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5. 제1차 결집
6. 제2차 결집
7. 제3차 결집
10. 제 4차 결집 - 불교 경전의 문자화
16. 현재의 테라와다 불교(테라와다 불교의 원칙과 특징들)
5. 제1차 결집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상가가 분열될 위협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꼬삼비의 두 비구 스님간의 다툼과 부처님의 사촌 데와닷따(devadatta)와의 대립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돌아간 후에 상가 분열의 위기나 담마의 그릇된 해석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그룹 중의 하나인 수밧다(subhadda)라는 비구 스님은 부처님이 완전하게 열반하신 것을 슬퍼하고 있던 비구 스님들의 모임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스승께서는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구 스님들은 부처님에게 더 이상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연장자인 마하깟사빠(Mahākassapa) 스님이 수밧다의 이 의견을 들었을 때,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담마는 쇠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개의 piṭaka(Sutta와 Vinaya)를 편찬하려는 의도로 비구 스님들의 결집모임을 청했습니다. 이 첫 번째의 모임이 제1차 불교결집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결집의 동기가 진정한 담마의 쇠퇴 가능성에 대한 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흥미롭습니다. 후에 미륵불(Metteyya Buddha) 이론의 발전 또한 그런 식의 의견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하깟사빠 스님은 부처님의 가사를 받은 유일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연장자 스님으로서의 권한으로 제1차 결집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두타행 수행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승보다 더 새 가사를 입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과 옷을 교환했습니다. 후에 어쩌다 일어난 이 일이 권위 양도의 상징적 의식이 되었습니다.)
아난다는 최초의 불교결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낭송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25년 동안 부처님을 시봉한 수행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그에게 시자를 요청하자 아난다는 어떤 조건만 허락되면 기꺼이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조건 중의 하나는 부처님이 무슨 설법을 하던 그에게 다시 반복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난다야말로 제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낭송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sutta)은 “Evaṁ me suttaṁ(에-왕 메- 숫땅)” 이라는 구절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내(아난다)가 들은 바로는” 이라는 뜻입니다.
붓다의 열반 날짜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빨리어 자료에 의하면 대략 BC 483년이었습니다. 독일 학자 Bechert는 BC 400년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승불교 구전에서는 매년 우기의 끝에 경전(sutta)에 점을 찍어 기록한 중국의 시대 계산 표시법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BC 380년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자료에 제1차와 제3차 불교결집만 있고, 테라와다 구전의 제2차 결집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BC 380년 이 해는 대승불교 구전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100년 후에 열린 제2차 결집을 BC 3세기로 보기 때문입니다(아소까왕 시절).
그러나 대승불교 쪽에서도 진정한 담마의 쇠퇴론(말법사상)을 주장하는 천태종에서는 예외입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담마의 쇠퇴는 AD 1055년에 시작되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1,500년 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테라와다 자료의 BC 483년을 지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입멸 날짜 규정의 중요성은 그리스, 중동, 중국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불교가 더 이상 인도나 동남아시아만의 종교가 아닌 국제적인 종교인 이상, 불교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역사적 사실과의 비교는 불가피합니다.
그것은 또한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발생한 시점에 대한 논쟁과도 뚜렷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이로운 점은 만일 우리가 부처님 탄생의 날짜를 명확히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불교경전에 있는 많은 신화적인 이야기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쉽게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제1차 불교결집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결집은 부처님 열반 3개월 후에 열렸습니다. 결집의 목적은 불제자들의 지침서로서 두 개의 모음집(Dhamma와 vinaya)을 편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집을 전후하여 비구 스님들 사이에 대립과 이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1차 결집을 열게 된 동기가 수밧다 스님의 발언으로부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집을 마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뿌라나(Puraṇa)라는 스님에게 그 결집에 만족하는지 물었습니다. 뿌라나 스님은 “나는 결집에서 편찬한 모음집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들은 담마만을 따를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이끈 제1차 불교결집에서 두 개의 모음집(Ānanda에 의한 dhamma와 Upāli에 의한 vinaya)은 성공적으로 편찬되었습니다. 500명의 아라한들이 그 결집에 참석하도록 뽑혔습니다. 그리고 함께 낭송함으로써 그 편찬을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1차 결집에 대한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부처님은 모든 그룹에서 아라한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비구니 스님은 초청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이미 아라한에 도달한 재가자들이 초청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제기되는 질문들에 의해 우리는 제1차 불교결집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이라도 출가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포살(uposatha) 의식은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따로따로 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포살이 진행될 동안에는 비록 아라한에 이른 재가자라 하더라도 그 의식에 참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보수적인 비구 스님들이 주축이 된 결집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재가자들에 대한 그릇된 대접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의지와 동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엔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제 1차 결집에 아난다는 부처님의 주시봉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을 들어서 아는 최초의 연장자 스님이란 점을 모든 비구 스님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뽑혔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는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을 시봉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그는 부처님께 너무 인간적으로 가까웠을 것입니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아난다에게 아라한이 되라고 다그치자 그가 얼마나 빨리 아라한이 되었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경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Suttantika)이나 율(vinaya)을 계속 암기하는 다섯 명의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디가바나까(Dighabhāṇakā), 맛지마바나까(Majjhimabhāṇakā), 상윳따바나까(Saṁyuttabhāṇakā), 앙굿따라바나까(Anguttarabhāṇakā) 그리고 위나야다라(Vinayadhara)가 그들입니다.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를 위한 전문가는 생략되었습니다.
디가바나까(Dighabhāṇakā)에 의하면 아난다는 걸어서 혼자 결집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맛지마바나까(Majjhimabhāṇakā)에 따르면 땅속으로 돌진하더니 결집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난다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묘사는 테라와다 구전에서도 아라한의 미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경우들이 삼장(Tripiṭaka)에서 발견됩니다.
그런데 제1차 결집에서 아난다는 경(sutta)을, 우빨리는 율(vinaya)을 암송할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경들은 유명한 문장 “evam me suttaṁ” (me=Ānand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되며, 언제 부처님이 그 장소에 머물고 계셨고 누구에게 설법을 하셨는지를 나타내는 두 번째 문장이 뒤따라 나옵니다.
한 학자가 이런 종류의 경전에 나오는 도시 이름의 횟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웨살리(Vesāli)라는 도시가 1,000번 이상 언급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라자가하(Rājagaha) 역시 빈번히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는 작은 마을보다는 주로 큰 마을에서 설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제1차 결집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살(uposatha) 날에 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은 서로 따로 모여 계본(pāṭimokkha)을 독송하였습니다. 재가자 상응부(Gahapati Saṁyutta)에서 언급한 아라한을 이룬 재가 신도들 또한 있었습니다. 처음에 상가라는 말은 빅쿠(bhikkhu), 빅쿠니(bhikkhuni), 우빠사까(upāsaka), 우빠시까(upāsika), 네 그룹의 모든 불자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데 있어 그들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재가자들은 가정을 가진 사람들로서 스님들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뿐이라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 출가가 더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해석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선 출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오늘날의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조직인 상가를 만드신 목적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이라도 평등하게 참여하여,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담마 수행에 좀 더 편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은 인도 역사상 여자(비구니)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연장자 아라한 비구니라 할지라도 가장 나이 어린 비구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부처님께서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상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상가 안에서는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스님들은 부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길잡이로서 법(dhamma)와 율(vinaya)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결집에서 경(sutta)과 율(vinaya)의 다섯 가지 길잡이(보호자)가 생겼습니다.
우빨리(Upāli)는 율(vinaya)의 보호자가 되었고,
아난다(Ānanda)는 장부 경전(Dīgha-nikāya),
사리뿟따(Sāriputta)의 제자들은 중부 경전(Majjhima-nikāya),
마하깟사빠(Mahākassapa)는 상응부 경전(Saṁyuṭṭa-nikāya),
아누룻다(Anuruddha)는 증지부 경전(Aṅguttara-nikāya)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들은 경과 율을 암기하고 보존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을 모든 다른 경전(nikāya)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부 경전(dīgha-nikāya)의 34경, 중부경전(Majjhima-nikāya)의 154경, 상응부 경전(Saṁyutta-nikāya)의 대응 경들과 증지부 경전(Aṅguttara-nikāya)의 번호로 정리된 경들이 그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담마를 이해하는 그릇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방법으로 전함에도, 점진적 가르침(Ānupubbīkathā)이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에게 연기(paṭiccasamuppāda)에 대하여 설명할 때, 보시(dāna) 와 지계(sīla)를 함으로써 천상(sagga)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보시와 지계는 원인을 가리키며, 반면 천상은 그것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보시에 관한 이야기(dānakathā), 지계에 관한 이야기(sīlakathā) 그리고 천상에 관한 이야기(saggakathā)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그러나 매우 효과적으로 근본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제 1차 불교 결집의 성과는 경장(sutta piṭaka)과 율장(vinaya piṭaka)의 편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장경(piṭaka)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주석서는 훗날 불자들 스스로가 덧붙인 것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부 경전(Dīgha-nikāya)에 있는 유명한 경전인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의 끝부분에서 부처님의 시신은 다비 후에 여덟 부분(aṭṭhadoṇa)으로 나누어졌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에 대한 주석서에 의하면, 유골이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이 언급은 스리랑카에서 덧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부경전(Dīgha-nikāya)에 있는 대반열반경이 BC 3세기에 마힌다 장로(thera mahinda)에 의해서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전해진 후에, 스리랑카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뒷부분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비구 스님들은 대사(MahāŒvihara)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부분은 대사파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전 끝에 덧붙여졌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대반열반경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경전의 정확한 부분이 아니라, 인도로부터 전해진 원래의 부분에 스리랑카에서 만든 추가분을 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경장(sutta piṭaka)이 제1차 결집에서 낭송된 경전과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예로는, 불종성경(Buddhavaṁsa)은 28장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석서는 26장까지뿐입니다. 이것은 불종성경에 대한 주석서가 인도에서 써졌을 때까지는 불종성경도 27, 28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종성경을 바탕으로 그 주석서를 쓴 사람은 26장 이외에 27장, 28장의 주석서는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불종성경은 28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27장, 28장이 스리랑카에서 대사파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삼장(tripiṭaka)이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삼장과 똑같은 것일 수는 없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삼장과 똑같다고도 이해해야 합니다.
제1차 결집에서 500명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과 율이 완성된 후에, 마 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들을 보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세 번째 모음집인 논장(Abhidhamma piṭaka)은 제1차 결집에서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에 편찬되었습니다.
BC 3세기 아소까 왕 시절에 열린 제3차 불교결집에서 회의의 의장이 된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Tissa) 비구 스님이 논장(Abhidhamma piṭaka) 7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사(KathāŒvatthu)라는 책을 썼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것으로 논장(Abhidhamma piṭaka) 7권은 불교 합송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경·률·론의 삼장 중에서 경장과 율장은 이 제1차 결집 때 확정한 것입니다. 논장에 대해서는 사서에는 제3차 결집 때까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정해진 경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현대의 학계에서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경전을 정리했지만 필기 용구나 종이 등으로 써서 기록하는 고대 중국이나 고대 서양의 문화와 달리 고대 인도에서는 말해진 말을 통째로 귀로 기억해서, 사람에게 전할 때도 들어 기억한 그대로를 입으로 주창하는 구두 전승의 문화였기 때문에 글로 쓰여진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모른다」에 머물지 않고 현대 우리의 기준을 적용시켜 「구전에서는 기억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실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그대로 올바르게 보존했을 리가 없다. 현존하는 빨리 경전은 기원 전후에 스리랑카에서 필기되어 이후의 것으로 거기서부터는 실수가 거의 없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의 약 5백 년간은 잊거나 잘못하거나 하여 경전의 내용이 없어졌거나 덧붙여졌거나 이것저것 혼합되어 있을 것이므로 현존하는 빨리 경전은 결국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잘못입니다.
