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5. 경안각지(輕安覺支)-고요한 마음에 도달하는 감동의 길(20180421. 서울)

담마마-마까 2021. 7. 15. 09:10

https://youtu.be/BehjiOqILHs?si=_3U8u86UpEsoF3xy

 

5. 경안각지(輕安覺支)-고요한 마음에 도달하는 감동의 길(20180421. 서울)

 

저번 시간에는 삐띠 삼보장가까지 끝났고, 오늘은 빳삿디 삼보장가(passaddhi sambojjhaṅga)입니다. 자칫 발음을 잘못하면 '빠사디' 그렇게 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거든요. 빨리어에 '편안하다, 가볍다' 이런 거 할 때 '빠사디'라는 것은 빨리어 단어에 없습니다. 발음을 할 줄 몰라서 아마 그럴 겁니다. 빳삿디 그렇게 읽어야 됩니다.

 

오늘은 빳삿디-경안각지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삐띠 경험들은 해봤죠? 삐띠에 차이들이 있죠? 그 차이들이 있다는 걸 뭐로 가지고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수행자 대답)

뭐 때문에 그렇게 차이가 나던가요? 어떨 때는 강하게 기쁨이 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완전 몸에 꽉 차기도 하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잖아.

그리했으면 여러분들 여기 못 왔겠지. 항상 삐띠가 있었으면.

차이가 나는 것은 뭐 때문에 차이가 납니까?

돌아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삐띠 삼보장가를 경험해봤던 분들은. 내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은 똑같은 거 같은데, 어떨 때는 삐띠가 약하게 오고 어떨 때는 삐띠가 강하게 오고 퍼지기도 하고 이랬을 거라. 왜 그랬어요? 스님이 물어보는 겁니다.

 

내가 예측을 하고 그런 삐띠가 온 것을 알았어요? 예측을 못했어요? (예측 못하죠)

그런데 제어는 가능했죠? (예) 제어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차이가 뭐냐면 지혜 부분에서는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일단 삐띠를 경험했다고 그러면. 물론 그게 무르익어서 성숙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려면 여러번 경험을 해봐야 되겠지만, 어쨌든 지혜의 부분에서는 크게 별반 차이가 없는데, 삐띠 종류가 여러 가지가 된 것은 다른 것보다는 '집중력의 차이'입니다.

 

집중하는 힘이 얼마만큼 강하느냐 약하느냐, 그리고 집중하는 대상이 뭐였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몸이나 느낌에 대한 집중이 강했다고 할 것 같으면 삐띠는 좀 더 오래갑니다. 강해집니다. 그런데 마음이나 법에 대한 것들은 빨리 변하기 때문에 약한 삐띠들이 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편만이라고 해서 몸에 꽉 차듯이 퍼지듯이 하는 삐띠들이 안 온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그런 것들을 자꾸 겪고 하다 보면 '아, 내가 수행에서 뭐가 부족하다' 하는 것이 드러나집니다. 아직 내가 집중하는 힘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대상을 지나치게 알아차리려고 하는 노력이 너무 오바(over)해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삐띠 부분의 삼보장가를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숙달이 되고 나면, 오력이 어느 정도는 약간은 균형이 맞춰지게 됩니다.

