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타심통(他心通)과 마음 알아차림 (20180818)

담마마-마까 2021. 7. 27. 09:00

https://youtu.be/nPXkzpn4mxU

* 타심통(他心通)과 마음 알아차림 (20180818)

 

저번 주에 누가 와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스님 앞에 가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고. 왜 그러냐 하니까, 마음을 읽는 것 같아가지고, 마음속에 있는걸 들킬까봐서 말을 못하겠다고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그때 스님이 한 얘기가 생각이 복잡하게 돼있을 때는 스님이 아니라 부처님이 와도 당신 마음을 못 읽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남한테 자기 마음을 안 들킬려고 할 것 같으면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동하고 있으면 행동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으면 말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누구도 당신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하고 한 얘기가 있습니다.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 타심통은 마음에 관계된 거죠? 신통(神通)은 전부 마음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중요합니까? 몸이 중요합니까? 마음이 중요합니까? 그런데 행동하는 것은 몸이 더 중요한 것처럼 하잖아. 아프고 병들고 죽고 하면 마음이 다치는 것보다 더 난리가 납니다. 이 몸을 살리기 위해서 먹고 또 뭔가 운동을 하고, 마음보다도 훨씬 몸이 중요한 것처럼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게중에 수행하는 사람들이든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몸보다는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는 게 뭐냐면 신통을 얻을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신통은 언제 얻을 수 있습니까?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이라고 보통 얘기하죠? 통상적으로는 다섯 가지입니다. 마지막 누진통은 아라한이 됐을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거는 제외해버리고 다섯 가지 신통을 얘기합니다.

언제 얻을 수 있어요? (수행자 대답 : 삼매에 들었을 때)

그렇죠. 삼매에 들어서 삼매 1선정이 자유롭게 자재가 되고, 2선정이 자유롭게 자재가 되고, 3선정, 4선정까지 자유롭게 자재가 되고 나서, 그걸 "다섯 가지 자재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섯 가지 자유롭게 자재하는 상태가 되고 나서 신통이 열리는 것이지, 선정삼매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신통은 열릴 수가 없습니다.

 

신통 비슷하게는 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어, 지금 내가 성냄이 있구나' 하고 알고 있을 것 같으면 성냄이 있는 상태를 본인은 압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성을 내고 있을 때는 굳이 말을 안 해도 '저 사람이 성을 내고 있네' 하고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로 인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추측하는 것이지 신통의 부분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부분도 신통의 영역에 속한다 하고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삼매에 들려면 탐·진·치가 없는 상태가 돼야만이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들 장애들이 분명하게 극복을 해야만이 삼매에 들 수가 있습니다.

삼매에 들고나서 3선정까지 자유롭게 자재하고 나서는 4선정에 들 때 4선정을 경험해본 사람이면 자신이 분명하게 결의를 합니다. 아딧타나라 해가지고 '아, 내가 뭔가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럴 것 같으면 '뭔가의 소리를 듣기를' 하고 발원을 하고 나서 4선정에 듭니다. 그러고 나서 4선정에서 나올 때 그 소리들이 들리게 됩니다.

결의를 하지 않고 결정심을 내지 않는 상태에서는 신통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럼 적어도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앉아가지고 얘기하면서 타심통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라.

짧든 길든 선정이 자유롭게 되고 나서 4선정 이후에 나오면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 그냥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는 신통이 있다, 이런 신통이 있다, 어쨌다' 하면서 그걸 알아맞추는 것들 그것은 추측인 것뿐이지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여러분들이 이해를 할 겁니다.

쉽게 말하면 신통을 얻기 위한 조건은 4선정까지 선정에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안 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또한 신통을 얻는다 해서 그것을 다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닙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여기 있지만 서울에 있는 누군가가 뭘 하는지를 볼려고 한다 알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거기에 관계된 삼매수행을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공중으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40가지 사마타 종류 중에 자기가 그 종류들이 숙달된 자만이 그게 가능합니다. 땅을 대상으로 해가지고 '이것이 땅이다, 땅이다' 한다든지, 아니면 물을 대상으로 해가지고 '이것은 물이다, 물이다' 한다든지, 빛을 대상으로 하면서 '이것은 빛이다, 빛이다' 하면서, 사마타 수행을 했을 경우에 그 각각은 신통이 열리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자유롭게 물속을 걸어다니는 경우도 있고,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해가지고 멀리에 있는 것들도 볼 수가 있고, 또는 내 몸을 아주 가볍게 만들어서 어디든지 갈 수가 있게끔 하고, 그것은 40가지 사마타 명상 중에 어떤 명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종류는 다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멀리 있는 곳의 사람들이 뭘 하는지를 분명히 보는 천안통을 얻을려고 한다. 그럼 거기에 맞는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쉽게 말하면 사마타 수행 중에서 허공을 대상으로 해서 하는 수행을 해서 그게 4선정까지 자유롭게 된 자만이 그게 가능한 것이지, 물을 대상으로 사마타 수행을 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라.

