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1. 불교 개론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3.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1. 불교 개론
BC 6세기에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는 아소까 왕 시대인 BC 3세기부터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남쪽으로는 테라와다 불교가 스리랑카를 통해서 태국,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으로 퍼졌고, 서북쪽으로는 테라와다와 길을 달리한 대승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서 북인도, 티벳까지 전파된 후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불교는 길을 달리하여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불교를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부르고 있지만, 소승불교라는 용어는 1956년 세계 불교도 회의에서 앞으로 일체 쓰지 않기로 결의된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스리랑카, 태국, 버마,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 전파된 불교를 지칭하는 데는 장로/상좌/빨리/남방/초기/근본/테라와다 불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우리 교단에서는 테라와다 불교라고 통일하였습니다). 히나야나(소승)불교라는 말은 적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테라와다의 지류,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종파를 지칭한 마하야나(대승) 학자들에 의해 창작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불교이기도 합니다. (cf. 설일체유부 종파는 시간에 대한 가르침을 놓고 논리적 대립을 하다 테라와다로부터 갈라졌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도가 현재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설일체유부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불교에는 3가지의 보물이 있습니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입니다. 붓다는 부처님, 담마는 진실한 가르침, 여기까지는 완벽한데, 상가는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하는 아직 완전하게 깨닫지 않은 출가자들과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출가자 모두를 포함하여 상가라고 합니다. 깨닫기 위한 시스템과 재가 신자가 보시를 해서 공덕을 쌓기 위한 복전으로서는 완벽하지만, 승단의 전원이 완벽하게 깨달음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승단(상가)은 자치 조직입니다. 승려 개개인이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에 의지하여 몸과 말과 마음을 지켜 조심해야 하지만,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 계율에 의거해 승단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합니다. 인도에서는 그러한 종교적 자치 조직을 인정하여 왔습니다. 불교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종교는 국가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인도의 문화와 관습으로서 종교인이나 승단에 대해서는 국가와 국민들은 최소한의 보호(보시라고 하는 형태)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종교인들 또한 국가나 국민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참견하지 않고, 상담을 요청받았을 때에만 조언할 정도였습니다.
붓다와 담마와 마찬가지로 상가도 보물에 속합니다. 국가나 국민과 관계를 가지면서,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며 붓다의 담마를 변함없이 지키고 전하기에 상가라는 보물이 불교를 지켜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붓다의 담마인 부처님의 불교는 현재도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온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테라와다 상가에서 확실히 지키며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 지역의 정부나 재가 신자의 버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지만 그 분의 가르침을 변형하지 않고 확실히 지키고 있기에 이 전통을 따르는 불교를 테라와다 불교라고 말합니다. 이런 불교는 기원전 3세기에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졌고 그 후 동남아시아에 차례차례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상가라는 보물이 없습니다.
기원 전후부터 인도에서는 대승경전이 창작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붓다·담마·상가라는 삼보에 예경드리는 본래의 불교와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출처도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법보로서의 대승경전과 거기에서 설명하는 불보는 위설이든 창작이든 존재하지만, 그것을 지켜 전해야 할 승보인 승단과 승단을 보호하고 유지해야 할 계율이 없었습니다. 경전만이 돌연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경전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느 부류의 승단에 속하는 승려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승경전은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면면히 전하며 배우는 사자 상속의 구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서적의 형태로 나타나 새로운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중국은 불교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수입 문물과 함께 대승경전과 그것을 반입한 서역이나 인도의 「승려」를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대승불교였던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승경전이 불교였던 것입니다. 붓다·담마·상가의 삼보로서가 아니라, 인도·서역지역의 가르침으로서의 법과 대승경전만이 들어 왔습니다. 중국에 있어서의 불교는 서적으로 전해진 다른 나라의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승단으로서 성립되지 않은 인도·서역의 대승의 「승려」를 중국에서는 서방 문화를 전하러 온 외교관처럼 취급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국가의 귀빈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국에 온 외국인 기술자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와 국가가 거리를 유지하며 대등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외래의 불교와 승려가 국가 체제 안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나 「승려」의 대우는 국가나 통치자의 시정방침에 좌우되게 됩니다. 때로는 국가의 정책에 따라 대우받기도 하고, 때로는 외래의 위험한 사상으로 낙인되어 배격되었습니다. 중국 불교는 가르침도 「승려」도 나라에 예속된 나라의 기관의 하나로서 다루어졌습니다.
그런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서기 4세기와 6세기에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됩니다. 이들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입되었기에 국가의 관리 아래 있는 종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 퍼지게 됩니다.