그전에는 생짜배기입니다! 억지로 그냥 갖다가 붙이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래서 되게 힘들었는데 삐띠 부분부터는 굉장히 수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부족한 것들을 자꾸 채우게끔 됩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좀 부족하다 할 것 같으면 집중력을 키우는 연습들을 더 해야 되는 거고, 또는 집중하는 힘은 이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노력하는 힘들이 너무 과해져있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속에서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아, 내가 무엇에 도달하겠다는 그런 목표를 세우지 말고, 내가 언제까지 뭘 하겠다, 뭔 경험을 하겠다 이런 목표들 보다는, 마음 속에서 업에 대한 것, 내가 지금 이렇게 수행해가지고 또 내가 선한 마음 내가지고, 선한 것들은 반드시 선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하고 초조해하지 말고,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것, 그걸 '깜맛타나(kammaṭṭhāna)'라고 얘기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자꾸 숙고를 하면서 '내가 지금 할 거는 선한 마음 내어서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고 편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뿐이다.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하고, 이생에 못하면 다음생에서 하면 되지 뭐. 어쨌든 선한 업을 지은 것은 반드시 선한 과보를 받기 때문에 다음생이든 아니면 이생에서의 다음이든 좋은 결과 있을 거니까 그건 걱정 안 한다.' 하는 마음을 편하게 탁 가지는 순간에 노력의 힘들도 어느 정도 균형을 탁 맞춰지게 됩니다.

 

본인이 오력의 균형을 맞추는 걸 어떤 포인트에서 어떻게 잡아야 된다 하는 걸 어느 정도 이 삐띠 삼보장가에서는 조금 조절하는 능력들을 가져야 됩니다.

균형이 맞춰지게 될 때 장애들은 잘 안 일어나게 됩니다.

장애들이 어느 정도 제거가 되고, 인제는 장애가 크게 나에게는 다가오지 않는다고 알게 될 때 그다음에 이 경안각지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보통은 삐띠하고 빳삿디 하고 붙어서 대부분이 나옵니다.

형식상으로는 보통 붙여 나오는데, 그래서 보통 붙여 설명하는 경우들도 많은데, 수행의 진행상에서는 차이가 조금 많이 납니다. 오히려 빳삿디는 수카 쪽에 가깝지, 삐띠 쪽에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온몸에 퍼지는 기쁨들이 숙련되고 나서 자주 그러한 현상들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기쁨에 대해서 크게 집착하는 것들이 없게 됐을 때, 그때 이 경안각지가 사실은 드러나게끔 됩니다.

 

처음에 출가를 한 스님들은 대부분 맨 처음 목표를 잡는 것이 여기 경안각지입니다. 지금 대부분 한 5년차 10년차 되는 스님들은 보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크게 그렇게 안 보이는데 욕심이 눈에 보여요. 지가 뭔가를 할려고 하고 뭔가를 더 많이 공부하고 뭔가를 더 많이 알려고 하고, 의견들도 자기 의견 자꾸 내세우고 그러면 자꾸 충돌들도 있고 하는 것들이 어른 스님들이 보았을 때는 눈에 그게 보이거든. 그런데 그것들을 버리는 시기가 이 경안각지 부분에 대한 이해들을 하게 됐을 때입니다.

 

처음에 출가했을 때는 아, 나도 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냥 평범하게 다른 스님들 같이 편안하게 허허 하고 웃어넘기고 대상도 붙잡는 것 없이 그냥 대상을 편안하게 바라보고, 사띠 하는 것도 남들이 봤을 때는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데도 분명히 하고 있는 상태가 되고, 이 상태가 되길 누구든지 원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모든 대상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는 우뻭카라고 하는 사각지(捨覺支)까지 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가벼워지고 편안해지고 평온해진다는 것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들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삐띠가 일어난 상태에서는 삐띠에 대해서 조절하는 능력들이 생겨나지 않으면 이거는 힘듭니다. 대부분은 보면,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그렇습니다. 수행을 하는 분들을 지도해보니까 보통은 삐띠 부분에서 끝나버리고, 아니면 삐띠 부분에서 이 경안각지 부분으로 안 넘어가고, 의도적으로 수카쪽으로 넘어가는 경우들이나 의도적으로 사마디라고 하는 삼매쪽으로 개발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본인이 이 부분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들도 있고 중요성을 몰라서 그러는 경우들도 있는데,

스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삐띠가 없어도 좋다. 또는 택법각지가 없어도 좋다. 그대신에 경안각지만은 분명하게 이해하고 또 경안각지에 이르러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은 굉장한 도움을 준다" 하고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 봅시다. 경안각지.