 

마찬가지로 타심통이라고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까?

심념처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지금 현재 어떤 마음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변화되는 법념처를 분명하게 해서 '아,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마음의 요소이고, 이것은 분명하게 무상한 성품이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법념처까지를 완벽하게 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자신의 마음조차도 잘 읽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면 됩니다. 아주 부유하게 산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고도 측은지심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경험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럼 수행자들 중에서 가끔씩은 탐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냄은 있는데. 그러면 탐심에 대해서 본인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어떻게 바뀌고 하는 현상들도 모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탐심이 일어난 것들 그걸 타심통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다 본인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본인이 분명하게 경험했고, 그것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분명하게 알 때 다른 사람들의 마음들 거기에 관계된 마음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게끔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이 탁발을 나갔는데, 장부경전에 보면 「수바경(Subha sutta)」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셔가지고 개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누구도 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셔가지고 그다음생에 개로 태어난 것을 몰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보고 아시는 거라.

그 개로 태어난 아버님 이름이 또데이야(todeyya)라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강아지 이름이 있는데도 강아지 이름을 안 부르고 “또데이야야” 하고 부르니까 이 강아지가 급히 자기가 옛날에 쓰던 침실로 가서 딱 앉아있는 거라.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이 놀래서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저 강아지가 전생에 당신의 아버지였다.” 하고 얘기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태종사에 있을 때 제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태종사는 전통적인 한국사찰이기 때문에 제사들을 지냈었어요. 그런데 제가 거기에 제사를 지내고 하는 데는 참여를 안 했지만, 그래도 가서 법문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법문을 하다 보면 그 사람들이 꼭 물어보는 얘기가 뭐냐면 “우리 돌아가신 누구는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하고 나한테 물어봅니다.

 

거참 대답하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어디 태어났다고 알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도 어디에 태어났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말을 안 하고 있으면 그러면 “다른 스님들은 어디 태어났다고 잘 얘기해주는데 스님은 말을 안 해줍니까?” 하는 거라. 알아야 대답을 해주지. 알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도 자꾸 대답을 해달래.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뭘 어떻게 하나 하고 한번 가서 보니까, 만약에 그 앞에 이상한 현상들이나 아니면 색다른 동물들이 왔다갔다 하면 “어, 그렇게 태어났을 것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거라. 추측일 뿐입니다. 그게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과거전생을 알 수 있는 것들은 숙명통이 열려야만이, 자신이 4선정에 들어서 4선정에서 나오고 나서, 자기 자신이 '어, 한시간 전에는 뭘 했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 '어, 하루 전에는 뭘 했지?' '일주일 전에는, 일년 전에는, 이생의 처음에는 어떻게 됐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나서, 내 과거생을 분명하게 거슬러올라가지게 되고 그렇게 해가지고 자기생을 분명하게 보게 됐을 때, 그걸 비춰봐가지고 '아, 이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도 이럴 것이다' 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숙명통은 사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과거전생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의 과거전생은 사실은 부처님의 권한이라.

그걸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왜 그러냐면 사람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자기가 체험한 것은 그중에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걸 다른 패턴들을 다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얘기해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들이 그런 부분들입니다.

 

신통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신통이 열릴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본인이 탐·진·치가 없는 상태를 만들 줄을 알고, 본인이 적어도 선정삼매에 자유롭게 들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신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신통이 있는 사람들은 남을 불편하게 하지를 않습니다.

적어도 그걸 가지고 남을 협박한다든지, 그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마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너에게 이러한 위험이 닥치니까 그걸 내가 보호해 줄테니까 뭘 어떻게 하라.” 이런 수단으로는 이용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도움될 수 있는 것들을 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그 사람의 업입니다. 그래서 업을 관여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안 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통이 드러나는 것들을 극도로 자재를 하게 됩니다. 경전에도 분명하게 부처님이 “신통을 부리지 마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타심통이라고 하는 것도 여러분이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을 얘기했으니까, 마음에 대한 것을 얘기할게요.