이런 불교의 2가지 흐름은 15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불교는 지금 각각의 지역에 조금씩 혼합되며 퍼지고 있습니다.
같은 불교이면서 각각 다른 길을 걸어 온 2개의 불교는 차이를 서로 이해하고 공통점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며 이런 교류를 통하여 먼 후일 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런데 스리랑카의 불교와 스리랑카식 불교, 태국의 불교와 태국식 불교라고 부를 때 그것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스리랑카의 불교, 태국의 불교라는 말은 전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수행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편, 스리랑카식 불교, 태국식 불교는 불교의 문화적 관행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 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buddha)라는 말은 그 누구든 깨달음(아라한에 이른 사람)을 이루신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불교의 창시자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붓다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스리랑카의 불교와 태국의 불교, 버마의 불교가 다르지 않음은 이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식 불교는 태국식 불교와 다르고, 버마식 불교와도 다릅니다.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싯닷타(Pāli. Siddhaṭṭhā, Skt. Siddhārthā)는 BC 6세기 인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위해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는 것을 경시하는 인도 문화로 인하여, 우리는 부처님 탄생의 정확한 연도와 날짜를 모릅니다.
고따마 붓다의 입멸 시기와 근본분열, 제2차 결집의 시기에 대한 대체적인 전승은 아래와 같습니다.
❇ 붓다의 입멸 시기
「B.C. 544~543년설」--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채용, 국제 불교도 회의에서 불기 2500년(1956년)을 기점으로 동일하게 이 설을 채용함.
「B.C. 485년설」--분별설부
「B.C. 383년설」--설일체유부
❇ 근본 분열의 시기
「불멸 후 160년설」--테라와다
「불멸 후 100년 이후설」--분별설부
「불멸 후 116년 아소까왕시대설」--설일체유부
「불멸 후 200년 이전설」--대중부
❇ 제2차 결집의 시기
「불멸 후 100년설」--테라와다·분별설부·법장부(장아함의 전승)·화지부·설산부
「불멸 후 110년설」--설일체유부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된 내용이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진실한지 아닌지 입니다. 반대로 중국인들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간과 날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 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 역사적 확실성은 많은 기념비를 남긴 아소까 왕의 경우에서는 확실합니다(그래서 부처님의 탄생, 성도, 입멸 연대를 잡는 기준으로 아소까 왕의 통치시기를 기준점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대 인도 역사에는 그다지 증거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빨리 경전에 나오는 자료들조차도 역사와의 일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본생담(Jātaka) 이야기 중의 하나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마라(Māra)가 말하길, 싯닷타 왕자를 7년 동안 뒤따랐지만 그를 공격할 꼬투리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7년이란 언급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왕자의 6년 고행과 다릅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 교리에 나오는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그 해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모순된 해석에 테라와다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인,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가 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를 편찬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빨리 삼장 외에 또 다른 중요한 테라와다 문헌은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스님이 주고받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질문과 답변인 밀린다빤하(Milindapañha, 밀린다왕문경)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사회개혁가였을까요? BC 6세기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생각해 보면 인간 평등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부처님의 여성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부처님의 여성에 대한 접근은 대담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과연 정법의 쇠퇴가 여성 출가자에게 책임이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경계를 제정했고 그것을 정법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빨리어 『장부』의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상가가 자주 많이 모이고, 모여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제정된 것을 따르고, 법랍이 많은 수행자를 존경하고, 일어난 갈애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청정한 범행자를 오게 하고 온 범행자를 편안하게 하는 한에서 상가가 성장하고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가의 쇠퇴는 여성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상가가 멸망하지 않게 하는 7가지 불퇴법을 잘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빨리어 『율장』의 주석서인 『선견율비바사』에 따르면 아소까왕의 아들 마힌다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날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영향을 받은 마힌다의 여동생인 상가미타도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마힌다 장로와 함께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보리수를 가지고 비구니 교단을 이끌고 건너갑니다. 마침내 인도 밖에서 처음으로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구니 교단이 스리랑카에서 안정됩니다. 약 600년 후, 즉 429년과 433년의 두 차례에 걸쳐 비구니 상가는 수백 명의 중국 여승에게 비구니계를 주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고 중국 여성은 구족계를 받아 비구니가 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비구니 수의 증가와 비구니 교단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법장부(Dharmagupta)율을 따르는 중국의 비구니 상가는 4차례의 법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습니다.