몸에 병들이 좀 많은 분들, 이런 분들은 자기 스스로 관찰해보면 몸에서 틀림없이 아픈 부위에서 열이 많이 발생하는 것들을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다른 부위보다도 더 깊은 부위가 많이 열이 발생합니다. 그 열을 관찰하면 당연히 열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부분에 대한 열이 완전하게 없어지지는 않아요.

또 다른 부위에서 아니면 또 다른 형태로써 열들이 틀림없이 발생합니다.

그 부분을 관찰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한은 이 열은 식지를 않아요.

 

보통 몸에 속병들이 있는 경우에는 경안각지 부분에서 치료들을 많이 합니다. 대상을 붙잡을 생각이 없이, 또 치료할 생각도 없이 그냥 그대로 가라앉혀버리는 것. 열이 일어나면 열이 발생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열이 싹 사그라드는 것들입니다. 경안각지에 이른 사람들이 열을 관찰하는 것과 그냥 사띠가 있는 분들이 열을 관찰하는 것은 그 치료의 과정에서 많이 차이가 나게끔 됩니다. 속병이 있는 분들은 그런 것들을 좀 유념해가지고 경안각지 부분을 이해하는 것들이 좋습니다.

 

경안각지 특징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뭔가 확 올라올려고 하는 것들, 안에 속병이든 아니면 마음의 부분에서 열이 발생할려고 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대부분 이 경안각지에서 눌러버리게 됩니다.

그냥 꺼버리듯이 잠재워버리는 상황이라. 그게 잠재워지는게 완전하게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기간동안 안 나타납니다.

 

보통 칠각지 경이 경전 부분에 세 부분에서 칠각지 부분이 나옵니다.

내용은 대동소이 합니다. 누군가가 그 칠각지를 들려주면서 그걸 들으면서 그것에 대해서 숙고를 하고 하면서 병이 싹 나아버리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보통 그 병이 낫는 것들이 뭐냐면 대부분 복주석서들에서 얘기하는 것들이 경안각지 부분입니다. 들려주는 순서에서 경안각지 부분에서 그 부분들이 열을 식혀버리게 되고 다시 그것들을 내가 정진각지나 염각지 쪽으로 다시 또 돌리는 형태들을 띠면서 이 부분들에서 많이 낫는다 하고 복주석서에서는 써놓고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도 경전을 공부할 때 경안각지라고 하는 것은 왜 두 부분으로 나눴을까? 의아스럽게 생각을 했거든. 여기에 보면 마음에 대한 경안, 몸에 대한 경안. 몸이면 그냥 육체의 몸이면 이해가 되는데 주석서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몸이 아니고 '수·상·행'이라고 그럽니다.

수상행(受想行)은 몸입니까? 마음의 영역입니까? 마음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부분이 이해가 안됐어요. 왜 몸에 대한 경안인데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면 경안각지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면 신통력이 개발되어서 몸을 크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아주 가볍게 돼서 하늘을 날아간다든지, 아니면 몸 안에 있는 병이 치료된다든지, 이런 형태들을 주석서나 경전에는 많이 써져있거든. 그래서 그거는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왜 수·상·행을 몸의 경안이라고 했을까 이해를 못 했었어요. 그런데 수행을 해보면 이게 이해가 됩니다.

 

쉽게 예를 들어볼게요. 뭔가 생각이 하나 탁 떠올랐다.

그럼 생각을 여러분들이 알아차린단 말이라. 생각이 탁 없어져 버렸어요. 그게 어디에 영향을 미치겠어요? 틀림없이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은 마음으로 알아차리면서 거기서 끝나버리는데, 그 영향은 틀림없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

영향을 미치는데 그냥 미치겠습니까? 수·상·행으로써 연결이 되는 거라. 그 생각이나 느낌들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가슴을 보면 가슴의 느낌이 생각마다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가 개념화시키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찰나 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일정부분 유지를 해나갑니다.

