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마와나 선원 개원법회 (20180616)
<21:30 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편하게 앉으십시요.
담마와나 선원이 개원하는 날입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게송을 하면서 선원을 상가에 공양올리고 불상도 상가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상가에서는 담마와나선원의 선원장스님을 떼짓사라 스님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괜찮습니까? (불자 : 예) 떼짓사라 스님인데? 떼자사미 스님이죠! 그런데 왜 아무 대답을 안 해? 통과시켜버릴까 그냥?
떼자사미 스님이 정식으로 선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박수 한번 칩시다. 이제 선원장 스님을 모시고 잘 운영들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선원이 개원을 하면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고 하면 반드시 스님들이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스님들이 했죠?
"자얀또 보디야물레 사까야낭~~'(Jayanto bodhiyā mūle. Sakyānaṁ nandi vaḍḍano)" 하면서 하는 게송이 있었습니다. 그걸 반드시 합니다.
거기에 보면 한번, 그 교재 한번 볼까요? 프린트물 이 교재 한번 펴보십시요. 뒷장으로 넘겨보면
"빠닥키낭 까야깜망 와짜깜망 빠닥키낭,
빠닥키낭 마노깜망 빠니디 떼 빠닥키나" 라고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스님이 한번 독송을 해볼테니까 한번 따라서 해보십시요.
「Padakkhiṇaṁ kāyakammaṁ, vācākammaṁ padakkhiṇaṁ,
padakkhiṇaṁ manokammaṁ, paṇidhī te padakkhiṇā」
[수행자들 독송 :
빠닥키낭 까야깜망 와짜깜망 빠닥키낭,
빠닥키낭 마노깜망 빠니디 떼 빠닥키나]
한글도 같이 독송해보십시요.
[몸으로 짓는 바른 행위는 행복을 가져오고,
바른 말로 짓는 행위도 행복을 가져오며,
바른 뜻으로 짓는 행위 또한 행복을 가져오니,
그대에게 바른 서원 또한 행복을 가져오기를!]
선원을 개원하는 날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이 바른 것들이 많습니다.
조금 전에 탁발공양 올렸죠?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계를 받아지녔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도 선한 일들입니다. 선원을 만들면서 선한 의도와 선한 행위들을 해가지고 이 선원을 건립을 또 한 것입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욱 더 선한 마음들을 많이 지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짓는 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여러분들이 받는 겁니다.
수행을 조금 해보시면 "깜맛사까따냐나(kammassakatāñāṇa"라고 하는 것들이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것은 어떤 것이든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것은 반드시 내가 즉시 받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어디 감추어져 있거나 다른데 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즉시 돌아오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들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악한 마음이나 악한 행위나 악한 말들을 할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적어도 그 냐나(ñāṇa)를 이해하고 그 이상의 경지에 든 사람들은 몸가짐들 몸과 말로 행하는 것들을 항상 조심을 하게 됩니다. 비록 내가 남들보다 큰 보시는 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것들은 나쁜 것들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결심들을 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같은 날에는 그런 결심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 밑에 보면 「바른 서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어떤 서원들을 세웠기에 오늘 이 자리를 오게 되었을까? 과거생에 세운 서원들로 인해서 이 자리에 와있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친구따라 강남가듯이 그냥 온 겁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열 가지를 세 가지 방법으로 삼십 가지 바라밀을 행하셨다 하고 여러분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 30가지 바라밀들의 공통적인 것이 아딧타나(adhiṭṭhāna) 라고 해서 결정심들입니다. 내가 이것은 반드시 한다고 서원을 탁 세우고 그것은 반드시 하는 것!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여러분들이 바른 결정심을 내어서 바른 서원들을 세워야 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계를 받는 게 오계를 받았죠? 오계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테라와다 불자가 될려고 할 거 같으면 오계는 항상 받아지녀야 됩니다.
그러면은 오늘 같은 날은 내가 결정심을 내어서 바른 서원을 세워야 됩니다.
