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붓다의 날_부처님은 유일하게 위대한 존재다 (20180527)
··· 그런 것들이 순룬 스님을 통해서 '아, 그렇구나' 하는 것들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래서 순룬 스님을 친견하고 나서 당대의 삼장법사 스님부터 해서 모든 스님 중에 "아, 진정으로 아라한이 됐다" 하고 인정해주시는 스님입니다. 요 근래에 아라한으로 세상에 인정을 받고 또 알려진 스님이 순룬 스님이 요 근래에는 최초였습니다. 그 뒤에 마하시 스님부터 쭉 또 스님들이 이어나가게끔 되었고,
순룬 스님도 유명한데 순룬 스님의 제자 중에 한 분도 일주일만에 아라한에 이르렀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바르게만 수행을 하면 그리고 진짜 열심히만 수행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는 걸 몸소 증명하신 스님입니다.
특히 열반에 드시고 나서 스님이 열반에 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열반에 들고 나더라도 나를 위해서 나뭇가지 하나도 쓰지 말아라. 화장을 하지 말고 그대로 뒀다가 3개월 뒤에 관뚜껑을 열어봐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순룬 스님이 계시는 곳이 밍잔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밍잔이 어디냐면 미얀마의 수도가 어디죠? (양곤) 예. 양곤에서 만달레이 가는 방향에 있습니다. 그 지역은 굉장히 더운 지역입니다. 그리고 습한 지역입니다. 지금 아마 미얀마 수도가 뭐드라? (네피도) 예. 네피도 부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밍잔이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굉장히 습한 지역인데, 열반에 드시고 나서 3개월 동안 아무 방부제도 없이 관을 덮어놨다? 일반적일 거 같으면 아마 다 썩어버릴 겁니다. 미얀마 다녀오신 분은 아마 여름 우기 때 얼마나 습한지 알 겁니다. 가방을 놔두면 가방에 곰팡이가 다 필 정도니까 굉장히 습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3개월 뒤에 진짜 관뚜껑을 딱 열어보니까 생전에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얼굴색이 더 밝아져 있습니다. 보통 열반에 드시고 나시면 이게 다 말라야 되는데, 안 마른 상태에서 그대로 그 모습을, 오히려 머리카락이 더 자란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왜 그렇겠어요? 아라한이 되면 그럴까? 아닙니다. 호흡수행의 힘입니다! 호흡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열반에 들고 나면 그 정지되는 힘들이 일정기간 동안 유지됩니다. 그래서 그 힘이 강한 순룬 스님 같은 경우에는 3개월이 가는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항상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사마타 수행으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만 알아차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의 코끝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든지, 어떠한 식으로든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적으로 그것들의 힘이 굉장히 강하게 작용을 하게 됩니다. 죽음 이후에도.
지금도 밍잔에 가면 순룬 스님의 시신이 그대로 보존이 돼있습니다. 방부제 처리도 없고, 그냥 유리곽에 손을 넣으면 순룬 스님의 손을 우리가 잡을 수가 있습니다. 직접 손을 잡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향기가 납니다. 스님의 몸에서. 몸도 보면 그대로 말라가지고 뼈에 피부가 딱 닿아가지고 시커멓게, 갈색 비슷하게 검은색 비슷하게 변한 모습인데 반점 하나 없습니다. 반점 하나 없이 그렇게 깨끗하게 돼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들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아니죠? '붓다의 날' 입니다.