수·상·행이 그대로 그 생각 하나에 영향을 미치니까 일어나지면서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는 거라.

 

하나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는데 그것의 영향은 수··행을 통해서 몸으로 영향을 탁 미치는 거라. 그때사 이해가 되더라고. '아, 부처님이 이 빳삿디 부분을 마음의 빳삿디와 몸의 빳삿디로 구분해놓은 이유가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이해가 되더라고.

 

그런데 틀림없는 사실은 마음의 빳삿디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좌지우지하지, 몸의 부분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수·상·행과 이 신체를 다 포함하는 겁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빳삿디는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들을 좌지우지 하지 마음의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않습니다.

 

이 연결고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수상행(受想行)과 식()을 분리를 시킵니다.

그런데 연결고리를 아는 사람들은 이게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경전에는 어떨 때는 식(識)을 별도의 것으로써 분리를 해놓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오온의 영역으로써 한 뭉텅이 한 덩어리로써 설명 해놓은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이해할 거 같으면 별도의 특정한 개별체로써 인식을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아비담마 배워본 사람 있습니까? 경안각지에 이르면 어떤 상태가 된다고 하든가요? 여기도 아마 적어놨던 것 같은데, 못 찾겠죠?

빳삿디는 라후따 부분이라 해서 가벼워지게 되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게 되고 하는 부분. 아, 77쪽에 있어요? (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지고 적합해지고 능숙해지고 올발라진다." 라고 적어놨습니다.

여기 부분은 보면 다른 것은 다 웨다나-느낌은 다 하나로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보면 아비담마에서도 보면 몸과 마음 두 가지로 나왔습니다. 실제적으로는 보면 '능숙해지고 적합해지고 부드러워지고 가벼워지고 올발라지고' 다 마음의 영역 같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비담마에도 그렇고, 위나야에도 그렇고 이것을 몸과 마음으로 두 가지로 분명하게 구분을 해놓았습니다.

이 이유를 여러분들이 경안각지를 통해서 이해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담마에 대한 오해를 안 합니다.

그냥 아비담마를 배우더라도 아, 이게 경안각지 부분에서 일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것은 또 삐띠 부분에서 일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고 체험을 하면 그 부분에 대한 것을 바르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얘기를 할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경안각지 부분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적합하게 하고, 능숙해지고 올발라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가벼워지는 것은 뭐가 가벼워지겠어요? (수행자 대답)

몸도 가벼워집니다. 어떨 때는 그게 신통으로까지 넘어가면 붕붕 뜨기까지도 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되어도, 몸이 굉장히 가뿐합니다. 가벼워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수·상·행에 영향을 미치면서 몸도 가벼워지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무게는 여러분들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가벼워집니다.

 

이렇게 보면 될 겁니다. 놀이기구 타봤죠? 여러분보다도 속도가 빠르다든지 하는 것들을 타면은 그 위에 있을 것 같으면 속도가 빠르게 회전을 할 때는 여러분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있습니다. 거 왜 그래요? 여러분들의 무게가 실제적인 무게는 그대로 있는데도 가볍게 느껴진다 할 때는 뜨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빠르게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면, 몸은 그리고 마음은 굉장히 가벼워집니다.

가벼워져 있지 않으면 대상을 그렇게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겨우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는 정도지, 이 '일어남'에 수백번 수천번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를 못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가벼워져 있지 않으면 대상이 변하는 속성으로써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차라리 삐띠가 없어도 좋고 다른 것 안 해도 좋으니까 가볍게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리고 몸과 마음을 자꾸 가볍게 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탁발하는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도 삐띠와 빳삿디와 수카가 그대로 있습니다. 음식 만들 때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하면서 기쁜 마음이 일어나지고 음식물을 만들면서 그것들을 또 알아차리면서 더욱더 기쁜 마음들이 더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한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와서 공양물을 올릴 때 아무 생각 없이 올리지는 않죠? 그냥 천천히 걸어오면서 걸음을 알아차리면서 탁발물을 분명하게 놓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탁발물을 놓을 때 실수를 한다든지 소리가 난다든지 하게 됩니다. 그대로 빳삿디 입니다.