북방에서는 비구니 교단이 대부분 존속되어 왔지만, 남방 비구니의 교단은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대부분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멸된 이유는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파괴 그리고 사회적 혼란 등으로 교단이 사라지고 난 후에 비구들은 즉시 다른 나라에 가서 상가를 구성하여 돌아오거나 다른 나라의 10명 이상의 비구들이 와서 교단을 형성하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비구 상가는 쉽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구니 상가는 비구 상가가 반드시 동참해야 비구니 상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강도 등의 위험과 이국으로의 여행길의 험난함 때문에 교단 형성을 위해 다른 나라로 가거나, 다른 나라의 비구니가 그 나라에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비구니 교단만이 소멸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시대의 사회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상가였습니다. 부처님은 그 스스로 위대한 사회개혁가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불교를 점검하는 것은 불교의 역사를 쫓는데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보리(bodhi) 혹은 삼보리(sambodhi)라는 말은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부처님을 포함한 아라한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단계 도달과 다른 아라한들의 그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正自覺者(Sammā-sambuddha,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라는 다른 말을 만들어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부처님을 신의 위치 혹은 그 이상의 위치로 올려놓기 위해 신중의 신(devātideva)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문장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에 대한 이런 신격화 내지 미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알다시피 부처님께서 법을 처음 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0명의 아라한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담마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포교적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담마를 배우고 올바르게 수행하여 부처님을 뵙지 않고도 아라한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부처님이 누구인지 계속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제자들은 자연히 부처님의 신격화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탑 신앙은 부처님의 신격화의 연장선에서 발달되었습니다. 탑 신앙에는 4개의 존경받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Sammā-sambuddha(정자각자), Pacceka Buddha(벽지불, 깨달음은 이루었지만 아직 담마를 설할 수는 없는 성자들), 그리고 Arahant(아라한)과 Cakkavatti(전륜성왕)으로 훌륭한 도덕심과 지성, 그리고 더 높은 정신세계를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지막만이 재가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출가자들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탑 신앙의 수행은 재가자들(Upāsaka와 Upāsika) 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탑을 세우고 유지하고 숭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출가 제자들에게 하신 이 권유는 재가자들이 탑 신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가 신도들이 어느 방향에서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사거리에 탑을 세웠습니다. 참배할 때 그들은 어떤 경들(Sūtra, Suttas)을 낭송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재가자들 또한, 출가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편찬되지 않은 부처님 말씀을 모았습니다. Buddhavaṁsa(불종성경), Lalitavistara(방광대장엄경, 보요경), Buddhacarita(불소행찬) 그리고 Mahāvastu(대사)같은 불교 경전들에는 재가자들에 의해 수집된 부처님의 일생 이야기를 묘사하는 자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담마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84,000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이 숫자에 따라 아소까 왕은 인도의 전역에 84,000 탑을 건립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동안 어디에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유명한 문장 “evaṁ me sutaṁ...” 으로 시작되는 경전을 통해서 25년 동안의 설법 장소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어느 장소인지가 언급된 후에, 무슨 법을 설하셨고, 그리고 그것이 몇 년이었는지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범천 사함빠띠(Sahampati)가 부처님께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paṭiccasamuppāda(연기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원인이 없으면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과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후에 이 진리를 놓고 며칠이고 몇 주고(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음) 거듭 숙고하셨습니다. 걸어서 약 250km 거리인 베나레스(바라나시)로 향하는 길에 부처님은 그의 이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최초의 설법 Dhammacakka pavattana Sutta(초전법륜경)를 5명의 제자들에게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묘사하듯이 어느 누구에게든지 차별 없이 법을 설하시면서 80평생을 사셨습니다. 고향을 향한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은 대반열반경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치고 병들어 아난다에게 물과 다른 것들을 청하면서 힘들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이 묘사는 부처님조차도 육체적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위장병이 있으셨는데 마지막 드신 음식이 위장의 상태에 맞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음식이 돼지고기였든 버섯이었든 관계없이 불교의 초기 경전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의미는 부처님은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점점 더 부처님을 신격화하려 했고 부처님 생애의 작은 부분까지도 미화하려 했습니다.