부처님이 오시고, 깨달음을 이루시고, 또 완전하게 열반에 드신 3대 날이 동일한 날입니다. 여러분 입장에서는 오늘 같이 이런 날은 좀 많았으면 좋겠죠? 그래서 스님한테 공양을 올리기도 해서 공덕도 쌓고, 또 이렇게 모이면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반갑게 인사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그건 아마 범부들의 마음이고,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따로 있고, 또 성도하신 날 따로 있고, 또 열반한 날 따로 있고 이러면 여러분들한테는 좋을지는 몰라도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한테는 귀찮기 그지없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그 뒤에 제자들이 결집들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안 했을까? "고마 하나로 모아갖고 한 날에 다 치뤄버리자." 그러면은 그거 같이 좋은 게 어딨어? 왜 한날 치뤄도 관계없을까? 부처님 태어나신 것은 이게 마지막 탄생이죠! 더 이상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성도를 하시고 나면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윤회할 수가 없습니다. 또 완전하게 이 몸까지도 버리는 열반에 들고나면 더 이상 윤회할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실제적으로는 이 세 날이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3개를 합해놔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
경전에는 부처님 탄생한 날이 며칠인지, 부처님 성도하신 날이 며칠인지, 열반하신 날이 며칠인지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뒤에 후대에 주석서를 쓰면서 작성된 것이 3대 날이 동일하다 하고 기술이 돼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치면은 대승불교에서 하는 성도의 날, 열반재일, 따로 두고 있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그렇게 하다 보면 조금 전 같이 범부들의 마음이 돼버립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의식에 빠지는 형태들로 나아가기가 쉽습니다.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근본적인 의미들을 여러분들이 파악을 해야 됩니다. 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 어떻게 해야만이 부처님과 같이 저렇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 그러면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은 내 마음의 작용이 어떻게 되기 때문에 다시 윤회하는 업을 받지 않게 되는지, 그걸 배우고 그걸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지, 성도날이 언제냐? 열반날이 언제냐? 그걸 따지는 것은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세 날을 한 번에 모아갖고 하는 것이 참 잘했다 싶어요.
괜히 의식적인 것들에 치우치는 것보다는 그걸 기념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걸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테라와다에도 한국 같이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같이 그렇게 무슨 기도, 무슨 기도, 보름 기도, 관음재일기도, 초하루 기도, 이런 식으로 기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날은 있습니다. 그게 가장 큰 게 뭐냐면 오늘 하고 있는 「붓다의 날」 4월 보름날 3가지 사건을 하나로 모아가지고 치루는 "붓다의 날".
그다음에 처음으로 부처님이 법을 설한 "담마의 날", 그래서 그 법을 기억하고 따르고 실천하는 날. 그리고 그 담마를 전해주고 또 그대로 유지시켜가서 변함없이 유지했다가 여러분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은 상가들이 했습니다. 그래서 상가들이 전체 모여서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하는 걸 기념해서 "상가의 날"로 정해놨습니다.
3대 축일이 그 3개있고, 딱 하나 더 있는 것이 안거가 끝나고 나서 스님들에게 가사공양 올리는 것, 그래서 "까티나 축제"
그 4개 있습니다. 일년 열두 달 가도.
그마만큼 허례허식, 의식들에 치우치지 않고 있다는 거라. 그렇다고 법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주마다 법회는 두 번씩 있습니다. 어느 절을 가더라도 그 의식은 동일합니다. 간단하게 의식하고 스님 법문 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그날 하루종일 수행하는 것, 일주일에 두 번씩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밖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실제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 더 훨씬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제목에 적어놓았습니다.
「부처님은 유일하게 위대한 존재다.」
경에 보면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들에 대해서 써놓은 「세기경(世紀經)」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다, 기독교 성경에도 그런 것이 있죠? 하느님이 뭘 만들었고, 뭘 만들었고, 뭘 만들었고.
그런데 부처님은 '부처님이 뭘 만들었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서 뭐가 만들어지고, 그다음에는 또 뭐가 만들어지고, 뭐가 만들어지고 하는 것들을 적어놓은 것이, 그걸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세기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것이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경의 핵심은 뭐냐면, 각각의 세계가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욕심이 생기고, 또 분쟁이 생기고, 너와 나가 갈리어지고 하는 현상들이 생겨나면서, 계급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칫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계급이 높으면 갑질을 할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계급이 낮으면 그걸 그냥 받아들이는 운명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세기경에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부처님이 하고 계십니다.
여기 대학교수 한번 손들어 보세요. 없어요? 몇명 있는 줄 알고 있는데, 스님한테 꾸지람 들을 까봐서 그러나? 그런데 가르치는 입장인 것뿐입니다. 대학 교수가 높은지 아니면 그걸 가르침 받는 학생이 낮은지 그건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배웠고, 그리고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닿았을 경우에는 내가 그걸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내가 아직 덜 배웠고, 더 성장해야 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듣는 것뿐인 것이지, 교수가 높고 학생이 낮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범부의 마음에는 내가 널 가르치니까 '넌 나의 제자다' 하고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생겨나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너보다 더 높아'
부처님 당시 때 인도에도 그랬습니다. 바라문이 있고, 크샤트리아가 있고, 바이샤가 있고, 수드라가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서 4성 계급입니다. '나는 높으니까 너희들 위에 군림을 해야 돼!'