 

편안하게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선한 공덕을 그대로 쌓아갑니다.

그리고 돌아가고 나서 자리에 앉아서는 공양 올린 것에 대해서 회상을 하면서 선한 행위에 대해서 선한 결과가 있게 되고, 내가 이런 것들로 인해서 부처님의 담마가 오래도록 전해지고 하는 생각만 하더라도 행복이 확 올라옵니다.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이렇게 삐띠와 빳삿디와 수카가 하나로 결합됐을 때 그것은 보시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어떠한 행위를 할 때는 사실은 이 세 가지가 다 결합되는 형태가 가장 좋습니다. 뭔가를 할려고 할 때 즐겁게 기쁘게 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애들 한번 보십시오. 뭐 하다가도 지 맘에 안 들면 딱 안 합니다. 그냥 그대로 멈춰버리고 떼를 씁니다.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고 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거 몇 시간 지치지도 않고 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그 대상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됐을 때,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할 수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도 항상 그런 마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벼워야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가벼워야 되고, 그리고 마음을 먹는 것도 가벼워야 되는 거고, 몸도 가볍게 자꾸 할려고 해야 되지,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나태와 게으름은 이 가볍게 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들뜸이라 하는 것은 빳삿디가 있을 때 발붙일 틈이 없게 됩니다. 이미 마음이나 몸은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있기 때문에 들뜰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들이 다 될 것 같으면 실제적으로는 빳삿디의 단계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는 발붙일 틈이 없게 돼버립니다. 그런 상태가 되기 때문에 빳삿디에서는 장애 없이 이 대상들을 그냥 가볍고 부드럽고 편안하고 그리고 바로 무상·고·무아의 현상으로써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생멸의 현상들을 알지 못하면 빳삿디 삼보장가에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대상은 끊임없이 아주 순간순간에 마음의 영역도 그렇고 몸의 영역도 그렇고 물질의 영역도 그렇고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면 우선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이걸 명심해야 됩니다.

가벼워지려고 하고, 부드러워지려고 하고, 적합해지려고 하고, 능숙해지려고 하고, 올발라지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자기 견해에 함몰이 돼서 자꾸 내세울려고 한다.

요즘 스님 좀 여러 가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보통 스님들이 얘기를 하는데, 재가자들이 좀 이래줬으면 좋겠는데 안 해준다고, 나한테 좀 신세 한탄하는 소리들을 좀 듣습니다. 대부분 보면은 견해 차이 때문에 그런 것들입니다.

그럼 재가자한테 니가 수행을 가르쳐가지고 견해에 대해서 유연성이 생기도록 만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니가 유연성이 있도록 만들어라. 니 자신이 유연해져야지 그걸 가지고 나한테 얘기한다고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 하고 얘길하지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좀 더 유연해져야 됩니다.

 

이번 달로 여기 법회는 끝나죠? 그러고 저쪽 새로 옮기는 쪽으로 가서 법회를 볼 겁니다. 스님 개인적으로는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다 그쪽으로 가서 거기서 새로운 법당에서 법회를 하고 또 거기에 신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인제 거기서 자립해가지고 내 좀 초청 안 했으면, 오라 소리 안 했으면 하는 게 두 번째 바라는 겁니다.

그래 주면 참 좋은 데 내가 그걸 내세우면서 "그리해!" 하고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상황 따라서 여기서 빠져나가는 사람은 빠져나갈 거고, 또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스님이 와서 좀 해주십시오 하면 또 가야 되는 거고, 그렇습니다.

 

자신의 견해에 너무 함몰돼있으면 법문하는 것도 차등을 자꾸 주게 됩니다.