「앞으로는 오계를 꼭 받아 지니겠다」 '지닌다'는 의미는 단순히 강제적으로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걸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서 그것이 몸에 배어서 그렇게 되는 것들을 '지닌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계는 반드시 받아지니도록 하겠다 하고 결정심을 내서 서원을 세워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알고 있기로는 담마와나 선원이 매주 일요일은 법회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법회에는 빠지지 않고 담마와나 선원에 가겠다, 가서 계도 받아지니고 스님 법문도 듣고 수행점검도 받고 수행도 하고 스님에게 공양도 올리고 하는 여러 가지들을 선근공덕을 쌓도록 하겠다 하는 그런 결정들을 또한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재가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일주일에 한번씩은 포살일을 꼭 지켜야 됩니다.
선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됐지만 이제는 담마와나 선원이라는 선원이 만들어졌습니다. 크든 작든 간에 이 선원에서 여러분들이 스님을 모시고 선원 운영을 해나가야 되는 거고, 또 여러분들이 수행이 향상될 수 있도록 자꾸 점검받고 나아가야 되는 그런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일주일에 한번씩은 불재일을 지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세상 살다 보면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빠져나갈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 토요일 같은 경우에는 쉬고 싶기도 하고 다른 행사들이 있으면 그 행사에 갈 일이 더 급하기도 하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불재일은 여러분들이 지켜야 되는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의무사항입니다. 그래서 선원에서 내가 이 부분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다 하는 그런 다짐들을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원은 스님이 법을 설하기도 하고 거주하기도 한다고 해서 선원이 다 운영되고 굴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재가자들이 자칫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스님과 재가자를 동등하게 자꾸 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와 남자가 기능이 다르듯이 그 역할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스님은 당연히 스스로 수행하고 선원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이 선원을 지켜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스님은 당연히 선원에 있으면서 여러분들 수행지도하고 법문하는 것이 스님 할 일입니다. 그것만 하면 스님 할 일은 다 끝나는 겁니다.
선원 운영은 여러분들 재가자들의 몫입니다.
스님이 또 직접 밥을 지어먹지 못하기 때문에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밥을 먹을 수 있게끔 편의를 제공해주는 것도 여러분들 몫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법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이 부처님의 고유한 법을 이어나갈 수 있는 재주는 없습니다. 법을 설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법이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몇백년 뒤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스님들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부분은 착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법을 지키고 법을 많이 알고 수행하고 하는 것들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법을 이어나가는 자격조건은 출가한 스님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은 그 법이 훼손되지 않게끔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법을 다음 후배 스님, 또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어야 될 의무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 그 법의 소중함을 알 거 같으면 그렇게 법을 이어주는 스님들을 보호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 또한 재가자들의 몫입니다.
이렇게 법을 이어가고 법을 설하고 하는 것은 스님들의 몫인 거고, 그것을 이어갈 수 있게끔 뒷바침해주고 또 그런 선원들을 운영하고 유지해나가는 것은 재가자들의 몫으로 정해져있습니다.
어떤 것이 뛰어나고 어떤 것이 낮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게 잘 어우러졌을 때 그 선원은 잘 운영돼나갑니다. 오늘 같은 날은 그런 서원을 세우기에도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가끔은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선원회비를 내고 있으니까 나는 그 선원에 불자다 하고 얘기하는 것들을 봅니다. 물론 회비를 내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인데, 그래서 그것이 선원을 운영해나가는데 보탬을 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개인이 본인에게 스스로 물어보면 그럼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만큼 수행을 해나갈 수 있었는가, 또 법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는가, 또 얼마만큼 불재일을 지켜나갔는가, 잘 한번 살펴보시면 됩니다.