45년 설법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비구니 상가를 허락했을 때, 상가에선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 외의 일에서도 비구 상가 안에서조차 어떤 이들은 부처님을 탐탁해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부처님의 사촌인 데와닷따(devadatta)가 있는데 그는 부처님을 거스르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띠(Sāti)라는 비구 스님이 재생(punabbhava)에 대해 부처님께 도전적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서, 그는 의식(Viññāṇa)이 이전의 생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다른 생으로 가지고 간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는 나의 가르침을 망치고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상가도 부처님을 거스르기도 하고, 담마도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앎을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세 종류의 앎(tevijjā, 삼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pubbe nivāsanussati ñāṇa(숙명통)는 전생의 기억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dibba-cakkhu(천안통)는 현재의 존재를 결정짓는 특별한 업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asavakkaya-ñāṇa(누진통)는 모든 편견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모든 번뇌를 부수는 앎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앎이 명상을 통해서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반해 마지막 것은 오직 아라한에게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Tripiṭaka(삼장)
알다시피 경전은 삼장(Tipiṭaka : Vinaya Piṭaka, Sutta Piṭaka, Abhidhamma Piṭaka)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Vinaya Piṭaka(율장)에는 Sutta-vibhaṅga(경분별), Khandhaka(건도부), Parivāra(부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Sutta Piṭaka(경장)에는 다섯 개의 모음집(Nikāya, 부)이 있습니다.
Dīgha-nikāya(장부) : 비교적 긴 34경전의 모음집
Majjhima-nikāya(중부) : 크기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152경전들.
Samyutta-nikāya(상응부) : 길이에 대한 고려 없이 상응하는 것들을 함께 묶은 경전들.
Aṅguttara-nikāya(증지부) : 1부터 11까지의 순번에 따라 정리된 경전들.
khuddaka-nikāya(소부) : 크기에 있어 가장 짧은 경전들.
이것은 Sutta nipāta(경집), Dhammapada(법구경), Theragāthā(장로게송),
그리고 Therīgāthā(장로니게송), Jataka(본생경), Buddhavaṁsa(불종성경), Cariyāpiṭaka(소행장), Apadāna(비유경) 같은 경전들을 포함합니다.
스리랑카에는 15개, 태국에는 17개, 버마에는 18개의 경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Nettippakaraṇa(도론), Peṭakopadesa(장훈), Milindapañhā(밀린다왕문경) 같은 경전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 Abhidhamma Piṭaka(논장)에는 Dhamma-saṅgaṇi(법집론), Vibhaṅga(분별론), Dhātu-kathā(계설론), Puggala-paññatti(인시설론), Kathā-vatthu(논사), Yamaka(쌍론), Paṭṭhāna(발취론)의 7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장부분은 테라와다에서 빨리어로 완전하게 보존해 온 남전문헌인 5니까야(부)와 달리 북전문헌인 4아가마(아함)는 복수의 여러 부파 것들을 모은 것입니다.
남·북전 많은 부분이 함께 대응 관계는 있지만, 상당 부분은 대응하지 않습니다.
율장 부분은 빨리율장의 한 종류, 한역율장의 다섯 종류, 티벳율장의 한 종류가 있습니다.
논장 부분은 테라와다 빨리논장의 7론, 설일체유부의 7론, 법장부의 1서가 현존합니다.
이런 경전들의 시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언제 누가 그것을 편찬했을까?
이런 의문은 우리에게 제1차 불교결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가르침은 BC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문자화된 성문 경전이 나타날 때까지 제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그런 구전의 시작은 부처님 생존 시부터 있었지만, 체계적인 구전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3개월 후에 열린 제1차 결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3.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부처님의 생애에서 탄생·출가·성도·열반 시의 나이와 그 시기에 대해서는 스리랑카·태국·버마 등에 전해진 남방 전승, 중국에 전해져 한역된 북방 전승 등에 따라 다양한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나이를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나이로 기록되어 있는지, 달을 기준으로 하는 나이로 기록되어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빨리 성전과 주석서의 기록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전승들을 비교 분석해서 부처님의 일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의 시기를 알아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나이를 세는 방법에 대해서는 입태를 기준으로 하여 만 나이로 계산하여 보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1) 입태는 āsāḷhā달(음력 6월)의 만월의 날(음력 6월 15일)
(2) 탄생은 입태 후 10개월이 지난 vesākhā달(음력 4월)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3) 출가는 만 29세가 되는 āsāḷhā달(음력 6월)의 만월의 날(음력 6월 15일)
(4) 성도는 만 35세 10개월의 vesākhā달(음력 4월)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고행 기간은 6년 10개월.
(5) 입멸은 만 80세 10개월의 vesākhā달(음력 4월)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또한 탄생을 기준으로 하여 만 나이로 계산하여 보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1) 입태는 탄생 10개월 전의 āsāḷhā달(음력 6월)의 만월의 날(음력 6월 15일)
(2) 탄생은 vesākhā달(음력 4월)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3) 출가는 만 28세 2개월이 되는 āsāḷhā달(음력 6월)의 만월의 날(음력 6월 15일)
(4) 성도는 만 35세의 vesākhā달(음력 4월)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고행 기간은 6년 10개월.