아, 이 스님 법문하니까 뭔가 나에게 도움이 되니까 이 스님 때만 가고, 다른 스님 때는 안 가고. 그런데 돌이켜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스님 어려워하죠? 그런데 좀 쉽게 설명해주는 스님은 안 어렵습니다. 장단점이 있는데도 지금 현재 나에게 이익되는 것만 생각을 하니까, 그 생각에 딱 매여있으니까, 어느 스님 법문은 가고 어느 스님 법문은 안 가고. 또 이 스님이 오면 나는 거기 갈 것이고, 이 스님이 안 오면 안 갈 것이고, 이런 견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조금 유연하게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유연했을 때 알아차리기가 쉽듯이 일상적으로 가지는 것들도 유연하게 가지는 것들이 훨씬 여러분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다음에 적합해진다는 것도 '까야'와 '찟따'로써 그렇게 해놨습니다.

'적합해진다'는 것은 뭐냐면, 내가 이것 다음에 할 것이 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스님은 여기 끝나고 나면 다음에 내려가야 되죠? 내 할 일을 잊어먹어버리게 되면은 한정 없이 이 일을 하게 되는 거라. 다음에 할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사띠를 했으면 사띠를 하고 나서는 그 대상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놔버리고 다음에 일어나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게 됩니다.

 

기쁨이 일어났으면 기쁨을 놓아버려야만이 빳삿디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못 놓으니까 계속 빳삿디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쁨에서 계속 헤매게 되는 거라. 이 현상 저 현상들에서. 그게 적합하다는 거라. 내가 지금 수행에서 적합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나가는 것. 뭘 놓아야 되고 무엇을 지금 사띠해야 될 대상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능숙해진다' 하는 것은 자꾸 연습해가지고 거기에 숙달되도록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빳삿디도 마찬가지고 삐띠도 마찬가지고,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겨나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틀림없이 빳삿디도 빳삿디를 능숙하게 해가지고 빳삿디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삐띠도 마찬가지였고. 그걸 모르면 수행은 계속 거기에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선정에 들어도 선정에서 1선정 2선정 3선정에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들이 다 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면 항상 선정에 들면 그 상태만 계속 있게 됩니다. 왜 그럴까? 좋기 때문에!

지금 삐띠 부분부터는 그전하고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수행이 되어나가고 좋은 것들인데, 좋은 것들이라도 그게 장애가 된다는 생각은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빳삿디도 수행에선 장애입니다. 이게 수행의 끝이고 이게 해탈일 것 같으면 그냥 여기서 끝나버리지. 그런데 이게 아니고 아직 한참 먼 수행의 단계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져야 되는 거라. 그것은 그렇게 할려면 자꾸 숙달되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능숙해져가지고 자유롭게 되는 상황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빳삿디 다음에 사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상태가 완료된 상태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꾸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올발라진다'는 것은 그냥 유연하기만 할 거 같으면 줏대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올발라져 있게 될 거 같으면 자신이 뭔가를 한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이 틀리더라도 그냥 계속 갑니다. 잘못된 길로 갔다, 그리하더라도 그 잘못된 길에서 호랑이 만나기도 하고 뭘 만나기도 하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계속 나아갈 것 같으면 결국에는 그 숲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낀다든지 아니면 다시 돌아올 것 같으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올발라진다는 의미입니다. 결정을 딱 하고 나서 마음을 다잡아서 그것을 끝까지 책임지고 해나가는 것들입니다.

 

빳삿디 부분에서는 이런 작용들을 다 하기 때문에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가라앉게 됩니다. 진정되게 돼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준비들을 할 수 있게끔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한번 쭉 읽어보시고, 78페이지 보면,

어떻게 하면 경안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아까 몸의 경안과 마음의 경안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까 스님이 좀 얘기를 했죠. 경안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얘기를 했습니다.

 

일단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에서 장애들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장애들이 있으면 기쁨부터 안 됩니다.

기쁨의 현상부터 안 일어나가지고 경안은 더더구나 안되게 됩니다.