우리 현대인은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누가 해도 기억에 의한 전달은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지만, 고대 인도인이 필기가 아니고 암기를 전달· 보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암기가 필기보다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구두 전승 문화의 인도에서는 긴 이야기도 기억하기 쉽게 여러 가지로 궁리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빨리 경전도 이와 같이 시의 형식으로 말해지거나, 교설의 테마가 처음에 열거할 수 있는 목차가 되어 있거나, 수를 맞추거나, 정해진 리듬으로 암송되도록 소리의 수를 조절하거나, 소중한 문장은 반복해 나오거나, 여러 가지 궁리를 해서 즐겁고 확실히 배우면서 기억할 수 있도록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억하기 쉽게 구성되어진 빨리 경전은 진지하게 말씀한 부처님과 진지하게 듣고, 익히고, 전해 온 제자들의 끊임없는 전통 가운데에서 비록 3천년, 1만년이 지나도, 어설픈 기억이 되거나 내용이 애매하게 되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전통을 계승해서 경전을 계속 전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스님들이 산 증인이니 확인해 보면 잘 알 것입니다.
한편 필기에 의한 한역 불전은 모처럼의 역본이 전란으로 불타거나, 베껴 쓸 때에도 결함이나 추가 기입이나 한자의 실수 등이 상당히 있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하여 빈틈없이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학계에서는 「한역 불전도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는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있지만, 그것은 필기에 의한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하기 전의 원본이 구두 전승이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존 빨리 경전이 제1차 결집으로 확정된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 것입니다. 실제로 현존 빨리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코 1구 1언도 바꿀 수 없다.」라고 규정지은 테라와다가 지켜 전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한 상태로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쓰는 것에 의지한 한역 경전이 어느 부파의 것도 완전한 상태로 전하는 것 없고 그 내용도 많이 개편된 자취를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 제 1차 결집의 율장 편찬 ❍
학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거드름 피워보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빨리 경전에서 말해지고 있는 그 내용을 직접 읽어 보면 그것이 제1차 결집 때에 빈틈없이 확정해서 그것이 이후에 결코 흔들림 없이 전해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 율장은 제1차 결집에서 확정했을 때로부터 현대까지 무엇 하나도 변함없음을 간단하게 압니다. 계율은 부처님 한 사람만이 정하거나 폐지할 수가 있는 권리가 있고 제자들을 위한 법률이기 때문에 불멸 후에 증가하거나 줄어들거나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1차 결집 이전인 부처님 생전에 확실히 정해졌습니다.
부처님은 열반 직전에 「계율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사소한 것이라면 폐지해도 좋다」라고 제자들에게 허락했지만, 제자들 자신이 무엇 하나 폐지하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들이 새롭게 조항을 덧붙이는 것은 논외입니다.
율장의 내용이 제1차 결집 당시나 현대에도 변함없는 것은 부처님의 생존 당시부터 행해지고 있던 포살이라고 하는 행사로부터도 엿볼 수 있습니다. 2주일에 한 번의 포살마다 근처의 제자들은 전원 한곳에 모이는 것이 의무입니다. 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제자들은 계율의 모든 항목을 독송하여 그 하나하나에 대해 각자의 위반 유무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계율을 서로 확인하니까 조항을 적당하게 생략하거나 덧붙이거나 내용을 바꾸거나 하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고 매회 마다 전부 독송하기 때문에 싫어도 기억해 버립니다.
어느 경전에 「백오십 가지의 계율을 지킨다.」라는 문언이 나오는데, 그때는 계율의 조항이 아직 그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 열반 때까지 좀 더 증가해서 결국 227가지 정도로 되었습니다. 불멸 후는 전혀 증감이 없는 채 그 계율이 그대로 현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빨리 경전 이외에도 한역이나 티벳 경전 등에 남아 있는 다른 불교 교단(부파)의 율장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서로 상당히 차이가 나고 게다가 한역이나 티벳 경전에는 도중에 개찬한 흔적이 몇 군데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율장은 부처님 당시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변형을 거치면서 전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빨리 경전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함께 단정 지어 버립니다.
그러나 빨리 율장은 엄격하게 조사했지만 어디에도 흠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문언의 형식에서 개변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몇 명의 학자가 빨리 율의 여기가 이상하다면서 몇 개를 지적하고 있지만 전부 문화의 차이에 의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이와 같이 빨리 율장에서만은 개편된 자취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빨리 율장도 개편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빨리 율장은 개편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편이 보다 정확한 것입니다.
현존의 빨리 율장에는 개개의 계율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 인연담으로 말해지고, 더불어 각 계율의 적용 범위나 범했을 경우의 벌칙이 판례를 들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들도 부처님 당시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판례를 기록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율을 어쩔 수 없이 만들어 제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제자들이 확실히 잘하고 있는데 계율만을 먼저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율의 조항만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 그 인연담이나 판례가 나중에 창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서가 역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세트로 계율인 것입니다.
❍ 제 1차 결집의 경장 편찬 ❍
경전도 그 대부분은 제1차 결집 때에 확정되었습니다. 어쨌든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이 경전이므로 불멸까지 전부 갖추어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율장의 경우와 달리 모든 제자가 부처님의 모든 설법을 들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5백 명의 아라한들이 서로서로 들은 것을 체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들어 기억하고 있는 설법을 서로 추렴하고 몰랐던 설법을 새롭게 듣는 가운데 잘못 들은 것, 잘못 이해한 것, 기억의 실수 등을 체크했습니다. 이런 것에 의해 잘못된 내용의 가르침을 보존해 버릴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고 부처님이 말씀한 그대로의 가르침이 어구까지 정확하게 「경장」이 되어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관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깨달은 아라한들이 거짓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들이 입을 모아 경전을 날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경장에 포함되는 경전의 대부분은 부처님 자신에 의한 것이지만 사리불 장로 등 수제자들이 말한 것, 또 신들이 말한 것, 그 이외의 사람들이 말한 「경전」도 몇 개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 몇 개는 부처님이 생전에 진실이라고 인정했으므로 불설에 준하는 것으로서 경장에 함께 수록되었습니다. 이같이 불멸 후에 제자들이 말한 경전도 함께 수록된 것은 그 내용이 부처님 생전의 교설과 같고 5백 명의 아라한들이 내용에 틀림없음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불설에 준하는 것입니다.
경장은 아래 5개 그룹으로 분류됩니다.
∙장부 경전 (34경) : 비교적 긴 이야기를 포함한 경전.
∙중부 경전 (152경) : 중간 길이의 교설로 구성된 경전.
∙상응부 경전 (5품 56상응 2872경) : 짧은 경전을 교리나 설자 등의 공통점에 상응해 그룹으로 나눈 경전.
∙증지부 경전 (11개장 2189경) : 4성제나 5력 등 말해지는 교설의 수에 의해 처음부터 11개 그룹으로 나눈 짧은 경전의 모임.
∙소부 경전 (15경) : 이상의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특이한 경전의 모임. 「숫따니빠따(경집)」 「담마빠다(법구경)」 「자따까(본생경)」 등.
이 중 장부, 중부, 상응부, 증지부의 4개 그룹에는 제1차 결집 이후 새로운 경전이 더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부 경전에는 제2차 결집이나 그 이후에 더해진 경전도 있지만, 그러한 경전에는 반드시 구별하여 두었기 때문에 혼합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귀에 관한 경을 모은 「아귀사경(뻬따왓투)」에 제2차 결집 때에 더해진 경이 몇 개 있습니다. 불멸 후에도 제자들이 아귀를 만나 도와 준 사건이 있었으므로 그 전말을 경장의 이 경전 그룹에 포함했습니다. 이와 같이 제1차 결집 때에 이미 완전히 정리된 각 경전군의 제일 마지막에 명기해 더해지고 있습니다.
장부, 중부, 상응부, 증지부, 소부의 그룹으로 나누게 된 많은 경전은 그 하나하나에 경명으로 번호를 붙여 10을 넘지 않게 하나의 세트로 정리해 세트의 이름까지 붙여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해 두면 경전의 어떤 것이든 한 개라도 누락되거나 수가 충분하지 않게 되면 알게 됩니다. 만약에 다른 이야기를 「경전」이라고 하며 나중에 덧붙이려고 해도 수가 증가해서 맞지 않게 되므로 곧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경전 마지막에 속편을 만들어 붙이려고 해도 모든 경전의 마지막에 「이 무슨 무슨 경전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다」라고 마지막에 표가 붙어 있으므로 그 후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경전의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려고 해도 전후와 얘기가 들어맞지 않게 되고 아라한들이 확실히 기억한 내용과 다르므로 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경전을 결집했을 때에 몇 겹으로 열쇠를 잠가 놓았기 때문에 경장이나 그 중의 경전 일부를 개찬하는 것은 어떤 경전 도둑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더욱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1차 결집으로 보존된 채로 현재까지 전해져 왔다고 압니다. 경전을 보존해 지키는 이러한 편찬의 연구도 5백 명의 아라한들이 지혜를 추렴해야만 할 수 있던 것입니다.
❍ 제1차 결집의 경장이 남아 있는 것은 빨리 성전뿐인가? ❍
아닙니다. 인도에서는 빨리 경전뿐이지만, 한역 경전과 티벳 경전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번역 경전은 테라와다가 보관 유지하는 빨리 경전이 아닌 다른 여러 부파가 보관 유지하고 있던 경장으로부터의 번역입니다.
다른 부파의 경장도 빨리 경전의 것과 비슷하게 5부 또는 4부로 분류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역에 남은 경전은 여러 부파의 경장으로부터 일부분씩 남은 것이지만 그것들을 모으면 경장이 가까스로 갖추어집니다. 각 부파 경장의 일부씩이 전부 합쳐지면 4부 또는 5부가 되어 빨리 경전의 내용과 이름이 대체로 일치합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불멸 직후의 제1차 결집 때에 아라한들이 빈틈없이 편찬한 그대로의 경장이 빨리 성전에 확실히 보관 유지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몇백 년이 지나 여러 부파로 분열한 다음에 테라와다가 빨리 성전을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이라면 다른 어느 부파의 경장도 같은 이름과 나누는 방법이 같이 되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부파로 분열하기 전인 제1차 결집 때에 모두 편찬한 경장이 다른 부파의 것은 거의 없어졌지만 빨리 성전에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역 경전은 하나하나 비교해보면 경전의 내용이 빨리 성전의 것과 상당 부분 다릅니다. 그 경우 아무래도 번역된 적이 없는 빨리 경전보다 한역이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한역은 빨리(마가다)어로부터의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북서 인도의 방언 간다라어 등으로 번역된 후 불멸 천년 가까이 지난 서기 4~5세기경 한문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번역으로부터의 번역(이중 번역)된 것이거나, 인도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문화가 다른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니까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또 남은 한역 경전에는 번호가 틀린 것도 있고 경전의 수도 빨리의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대체로 빨리 경전이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 부파 경전에 본래 얼마만큼의 경전이 있었는지, 얼마나 누락되었는지, 어느 부분이 나중에 창작되었는지, 그것이 한역 때 어떻게 바뀌었는지, 인도에서 이미 변했는지 등 그 부파 자체가 없어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전의 수나 내용이 한역된 다른 부파의 것은 빨리의 것과 상당 부분 다르고 불완전하므로 학계에서는 완전하게 남아 있는 빨리 경장을 기준으로 하여 한역 경전을 비교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역과 빨리 경전의 내용이 다를 경우 「문자로 전한 한역이 올바르고 구전의 빨리 경전은 나중에 변경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일 뿐입니다.