(5) 입멸은 만 80세의 vesākhā달(음력 4월)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먼저 부처님의 입태와 출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님의 입태와 출생을 언급하는 경전은 열반경과 관련된 문헌들이 많습니다. 이런 언급들은 본문 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경전의 마지막에 부가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입태로부터 출생까지의 월수를 말하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이 기간이 10개월로 동일합니다.
그 외에도 부처님의 출생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달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기후나 꽃 등의 언급을 통해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남전의 빨리 경전과 주석서들은 부처님의 입태와 출생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북전의 장아함경의 불반니원경 등 대부분의 한역 기록에서는 탄생이라는 언급이 입태인지 출생인지의 판단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입태가 4월 8일에 10개월 태내에 있었다는 것이라면, 계산상으로 출생은 2월 8일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수행본기경, 과거현재인과경 등에서는 출생도 4월 8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입태와 출생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한역 경전과 주석서들보다는 입태와 출생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빨리 경전과 주석서들이 더 믿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빨리어 Jātaka(본생담) 주석서인 Nidānakathā에서는 “마하마야 왕비는 아살라하달의 만월 마지막 날(이것은 6월 15일에 해당한다)에 보살이 결생되었다. 그녀(보살의 어머니)는 보살을 10개월간 그 태내에 보호한 후 출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는 결생인 입태의 시기에 대한 기록만 있고 출생의 시기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보살이 10개월간 태내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보살의 출생은 웨사카달의 만월의 날인 음력 4월 15일로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한 스리랑카 역사서인 Dīpavaṁsa(도사)에서는 “정자각자는 웨사카달의 만월의 날(4월 15일)에 탄생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다른 주석서들에 기술된 보살의 출생 등에 바탕을 두고 살펴보면 보살의 입태는 음력 6월 15일, 출생은 4월 15일로 보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음력 6월 15일을 보살의 입태일로, 음력 4월 15일을 보살의 탄생일로 여깁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출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빨리어 자료와 한역 일부 자료에서는 29세에 출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역 자료인 근본유부율 파승사 등 여러 곳에서는 19세에 출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역 별역잡아함에서는 31세에 출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빨리어와 한역 모두 공통적으로 고행기간을 6년 혹은 횟수로 7년(6년 10개월)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빨리어 자료에 의하면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성도한 것이 되지만, 한역 19세 출가로 계산하면 성도가 25세가 되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출가 후 고행 16년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불전과 중국 문헌에도 고행을 16년으로 기록한 것은 없고 모두 6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불교 자료 어디에도 25세에 성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29세에 출가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장부경전 대반열반경에 “나는 29세에 선을 구하여 출가했다. 나는 출가하고 나서 정확한 방식과 바른 진리를 찾아 많은 지역을 유행했다.”
또한 Jātaka(본생담) 주석서인 Nidānakathā와 소부 경전의 Apadāna(비유경) 등에서도 일관되게 29세에 출가하여 6년 후에 붓다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29세에 출가했다고 말합니다.
출가의 달과 요일은 음력 6월 15일, 6월 8일, 4월 8일, 5월 8일설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2월 8일을 출가재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한역 대반열반경에 인도력 2월 8일에 보살이 출가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인도력 2월 8일은 우리나라 음력으로는 4월 8일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나라 출가일은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날입니다. 이는 인도력부터 중국력으로의 전환 시에 생긴 오차로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음력 6월 15일을 출가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본생담 주석서인 Nidānakathā에 “보살은 전륜성왕의 위의를 버려버리고, 아살라하달 만월의 마지막 밤 시간(6월 보름의 깊은 밤 시간)에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스리랑카의 역사서들에 기술된 보살의 출가 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음력 6월 15일을 보살의 출가일로 여깁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성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후에 몇 년간 고행을 한 후에 성도하셨기에, 출가 연령과 고행 연수를 더하면 성도 연령이 됩니다. 그런데 출가 연령에 여러 설이 있기에 성도 연령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35세에 성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전전승의 빨리경전과 주석서들은 한결같이 부처님의 성도를 35세로 말합니다. 그런데 북전전승의 자료에는 30세, 35세, 24세라는 여러 이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출가 연령에 여러 이설이 있기에 그로부터 6년 후를 성도 연령으로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 자료에서는 묘하게도 출가 연령을 19세로 하고서도 고행 6년을 더하면 성도는 25세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25세 성도설은 경전이나 인도 문헌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표면화해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빨리어 자료들에서 고행을 「만 6년」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 다수이기에, 빨리 경전의 29세 출가에, 만 6년 고행을 더한, 35세 성도를 따릅니다.