그것들이 뒷받침이 안 되는 상태에서 선원 운영하는 운영비를 냈다고 해서 그 선원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맹이가 빠진 빈 껍데기만 가지고 얘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해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서울법회 팀들이 지금 여기 많이 합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한번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이런 선원 하나 만들려고 참 부단하게 노력을 했는데 그래서 여기 세들어 있다가 저기 세들어 있다가 하면서 많이 휩쓸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여기 선원이 생겼다 해서 그분들이 여기 선원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 그래도 내가 이 선원을 짓는데 공을 많이 들였기 때문에 내가 여기 선원을 운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스님 개인적으로는 그것은 인정하지만 이제는 그런 그러한 관념들을 내려놓아야 됩니다. 선원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면 거기서 새롭게 선원을 운영하는 것들이 다시 체계가 잡혀져야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선원이 운영되도록 그렇게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 선원장 스님으로 임명된 떼자사미 스님께도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재가자들이 운영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자꾸 마음을 돌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운영하는 것은 재가자한테 딱 맡기십시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더라도 1년 정도 지나고 나서 "아, 이 부분은 이렇지" 하고 자기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해서 바꿔나가더라도 안 늦습니다. 그동안에 나는 올바르게 부처님 법을 전하는 것만 하면 되는 겁니다. 운영하는 부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거기 마음을 쓰려고 할 겁니까?
그리고 여러분들도 스님의 법문이 어떨 때는 심념처 수행을 지도하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도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두루두루 수행 부분을 지도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심념처의 방식으로만 지도를 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 공부를 해왔고 또 익혀온 것이 그 방법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방법을 지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의 지도방법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터치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정 마음에 안 들면 여기에 매주 나오면서 가끔씩은 저한테나 혹은 다른 스님들 있는 곳에 가서 수행하면서 수행 지도를 받으면 됩니다. 결국엔 나중에 가면은 별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심념처 수행을 하든 수념처 수행을 하든 어떤 수행법을 하든 나중에는 큰 의미들이 없습니다. 단지 일정한 경지까지 오르기 위해서,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 ñāṇa) 라고 하는 경지까지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그런 수행 방법들이지 그것들이 나중에는 크게 문제되는 부분은 없다는 뜻입니다. 심념처 수행으로 얼마든지 여러분들이 상카루뻭카냐나에까지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크게 문제 안 됩니다.
여기서는 스님의 수행법을 어떠한 경우든지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주어야 됩니다. 본인이 그 수행법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아직 본인의 수행이 덜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는 견해들이 아직 확립이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럼 본인이 더욱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그 선원의 성격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스님이 관여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고 재가자들이 관여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서로 양쪽에서 해야 될 것들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선원입니다.
선원은 바르게 운영돼나갈 때 그 선원은 더욱더 번창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주자주 재가자분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더 널리 펼쳐나가는 것, 좀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한 방편들을 마련을 해야 됩니다.
선원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또는 선원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할 때도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것들이 항상 선한 것들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럼 여러분들에게는 행복이 따라오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분란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바르게 결정을 해서 바른 서원들을 냈을 때 그 서원들은 여러분들에게 행복을 갖다 주는 것이지 여러분들을 도와 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날들을 여러분들은 바르게 기억하고 그 찰나 찰나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찰나 한순간 한순간 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들을 사띠하지 않고 흘려보내서는 죽은 시간을 보내는 거와 같습니다.
그 밑에 게송들이 있습니다. 한번 스님하고 같이 독송을 해보겠습니다.
「Sunakkhattaṁ sumaṅgalaṁ, supabhātaṁ suhuṭṭhitaṁ,
수낙캇땅 수망갈랑, 수빠바-땅 수훗티땅,
sukhaṇo sumuhutto ca, suyiṭṭhaṁ brahmacārisu.
수카노- 수무훗또- 짜, 수잇탕 브라흐마짜-리수.
좋은 별자리, 좋은 길상, 좋은 새벽, 좋은 깨달음의 시간,
좋은 찰나, 좋은 순간이기에, 최상의 청정한 수행자에게 공양 올리기 좋았다네.」
스님들에게 공양 올릴 수 있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오후에는 공양 올릴 수 없죠? 오전에 밖에 공양 올릴 수 없습니다.
“법회 시간을 어떻게 정할까요?” 하고 물어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스님이 없을 때는 오후에 법회 해도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상주하고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법회는 오전에 돼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오전만이 좋은 시간입니다. 오후 시간은 좋은 시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스님들에게 공양 올릴 수도 없고 스님들이 공양을 드실 수도 없는 시간입니다.