다른 부파의 것으로부터 티벳어로 번역된 경전은 한역보다 더 이빨 빠진 상태입니다. 중부, 소부경전 등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몇 개의 경전이 단행으로 번역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티벳 경전은 연구도 거의 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성전 중에서도 「시의 형태로 말해진 게문의 경전은 말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빠른 시기에 성립한 것이고, 보통 문장으로 말해진 산문의 경전은 말이 당시 보급되어 있던 일상어이므로 게문의 것보다 늦게 성립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자주 말해지지만 이것도 빗나간 화살입니다. 시의 형태로 할 때는 운율의 제한이 있거나 격언과 같이 임펙트를 담기 때문에 일부러 옛스럽고 격조 높은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시의 형태로 말하거나 일상의 말로 말하거나 한 그 모든 경전을 전부 일괄해서 아라한들이 제1차 결집 때에 확정했습니다.
다른 부파의 성전이 모두 여러 가지 변형을 받거나 너덜너덜한 쪼가리를 짜깁기한 가운데 빨리 성전만이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제1차 결집을 한 부처님의 직계제자들이 처음부터 빈틈없이 확정하여 조금도 변경할 수 없게 확실히 열쇠를 잠가, 그때로부터 게을리하지 않고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망가뜨림 없이 2550여년이란 역사 속에 변함없이 현대까지 전해 왔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장(Vinaya piṭaka)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뿌라나(Puraṇa) 장로의 불만에 관한 이야기는 제1차 결집 후에 스님들 사이의 불화에 관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결집 직후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후에 비구 스님들이 다른 종파로 분열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부처님의 담마는 포교의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60명의 제자들이 담마의 전파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을 때, 스님마다 각각의 장소에서 다른 조건들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날씨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심지어는 인도 대륙은 거대해서 시간대까지 달랐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후에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227가지의 율(vinaya)을 어느 하나도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직면한 조건에 맞추어 사소한 계율들을 바꾸어야만 했던 스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하 깟사빠 존자는 율(vinaya)의 어느 한 부분도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제1차 결집에서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던 비구 스님들은, 어떤 곳에서는 소금을 구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소금을 축적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어떤 스님들은 바뀐 환경 속에서 점심시간 이후에도 공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조차 탁발할 때 아무도 공양물을 올리지 않아서 때때로 빈손으로 수도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특히 낯선 곳에서 일반 스님들이 직면해야 했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vinaya)의 어떤 계율들은 바뀌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아주 기본적인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vinaya)은 율(vinaya)로 확정되었다. 어느 한 부분도 바꿀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야사(Yasa)장로 역시 제1차 불교결집에서 편찬된 말씀의 어느 한 줄도 바꾸기를 원치 않는 스타위라와다(Sthaviravāda, 장로의 견해, 상좌)에 소속된 스님으로, 그런 성향의 대표적 스님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사 장로가 점심 공양 후에도 공양을 하거나 재가자들로부터 금이나 소금을 받는 비계율적 스님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 지 상상이 갑니다.
소소한 계율들을 바꾼 스님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담마의 진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었기에, 담마의 정신이 전해지기만 하면 어떤 계율들은 부차적인 것이고 융통성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스님들은 야사 장로 스님으로 대표되는 Sthaviravāda(장로의 견해)파에 의해 주도되는 원전 연구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불교결집은 부처님 열반 100년 후에 열렸습니다.
6. 제2차 불교결집
(1) 비계율적 10가지 문제점
제2차 불교결집은 인도의 불교 상가의 역사에 있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결집 후에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의 종파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제 2차 불교결집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Pāli 경전 – Cullavagga (Vinaya Piṭaka)
– Mahāvaṁsa
– Dīpavaṁsa
– Samantapāsadikā (Vinaya-aṭṭhakathā)
– Mūlasarvātivāda - Vinaya
– Dulva (Tibetan)
대부분의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의 자료는 제 1차 결집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자료 중 일부는 빨리어 자료가 제2차 결집이라고 기록한 불교결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산스크리트어 자료는 BC 3세기 아소카 왕 시절에 열린 제3차 결집을 제2차 결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산스크리트어 자료에 따르면 불교가 인도 밖으로 전파되기 전에는 오직 두 개의 불교결집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빨리어 자료에서는 분명히,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지 100년 후에 열린 제2차 불교결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다른 자료와 후대의 역사가들은 제2차 결집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1차 결집을 순전히 허구라고 평가하는 H.Oldenberg 조차도 제2차 결집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빨리어 자료에 의하면, 야사(Yasa) 비구가 인도의 북쪽과 서쪽 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그는 “비계율적 vinaya(율)”을 행하고 있는 왓지(Vajji)국의 스님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비계율적 요소의 10가지 항목을 논의하기 위하여 비구 결집을 주장했습니다. 이 결집에 700명의 아라한 비구 스님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비계율적 요소의 10가지 항목(dasa vatthu)은 다음과 같습니다.
➀ 뿔에 소금을 넣어갖고 다니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가?(kappati siṅgiloṇakappa, 鹽淨) : 문제점은 부패하지 않는 소금은 계속 쌓아두고 가질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스님은 장차 사용하려고 그 무엇도 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있는데, 소금을 먹기 위함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쌓아두기 위함이란 것입니다.(싱길로나 깝빠 : 음식을 저장하는 것은 경분별의 빠찟띠야 38 위반. 어떤 음식물이든 병이 들어 약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밤을 넘겨 저장해서는 안 된다)
➁ 오후에 음식을 먹는 행위(kappati dvaṅgulakappa, 二指淨) : 태양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넘어갈 때까지는 먹어도 무방한가? 라는 것으로, 거대한 인도 대륙의 시간대의 차이를 생각해야 합니다.(드왕굴라 깝빠 : 비시식은 경분별의 빠찟띠야 37 위반. 정오까지의 시간에 모든 식사를 끝내야 한다)
➂ 같은 날 이웃마을에 가서 두 번째 공양을 하는 행위(kappati gamantarakappa, 聚落間淨) : 공양을 마친 후라도 오전 중이라면 다른 마을에서 다시 탁발을 해서 공양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조항.(가만따라 깝빠 : 잔식은 빠찟띠야 35 위반. 만족하게 식사한 자는 잔식법이 행해져 있지 않은 음식은 오전 중이라도 먹을 수 없다)
➃ 같은 교구 안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 포살(uposatha) 의식을 시행하는 행위(kappati avasakappa, 住處淨) : 이것은 같은 지역에서 포살(참회의식)을 사정에 따라 두 곳으로 나누어 시행해도 무방한가? 라는 것으로, 일부 비구 스님들이 포살(uposatha) 의식을 다른 장소의 결계(sīma)에서 실행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아와사 깝빠 : 율에 반하는 악작, 율장 대품. 하나의 거주처 구역 내에서는 하나의 결계당에 전원 모여 포살을 실시해야 한다)
➄ 상가의 의결 행위를 할 때 나중에 재가를 받는 행위(kappati anumatikappa, 隨意淨) : 공식적인 의결행위를 할 때 정족수에 미치지 않더라도 곧 도착할 비구의 동의를 예상하여 의결한 후, 사후에 승낙받아도 무방한가? 라는 것으로, 포살의식 동안에 한 스님이 잘못에 대해 참회를 하면, 판단 혹은 벌칙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즉시 행합니다.(아누마띠 깝빠 : 율에 반하는 악작, 율장 대품. 상가깜마에 참석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정을 미루거나, 뒤에 승인을 받을 수 없다)
➅ 선례를 변명으로 이용하는 행위(kappati acinnakappa, 常法淨, 久住淨) : 계율 규정에 없던 선례를 변명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계율은 사소한 계율이라도 현재 어긴 경우에는 적용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계율 제정 전에 그 계율을 어긴 것을, 지금 자신이 어긴 것의 변명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찐나 깝빠 : 부분적으로 비법, 부분적으로 정법. 즉 스승이나 대덕스님들이 관습적으로 행해온 것이 율에 어긋나지 않을 경우는 실행해도 되고, 율에 어긋나는 경우라면 실행해서는 안 된다)
➆ 공양 후에 유장(아직 응고되지 않은 젤리상태의 우유)을 마시는 행위(kappati amathitakappa, 生和合淨) : 이것은 일종의 취기 있는 음료로 볼 수 있습니다.(아마티따 깝빠 : 잔식은 빠찟띠야 35 위반. 이것도 식사 후에 잔식법을 하지 않은 것은 먹을 수 없고, 발효되어 취기가 있을 위험도 있기에 금지된다)
➇ 발효되는 야자 주스를 마시는 행위(kappati jalogi pātuṁ kappa, 水淨) : 이것 역시 취기 있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잘로기 깝빠 : 빠찟띠야 51 위반, 껍질주, 과일주 금지. 완전히 발효되지 않아도 진행 중인 것은 술의 범주에 들어간다)
➈ 테두리 없는 방석을 사용하는 행위(kappati adasaka nisidana kappa, 不益縷尼師檀淨) : 테두리가 없는 것이라면 방석의 크기에 제한이 없는가? 라는 조항.(니시다나 깝빠 : 빠찟띠야 89 위반. 니시다나인 방석을 새로 만들 때는 반드시 이전의 것을 절단해서 테두리로 사용하고, 새로운 천과 테두리를 서로 기워서 만든 것이라야 한다)
➉ 물이 들어있는 항아리 속에 금과 은을 받는 행위(kappati jataruparajata kappa, 金銀淨) : 개인적인 용도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용하는가? 라는 조항.(자따루빠라자따 깝빠 : 닛삭기야 18 위반. 금·은전을 직접 받는 행위는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다)
불멸 백 년 후에 마가다국과 꼬살라국의 중간에 있는 웨살리라는 마을에서 현지 비구들이 10가지 계율 항목에 대해 완만하게 변경하거나 새로운 조항을 만들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즉, 오전 중이라면 몇 번이라도 식사해도 괜찮다든가, 병들었을 때는 약으로서 적은 양의 알코올(술)이라면 마셔도 괜찮다든가, 금·은을 받아 저축해도 괜찮다 등등, 이런 사소한 것 10가지에 대해 기존의 입장과 상치되는 것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또 포살 때에 한곳에 모이지 않아도 근처의 비구끼리 따로 따로 포살을 해도 좋다고 하는 것도 10가지 항목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을 부모로 하여 모두 가족과 같이 사이가 좋았던 불교 교단이 분열하는 예고였습니다. 여기의 동료, 저쪽의 동료로 나누어 동료의식으로 따로따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교단은 곧바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제2차 결집을 통해 이 10가지 항목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혔습니다.(dasa vatthuni dipenti). 그 10가지는 비법적이고, 비계율적이고,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adhamma,avinaya, apaññatta)이라고 분명히 밝히었습니다.
