 변하는 현상으로써 이렇게 떠오르게 됩니다. 그럼 그 행복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번 행복하기를 하면 쭉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행복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그냥 보여버립니다.

 

시간이 넘어가지고 이걸 12가지를 다 할 수가 없어서, 이 부분은 정리해가지고 홈페이지에 올려줄게요. 됐죠? (예)

어쨌든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각각의 스님들에게 강의를 듣고 또 수행을 하고 할 때 왜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단순히 그냥 와서 새로운 거 배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바뀌기 위한 겁니다. 조금 더 여러분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습관들이나 경향지어진 것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것들이라. 그래서 내가 하루빨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이걸 지금 배우고 있는 거라.

그 목적을 자꾸 잊어버리면은 그냥 공부만 할려고 그럽니다. 어디다 쓸 거라? 그거 공부해 가지고.

 

세상의 여덟 가지에 포함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로까담마(lokadhamma)라고 하는 것을 쫓아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로까담마를 벗어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은 테라와다 불교사는 하나도 못했네. 요거 그대로 가져오십시오. 프린트물을.

 

이당 메- 바-와낭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이와 같은 수행 실천 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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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1. 불교 개론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3.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1. 불교 개론  BC 6세기에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는 아소까 왕 시대인 BC 3세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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