자! 스님이 보입니까? 보이죠? 어떻게 인식을 합니까?

아마 스님을 인식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다 다를 겁니다. '어. 오늘 스님 피곤해 보이시네' '오늘 스님 얼굴이 맑아 보이시네' 또 어떤 사람은 또 다르게 인식을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인해서 그것들을 인식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경험된 것들을 축적된 데이터에 따라서 그것을 본인만이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동일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이 스님을 인식할 때는 그 인식 패턴에 따라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들만의 주관적인 것이지, 절대 객관적인 것은 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기능은 그와 같습니다.

조금 있다가 점심공양을 할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맛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맛없다고 그럽니다. 왜 그럴까? 인식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나는 이런 종류는 맛있다고 데이터가 축적이 돼있을 거 같으면 그 비슷한 것일 거 같으면 맛있다고 인식을 할 거고, 맛없다고 인식된 것들이 축적돼있는 사람은 맛없다고 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식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조작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타심통이 있으면 그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분명하게 인식한 것들은.

'아, 저 사람이 저걸 먹고 맛있다고 하는구나'하고 알고,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인식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면 어떻게 될까?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일어나집니다. 그걸 경전에서 뭐라고 비유를 했느냐면 모래사장에 있는 모래를 한주먹 쥐어가지고 이렇게 보여줍니다. 이거 셀 수 없을 만큼 모래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 변화가 단 1초 동안에 이것보다도 더 많은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이 모래알 갯수 보다. 내가 그걸 어떻게 다 인식할까?

 

뭐가 일어났다가 다시 또 다른 것이 일어나고, 다시 또 다른 것이 일어나고, 또 다른 것이 일어나고, 계속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데 뭘 가지고 인식해가지고 '이 사람의 마음이다' 하고 알 수 있을까?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마만큼 빠르기 때문에! 그런데 명료하게 뭔가를 인식하고 탁 추측되는 것들은 그것은 알 수가 있겠죠. '아, 저 사람이 뭐라고 인식했구나' 아는 것들은.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러는 것이 아니고 생각의 흐름입니다. 뒤죽박죽이 됩니다. 이렇게도 생각했다가 저렇게도 생각했다가 계속적으로 생각의 흐름들은 바뀌어져 나갑니다.

그럼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나는 그 흐름만 아는 것뿐입니다.

저 사람이 저 음식을 먹으면서 갖가지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 그거는 탐심의 흐름들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의 마음에는 탐심이 계속적으로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게 되는 것이지, 탐심 중에 어떤 것이 일어났고 사라지고, 그다음 또 어떤 탐심이 일어났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뜻이라.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겨우 그 정도, 마음의 흐름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큰 흐름들, 보통 그것을 여섯 가지로 아니면 여덟 가지로 얘기합니다. 아, 저 사람에게 탐심이 있구나, 탐심이 없구나, 또는 어리석음이 있구나 하는 것, 그리고 저 사람 마음이 수축돼있구나, 아니면 긴장돼 있구나, 아니면 뭔가에 집중돼 있구나, 그런 정도 큰 것들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잔잔한 흐름까지를 세세하게 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뜻이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설혹 여러분들이 사띠를 안 하고 있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여러분들의 마음의 흐름만 읽히는 것뿐이지 다른 것들을 다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거라. 그마만큼 마음은 빨리 생멸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그 훈련들은 조금씩 조금씩은 해나가야 됩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아이를 보고, 아이가 배가 고픈지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건지를 압니다. 그것은 그 아이의 마음을 정확하게 안다기보다는 '이럴 때는 이런 마음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끔 된다는 거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의 마음을 무시하고 살 것 같으면 실제적으로는 잘살아가지 못합니다. '아, 저 사람이 어떤 마음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마음을 다치지 않게끔 하고, 아니면 그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려고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인간관계는 상당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타심통의 영역인 것이지, 그 마음을 분명하게 읽어내가지고 내가 그걸 알려고 한다? 이미 탐심이 들어가서 선정에 들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선정에 들더라도 그 신통은 개발되지 않는다는 얘기라.