장애들이 없이 대상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상들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이 보이게 되면, 기쁨이 일어나지고, 기쁨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을 거 같으면 경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안은, 앞에 기쁨의 부분에서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개발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경안부분에서는 마음에 의해서 마음이 개발되는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경안의 순서들은 대부분 보면 마음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져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에는 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끔 되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주석서에 그렇게 나와 있죠! "몸이 변하는 속도보다도 마음이 변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하는 겁니다. 아직은 이해가 안 되죠? 경안 부분에 가면 그게 이해가 되어집니다.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먼저 보여집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더라도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이 먼저 보여집니다.

마음에 대한 것들이 분명하고 그것들이 생겨나는 것들이 탁 보이고 나면 몸이 변하는 것들이 보여지게 됩니다.

그 마음의 현상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면, 그 마음은 독립돼서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수·상·행으로 연결돼서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보여지게 됩니다.

그런 순서를 밟아서 경안각지가 한 사이클을 이루게 됩니다.

이게 자꾸 능숙해지면 어느 정도 경안각지에서 편안하게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 부분이 78페이지에 적어놓은 겁니다.

 

말은 쉬운데 조금 힘들게 느껴지죠? 그런데 실제적으로 보면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보면 희각지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하는데, 거기서 대부분은 멈춰버립니다. 좋으니까 자꾸 멈춥니다. 그런데 자꾸 여러분들이 돌아보십시오. 어떻게 여러분들을 바꿔주는가, 그것이?

물론 기쁨이 있으니까 일상 생활하는 것도 짜증 없이 잘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크게 수행이 진전됐다든지 아니면 사띠가 성숙됐다든지 그런 것들은 보기 힘들 겁니다.

 

저번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사띠는 어떤 경우든지 희각지가 개발되더라도 희각지 부분은 더욱더 자꾸 여러 가지들로 만들어지고 발전해나갈 수가 있는데, 사띠는 절대 성숙되지 않는다고.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자꾸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일 때 사띠는 성숙돼나가는 것이지, 그냥 저절로 다른 각지들이 일어나지니까 사띠도 어느 정도 증장됐겠지, 착각해선 안 된다는 거라.

 

그 부분을 분명하게 이해할 것 같으면, 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기쁨의 현상보다도 오히려 사띠를 무상·고·무아의 현상으로써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가는 것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대상을 잘게 쪼개서 알아차릴려고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띠가 성숙을 하게 됩니다. 무슨 현상들이 일어나서 사띠가 성숙되는 것이 아니고!

 

경안각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안각지가 일어났다 해가지고, 물론 희각지 보다는 사띠가 성숙돼있는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 경안각지가 성숙돼있는 상태에서 처음의 단계와 마지막의 단계에서 사띠가 많이 바뀌어져 있느냐면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걸 착각을 해선 안 된다는 거라.

 

희각지 부분에서 약간만 대상을 놔버리는 훈련들만 하고, 지금 현재 내가 그냥 가볍게 편안하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하는 생각들만 탁 일으키면 경안각지가 바로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이걸 모른다는 거라. 대부분이.

그 부분만 잘 단추를 꿰면 경안각지는 수행하고 나서 며칠 내에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어렵게 보지 말고, 어려운 것은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부족한 오력 중에 뭐가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들어주는 것이 이 희각지와 경안각지에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여기서 오력의 균형들이 잡혀지고 그걸 조절하는 능력들이 생겨나야만이 그다음부터는 다른 것들이 순일하게 넘어가집니다. 그래서 이 희각지와 경안각지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여러분들에게는 훨씬 이익입니다. 사띠는 계속 강화되고 무르익고 성숙됩니다.

 

자, 그런데 그렇게 잘 안되는 분들을 위해서 주석서에 "경안을 생기게 하는 일곱 가지 방법에 대한 것"

그런데 그 일곱 가지 방법 중에, 경전에 써진 게 「지혜가 있는 사띠」입니다.