소부 경전의 Apadāna(비유경) 39에 “그 업이 무르익는 동안, 나는 수많은 고통을 당하며, 우루웰라에서 6년을 보내고, 그 후에 나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55에는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해서 6년 후에 붓다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주석서 아시따 선인의 예언 부분에서도 “정반왕 가계의 이 아이는 지금으로부터 35년이 지나서 붓다가 되실 것이다.”라는 기록이 모두 35세에 성도하는 것으로 일치합니다.
그러기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35세에 성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의 달과 요일은 출가와 마찬가지로 음력 6월 8일, 4월 8일, 4월 15일, 4월 23일, 5월 8일설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을 성도재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음력 4월 15일을 성도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역사서 Mahāvaṁsa(대사)에서 “마가다국의 우루웰라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대성자는 웨사카달의 만월일(음력 4월 15일)에 무상보리를 이루었다.”
본생담 주석서인 Nidānakathā에 “그녀 수자따(Sujātā)는 큰 스승이 6년 고행을 그만둔 뒤인 웨사카달의 만월일(음력 4월 15일)에 유미죽을 공양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스리랑카의 다른 역사서들에 기술된 부처님의 성도 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음력 4월 15일을 부처님의 성도일로 여깁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입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경전에서 부처님의 입멸 연령을 전하는 장면은 크게 나누어 3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한 가지는 사라쌍수에서의 부처님 입멸 장면이고, 또 하나는 입멸에 앞서서 마라(마왕 파순)의 재촉을 받고 3개월 후에 입멸한다고 선언하시는 장면이며,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부처님에 앞서 입멸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의 입멸과 관련된 장면입니다.
부처님께서 3개월 후에 입멸한다고 선언한 것은 우안거 기간은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안거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수명을 버리지 못하고 잡아둘 수 있기 때문에 3개월 후에 입멸한다고 선언한 것은 일단 잡아둘 수 있었던 생명을 버릴 결심을 하는 것이기에 우안거 기간이 지난 후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라에게 이 선언을 하신 것은 짜빨라 승원에서 안거가 지난 후인 음력 1월 보름에 하시게 됩니다. 그래야 부근 웨살리에 흩어져 수행하는 비구들을 모으는데 율의 저촉을 받지 않게 됩니다.
남전전승의 빨리경전과 주석서들은 부처님의 입멸 연령을 80세로 말합니다. 그런데 북전전승의 자료에는 79세, 82세라는 이설이 있지만 대부분은 80세로 일치합니다. 우선 북전에 불합리한 전승이 있는 이유는 출가로부터 입멸까지와 성도에서 입멸까지의 연수를 동일하게 모두 50년 혹은 50년 남짓으로 기록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출가와 동시에 성도한 것으로 되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출가로부터 입멸까지의 연수를, 성도로부터 입멸까지의 연수로 오해한 것에 의해 생긴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전에 「나는 29세에 출가하고 나서 성도했고, 이렇게 50년을 경과했다」라고 읽어야 하는 것을, 「성도로부터 50년」으로 역경가들이 풀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전의 전승 중에서 합리적인 것은 29세 출가, 6년 고행, 출가로부터 입멸까지 50여년, 입멸 80세로 기록한 「대지도론」이나, 29세 출가, 6년 고행, 35세 성도를 말하는 「비바사론」이 그래도 남전의 빨리 전승과 일치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빨리어 전승과 주요 한역 아함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출가 29세, 성도 35세, 입멸 80세라는 전승이 기본이 된다고 봅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중부경전의 Mahāsīhanāda Sutta나 장부경전의 대반열반경에서 “사리불이여! 혹은 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고 노쇠하고, 고령으로, 인생의 종착에 이미 이르렀다. 내 나이 벌써 80이 되었다.”
장부경전의 대반열반경의 다른 부분에서 “아난다여! 수행 완성자는 이제 늙고 쓸데없이 나이를 먹어 80세가 되었다. 비유하면, 낡고 더러워진 마차가 2개의 수레바퀴에 의지해 겨우 움직여 가는 것과 같다. 나도 늙고 쓸모없이 나이를 먹어 80세가 되었고, 나의 몸도 2개의 수레바퀴에 의해 겨우 움직여 간다.”
