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2016년 경주 안거해제_작은 행복에서 큰 행복으로 나아가라_20161016

담마마-마까 2025. 1. 27. 18:04

 

https://youtu.be/SB5RVWiLun8?si=ZKvoosmUDqrzzTr9

 

* 2016년 경주 안거해제_작은 행복에서 큰 행복으로 나아가라_마하보디선원_20161016

 

안거 결제할 때 스님이 여러분들한테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들었던 용어가 '미따바닌(mitabhāṇin)'이라고 하는 용어를 들어서 얘기를 했습니다. "말하는 자격을 갖춰라" 하면서, 생각을 하고 나서 말을 하고, 그 요점을 갖춰서 반드시 말을 하고, 공허한 말을 하지 않고, 또 그 말하는 것들이 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자격을 잘 갖추도록 하라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잘 지켜왔습니까? 법문 그날 듣고 나서 다 까먹어 버리고 생각도 안 하고 있었죠? (수행자: 조심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해 온 분들은 그래도 오늘 같이 이제 안거해제 하는 날 그래도 이번 결제는 알차게 잘 보냈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 겁니다.

근데 그렇게 하려다 보면 참 무진 애를 써야 됩니다.
이때까지 말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지도 않았었고, 먼저 남을 배려하면서 말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무진 애를 써야 됩니다. 사실은 그것이 바른길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이 중도라는 용어로 맛지마 빠다(majjhimā padā)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중도라는 것이 이쪽과 저쪽을 떠나 가운데를 중도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질을 완전히 싹 바꾸어 놓는 걸 중도라고 얘기합니다. 잘못 해석하면 맛지마를 그냥 고행도 아니고 쾌락에도 속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을 중도라고 착각을 하는데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도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아까 결제할 때 말에 대해서 조심해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하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굉장히 자기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말을 하나 할 때도 항상 신중하게 해야 되고, 남이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도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되고, 이렇게 하려면 마음에 안 들고 또 얼마나 답답할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중도라는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래야만이 자기의 마음이 바뀌고 삶의 질이 바뀌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중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지켜왔으면 적어도 조그만 거 하나로 인해서도 내가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렇게 행복들이 오는구나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결제가 참 중요한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뭔가 크게 탁 나한테 다가와서 그것으로 인해서 큰 행복이 일어나는 것들이 되면 참 좋겠는데 그리되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작은 행복으로부터 큰 행복으로 나아가지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작은 행복을 떠나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큰 행복을 얻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그런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말 하나에도 이렇게 적어도 3개월 지켜 놓으면 ‘아, 이런 행복들이 있구나’ 하는 걸 알면은 인제 그런 작은 행복으로 인해서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거라.

이제는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듣는 것까지 해보겠다, 그렇지 않으면 보는 것까지 해보겠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 정도 나아가면 이제 그러한 틀이 완전히 확 바뀌어 버리게 되는 형태가 되는 거고.

 

그래서 생각하는 것들도 모든 것들이 무상 고 무아에 맞게끔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한 집착도 점점점 엷어지게 되는 거고, 그러니 당연히 배려하는 것들도 많아지게 되는 거고, 그러면 자아에 대한 존재 욕구들도 점점 엷어져 나가서,

어느 순간에 돌아보면 ‘어, 나에게는 이런 계금취나 이런 것들이 떨어져 나갔네’ 하는 것들을 돌아보면 탁 금방 알 수가 있게 되는 거고, ‘더 이상 의심하지도 않게 되었네’ 하고 금방 알게 되는 거고, 그래서 ‘나는 언제 어느 정도까지 도달하면 저 목표에 도달하겠다’ 하는 게 보입니다. 그런 상태까지 이제 이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부처님 가르침을 특히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법의 길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길은 작은 행복에서 큰 행복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이나 교도들이 부처님을 참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자이나 교도들이 와서 부처님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만날 작은 행복으로 인해서 큰 행복을 얻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하는데 그럴 것 같으면 빔비사라 왕은 매일 같이 작은 행복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행복은 더 크기 때문에 부처님보다 더 큰 행복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비꼬게 됩니다. 그게 맞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작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따르고 했을 때 얻어지는 행복을 그걸 작은 행복이라고 그럽니다. 세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서 얻어지는 행복들은 그건 세속적인 행복인 것이지 법의 행복에 속하지는 못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거는 부처님이 그것을 작은 행복을 버려버려야만이 큰 행복이 온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어서 그렇게 큰 행복을 얻었으면은 그 큰 행복이 바뀌지 않은 상태가 돼야 되는데, 그런 상태가 됐을까?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면 도와 과 밑으로 떨어집니까, 안 떨었습니까? 떨어지질 않죠!