스님들의 계율은 일체의 개인적 소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본 원리입니다. 만일 스님이 이것을 어기면 문제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전승에 따르면, 삼장(Tripitaka)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입니다. 여기에서 부처님 입멸 100년 후에 편찬된 교리가 어떻게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2) 상가의 분열
제2차 불교결집의 결과는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상가가 두 갈래로 분열된 것이었습니다. 장로 스님들은 비계율적 조항의 10가지 항목이 율에 어긋난다고 거부했습니다. 한편으로 왓지국의 젊은 스님들은 10가지 항목이 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상가의 분쟁 해결법에 따라 멸쟁건도(adhikaraṇasamatha khanda)를 실시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기준을 통해 양쪽의 대표로 선발된 분쟁해결 위원들이 장로 스님들의 견해가 여법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과 율에 근거한 여법한 판단을 상가에서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항들이 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자들이 청정한 테라와다(Theravāda)로부터 분리되어 부처님의 담마와 위나야를 변경하고 파괴한 자(bhinnavādā)로 규정된 그들은 대중부(Mahāsaṅghika)라 불리는 새로운 학파를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부처님 생존 시에도 상가는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부처님께서 그 갈등을 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 후 상가는 더욱 불안정해지더니 결국엔 부처님이 입멸하신 지 100년 후에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비계율적 조항(asavatthuṇi)의 10가지 항목에는 바라이(pārājika) 죄로 여겨질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허락하실 수도 있는 사소한 계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율(vinaya)의 단 한 줄도 바꾸기를 원치 않았던 상가의 엄격한 입장고수는 결국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테라와다 전승은 인간적인 부처님이라는 개념을 지키고 있는 반면, 대승(Mahāyāna)학파는 부처님의 신격화라는 개념을 발달시켰습니다. 전형적인 예가 부처님은 3개의 몸(kāyas), 즉 화신(Nirmāṇa-kāya, 우리가 볼 수 있는 늙고 변하는 몸), 보신(Sambhoga-kāya, 다른 세계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는 부처님의 참 몸), 법신(Dharma-kāya, 부처님의 본질)를 갖고 있다는 삼신(Trikāya)이론입니다. 불교철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부처님에 관련된 모든 종류의 연구를 뜻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개념의 전개입니다.
후대의 빨리어 주석서에서 우리는 세 종류의 부처님,
즉 성문보살(sāvaka-bodhisatta), 연각보살(pacceka-bodhisatta),
대보살(mahā-bodhisatta, 혹은 전지보살<sabbaññu-bodhisatta>)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등각자(Sammā-sambuddha)가 되기 위하여, 믿음(saddhā)이 있는 보살(bodhisatta)은 16 아승지(asaṅkheyya, 무수한 시간)를 더한 100,000 겁(kappa, 긴 시간) 동안 생사윤회를 받아야 하며, 힘(viriya)을 가진 보살은 8 아승지(asaṅkheyya)를 더한 100,000 겁(kappa) 동안 생사윤회를 받으며, 지혜(pañña)가 있는 보살은 4 아승지(asaṅkheyya)를 더한 100,000 겁(kappa) 동안 생사윤회를 받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발달된 이런 종류의 이론의 목적은 분명히 부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입니다.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a sutta)에 따르면 하나의 우주에 하나의 부처님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빨리어 불교에서 이런 종류의 보살 이론은 여성의 권리를 차별하기 위하여 이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태어날 수 없는 18가지 역겨운 상태 중 하나가 여자의 형상(itthibhāva),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자 노예의 자궁(dāsiyā kucchimhi)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제2차 불교결집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티벳어 자료를 포함하여 북방의 전승 자료에 의하면, 대천(Mahā deva)스님이 제기한 다섯 가지 항목에 관하여 스님들 사이에서 다른 의견이 있었으므로 그 결집이 소집되어야만 했습니다. 테라와다 아라한에 대한 그의 다섯 가지 비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라한도 유혹당할 수 있다. (atthi arahato rāgo ti).
아라한도 세속에 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aññāṇaṁ nañāṇa).
아라한도 어떤 일에 관하여 의혹(kaṅkhā)이 생길 수 있다.
아라한은 다른 사람의 도움(paravitāraṇa)으로 아라한과의 자각을 얻는다.
성도의 길은 괴롭다는 놀라움의 외침으로 얻어진다. (aho).
그러므로 북방의 전승에 따르면, 아라한을 다르게 이해하는 이 다섯 항목으로 인해 두 종파의 분열이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반면 테라와다 전승은 비계율적 수행의 10개 항목을 분열의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빨리어 전승은 대천에 의해 제기된 도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방 전승에서 그 아라한에 대한 것이 상가 분열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나아가 아라한 대신 보살의 개념을 발달시켰습니다.
대천(Mahā deva)의 논쟁은 티벳어와 북방의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빨리어 논사 주석서(Kathāvatthu aṭṭakathā)와 같은 빨리어 자료에서도 발견됩니다. 중요한 것은 상가 안에서 이미 한 사람 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신 100년 후에 자신들의 이상이었던 아라한에 도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천(Mahā deva)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 사람들에 따르면 아라한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괴로움(dukkha)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3) 심화된 상가의 분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제2차 불교결집 후에 상가는 분열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더욱 분열하게 되었고, BC 3세기에는 1개의 청정교단인 테라와다와 17개의 부파가 존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중에서 두세 부파만이 불교 경전을 자체적으로 보존하여 전했지만 완전하게 삼장을 갖춘 것은 아니었고, 오직 청정교단인 테라와다에서만 완전한 삼장(Tripitaka)을 갖추고 있습니다.
대중부(Mahāsaṅghika)는 두 개의 모음집(Sutta와 Vinaya)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논장(Abhidhamma piṭaka)은 편찬하지 못했습니다.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는 부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삼장을 보존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Theravada)는 경(Sutta), 율(Vinaya) 그리고 논(Abhidhamma)을 완전하게 보존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우리는 공통의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학문에서 경(Sutta)과 율(Vinaya)의 원전이 무슨 언어로 보존되었는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또한 논(Abhidhamma)이 언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BC 3세기에 논사(Kathā vatthu)의 저작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경(Sutta)과 율(Vinaya)의 공통 자료에 의거하여 삼장(Tripitaka)의 형식을 합송하여 전하는 구두로 완성시키는데 200년이 걸렸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상가가 분열하게 되었을 때, 각 부파는 수중에 공통 자료(Sutta와 Vinaya)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중 극히 소수만이 보존되었습니다.
대중부(Mahāsaṅghika)와 설일체유부(arvāstivāda)는 웨다(Veda)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그것들을 보존했습니다. 최초의 산스크리트 본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티벳어와 중국어 자료의 번역본은 아직 보존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Theravada)는 이것을 부처님이 쓰셨던 인도의 방언으로 보존하였습니다.
그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언어학적 노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사셨던 마가다(Magadha) 지방의 방언인 마가디(Magadhi)어 일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빨리어가 그것과 동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현재의 빨리어는 웃제니(Ujjeni)와 산치(Sañchi) 같은 인도의 서쪽 지역의 방언들에 더욱 가깝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이나교(Jaina) 성전을 활자화 하는데 사용된 쁘라끄리뜨(Prakrit)라는 혼합된 방언일 수도 있습니다.
상가 분열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이해로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무슨 근거로 우리는 테라와다 전승이 불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테라와다가 불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테라와다는 그들의 전승 안에 가장 오래된 교리들, 체계적이고 완전한 삼장(Tripiṭaka)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빨리 율장과 주석서를 참조하여 제2차 결집 기사의 구성을 정리해 보면,
① 부처님 입멸 백 년 후 시수나가(Sisunāga) 왕조의 깔라소까(Kālāsoka) 왕 제위 시에 웨살리의 왓지족 출신(왓지뿟따까) 비구들이 10가지 항목들에 대해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야사 장로(Yasa)가 웨살리에 갔다가 포살일에 그곳 비구들이 대중들 한 가운데 물을 가득 채운 발우를 놓아두고 재가자들에게 상가의 필수품을 구입하는 데 쓰기 위해 금·은을 그곳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② 계율에 철저한 서인도 출신의 야사 장로는 왓지족 출신 비구들이 재가자에게 금· 은의 보시를 받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재가자들을 독려하며 금·은의 보시를 계속 받게 됩니다.
③ 야사 장로가 재가자에게 금·은을 보시하는 것을 비판하자,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그에게 하의갈마(paṭisāraṇiya kamma, 출가자가 재가자에게 참회를 구하는 의식)을 요구했습니다. 야사 장로는 그들에게 계율상 하의갈마를 받은 비구는 수반(隨伴) 비구(anudhuta bhikkhu)를 동행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들어 자신에게 수반 비구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④ 야사 장로는 수반 비구와 함께 웨살리에 들어가 재가자에게 자신은 “비법을 비법이라고 말하고, 법을 법이라고 말한다. 비율을 비율이라고 말하고, 율을 율이라고 말한다.”라고 하며, 금은에 대한 비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후 부처님 생전 시의 네 가지 화제를 예로 들면서 일찍이 부처님은 ”사문이나 붓다의 제자들이 금·은을 받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을 웨살리의 재가자에게 전합니다. 이에 재가자들은 웨살리의 왓지족 출신 비구들보다는 야사 장로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⑤ 웨살리의 재가자는 야사 장로를 「석가모니의 출가 제자」라고 인정하고,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결과적으로 야사 장로는 하의갈마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의 정당성을 재가자에게 주장한 것이 됩니다. 즉 이 행위는 그들이 속한 상가에서 보면,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상가의 결정에 불복한 것이 됩니다. 「탁마건도」에 의하면, 그러한 비구는 거죄갈마(ukkhepaniyakamma)를 실시해 상가와 불공수(asambhoga, 다른 스님들과 같이 식사할 수도, 잠잘 수도 없는 것) 하도록 하는 벌을 내릴 것을 율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⑥ 수반 비구에게 그러한 자초지종을 들은 웨살리의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이번에는 비구들을 소집하여 놓고 야사 장로에게 거죄갈마(ukkhepaniya-kamma)를 행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야사 장로는 신통으로 허공으로 올라 꼬삼비에 가서, 다른 지역에 있는 비구들에게 사자후를 토하듯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존자들이여! 이리로 모여 주십시오. 이 논쟁(adhikaraṇa)에 참가해 주십시오. 이미 비법이 빛나고 바른 법이 배제되었습니다. 비율이 빛나고 바른 율이 배제되었습니다. 이미 비법을 말하는 사람이 힘을 가지고, 바른 법을 말하는 사람이 약해졌습니다. 비율을 말하는 사람이 힘을 가지고, 바른 율을 말하는 사람이 약해졌습니다.”
야사 장로는 다문이며, 전승자이며, 지법자이며, 지율자이며, 현자였기 때문에 많은 지지자가 나타났습니다.
⑦ 야사 장로는 아호강가(Ahogaṅga) 산에 머무르고 있는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를 방문하여 웨살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계율적인 10가지 항목에 관하여 상세하게 전합니다. 삼부따 사나바시 장로도 이것들이 비법이라는데 동의하였습니다. 그때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로부터 60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삼림거주자(森林居住者)이며, 걸식자이며, 분소의자(糞掃衣者)이며, 삼의자(三衣者)이며, 아라한이었습니다.
아완띠(Avanti)와 닥키나빠타(데칸 남로) 지방으로부터도 88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장로들은 소레이야(Soreyya: 마투라의 동쪽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Revata) 대장로를 떠올립니다.
⑧ 그때 소레이야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 대장로는 천이통으로 장로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해서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사하자띠(Sahajāti)에서 장로들과 만나게 됩니다.
⑨ 야사는 레와따 대장로에게 열 가지 항목의 합법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레와따는 열 가지 항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어본 뒤, 단호하게 그것을 비난하고, 논쟁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⑩ 한편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이 논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버려서 귀찮은 생각이 들어 레와따 대장로에게 사태의 수습과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위해 출가자의 필수품을 준비해서 대표단을 보냅니다.
⑪ 그때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살하(Sālha) 장로는 선정 중에 “빠찌나(Pācīna, 동쪽 인도)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다.”라고 생각하며, 정거천 신들과 대화하고, 신들도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시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니다.