 

가장 좋은 것은, 불교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스님들의 성향을 보고 필요한 것들을 잘 조달을 해줍니다.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그때 생겨납니다. 기후적인 조건들이나, 방사적인 조건들이나, 이런 것들은 다 맞는데 먹는 음식이 각각마다 성질이나 특성에 따라 다릅니다. 그럼 이분에게는 이것이 필요하게끔, 저분에게는 저것이 필요하게끔 해서 맞게끔 해줘가지도 그분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어느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 그 부인 이름이 마띠까 입니다. 마띠까 부인이 있는 곳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뭔가를 크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아, 내가 오늘은 많이 피곤한데 누군가가 와서 이 방사 좀 치워줬으면 좋겠다', 하고 탁 마음을 내니까 그 부인이 사람을 보내가지고 방사를 치워주고, '달달한 초콜렛을 먹고 싶은데 그것 좀 보내줬으면 좋겠다' 하니까 누군가를 시켜가지고 초콜렛을 보내주는 거라. 덜컥 겁이 나는 거라. '저 부인이 내 마음을 다 읽어버렸구나.' 그래서 냅다 부처님한테 도망을 갑니다.

 

부처님이 그때 얘기합니다. "그 부인에게 너의 마음을 들키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하라. 행하고 있든 말하고 있든 생각하고 있든 내가 뭘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 부인 뿐아니라 마라도 어느 누구도 범천조차도 네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행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본인이 알아차릴 동안에는 개념이 성립되질 않습니다.

자, 스님 보이죠? 스님 얼굴을 보고 어떻게 생겼다 할 것 같으면 이미 개념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차리려면 어떻게 알아차려야 돼요?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보인다고 알아차릴 동안에는 사띠를 하고 있는 겁니다.

개념이 거기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 보이는 것이 있는 것뿐입니다. 들리는 것이 있으면 '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실재하는 것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개념화시키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어디에도 개념화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거라.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이 소리가 듣기 좋다, 듣기 싫다, 아름답다, 맛있다, 향기롭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보고, 듣고, 맛보고', 한다고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먹을 때는 먹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팔을 뻗으면 팔을 뻗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개념화시켜 버리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들킬 수밖에 없다는 거라.

 

수행을 해나가면 해나갈수록 여러분들의 마음을 들킬 수 있는 조건은 점점 더 엷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사고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들은 점점 더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망상부리는 것도 점점 더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자신의 마음을 안 들킬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마음을 읽을 수는 있습니다.

'저 사람이 탐심이 일어났구나', 또는 '성냄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은 읽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다' 하는 데이터를 가지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심념처를 하든 법념처를 하든 가장 먼저 돼야 되는 것은 그 대상에 집중해서 어떤 마음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욕심이 일어났으면 '어, 내가 지금 욕심이 일어났네' 하는 걸 분명하게 보게 됐을 때 그 욕심이 변하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 그렇게 분명히 보니까 욕심이 사르르 사라지네' 법념처로 이미 전환된 겁니다.

그럼 '욕심이 사라졌구나' 사라지고 나서 마음이 뭘 하는지를 보니까,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호흡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또 욕심이 사라진 곳에 또 다른 마음이 뭔가 성냄의 마음이 아니면 뭔가 잘 안된다는 마음이 확 일어나면 확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는 거라.

 

마음의 흐름들을 분명하게 보게 될 때 집중력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수행방법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행방법들은 한결같이 처음에 집중력을 키워주기 위한 훈련들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다 알아차리라면 대부분은 보면 그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전부 개념화시켜서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라. 아무리 그래봐야 그건 수행하고 관계없는 감각적인 것에 전부 빠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좋고 싫은 것으로서 흘러가버린다는 거라.

 

그걸 끊기 위해서 심념처 수행이든, 수념처 수행이든, 신념처 수행이든, 각각의 수행방법들을 스승들은 가르치는 겁니다. 대상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집중하기 위해서. 집중력이 커져야만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내가 무슨 마음이 일어났으면 무슨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그거 알아가지고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실제로는 그거 알아가지고는 큰 이익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마음이 일어났는지를 알면 뭐할 건데? 그러한 마음들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또 다른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직 집중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는 것들은 알고 하지만, 그것들이 본인에게 왜 일어나는지를 모르는 거라.

탐심이 일어났으면 탐심이 일어난 원인이 있을 건데도, 탐심이 일어난 것만 자꾸 볼려고 합니다.

 

탐심이 일어났을 때 그건 마음의 작용이라고 마음만 보는 훈련들을 합니다. 마음은 몸과 밀접하게 연관이 돼있습니다. 그럴 때 내 몸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느낌들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훈련들을 또 할 거 같으면 그나마 또 낫습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합니다.

그냥 마음이 일어난 것만 볼려고 그럽니다.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마음이 일어나는 것만 볼려고 그럽니다. 뭔 마음이 일어났는지를 자꾸만 볼려고 그럽니다.