특히 저 멀리에 있는 마하보디 선원이나 우리 붓다의 길따라 선원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멉니다. 거기 올려면 아마 그 전날 도착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 오전 10시까지 갈려면 굉장히 힘들게 가야 됩니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것도 아니고 공양 준비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어떠한 경우든지 상가 스님들이 있을 때는 공양을 올리는 것이 오전 시간이었고 법문을 하는 것도 오전 시간에 법문을 했지, 오후 시간은 스님들에게 법문을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게 테라와다의 전통입니다.
여러분들이 공양 올리기 좋고 공덕을 쌓기 좋은 시간들은 오전 시간이 훨씬 많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부지런히 노력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에게 훨씬 좋은 시간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여기 담마와나 선원도 법회 시간은 반드시 오전에 탁발공양 올릴 수 있고 법문을 해서 끝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봅니다.
오후 시간은 되도록이면 수행하는 시간들로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수행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할 것들을 스님에게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질문하는 시간들을 마련하고.
그런 시간들이 바로 여기에도 적어놓았지만, "좋은 찰나 좋은 순간들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아무리 오전 시간이라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공양올리기 좋은 시간이 될려면 선한 마음을 내고 그래서 기쁨이 일어나서 공양물을 준비하고 공양 올릴 때는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고, 공양 올리고 나서 아, 공양 올린 것에 대해서 내가 참 잘했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행복한 마음이 들고, 기쁨과 평온함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삼박자를 이루게 될 때 이것이 좋은 시간 좋은 순간입니다. 오전 시간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는 그것은 좋은 순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수행할 때도 분명한 알아차림이 있어서 대상을 대상으로써 바라보게 될 때 그 대상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거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행복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평온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상을 대상으로 바르게 보지 못하면 짜증들이나 분노들이나 아니면 집착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선한 마음하고는 거리가 멀어져버립니다.
사띠하지 않는 순간들은 여러분들에게 '수(su)' 라는 용어를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수망갈라 수훗띠땅 하는 전부 'su'가 앞에 붙어 있는 것은 '좋은' 이란 의미지만 그 좋다는 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사띠하지 않는 순간은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한 경우든지 나쁜 쪽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선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항상 'su'라고 하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공양 올리는 것으로 인해서 수카(sukha)라고 하는 행복이 일어날 수가 있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조금 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될 거 같으면 수빤냐(supaññā) 라고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지혜들이 이루어져가지고 결국에는 닙바나에 이를 수 있는 열반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사띠만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고, 반드시 그것들을 더욱 더 증장시켜주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띠를 조금 더 키워나갈 수 있을까?
초보자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붓다·담마·상가를 의지해서 나아가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본인이 지혜가 어느 정도 열릴 거 같으면 당연히 스스로를 의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고 있는 담마가 올바른 줄 알기 때문에 담마를 의지하게 됩니다.
가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법을 의지하고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라고 했으니까 삼보를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어느 정도 수행을 해서 그 상태 이상이 된 사람들에 해당이 되는 것이지 인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항상 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바른 담마가 뭔지 아니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바르지 않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있는 상황도 못되는 상황에서는 그것들이 의지처가 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붓다 담마 상가라고 하는 것은 그런 분들에게는 반드시 의지하고 나아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을 회상하는 것은 그런 초보자에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처음에 스님이 태국에 나갔을 때 맨 먼저 한 것이 담마 한 구절이였습니다. 담마 딱 한 구절 외우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걸 반복해서 외웠습니다.
담마에 대해서 희열이 일어나게 되면 부처님에 대해서 희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담마를 전해오고 가르쳐주는 상가에 대해서도 희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삼보를 믿고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아마 담마와나 선원도 아침 저녁 예불을 할 것이고, 또 스님 법문을 통해서 담마에 대한 구절 하나씩을 꼭 전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처음에 시작할 때는 다른 것들은 다 놓치더라도 한 구절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나가야 됩니다. "두 번 다시 똑같은 시간이 여러분들에게 없다"고 생각을 하면 지금 현재 시간이 분명히 소중할 겁니다.
태국가서 스님이 마음에 딱 걸렸던 것이 그 구절입니다.