10가지 항목의 논쟁을 동쪽의 비구와 서쪽의 비구의 분쟁으로 2분화해서, 동쪽의 비구가 비법을 말하고, 서쪽의 비구가 여법을 말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단계에서 야사 장로 측과 왓지족 출신 비구들과의 대립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돌연 여법설자 측과 비법설자 측의 대립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상가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동쪽의 비구들이 비법설자라고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⑫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를 찾아가 준비해 온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주려고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웨살리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의 제자인 웃따라(Uttara) 비구에게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줍니다. 웃따라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그들의 권유를 못 이기고는 한 벌의 가사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에게 “모든 부처님(佛世尊)은 동방의 국토에서 태어나셨다. 동쪽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다.”라고 레와따 장로가 말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⑬ 웃따라 비구는 레와따 장로에게 이 말을 전하지만, 레와따 장로는 「너는 나에게 비법을 재촉했다」라고 하며 웃따라 비구를 떠나게 합니다. 웃따라 비구는 그 말을 왓지족 출신 비구들에게 전하자, 하는 수없이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를 스승으로 받들기로 합니다.
⑭ 이후로 갈라진 양자를 화합시키는 절차를 행하게 됩니다.
상가는 레와따 장로의 제의로 그 논쟁의 판결을 내리기 위해 웨살리로 갔습니다. 상가 대중들이 모이자 레와따 장로는 곧바로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⑮ 그때 삽바까미(Sabbakāmi)라는 대장로가 웨살리에 있었는데, 이 대장로는 아난다의 제자로 법랍이 120년이었습니다. 레와따 장로는 먼저 삽바까미 대장로를 찾아갑니다. 뒤따라 아호강가 산에 머물던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도 그곳에 방문합니다.
⑯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가 문제점들을 삽바까미 대장로에게 설명하자, 삽바까미 대장로는 “동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이 여법설자이다.”라고 판정합니다. 이에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도 동의를 표합니다.
드디어 10가지 항목을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비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⑰ 상가는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려고 모였지만, 끝없는 논의가 되풀이 됩니다. 그래서 레와따 장로는 단사인(ubbahika, 斷事人, 분쟁을 조정해 화해시키는 직무를 행하는 자, 중재위원)을 선출해서, 논쟁을 진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쪽과 서쪽 비구들로부터 네 사람씩 총 8명의 단사인이 선출됩니다.
율장의 건도부에는 이와 같이 끝없는 논의(anaggani bhassani)가 생길 경우에, 단사인을 선출하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가가 분열 상태에 있는 것을 화합시키는 경우에는 통상의 다수결보다 단사인 선출로 전원 일치의 결론으로 상가의 화합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⑱ 즉, 8명은 삽바까미(Sabbakāmi), 살하(Sālha), 쿳자소비따(Khujjasobhita), 와사바가미까(Vāsabhagāmika), 레와따(Revata),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n), 야사(Yasa), 수마나(Sumana), 그리고 좌석 배정의 책임을 맡은 아지따(Ajita) 등으로 구성된 단사인에게 이 논쟁의 판결을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700명의 비구들은 웨살리에 있는 왈리까라마(Vālikārāma)가 이 논쟁을 진정시키는 장소로 적당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모두 갔습니다.
레와따 장로의 사회로 갈마가 이루어졌습니다. 레와따 장로가 10가지의 항목 하나 하나를 물으면, 삽바까미 대장로가 그것들을 빠띠목카(Pātimokkha, 戒本)의 조항과 대조하면서 대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⑲ 삽바까미 대장로는 각 항목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 율에 근거하는지를 설명한 후에, 그에 대한 정(淨)·부정(不淨)을 가렸습니다. 단사인들의 합의를 거쳐 이러한 것들을 재가하게 되고, 의장인 레와따 장로는 비법, 비율이라고 결정 난 것을 최종적으로 젓가락을 던져(salakaṁ nikkhipami) 확정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판정이 행하여졌습니다. 상법정(常法淨) 이외의 9가지 항목이 모두 율에 저촉되는 행위로 판정됩니다. 상법정은 경우에 따라 인정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들 열 가지 항목은 상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들은 모두 비법(邪法)이며, 비율(邪律)이며 스승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며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심의가 끝납니다.
⑳ 마지막에 레와따 장로는 10가지 항목의 결착을 선언합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논쟁(adhikarana)을 진정시키는 것이 빨리율 주석서에서 설명하는 제2차 결집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상가 분쟁은 있어도 결론을 도출시켜 분쟁을 진정시킬 수 있었기에 파상가는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부처님 없는 상가의 자주적 운영에서 부처님의 법과 율을 둘러싼 분쟁은 불가피하지만, 상가 내의 분쟁의 진압과 파상가의 회피를 통해서 부처님이 없어도 상가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㉑ 이 논쟁을 계기로 웨살리에 운집해있던 700명의 장로들은 경과 율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집을 다시 실시했던 것입니다. 이 제2차 결집은 제1차 결집 때 확정된 부처님의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를 다시 확인하고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경전이나 율장을 만들 수도 없고, 경도 율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재확인했습니다.
이 결집은 깔라소까(Kālāsoka) 왕의 재위 10년, 기원전 386년에 8개월 동안 행해졌고,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서 행한 결집이기에 칠백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7. 제3차 불교결집
모처럼 빈틈없이 확정한 성전도 바꾸려고 하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펼쳐 나가려고 하면서 제2차 결집으로부터 아소까 왕이 나올 때까지의 근 백년간 부파의 분열은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더욱더 분열해 버렸습니다. 대중부는 한층 더 몇 개의 부파로 분열되고, 북서 인도에서는 설일체유부가 생겨나 남서 인도의 원줄기인 테라와다로부터 분리되어 헤어져 버렸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의 테라와다란 한 줄기로부터 17개의 부파로 분리된 것입니다. 디빠왕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장 뛰어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최고의 승리자의 가르침이다. 마치 나무에 있는 가시와 같이 나머지 17개 부파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중요한 부파의 이름이 몇 개 있습니다.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Sautrāntika(경량부), Śalia(산주부),
Prajñāptivāda(설가부), Vetulya(Vedula, Vedala, 방광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 만의 경전을 갖고 있는 부파들입니다. 테라와다는 유일하게 암송에 의해 전승돼 온 빨리어 경전 삼장 전체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부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보존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중국어 같은 5, 6개의 다른 언어로 된 율장과 경들이 현재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218년 후에 즉위한 아소까 왕은 갠지스와 인더스의 양대 강을 포함한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이 되어 데칸 산맥의 인도 남부까지 정복하여 인도 전 국토를 지배했습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기여서, 이것이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가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켜야 할 오직 하나의 율장이 존재하는데, 출가자는 이 공통의 율을 지키는 것으로 같은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적인 확장에 의한 지방적 특성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각각의 지역에서 각각의 율장을 가지게 되면서, 각기 다른 부파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고, 다른 집단으로서 독립된 행위를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끼리 각 지역을 중심으로 상가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분열하지 않은 하나의 테라와다와 제각기 분열한 17개의 분파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소까 왕은 스스로 깊이 불교에 귀의하였지만 교단이 점점 부파로 분열하고, 많은 부파에서 경이나 율이 자의적으로 편찬되어, 불교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상태를 걱정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 빠딸리뿟따에서 부처님의 바른 말씀을 따르는 종파를 찾아내기 위하여 BC 3세기에 제3차 결집을 소집할 것을 상가에 권유하였습니다.
제3차 결집은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분쟁을 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에 의해 생겨난 혼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아소까 왕의 불교귀의 이후 왕가의 후원이 불교에 집중되자 많은 외도들이 왕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교단에 내부적으로 교리적 계율적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빅쿠들은 승려인 척 행동하는 외도들과 함께 포살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7년 동안 아소까라마(Asokārāma) 사원 등에서는 포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장로들은 아소까 왕의 이 권유가 시기에 맞고 이치에 맞아, 적어도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사서에 이 제3차 결집의 기사가 자세히 기록됩니다.
대조적으로 대중부를 비롯한 부파 계통의 사서에는 제2차 결집의 기사는 실려 있지만, 이 제3차 결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을 바꾸고 불교의 정신과 빅쿠의 출가 생활을 어지럽혀 아소까 왕의 권유와 후원에 의해 실시된 제3차 결집에서 배척되어 버렸기에 나쁜 것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지, 대중부계를 비롯한 각각의 부파가 이후에 급속히 쇠약해져서 기록하는 여력조차 없어졌든지 이 3차 결집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소까 왕 시대에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에서 분열했던 북서 인도의 설일체유부도 자파의 사서에 아소까 왕의 사적을 많이 싣고 있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앞의 제2차 결집과 아소까 왕의 제3차 결집을 함께 적어 「불멸 백년 후 아소까 왕의 시대에 제2차 결집을 실시하여 테라와다와 대중부의 2개파로 분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일체유부도 아소까 왕과 견해가 맞지 않았던 것인지 기록의 실수인지 설일체유부가 없어진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붓다왕사(Buddhavaṁsa, 불종성경)와 마하왕사(Mahāvaṁsa, 대사, 대왕통사)에 의하면, 아소까 왕은 당대의 가장 탁월한 빅쿠 스님인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왕에게 상가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위밧자와다(Vibhajjavāda)라는 분별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기준점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각 부파의 대표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처님은 어떻게 담마를 설하였는가를 물어, 부처님은 담마를 분별하여 가르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질문을 했습니다. 예라고 답한 사람들만 교단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못하고 단멸론이나 상주설 등 삿된 견해를 지니고 이설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빅쿠가 아니라고 선언한 후 흰옷을 입혀 환속시켰습니다. 그 수가 무려 6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단은 다시금 통합되고 교설은 청정해지게 되었기에 상가는 모여서 포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이렇게 승인된 수많은 빅쿠 중에서 오랜 경험으로 확신에 차있고, 여섯 종류의 신통력을 갖추었으며, 삼장에 능통하고, 무애해도를 갖추고, 삼명을 구족한 천명의 빅쿠들을 선발하여 법과 율을 다시 확인하고, 모든 이설을 까타왓투(Kathāvatthu)라는 논서를 설하여 논파하고 청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천명의 빅쿠들에 의해 빠딸리뿟따의 아소까라마에서 불멸 후 236년 음력 9월 보름 안거해제일인 자자(Pavāraṇā)날까지 9개월에 걸쳐 법의 결집을 행하였습니다. 이 결집을 제3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한편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은 과거 현재 미래(sabbaṁ asti; atthi)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을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에 대승불교에서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그릇된 관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기법에 뿌리를 둔 공(sunyatā) 사상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무것도 스스로에 의존해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견해의 사람들을 소승(Hinayana)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설일체유부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를 주장한 유일한 부파였기 때문입니다.
테라와다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의장으로 한 이 제3차 결집의 특징은 경장과 율장의 재확인뿐만 아니라, 이때 처음으로 논장 아비담마의 편찬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빨리 아비담마 7론의 마지막 「논사」이므로 이때까지 논장도 거의 정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빨리 성전의 논장인 아비담마는 경전의 엣센스를 분류하여 집성한 것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한 발자국도 바꾸는 것이 아니지만, 주로 제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경장이나 율장과 달리 부처님의 직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제3차 결집까지는 어느 논장도 이름마저 기록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논사」 성립의 사정이 특수하기 때문인지 여기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논장은 부처님 이래의 성전으로부터 빗나간 여러 가지 이견·사악한 견해를 한 개씩 비판하며 논파한 논문입니다. 그 견해의 수가 216가지에 이릅니다. 이것은 불멸 이후로부터 2백여년이란 기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이설이 배출되고 성전이 삐뚤어져 제자들이 여러 가지 부파로 분열해 버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제2차, 제3차 결집까지 부파가 계속 분열했고, 많은 부파에서 성전도 자의적으로 개편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빨리 성전도 시대와 함께 상당한 변천을 거쳐 왔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잘못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기록을 읽어 보면 대부분의 부파가 성전을 개편하는 중에도, 단 1줄도 경장과 율장을 바꾸는 일 없이 완고하게 지켜온 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파는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빨리 성전을 계속 보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개편을 받은 흔적도 없으니 당연히 제3차 결집 때에도 전혀 개편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빨리 성전도 개편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올바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억측이라는 것이 됩니다.