또는 삼매를 경험해서 삼매를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하는 법을 알 것 같으면, 삼매 들고 있는 사람은 그 밑으로 떨어지질 않습니다. 적어도 삼매에 들어있는 동안에는. 그마만큼 큰 행복은 없습니다.

 

근데 쉽게 말하면 큰 행복이라는 것은 이러한 능력에 속합니다.

내가 지금 그 삼매에 들어있든, 그렇지 않고 도와 과에서 더 해야 할 일이 있든 없든 간에, 그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돼야만이 그걸 큰 행복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빔비사라왕이 조그마한 행복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 상태에 이르게 됐을까? 그거는 장담을 못한다는 거라.

재산으로 인해서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재산으로 인해서 불행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고, 그 행복이 없을 수도 있는 거고, 자식이든 뭐든 다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법의 행복은 되지 못한다. 작은 행복조차도 되지 못한다 하고 애기합니다.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그런 답을 합니다.

나는 적어도 내가 고요하게 삼매에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일주일 동안 삼매에 들 수 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즐거움을 얻으면서 누리고 산다는 거라.

그 삼매에 들면 어떻게 돼요? 말도 끊어져 버리고 상 수 멸이라고 그러죠? 느낌도 끊어져 버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그대로 대상만 인지하면서 행복을 누리면서 그대로 지낼 수 있다는 거라. 그럴 때는 누가 옆에서 천둥이 치든 번개가 치든, 얼마 전 같이 여기 같이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그거에 개의치 않고 삼매에 빠져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꼭 삼매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법문을 듣다가도 그 법문 듣는데 찰나 삼매가 지속적으로 쭉 일어날 것 같으면 그 소리만 오로지 들리는 것이지, 주변에 뭔 소리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면 그 법으로 인해서 기쁨들은 계속 가지고 행복을 누리면서 그 상태를 유지해 나갑니다.

 

부처님은 적어도 그걸 할 줄 안다는 거라.

빔비사라왕이 그걸 할 줄 아느냐? 못하는 거라. 그럼 일주일 아니라 단 하루라도 그렇게 있을 수가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 단 하루라도 그렇게 있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법의 기쁨에 젖어가지고 하루 동안 계속 즐길 수 있을 자격을 갖췄느냐는 거라. 그러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법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아주 작은 것 같지만은 그 작은 것들이 결국은 본인에게는 행복을 가져오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는 자격을 갖추라고 당부를 했으면 그걸 갖추도록 열심히 노력했을 때 ‘아, 이게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의 소중함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가끔씩 그런 경우들을 봅니다. “스님, 법문해 주고 나면 너무 고마워서 항상 스님한테 고마운 마음을 지닙니다.” 하고 그럽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이 드는 생각은 뭔지 알아요? ‘아직 공부 더 해야 되겠습니다.’