"나에게 똑같은 시간은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죽음은 항상 내 곁에 다가와있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담마 구절은 그와 같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경각심을 일으키게 해주는 데에는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꼭 한 구절씩은 불재일날 와서 여러분들 마음에 받아 지닐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쭐라빤다까에 대해서 여러분들 잘 알죠? 「마음을 닦자」 하는 그 딱 한마디. 방바닥을 닦을 때도 마음을 닦듯이 닦는다고 생각하니까 방바닥이 깨끗해지는 것을 보고 마음도 닦으면 이렇게 깨끗하게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고.
담마의 구절은 여러분들 마음을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고 여러분들을 점점 더 실천하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삼보를 의지해서 나아가는 상태에 있는 분들은 반드시 담마 한 구절씩, 일주일에 한 구절씩은 꼭 받아지녀서 자기 것이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장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질 겁니다.
아무리 선원이 있고 선원에 운영하는 분들이 있고 도반들이 있고 또 법을 전해주는 스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성장하지 않으면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반드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들을 이 선원을 통해서 마련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느 정도 수행되신 분들은 삼보를 의지처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밑에 있는 구절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
Sabbe saṅkhārā dukkhā,
Sabbe dhammā anattā.
삽베 상카라 아닛짜, 삽베 상카라 둑카, 삽베 담마 아낫따.
모든 형성되어 있는 것들은 무상하다.
모든 형성되어 있는 것들은 괴로움이다.
모든 현상들에는 실체가 없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체험이 되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이 어떻든지 간에 무상한 성품 또는 불만족의 성품, 나라고 집착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순간순간이 여러분들에게는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듯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에게는 다시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고, 여러분이 지닌 모든 것들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도 여러분들에게는 다시 오지 않는 것, 딱 1회밖에 해당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지금 그것들이 여러분들 곁에 있을 때 여러분들이 마음껏 누려야 됩니다.
선원이 존재할 때 선원의 이익됨을 마음껏 누려야 되는 것이지 선원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또 다닐 것 같으면 몸과 마음이 피곤할 뿐입니다.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무상하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모든 것들이 무상한 것들입니다. 두번 다시 오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알면 지금 현재 더욱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성품들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내 것이 될 수도 없을 뿐아니라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만족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단지 여러분들이 그것들이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 또 '우리 선원'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들 것입니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단지 개념으로서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견해가 생겨나버리게 됩니다. 「우리선원」이란 것이 생겨나버립니다. 그런데 견해를 버리고 나면 내가 지금 가서 수행하고 법의 이로움을 얻는 곳일 뿐인것이지, 실체하는 곳일 뿐인것이지 그것이 내가 집착해야 될 선원이 되지 못하고, 내가 집착해야 될 견해가 되지 못합니다.
여기 있는 스님, 테라와다의 전통에서는 선원장으로 임명되면 상가에서 회의를 해서 선원장을 새로 뽑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그 선원의 선원장은 그 스님이 쭉 맡아서 합니다. 특별하게 계율적인 문제나 본인이 하기 싫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해서 그것들이 조건이 바뀌기 전에는 상가에서도 특별하게 선원장을 바꿀려고 하질 않습니다. 물론 더 좋은 선원이 있어서 그 스님이 저기 갔으면 좋겠다 해서 상가에서 의결할 거 같으면 거기 보낼 수가 있겠죠.
그런데 그런 조건들이 되기 전에는 아마 모르기는 해도 담마와나 선원의 선원장은 여기 오늘 선원장이 되신 떼자사미 스님이 쭉 여러분들을 지도를 해야 될 겁니다.
항상 있을 것 같죠? 그런데 스님도 계속적으로 변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담마와 내일의 담마가 다를 수밖에 없고, 스님의 수행이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를 수밖에 없듯이, 스님의 몸도 점점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나 여기서 안 살아 하고 훌쩍 떠날지도 모릅니다. 십년 전의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단지 내가 안 바뀌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선원장 스님이 있고 선원이 있을 때 내가 뭘 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그것들이 여러분들 것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것들을 자꾸 여러분들 것이 되도록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마지막 구절을 같이 독송하는 것으로서 오늘 개원법회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 중생들이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을 얻기를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계속 이어지기를」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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