제3차 결집에서 아소까 왕은 담마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소까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앞으로 또다시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혼란이 없기를 바라며 포교승을 파견할 9개국을 선택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요나까(Yonaka, 지금의 그리스 지방) 사람인 담마락키따(Dhammarakkhita) 장로를 아빠란따까(Aparantaka, 인도 서해안) 지역에, 더 아래 서쪽으로는 마하담마락키따(Mahādhammarakkhita) 장로를 마하랏타(Mahāraṭṭha, 데칸산맥 서북부) 지역에, 더 나아간 서쪽으로는 마하락키따(Mahārakkhita) 장로를 요나까 지방(Yonakaloka, 서북쪽 인도 국경지역)에 보내었고, 북쪽으로는 맛지마(Majjhima) 장로를 히마완따(Himavanta, 히말라야 지방인 지금의 네팔) 지역에 보내었고, 동쪽으로는 소나까(Sonaka) 장로와 웃따라(Uttara) 장로를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 지금의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남부)에 파견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마하데와(Mahādeva) 장로를 마히사까만달라(Mahisakamaṇḍala, 데칸산맥 동남부) 지역에, 더 아래 남쪽으로는 자신의 동주(Saddhivihārika) 제자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잇디야(Iddhiya) 장로와 웃띠야(Uttiya) 장로와 삼발라(Sambala) 장로와 밧다살라(Bhaddasāla) 장로를 땀바빤니(Tambapaṇṇi, 스리랑카)에 보내었고, 서남쪽으로는 락키따(Rakkhita) 장로를 와나와시(Vanavāsi, 데칸산맥 서남부)지역에, 서북쪽으로는 맛잔띠까(Majjhantika) 장로를 까슈미라 간다라(Kasmīragandhāra, 지금의 페샤와르와 라왈삔디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여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제안으로 상가에서 결정하여 각 지역에 파견된 장로들은 각각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그리고 각 지역에 부처님 가르침의 확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제 3차 결집의 중요성은 분열된 상가의 단일 교단으로의 정화와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의 영역을 넘어 포교단을 파견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테라와다라는 말은 제3차 결집 후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3차 결집 이후를 테라와다의 시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테라와다 사람들은 그들의 기원은 적어도 제2차 결집을 주도했던 Sthaviravāda(장로의 견해)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부처님 시대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한편 대승불교는 우리가 이용 가능한 어떤 역사적 자료에 의하든, 지금까지 대승(Mahayana)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북전의 자료에서 설일체유부는 3차 불교 결집 이후 인도의 북쪽 지방을 행동의 중심지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대승(Mahayana)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설일체유부는 불교 사상을 확장하고, 마지막으로 대승이 일어난 곳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불교 역사는 이때부터 테라와다의 중심지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테라와다 불교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인도에서 고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도의 테라와다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증거들은 약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입멸 후 인도에서 쓴 유명한 3권의 책이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책들의 이름은 (1)Nettipakarāṇa(수행 안내서, 指導論) (2)Peṭakopadesa(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입문서, 藏釋論) (3)Milindapañhā(밀린다왕문경)입니다.
이 경전들은 현재 빨리어 문헌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 빨리어경전’ 텍스트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처음 두 책은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밀린다왕문경(1~88 pp. PTS본)의 처음 부분 역시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책의 두 번째 부분(90~420 pp.)은 아마도 기원후 1세기에 테라와다 사람들에 의해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의 앞부분은 중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소까 왕의 공헌은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 의해 시작된 포교활동을 후원한 것입니다. 포교단들은 스리랑카, 캄보디아, 버마를 포함하여 9개국에 보내졌습니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스리랑카였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마하왕사와 붓다왕사 같은 스리랑카 역사의 기술가들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꽃피우도록 운명 지어진 이유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하왕사에 의하면 부처님은 스리랑카를 몸소 3번 방문하셨으며, 제석천(Sakka deva)에게 스리랑카의 Vijayā(승리, 영광)를 지키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예지력은 스리랑카라는 땅이 불교의 땅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하왕사에 따르면 부처님 살아계실 때 보리수나무 가지가 스리랑카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대기의 기술가들이 얼마나 불교와 스리랑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려고 했나를 보여줍니다.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 후에 아소까왕의 추천에 따라 왕의 친족인 마힌다 장로를 필두로 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하여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3 결집 뒤에 마힌다 장로를 시작으로 테라와다가 스리랑카에서 포교를 시작한 경위는 「디빠왕사(도사)」 「마하왕사(대사)」 등 스리랑카의 사서에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건너가서는 다른 부파와 거의 관련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부파가 인도에서 소멸되었어도 테라와다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경위를 세세하게 적고 있기 때문에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역사나 사적은 현대의 학계에서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중에 빨리 성전에 관해서는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 현재까지 어떤 변경도 없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학계에서도 거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나 혹은 남서 인도에 있었을 무렵에 이미 테라와다의 성전이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로부터 현존하는 빨리어로 번역된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서 등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문이 일어나는 「근거」로 2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도에 남은 제 부파의 경이나 율이 현지의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본은 이미 없어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역된 문헌의 원어가 마가다어 혹은 「빨리어」가 아니라, 예를 들면 북서 인도의 간다라어 등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학계에서는 「역시 제 부파는 성전을 현지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빨리어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없는데 다른 부파의 것이 그렇다고, 어째서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빨리 성전 언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국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반마가다어」라는 것입니다.
「반마가다어」는 부처님과 동시대에 마가다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자이나교의 조사나 제자들에 의한 문언에 남은 것입니다. 마가다어도 빨리어도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이나교의 문헌은 부처님 당시 마가다어의 흔적을 더듬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반마가다어」는 「반」이 붙듯이 완전한 마가다어라고 할 수 없는 방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과 빨리 성전의 언어가 일부 다르다고 해도 빨리어가 완전한 마가다어일 가능성은 당연히 남습니다.
불멸 2백여년 후 아소까 왕에 의한 법칙비문으로부터 빨리 성전의 언어 문제가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소까 왕은 인도 각처에 그 지방의 언어로 비문을 세웠고 테라와다가 활동하고 있던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와 마가다 지방의 「마가다어」로도 법칙문을 새겼습니다.
그렇지만 「빨리어」는 그 어느 쪽과도 조금씩 다릅니다. 「아소까 왕 비문의 「마가다어」와 빨리 성전의 언어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성전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말하지만,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2백년이나 후의 「마가다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한글과 현대의 한글을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있겠지요.
빨리 성전의 언어는 아소까 왕 당시의 남서 인도 피샤체어와도 조금 다르기 때문에 피샤체어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양자 간에 닮은 점이 있다고 해도 빨리 성전이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빨리 성전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는 장로들과 함께 2백년간이나 그곳 사람들의 종교 생활의 지침이 되고 있었으니까요.
이와 같이 「성전어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로부터 살펴봐도, 사서 등의 문헌 자료로부터 살펴봐도, 그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부파의 성전은 번역되었을지 모르지만, 빨리 성전만은 어떤 다른 언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성전은 처음부터 그 언어로 말해졌고 그것이 그대로 어떤 변형도 받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의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계속 보관 유지해 온 테라와다가 설혹 어떤 이유가 있어도, 언어가 비슷해도, 그 금언을 다른 현지의 언어로 번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번역 자체가 성전을 변경하는 큰 문제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서 글로 남길 때에도 빨리 성전을 스리랑카의 싱하라어로 번역하여 적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의 발음을 적었습니다. 빨리 성전은 빨리어인 채입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에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전해졌지만, 인도에서는 테라와다가 일정 기간 유지되다가 서서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마힌다 장로의 포교단이 정착한 이후에 서서히 스리랑카로 이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 남은 다른 대중부의 부파도 똑같이 사라져버립니다. 계율까지 바꾸어 버린 대중부 여러 부파는 아소까 왕에 의해 배척되고 나서 2~3백년 내에 그 성전과 함께 역사의 저 멀리로 사라졌습니다.
그중 설일체유부는 부파 중에서 끝까지 남아 인도 북서부의 바라문교와 대항하면서 기원 전·후부터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 붐을 타고 자파의 논문(대승의 「논장(아비다르마)」이라고 하는 「불교에 관한 개인의 논문」)을 산스크리트어로 써서 대승불교와 같이 중국이나 티벳으로 이동합니다.
그 후 기원후 3~4 세기에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와 대승의 「중관파」가 합쳐져서 「유식파」도 나타나면서 그것과 대항하다가 유부 자신도 기원후 7세기 무렵에는 결국 멸망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원어를 버려버리고 번역한 것을 포함하여 부처님의 성전을 조금이라도 바꾼 부파는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확정한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보관 유지해온 테라와다만이 스리랑카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온 세상에 지금도 맥을 같이하며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을 최초 결집부터 말도 내용도 변함없이 이어서 전승하여 온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그 자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존 빨리 성전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가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빨리 성전을 스스로 읽고 말해진 내용을 스스로 실천하여 이해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접하다 보면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압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인가 하는 것은 거기에 깨달음의 길이 나타나고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확인하면 압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 불변의 가르침은 요구하기만 하면 금방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은 지금도 여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10. 제4차 결집(불교 경전의 문자화)
인도에서 불교는 초기부터 고대 바라문교의 영향인 인도적 사고에 의해 경전의 문자화와 불상의 제작은 오랫동안 터부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역사에서 경전의 결집은 중요합니다. 결집 가운데 제3차 결집까지는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것이었지만, 제4차 결집은 지금까지 합송으로 전해져 왔던 삼장 및 그 주석서를 문자로 기록한 경전 필사의 결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전 성립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원전 일세기 무렵에 테라와다의 정통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대사)의 빅쿠들은 지금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구전되어 온 교법을, 처음 문자를 사용하여 필사하게 됩니다.
디빠왕사와 마하왕사에 의하면, 「이전에는 큰 지혜있는 빅쿠들은 암송에 의해 삼장 경전 및 그 주석서를 미래에 전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교법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빅쿠들이 모여 교법을 오래도록 존속하기 위해서 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순수하게 전승해온 가르침을 필사하여 패엽경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로 필사하여 패엽경으로 남긴 곳은 스리랑카 고대 도시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로부터 백 킬로 정도 떨어진 마탈레(Matale)의 알루위하라(Aluvihara (Alokavihara)) 석굴사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시와(Siva) 장로를 의장으로 한 5백 명의 빅쿠들이 참가해 왕의 후원을 받지 않고 7년에 걸쳐 완수한 대사업이었습니다. 빨리 삼장은 이때 패엽경에 완전하게 필사하였고, 싱할라 주석서는 A.D.I00년경까지 점차적으로 완료하여 기록되게 됩니다.