삐띠 부분도 마찬가지였고 경안 부분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지혜가 있다는 것은 대상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써 자꾸 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렇게 보면서 사띠하는 것들이 사실은 답입니다.

그 답을 자꾸 놓쳐버리고 밑에 것만 자꾸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반쪽짜리 밖에 안된다는 거라. 그것을 자꾸 하도록 하고, 그다음 밑에 일곱 개들을, 설혹 내가 삐띠가 없고 택법각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계속 연습하면 적어도 선심소는 계속 일으켜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직 적절하게 식사를 할 줄 모르죠? 조절하십시오, 조절하십시오.

스님도 저녁을 안 먹는 것이 아예 조절이 돼있습니다. 저녁에 어떤 사람들이 가끔씩 과일을 갈아가지고 오는데 건더기 같은 것이 섞여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쪽쪽 빨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들어갈 때가 있어요. 씹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거북스러워요. 이미 몸이 식사량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돼있는 거라. 그리고 뭐가 지금 필요한지 뭐가 필요하지 않는지를 압니다.

아플 때는 꿀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꿀을 먹을 때와 안 먹을 때를 압니다. 꿀을 먹었을 때 몸에서 어떤 반응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는지를 알게 됩니다.

 

필요한 것들과 적합한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만이 식사를 조절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한테 꼭 지금 먹는 양 만큼 먹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습관적으로 먹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내 몸에 적합한지 않은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들이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밥을 먹을 때는 항상 이 두 가지를 항상 스스로에게 여쭈어보십시오. 이게 필요하고 이게 지금 적합한 것인지? 이 두 가지를 충족했을 때 그것을 먹도록 하십시오. 그게 안 되면 강제적으로 하십시오. 그걸 조절할 수 있는 능력들을 가져야 됩니다.

이게 경안각지를 일으키는 다른 요인들보다도 최고 중요한 요인입니다.

 

경전에도 그런 게 있죠? 위사카 부인인가? 위사카 부인이 ‘스님들이 저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지?’ 하고 보니까 그 스님들이 특성들이 다 있는데 일률적으로 공양을 공양처에서는 주거든. 어떤 사람은 기름진 게 맞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채소류가 맞는 사람이 있고, 그거 없이 그냥 일률적으로 주니까, 위사카 부인이 아! 이분들이 다른 조건들은 다 잘 성숙돼있는데, 이 뒤에 조건들은 다 성숙돼있는데, 딱 하나가 먹는 것에 대한 것들이 적합하지 않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하는 것을 알고 그 스님들에게 개별적으로 맞는 것들을 줍니다.

 

여러분도 초코렛 먹으면 달콤하고 맛있죠? 그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은 다른 것보다 기분이 좋아지고 하기 때문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월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먹는 것 조절하는 것들이 오히려 이 경안각지에서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수행 센터에 가서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서울에 수행 센터가 생기니까 탁발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탁발하는 습관들을 가져서 스님한테 공양 올리는 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공덕뿐 아니라, 여러분이 그 음식 중에서 적합한 것들 필요한 것들을 간추려가지고 그걸 먹고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거기서 편하게 누군가가 해주는 거 가지고 공양을 한다? 안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공양 올린 것으로 인해가지고 여러분들이 깨달음에 이르는데 더 유익하다는 조건도 전혀 없습니다.

그럴 필요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서 탁발을 하고 공양을 올리는 습관들을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음식을 조절하는 법들을 자꾸 배워서 빨리 경안각지가 열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일곱 가지 다 쭉 읽어보시면 될 겁니다. 마지막에 보면

「이런 식으로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수행을 거듭하면 마음은 유연해지고 대상에 고정되지 않고 장애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안각지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수행에서 서두르거나 빠른 결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은 오로지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만으로도 평온함이 개발될 수 있습니다. 경안각지가 개발되면 얻게 되는 이익은 무한합니다. 그때까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띠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가볍게 떨어트려서 대상을 관찰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