Mahāvaṁsa에서 “오종의 눈을 가지고 있는, 비할 데 없는 승리자는(성도 후) 45년간 활동하시다가, 세상의 모든 일을 모든 방법으로 설하시고서, 꾸시나라의 사라쌍수 사이의 좋은 장소에서, 웨사카달의 만월의 날에 세상의 등불은 반열반하셨다.” 라는 기록이 모두 80세에 입멸하신 것으로 일치합니다. 그러기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80세에 입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입멸의 달과 요일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음력 4월 8일, 4월 15일, 5월 15일, 11월 8일설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2월 15일을 열반재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음력 4월 15일을 열반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역사서 앞의 Mahāvaṁsa(대사) 기록과 더불어 율장의 주석서인 Samantapāsādikā(선견율비바사)에 “웨사카달의 만월의 날의 아침 일찍 무여열반계에 반열반하셨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스리랑카의 다른 역사서인 Dīpavaṁsa(도사)에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신 후 4개월 뒤에 제1차 결집을 했다.” 이 제1차 결집은 우안거 중에 행해졌던 것이기에 4개월 전인 4월 15일에 입멸하셨다는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음력 4월 15일을 부처님의 열반일로 여깁니다.
정리해보면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입태·탄생·출가·성도·입멸을 다음의 같이 말합니다.
(1) 입태 = āsāḷhā달의 만월의 날(음력 6월 15일 )
(2) 탄생 = vesākhā달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금요일).
(3) 출가 = āsāḷhā달의 만월의 날(음력 6월 15일 월요일)
(4) 성도 = vesākhā달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수요일)
(5) 입멸 = vesākhā달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화요일)
이제 이런 기념일의 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소까 왕(재위 B.C. 268~232 년)의 연대는 거의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불멸연도가 아소까 왕의 재위보다 백 년 전인지, 2백 년 전인지의 문제는 미묘한 부분입니다.
테라와다의 기록에도, 설일체유부계의 기록에도 문헌 이상의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주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테라와다의 「불멸 2백년 후의 아소까 왕」이 압도적으로 진실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록 자체의 신빙성을 생각하면 테라와다의 것은 지금도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당시 언어의 기록이고, 그 문헌이 도중에 개편된 흔적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의 사서인 「도사」의 두 문장에서만 불멸 2백년을 백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사서를 제외한 다른 테라와다의 자료는 모두 불멸 2백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사서는 필기했을 때의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필기의 기록은 신용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서 쭉 암기에 의한 구두 전승을 계속해 온 테라와다도 스리랑카에 들어간 후 2백년 남짓 지난 기원전 일세기에 만약을 위해 필기에 의해 경전을 남기게 됩니다. 기록하는 김에 경전 이외의 사서 등도 기록했습니다. 이것으로 경전 이외의 문헌을 필사적으로 암기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대신에 기록 특유의 문제도 생깁니다.
한편 인도에 남은 설일체유부계의 기록은 부파 자체도 이미 없어졌고 기록도 한역된 것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게다가 그것은 한문의 번역 탓인지 아니면 번역 전의 원문이 불완전했던 탓인지 불멸 백년 혹은 2백년 모두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티베트의 기록은 그 같은 인도의 원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게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의 배경을 고려해도 테라와다는 「성전을 결코 바꾸지 않은 채 보관 유지한다.」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고, 거기에 불교 교단의 타락을 걱정한 아소까 왕의 교단 정화를 요구하는 제3차 결집의 의뢰가 이루어져 테라와다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다른 파의 잘못된 이해·사악한 견해를 묻는 「논사」까지 작성합니다. 테라와다와 아소까 왕은 서로의 기대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테라와다의 기록에서는 아소까 왕의 사적을 행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인도에 남은 부파 중에 아소까 왕이 배척한 대중부 제 파는 물론, 논장에 관해서는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설일체유부 조차도 「성전을 결코 바꾸지 않는다」는 테라와다와 그것을 옳다고 지지하는 아소까 왕의 태도는 곱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기록의 자료로서의 신빙성이나 그것을 보관 유지한 제 부파의 배경으로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빨리 성전에 따라 아소까 왕을 불멸 약2백년 후의 사람으로 역산해보면 부처님은 기원전 483년경에 입멸했다고 보는 연대가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덧붙여서 현대의 테라와다의 전승에서는 이것보다 더 60년 전인 기원전 544년을 불멸연도로 보고 거기서부터 불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는 스리랑카 왕의 연대를 기준으로 인도의 것과 합해 역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60년의 차이는 적지 않지만 스리랑카가 불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기(佛紀)는 올해(서기 2013년)가 2556년입니다. 이는 테라와다 불교권으로부터 유래합니다. 부처님의 탄생을 기원전 624년, 입멸을 기원전 544년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테라와다 불교권인 스리랑카 불교역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1956년에 세계 불교도 협의회(WFB)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부처님의 입멸 2500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습니다. 이때 불기가 세계 불교도 협의회의 동의로 통일되게 됩니다. 불기는 이때부터 전 세계에서 부처님의 입멸로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한 안거횟수를 계산한 연대기입니다. 때문에 불기는 ‘불멸기원(佛滅紀元)’의 약자로 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북방 전승의 기록에 따라 불탄일과 열반일을 기념하였다가, 테라와다 불교권의 불기를 청담스님이 종정으로 취임한 해인 1966년 8월 「제13회 임시종회」에서 수용한 이래 1967년부터 공식적으로 세계 불교도 협의회(WFB)의 불기를 명시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면
BC 624년 - 보살의 탄생
미래의 붓다이신 보살이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으로 석가족의 왕자로서 현재 네팔의 룸비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때가 웨사카(Vesakha)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4월 15일 금요일). 부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아소까 왕의 석주가 19세기 말에 룸비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he jāte Sākyamuni)」
BC 595년 - 보살의 출가
보살의 나이 29세에 노인, 병자, 죽은 자, 그리고 출가사문을 만난 후 진정한 행복을 찾기를 결심하고 출가합니다. 그때가 아살라하(āsāḷhā)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6월 15일 월요일).