이것이 인도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포함해 성전을 문자로 필사한 최초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필사된 패엽경을 1848년 영국군이 사원을 파괴하면서 소각해 버립니다. 2000년간 지켜온 최초의 필사본과 5세기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서들 모두를 말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현재 알로까위하라 사원에는 800여 년 전에 제작된 패엽경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경전을 필사한 배경 및 원인을 살펴보면,
불교가 정식으로 스리랑카에 전해진 것은 부처님의 입멸 후 236년 지나서 당시의 인도 왕인 아소까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 불교의 제3차 결집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후 제3차 결집의 의장이었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여러 나라에 전도사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스리랑카에는 아라한인 마힌다 장로(Arahant Mahinda) 일행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도됐을 때는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섬에는 확립된 기존의 종교는 없었기에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이 새로운 가르침이 매우 합리적인 진정한 가르침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불교를 진심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이 맑고 깨끗한 가르침을 자유롭게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또한 기존의 민속신앙이나 전통 등 어떠한 것에도 오염되는 일이 없게끔 모든 수단을 다해 보존했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확립되면서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에는 깊은 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문화나 문명은 인도의 생활양식이나 삶의 방법에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의 왕들 중에는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자손의 왕녀들과 결혼한 왕도 있었습니다.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마힌다 장로와 오래도록 이야기한 후, 왕은 장로에게 불교가 이 나라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는지 어떤지 물었습니다. 장로의 대답은 “아니요! 아직 아닙니다.” 이었습니다.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스님이 되어 스스로 계율을 지키기까지는 불교는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은 마힌다 장로가 불교의 현지화 내지 토착화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자 왕은 무언가 참배의 대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소까 왕의 딸이었던 상가밋따(Saṅghamittā) 빅쿠니는 마가다의 부처님 성도지로부터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서 이식하였는데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불교 참배의 대상으로서 확실히 정해지게 됩니다. 또한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아누라다뿌라에 마하위하라를 건립하여 스리랑카 사람들이 출가하여 상가를 구성하고, 재가자들에게는 신앙의 거점이 될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장로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이후 당분간 평화가 계속되어 대대로 왕들은 불교를 보호해서 점차 불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어쨌든 아소까 왕 당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각문 등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스리랑카로 들여왔을 때, 경전암송자(Bhānaka, 誦經者) 역시 같이 들어와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몇몇 스리랑카 스님들이 송경자(Bhānaka)가 되어 모든 경전들을 암송하여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1세기 경전들이 문자화될 때까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BC 1세기에 왕은 마하위하라의 몇몇 송경자들에게 담마 보전 보존을 위해 인도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인 60명은 우리 백성이 아직 고통받고 있는데 어떻게 인도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왕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담마를 암기하여 보존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빅쿠 스님들이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스리랑카에 남아있던 스님들을 만나 함께 암송하면서 경전들을 비교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단어도 없어지거나 빠진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송경자 그룹이 단 하나의 단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구두로 경전들을 전승하였습니다.
한편 무외산사(Abhayagiri vihāra, 無畏山寺)라는 새로운 사원이 왓따가미니 아바야(Vaṭṭagāmani Abhaya) 왕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마하띳사(Mahātissa) 빅쿠스님에게 주었습니다. 마하띳사 장로는 즉시 그리로 가지 않고 마하위하라 사원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이 장로는 사교성이 있어서 속인의 집에도 자주 출입했기 때문에 지계 견고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로부터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마하위하라의 빅쿠스님들로부터 교단 추방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 처분의 부당을 비난한 마하띳사 장로의 제자인 바할라맛수 띳사(Bahalamassu Tissa)는 그들의 추종자 5백 빅쿠와 함께 마하위하라 사원을 이탈해 독립의 일파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당연히 마하위하라 사원에서 쫒겨난 마하띳사 장로는 새로운 사원인 무외산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곧 그곳은 많은 불교 행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정통보수적인 마하위하라(大寺)와 무외산사(無畏山寺)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하위하라 설립 후 대략 118년만에 스리랑카의 교단이 2개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BC 1세기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후에도 무외산사파의 계통은 왕의 보호를 두껍게 받으며 법과 율에 이설을 주창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에 비하여 마하위하라 사원의 정통파는 점차 쇠락해 갔습니다.
한편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 재위 동안 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빅쿠들은 산이나 숲으로 피난했습니다. 대사는 버림을 받아 경내에 나무가 어지럽게 뒤엉키고 풀과 이끼로 뒤덮였으며 사원은 방치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계율에 철저한 빅쿠의 엄숙한 길을 실천할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환속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의 다양한 재난은 상가의 생활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처님의 순수한 말씀인 경전을 잘 지킬 필요가 명백하게 있었으므로 빅쿠들은 교법학습(Pariyatti)이 수행실천(Patipatti)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빅쿠들은 「불교의 근본은 빠리얏띠(pariyatti)인가 빠띠빳띠(patipatti)인가」라고 논쟁해, 전자가 승리를 거두어 경(Sutta)과 율(Vinaya)이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학습이 수행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래서 수행실천(Patipatti)보다 경전의 전승(suttante rakkhite)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행에는 뜻이 없고, 다만 생활을 위해서 출가하는 사람이 증가해 경전을 암송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교단 존속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지금까지의 암송을 그만두고,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구전으로 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전문적인 송경자 빅쿠들의 죽음이 이어져 상가는 대단한 곤란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빠진 상가를 구하기 위해서 빅쿠의 지도자들은 소의 성전을 보다 안전하게 전승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만일 이러한 일이 앞으로 다시 일어난다면 담마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담마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결집을 열고 그들 스스로 삼장과 주석서의 모든 텍스트를 종려나무 잎에 글자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열린 이 회의가 제4차 결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의 텍스트가 이 결집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불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제4차 결집은 지금 알루위하라(Aluvihara)로 알려져 있는 알로까위하라(Ālokavihara, 광명사원)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알로까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현재의 캔디에 가까운 마탈레에 위치한 동굴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의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당시의 수도인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집을 행했을까? 통상적으로 앞서 열린 결집들은 더 좋은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는 큰 도시에서 열렸었습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4차 결집은 왜 수도인 아누라다뿌라에서 열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정치적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은 마하위하라 사원보다는 아바야기리 사원에 있는 마하띳사 장로를 더 좋아했습니다. 반면 왕비는 마하위하라 사원의 독실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래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 스님들은 왕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을 거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스리랑카의 도처에 마하위하라 사원의 분원들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스님들은 지역의 부호들인 지방귀족들의 후원을 왕의 후원보다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결집장소를 수도가 아닌 알로까위하라로 선택한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외부의 타 종교인으로부터의 침략.
② 바라문 띳사의 반란과 12년간의 기근.
③ 무책임하고 무신앙적인 출가자의 증대.
④ 상가의 분열.
⑤ 송경자들의 감소로 합송의 어려움.
⑥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경전을 전승하려는 의지.
이 중에서 상가의 분열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해집니다. 또한 무외산사파의 자유로운 경전 해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왕이 무외산사파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수도 아누라다뿌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알로까위하라 사원에서 경전을 문자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로운 사고로 순수성을 잃어버린 부파의 발생과 그들과의 오랜 갈등은 테라와다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 테라와다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테라와다의 정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대립의 역사는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구전의 합송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빨리 문헌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기록된 패엽경이 있을 때든 없을 때든 테라와다 스님들은 2600년간 변함없이 스승이 전해주는 가르침을 그대로 암송하여 전승했습니다. 경전 암송은 출가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 풍토, 인종, 언어가 인도대륙 본토와 비슷하기에 다방면에서 대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스리랑카의 빅쿠들은 이 섬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불적을 순례하거나 인도로의 불교 전파에도 종사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비문을 통해 추정할 수 있고, 후대에 인도출신인 붓다고사, 붓다닷따, 아난다, 담마빨라 스님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스리랑카로 들어와서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인도 내의 테라와다와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 테라와다에서도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를 그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도에 불교가 미약해지면서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불교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인도의 부처님 성도지인 붓다가야에서 출토된 명문 중에 B.C 250년경 인도 숭가 왕조때 비에는 ‘따하빠나(땀바빠나인 스리랑카를 지칭)의 주민 보디라키따가 보시함’ 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예부터 스리랑카 사람들이 인도의 불적을 순례하거나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명문들에 의해서도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빅쿠들이 남인도를 비롯한 북인도에까지도 교화 활동을 넓히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에, 이것은 제4차 결집에 의해 필사된 경전이 아마 인도 본토에도 전해졌다고 봅니다.
또한 그 무렵부터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계승되어져 온 사자 상속의 암기·합송에 의한 경전의 전승법을 유지하면서도, 교설의 수지·독송(vācana)을 강조하고, 필사(lekha)의 공덕을 말하며, 서적(potthaka)의 공양을 최상으로 하는 생각이 나타납니다.
대승불교의 기원은 이런 필사에 의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존하고 있는 초기 대승경전의 주된 것은 필사본으로 필사의 공덕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빨리 경전은 구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을 위한 목록, 전형화한 문구, 동어 반복, 운문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계승해온 사자상속의 암기·합송에 의한 경전의 전승에 대한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서 제4차 결집에서 경전을 필사한 것이므로, 결집의 본래 의미인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본래의 의미에 비추어 보면 제4차 결집은 다만 암기하고 있던 내용을 문자화했을 뿐이지만, 문자화 된 것에 의해 경전은 보급되어지고, 재가 신자도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합송에 의한 집단적, 조직적 신앙 형태로부터 경전을 필사·독송하는 개인적 신앙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합송의 방식이 없어지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전통적인 합송의 방식을 상가에서는 따르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역사를 보면 헌신적인 승려나 재가 불자들이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에 신흥 종교나 다른 교의가 섞이지 않게 얼마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원래의 상태를 보존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분투하며 용감하게 맞섰는지 알게 됩니다. 때로는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스리랑카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어도 불교의 어떤 종류의 어느 종파보다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 제일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봐도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서구의 작가로 「오늘날의 불교(Buddhism for Today)」의 저자 모리스·오코넬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불교를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빨리 경전에 기록되고 있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빨리 경전은 근거 있는 확실한 것이며, 적어도 정자각자가 말한 진정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빨리 경전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어떤 불교냐고 이름을 붙인다면 「테라와다 불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빨리어로 정확하게 기록한 나라는 스리랑카였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84년에 시작하여 7년간 결집을 통해 진행한 일입니다. 또 빨리 삼장을 버마, 태국, 그리고 부처님의 탄생지인 인도에까지 전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453년이 지난 후에 스리랑카에서 4번째의 경전 편찬회의(제4차 결집)가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제4차 결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숙지하고 있던 5백 명의 빅쿠들이 「빨리 경전의 내용이 원래의 가르침으로부터 변함없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관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하여 남기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가한 빅쿠들은 일반적인 승려는 아니라, 전부 아라한(성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성자이기에 보편적인 진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빨리 경전의 불교는 스리랑카 문화가 섞인 「스리랑카식 불교」가 아니라, 마힌다 장로가 인도에서 가져온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순수한 불교」인 것입니다.
제4차 결집은 담마가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빨리 삼장을 필사해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을 다른 것과 서로 섞이지 않게 노력한 결과물인 패엽경이라는 형태로 보존하기 위한 경전 편찬회의였습니다.
16. 테라와다 불교의 원칙과 특징들
순수함을 유지해나가는 테라와다 불교는 개인의 완전한 닙바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합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순수함을 유지 전승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담마를 따르는 진실의 힘 때문입니다. 단지 담마를 존중하며 테라와다의 원칙을 지켜온 결과입니다. 즉 테라와다의 원칙에 의해 테라와다 불교국가들은 형제와 같이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문제를 해결하여 기쁨을 누려왔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도들에 있어서 이 세계의 어떤 것보다 테라와다의 원칙만큼 존중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원칙이 우리들의 마음을 관리하고 있는 한은 언제까지나 불교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테라와다는 죽은 불교가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바라문교의 가르침이 불교와 섞여 변형되어 버리면 순수성을 잃어버립니다. 담마와 어울리지 않는 가르침이 더해져도 순수성을 잃어버립니다. 현재 불필요하다고 조금 빼어버려도 절름발이가 되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테라와다 순수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테라와다 불교도는 재가자이든 출가자이든 태국인이든 버마인이든 스리랑카인이든 관계없이 모두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며 형제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테라와다 불교를 일러,
① 테라와다 불교는 본래의 순수한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교단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원칙을 그대로 보호하기 위해 소소한 삭제나 변경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테라와다를 제외한 모든 분파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들의 경전을 첨가하거나 삭제하고 변경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증명할 필요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기 전에 아난다 시자에게 사소한 문제는 바꾸어도 좋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어떤 이익을 위해서라도, 어느 누구라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담마와 위나야를 부처님의 입멸 후에는 변경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제1차 결집을 통하여 이 세상에 엄숙하게 선언했고, 그 뒤 여러 차례의 결집을 통하여 이를 증명하고 확인하여 왔습니다.