그게 필요한 부분이기는 한데, 그것만 해가지고는 큰 이익이 없다는 거라.

 

일어난 마음으로 인해서 몸이 어떻게 바뀌고, 그 일어난 마음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원인을 자꾸 알게 될 때, 그러한 마음들은 가치 없는 것이고, 번뇌에 해당이 된다 해가지고 끊어내버리게 됩니다.

 

본인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그 마음이 어떤 역할을 하고 그 마음이 몸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 같으면 본인에게 아픔을 주는 행위는 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남에게 악한 마음이 일어나가지고 악한 말을 하게 된다든지, 악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내 몸도 아파온다든지, 이런 것들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능력들이 생겨나면 다른 사람들이 아프는 것도 하지를 않게끔 된다는 거라.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도 고통스러워지고 나도 고통스러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날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한 원인이 되는 것으로부터 아예 떠나버릴려고 하게 됩니다.

선원에 오면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하고 집중을 하게 된다, 아직 훈련되지 않았으면 자주 그럼 선원에 가야되는 거라. 그래서 그것이 훈련이 됐을 때 집에서도 선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들을 계속적으로 유지를 해나가게 되는 거라.

 

본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을 분명하게 관찰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번뇌가 있는 한은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대상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본인 나름대로의 자아에 인해서 개념화시키게 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들, 어떠한 마음이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 이제 그만 싫증을 낼 때도 되었다는 거라.

 

'지금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면서 갈 순 없을까' 하고 마음을 자꾸 낼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고, 배가 꺼지면 꺼진다고 알고, 하루종일 불러오고 꺼지고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알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거라. 그건 알든 모르든 죽을 때까지는 호흡은 하게끔 돼있는 거라.

 

어떤 마음이 일어났는지, 아, 탐심이 일어났는지, 진심이 일어났는지, 좀 나태한 마음이 일어났는지, 그것만 알면 뭐 할거냐는 거라.

살아있는 동안에 그러한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인제는 대상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을 할려고 하고 그것이 선정에 드는 것이든 안 드는 것이든 그거하고는 여러분들하고 관계없습니다. 하다 보면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하고 그런 겁니다. 또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타심통이든 뭐든 신통이든 개발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조금 더 집중하면서 그 대상들이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봐서 변하는 성질들을 보게 될 때,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점점 줄어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완전하게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신통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통을 바랄려고 하지 말고 지금 현재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개념화해서 그냥 대충 알아차리고 있는지 그걸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왼발 오른발,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무슨 마음이 일어났다', 혹시 그렇게 개념화시켜가지고 그것들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얼마만큼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수행의 향상은 달라집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다른 대상이 일어났을 때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힘도 똑같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대상이 일어나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변해가고 멈추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보여지게끔 됩니다.

 

지금 내가 해야 될 것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 대상을 분명하게 사띠하는 것!

그것이 마음에 대한 사띠이든, 법에 대한 사띠이든, 아니면 느낌에 대한 사띠이든, 몸에 대한 사띠이든 관계 없습니다.

그 사띠속에 집중하는 힘이 분명하게 있을 때는 여러분들은 지금 잘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꾸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신통이 있고 없고,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알까 모를까 그런 외부적인 것에 신경을 써야 될 때는 아니다 하는 겁니다. 지금 해야 될 것은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내가 해야 될 전부다" 하고 마음을 먹고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 스님 오늘 법문 가운데 선정수행하고 위빳사나 수행하고 뒤섞여가지고 혼동하기 쉬운데 뒷부분을 좀...

스님 답변 : 사마타든 위빳사나든 그걸 자꾸 구분할려고 하지 마십시요.

하다 보면 수행은 사마타 수행이 되기도 하고 위빳사나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본인이 집중하는 힘이 좀 약하면 사마타 쪽으로 조금 더 하게 될 거이고, 또는 노력하는 힘이 좀 약할 것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이지, 그걸 문자적으로 자꾸 여기는 위빳사나 수행하는 곳인데 왜 사마타 수행쪽으로 자꾸 가르치느냐 이렇게 얘기를, 이렇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집중하는 힘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게 찰나적인 집중하는 힘이든 아니면 그냥 쭉 집중하는 힘이든 집중하는 힘들은 반드시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집중하는 힘으로 인해가지고 사마타 수행을 하기도 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설명한 것이 이것은 사마타 수행에 가까운 것인데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다고 부정할 필요도 없는 거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은 그런 신통이 나에게 지금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집중하는 힘이 있을 거 같으면 신통과 버금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