BC 589년 - 깨달음의 성취
출가하여 6년 10개월 동안 고행과 여러 수행을 한 뒤, 그의 나이 35세에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합니다. 그때가 웨사카(Vesakha)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4월 15일 수요일)
BC 589년 - 최초의 설법
깨달음을 성취하신 붓다는 약 18유순(yojana, 1유순은 약 14km이므로 18유순은 약 250km)을 걸어가 현재 인도의 바라나시부근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습니다.(Dhammacakkappavattana, 초전법륜). 그때가 우안거(vassavaso) 시작하는 달인 아살라하(āsāḷhā)달의 보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음력 6월 15일 토요일). 꼰단냐가 성인의 길의 첫 번째인 수다원(Sotapatti)에 이르렀습니다.
BC 589년 - 두 번째의 설법
첫 번째의 설법 후 다섯 명의 수행자는 날을 달리하여 차례대로 수다원에 이르렀고, 5일 후에 부처님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섯 명이 출가한 음력 6월 20일에 부처님께서 무아상응경(Anattalakkhana Sutta)을 설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자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부처님을 비롯한 6명의 아라한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수행하면 누구든지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때가 성도 후 첫 번째 안거기간중인 아살라하(āsāḷhā)달 20일입니다.(음력 6월 20일 목요일)
BC 589년 - 최초의 전도 선언
부처님께서 첫 번째 안거를 지내시는 3개월 동안 바라나시 부근 녹야원에서 많은 제자들이 출가하여 부처님을 따르게 되고, 부처님을 제외하고도 60명의 아라한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전도 선언을 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이든 인간이든 간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비구들이여! 그대들 또한 신이든 인간이든 간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앞으로 가라, 비구들이여! 많은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신들과 인간들의 미덕, 이익,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
한 길을 두 사람이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뛰어나고, 중간도 뛰어나고, 끝도 뛰어난 진리를 가르쳐라.
모두 완벽하고 순수한, 성스러운 삶을 알려주어라.
그들의 눈에 먼지가 덜 낀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들으면 눈의 먼지를 덜어낼 것이다.
어디엔가 진리를 이해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 또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세나니가마에 있는 우루벨라로 갈 것이다.”
이 간곡한 당부로 부처님의 제자들을 여러 지역으로 법을 전하러 떠나게 되고, 그분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많은 지역에서 받아들여 삶의 지표로 삼게 되고 눈 밝은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입멸하실 때까지 45년 동안 몸소 법을 설하셨습니다.
BC 544년(불기 원년) - 부처님의 입멸
부처님께서 80세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길,
“내 나이 무르익어 나의 수명은 이제 한계에 달했도다.
그대들을 버리고 나는 가리니 나는 내 자신을 의지처로 삼았다.
제자들이여! 방일하지 말고 알아차림을 가지고 계를 잘 지켜라.
사유(思惟)를 잘 안주시키고 자신의 마음을 잘 보호하라.
이 법과 율에서 방일하지 않고 머무는 자는
태어남의 윤회를 버리고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꾸시나라(Kusinara)의 살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우셔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때가 vesākhā달의 만월의 날(음력 4월 15일 화요일)입니다. 이로부터 불기가 시작됩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테라와다 불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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