이것이 테라와다 불교가 다른 불교 교단과 다른 점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시간과 장소, 환경에 의해서든, 누구에 의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꾸질 않고, 주객을 전도시키지도 않습니다.
만약 어떤 일로 잘못된 것, 가짜가 혼합되면 원래의 가르침의 내용과 똑같은 형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여 왔습니다. 부처님은 법과 율이라는 두 가지에 문제가 생기면 사대교법(Cattaro mahāpadesa)을 빌려서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라고 단호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빅쿠들이여! 빅쿠들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것은 제정하지 않고, 이미 제정한 것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것은 제정한 계목의 학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엄격하게 받아들이면 발전을 기대할 수 있어서 퇴보할 일은 없다."라고 대반열반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② 존경해야 할 것들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돋보이도록 행한 공덕,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행한 공덕, 붓다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행한 공덕, 스승의 공덕, 계·정·혜의 공덕 이러한 공덕에 채워진 존경해야 할 특별한 스승에게, 그 스승이 돌아가실 때까지 살아있는 한 4가지 필수품을 보시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4가지 필수품은 가사, 식사, 거주처, 약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길상경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Maṅgala sutta(망갈라 숫따)라고 합니다.
길상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뿌-자- 짜 뿌-자니-야-낭, 에-땅 망갈라뭇따망.
pūjā ca pūjanīyānaṁ, etaṁ maṅgalamuttamaṁ.
「존경해야 할 사람들을 공양하는 것은 최상의 길상이다」
출·재가자는 존경해야 할 부처님의 제자를 존경하고 공양하는 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뛰어난 특징이며 의무입니다. 여러분도 바른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존경해야 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최상의 길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길상경에,
Gāravo ca nivāto ca, santuṭṭhi ca kataññutā,
가-라오- 짜 니와-또- 짜, 산뚯티 짜 까딴뉴따-
kālena dhammassavanaṁ, etaṁ maṅgalamuttamaṁ.
깔-레-나 담맛사와낭, 에-땅 망갈라뭇따망.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는 것. 겸손한 것. 만족하는 것. 감사하는 것. 때가 되면 법을 듣는 것. 이것들은 최상의 길상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일은 경사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말했듯이, 여러분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은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존경해야 할 특별한 스승을 존경하고, 겸손하고, 만족해서, 붓다·담마·상가의 삼보의 공덕과 은혜, 스승의 공덕과 은혜에 깊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담마스쿨에서 스승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설법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길상을 많이 얻고 있는 것을 알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이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업도 있고, 과거세의 업과 현세의 업도 있고, 스승과 같은 장로를 만나는 업도 있고, 다양한 원인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특별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은 5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붓다)
생명 존재의 진리를 깨달으시어 대자비를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가르치고 이끌어 주신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존경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둘째.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담마)
부처님의 올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여러분은 존경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셋째. 부처님의 출가 제자(상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정·혜를 그대로 실천해서,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게 지켜 전하고 있는 상가, 그 상가를 여러분은 존경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존경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존경해야 합니다. 존경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공양해야 합니다.
넷째. 자신을 낳아 키워 준 공덕과 은혜가 있는 부모님
부모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생명의 은인이며 첫 번째의 선생님입니다. 부모의 공덕과 은혜를 여러분은 존경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다섯째.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
공덕과 은혜가 있는 선생님, 자신의 인생이 좋아지도록 올바른 길을 이끌어 주신 선생님, 이 선생님의 공덕과 은혜를 알아 여러분은 존경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윤회 가운데를 건널 때는 올바른 선생님이 소중한 일입니다.
이상의 5가지가 있습니다.
이 5가지의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 이외에, 이 5가지 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계율·선정·지혜가 증대되도록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존경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가끔은 수행과 담마 스쿨에 참가할 때, 계·정·혜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존경되고 공양받고 있습니다.
빨리어에 Guṇa vuddha(구나 웃다)라고 있습니다. Guṇa는 공덕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공덕은 계율·선정·지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vuddha는 증대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합하여 Guṇa vuddha는 계율·선정·지혜라고 하는 공덕이 증대되도록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또, 자기보다 연장자에게도 존경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빨리어에는 Vayavuddha(와야웃다)라고 있습니다. Vaya는 나이를 먹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Vaya vuddha는 연장자를 존경하고 공양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상의 존경하고 존경해야 할 일에 공양하는 방식은 5가지가 있습니다.
‘신체의 행위로 공양한다. 말의 행위로 공양한다. 마음의 행위로 공양한다. 재물로 공양한다. 법으로 공양한다.’ 이렇게 5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의 신체의 행위로 공양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조금 전 이야기한 붓다·담마·상가 등의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의 공덕과 은혜를 생각하고 자신의 신체의 행위로 합장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체의 행위로 공양하는 것입니다. 붓다·담마·상가의 삼보의 공덕과 은혜, 자신의 스승님의 공덕과 은혜에, 신체의 행위로 합장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말의 행위로 공양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붓다·담마·상가 등의 삼보의 공덕과 은혜를 생각하고 소리를 내, 말로 하여, 독송하는 것은 말의 행위로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말의 행위로 소리를 내 붓다의 9덕, 담마의 6덕, 상가의 9덕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의 행위로 이해하고 독송하고 있습니다. 가끔 삼귀의를 독송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의 마음의 행위로 공양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붓다·담마·상가 등의 삼보의 공덕과 은혜를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반복하고 반복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리를 내지 말고 아눗사띠(anussati, 주의깊게 반복해서 알아차림, 隨念) 명상을 합니다. 붓다·담마·상가 등의 삼보의 공덕과 은혜를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반복하고 반복하여 생각하면 기쁨의 마음이 생깁니다. 기쁨의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마음의 행위로 공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주 불수념(붓다눗사띠), 법수념(담마눗사띠), 승수념(상가눗사띠) 등의 명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붓다의 공덕과 은혜, 담마의 공덕과 은혜, 상가의 공덕과 은혜를, 소리 내지 말고 마음속에서 반복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기쁨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기쁨의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마음의 행위로 공양하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신체의 행위, 말의 행위, 마음의 행위가 갖추어질 때, 높은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체의 행위만 있고, 말의 행위, 마음의 행위가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의 행위만 있고, 신체의 행위, 마음의 행위가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행위만으로 공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는 여러분은 신체의 행위, 말의 행위, 마음의 행위 모두로 공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매우 높은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높은 공덕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공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설법은 들어야 할 일입니다. 한 번의 설법을 들어도 바르게 알면 많은 공덕을 얻습니다.
네 번째의 재물로 공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재물로 공양하는 것으로는,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붓다·담마·상가 등에 꽃·음식·음료와 같은 자신의 소유물을 보시하는 것, 공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āmisapūjā(아-미사뿌-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물로 공양한다는 것입니다. āmisa는 재산, 소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Pūjā는 공양이라는 의미입니다. 합하여 āmisapūjā는 재물로 공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재산에 집착하여 공양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잘 사용합니다. 보시해야 할 대상에 보시하고, 공양해야 할 대상에 공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āmisapūjā 재산으로 공양한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로 공양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집착합니다.
다섯 번째는 법으로 공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렵습니다. 법으로 공양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공양해야 할 붓다·담마·상가 등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법으로 공양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이것을 빨리어로 Dhammapūjā(담마뿌-자-)라고 합니다.
Dhamma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Pūjā는 공양한다는 의미입니다. 합하여 Dhammapūjā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으로 공양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붓다·담마· 상가 등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법으로 공양하게 됩니다.
재산으로 공양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지만, 재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율을 지켜, 자비의 명상, 위빳사나 명상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스승이 가르치는 부처님의 법대로 실천하면, 법으로 공양하게 됩니다. 재물을 보시하여 공양하는 이, 법을 실천하여 법으로 공양하는 이도 있습니다. 양쪽 모두 공양할 수가 있으면 더욱 훌륭합니다.
이와 같이 존경해야 할 것들에 공양하는 것은 최상의 길상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Paccattaṁ veditabbo viññuhi ti.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 띠.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각자 바르게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테라와다 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③ 테라와다 불교의 중요한 원칙은 팔정성도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삶에 관한 원칙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팔정성도의 가르침이 없다면 전 세계 누구도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위험을 벗어나거나, 스스로 닙바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과 세속을 벗어난 것의 두 결과를 위해서도 팔정성도를 실천 규범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팔정성도를 이해하여 실천하는 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핵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빅쿠들이여! 나는 이 팔정성도를 청정범행이라고 설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를 바르게 실천하는 방법,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 팔정성도를 제대로 실천해야 하고, 개개의 생활에서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덟 항목인 견해, 생각(사유), 말(언어), 행위, 생활, 노력, 알아차림, 집중(삼매)은 안정되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사려 깊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 팔정성도를 설하시고, 에히빳시꼬(ehipassiko),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기에, 누구나 와서 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담마를 "도" 혹은 " 흐름" 이라는 영광스런 말로 칭송하셨습니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나아가듯이, 그 도는 자연스럽게 닙바나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 여덟 가지 바르고 성스러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닙바나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불교는 계, 정, 혜, 해탈의 맛입니다. 계, 정, 혜인 팔정성도를 스스로 실천해야만 불교의 진수인 해탈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 진수는 번뇌가 다해 집착을 여윈 경지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단순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테라와다 불교의 특징들은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④ 테라와다 불교는 의례를 비롯한 삼장에서 부처님의 말씀인 빨리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합니다. 출·재가자는 기본적으로 빨리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⑤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붓다가 되셨던 것이기에, 부처님은 영원하여 전지전능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니라고 테라와다 불제자는 알아야 합니다.
⑥ 테라와다 불제자는 여러 보살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을 비롯한 사쌍팔배의 성자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성자들은 바른 견해를 지니었고, 자애를 가졌으며, 연민심을 지녔기에, 이타행을 실천하는, 고귀한 분들입니다. 살아계신 그분들이 여러분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닙바나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⑦ 테라와다 불제자는 실천해야만 하는 10개의 바라밀을 충만 되게 성취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것만이 붓다(성불)가 되는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 특별한 10가지 바라밀을 성취하고 지혜를 가지도록 노력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라밀을 성취하는데 게을러서도 안 됩니다. 비록 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지 못해 붓다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바라밀의 공덕으로 여러분들은 힘든 고비를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⑧ 테라와다 불제자는 집착이 다하고 그치는 것이 닙바나라고 알아야 합니다. 닙바나는 영원한 행복과 기쁨이 있는 다른 생(극락)이 아니라, 이생에서 경험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⑨ 테라와다 재가자는 항상 출가자가 불편함이 없도록 돌보며,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 지니고, 불재일에는 팔계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테라와다 출가자는 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재가자를 존중하며, 개인이 아니라 상가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테라와다 출·재가자는 해야 할 일에 조화가 잘 이루어져 목적을 잃지 않고 「붓다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붓다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행하여 교단을 아래로부터 떠받치는 것을 말합니다. 교단 위에 걸터앉아 무임승차하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의 가족 중에 무임승차하는 자가 많아지면, 교법은 쇠퇴해 기울게 되어버립니다. 붓다의 가족으로서 어깨에 메어 떠받치는 구성원이 증가하면, 교법은 융성해져서 발전하게 됩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테라와다 불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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