법의 기쁨을 알 것 같으면 부처님이 가르치는 그 법의 소중함을 오히려 더 알게끔 되는 것이지, 그걸 전해주는 사람에 대해서 소중함을 가지는 건 아니라는 거라. 그 소중함을 항상 가슴에 가지고 있지만, 먼저 말에서 튀어나와야 되는 것은 “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리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하는 말이 먼저 튀어나와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적어도 살아가면서 그런 기쁨들은 자꾸 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오늘이 스님들에게는 해제의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해제를 하고 또 다른 날들을 지내게 됩니다. 여러분도 안거를 했던 분들도 아마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재가자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은 지금 시점에서 내가 얼마만큼 내가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을 잘 지켜왔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거는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생각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계를 받았습니다. 오계를. 근데 계라고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건 지키기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데, 그 계가 가져오는 것들로 인해서 평온하고 고요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계가 너무나 좋습니다. 그 계로 인해서 나는 행복감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러면 더욱더 계를 더욱 잘 지키려고 하게 돼서 더 큰 행복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을 지키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조그마한 거 하나라도 알아차림을 쭉 유지해 나가면서 아,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은 그럼 그걸 계속 더 할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언제든지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끔 이어나가게 될 때 ‘아, 이것이 진짜 나에게 주는 행복은 크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럴 때 나에게는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혜는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들을 내가 지혜를 개발한다고 해서 개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만큼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그것을 체험해서 알게 됐을 때 지혜는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물을 아까도 얘기했지만, 법의 현상에 맞게끔 탁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을 때 그런 중도의 눈이 떠졌을 때 지혜는 일어나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계정혜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역할들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음부터라도 이런 자리들이 있고 할 거 같으면 조금 더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끔 자꾸 살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앞에 닥친 이거, 조그마한 이것, 이것들이 나에게 큰 행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공양 올리는 것, 힘들게 느낄 것 같으면 그건 힘든 겁니다. 근데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가져온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을 할 때가 행복과 기쁨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법을 따르게끔 만들어주는 거라.

대상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 대상들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오히려 그런 대상을 만들어준 스님들한테 “아이고, 스님 고맙습니다.” 하고 얘기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법을 빨리 볼 수 있다는 걸 항상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작은 행복도 헛되이 하지 말고 큰 행복으로 나아가라" 하는 얘기로써 간단하게 법을 설했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질문 있는 사람 있어요?

우리 또, 그리고 선원에 계신 악가삿도 스님 뭐 따로 할 얘기?

 

- 악가삿도 스님 : 아마 사사나 스님께서는 내일 정도에 퇴원하실 것 같고요. 사사나 스님이 오시면은 우리 마하보디 선원도 좀 더 힘이 나지 않을까? 더 활기차게 되지 않을까? 안정적이 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 사사나 스님 건강이 좋아졌고 이번 지진 피해로 선원에는 별다른 피해없이 무사하게, 태풍도 무사하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도량이라는 곳이 안전한 곳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항상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항상 선원에 오셔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계율을 지킬 수 있고 그리고 마음은 항상 청정해 있으면 본인 스스로가 행복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 빤냐와로 스님 : 하나 더 당부드릴게요.

악가삿도 스님을 자꾸 사사나 스님 아들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가삿도 스님은 또 다른 테라와다의 출가 비구 스님입니다. 그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스님 개인적으로는 사사나 스님하고 악가삿도 스님하고 연결되는 것들을 좀 안 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목으로 볼 것 같으면 출가자로서 참 훌륭한 재질을 지닌 스님이 악가삿도 스님입니다. 여러분들 그거 잘 모르죠?

 

출가한 스님들은 존경받을 만한 행위들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교리도 많이 배우고 또 수행도 많이 하고 해야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건데, 중요한 게 이것 말고 세 가지가 더 있습니다.

집착하는 것들을 얼마만큼 끊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내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아직은 어리지만은 사사나스님 보다도 오히려 악가삿도 스님이 끊기가 더 쉬운 재질이라는 거라. 그리고 얼마만큼 알아차림을 유지시킬 수 있느냐는 거라. 악가삿도 스님은 훌륭한 그런 재질들을 타고났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세 번째가 , 나의 것이라는 자아 관념들을 얼마나 버릴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런 부분에서는 세 가지 다 공히 굉장히 중요한 재질을 타고 났어요 악가삿도 스님이.

 

그래서 어찌 보면은 저 스님이 사사나 스님을 시중하다가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수 있을 때 여러분들이 그걸 또 열심히 뒷바라지 해주는 것들도 마하보디 선원을 봐서도 크게 이로움이 되는 것이라고 봐집니다. 그래서 아직은 얼마 안 된 스님이지만 그래도 훌륭한 재질을 갖춘 스님들은 아낌없이 자꾸 보좌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사사나스님보다는 악가삿도 스님한테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지금 뛰어나가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런 좋은 재질을 타고 났으니까 스님도 그런 재질을 괜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헛되이 자꾸 보낼려고 하지 말고, 공부할 수 있을 때 공부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끝.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