지금도 그런 게 있습니다. 바라문이 지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차라도 비켜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인도에 가면 앞에 자기보다 못한 차, 좀 나쁜 차가 가는 꼴을 용납을 못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빵빵거리든 뭘 하든 그것이 비켜나게 하든, 자기가 추월하든지 해야지 그것이 앞에 가는 꼴을 못 봅니다. 역사적으로 계속된 것들이 이 계급이 형성이 된 것들이 쭉 습관화, 관습화 돼있기 때문에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 하더라도 그걸 용납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과연 그 사람들의 마음은 선한 마음들이 더 많이 일어날까, 아니면 악한 마음들이 더 많이 일어날까? 또는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는 마음이 더 강할까, 아니면 '나라고 하는 것은 없어. 다 무상한 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더 강할까? 아마 대부분이 전자일 겁니다. 나를 더 내세울려고 하고 또 남들보다도 더 성질도 많이 부리고 욕심도 더 많이 가지고, 그래서 부자들은 계속 더 부를 쌓게 되는 거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안 떨어질려고 더 붙잡게 되는 거고, 그게 세상사라고 사람들은 보통 얘기합니다.
“그거 빼고 나면 뭐가 있어요?” 하고 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럴 동안에 그 사람의 마음은 더 시궁창으로 가지는데, 그거는 누가 책임을 질 건데? 여러분들 마음에 지금 내가 재산이 더 많아지고 더 명예가 높아졌다 해가지고 마음까지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상에서 뛰어난 자라고 하는 것은 계급이 뛰어나다고 해서 뛰어난 자가 될 수가 없다. 내가 지위가 높다고 해서 높은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연장자가 될 수는 없다."
순룬 스님이 아라한이 됐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40년 50년 된 법랍된 스님들이 처음에는 순룬 스님한테 가서 삼배 인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아, 아라한이구나' 알고 나서는 그 뒤부터는 순룬 스님한테 가서 그 40년 50년 법랍이 된 스님들이 인사를 삼배를 드립니다.
도의 경지가 높은 자가 훨씬 더 마음이 청정하고 더 깨끗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선한 마음이 더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의 마음에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은 스스로 확신을 가져도 좋습니다.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르게 믿고 실천하고 있다. 나는 너보다도 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처님이 향한 최종적인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부처님은 과거생부터 무수하게 바라밀을 쌓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바라밀을 아직까지도 어느 누구도 부처님만큼 바라밀을 완성하고 쌓은 분이 없습니다.
순룬 스님도 바라밀을 많이 쌓았으면 경전도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많이 알고 있어야 될 것이고, 또 법을 설하고 하는 능력들도 갖추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못한 거라. 바라밀을 쌓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바라밀의 공덕에서는 어느 누구도 부처님을 따를 자가 없다는 거라.
왜 바라밀을 쌓아야 될까?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요인이 된다는 거라.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조금 더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해서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바라밀의 힘입니다.
또 수행에서 장애가 있을 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들도 바라밀의 힘입니다. 수행력의 힘으로써 그 장애들을 넘어가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참 좋겠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조건 알아차림만 하고 있으면 그 장애들을 타파하고 넘어서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라밀의 힘이 없으면 그것을 받쳐줄 힘이 생기질 않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여러분들이 스님들한테 공양물도 올리고 또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팔계를 지킵니다. 또 오늘은 수행도 하고 합니다. 또 사람들하고 모여서 얘기를 하면서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내면서 대화들을 합니다. 그게 다 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이 따로 몰려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 내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조금 더 선한 마음을 낼 수 있는가? 어떻게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것이 열 가지 바라밀 또는 서른 가지 바라밀이라고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바라밀로써는 부처님을 따라갈 분이 없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은 바라문 보다도 낮은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뛰어난 분이라는 겁니다. 따를 자가 없는 바라밀을 지닌 자이기 때문에.
지혜에서도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혜를 지닌 분입니다.
그래서 지혜에 이르는 길을 부처님만큼 분명하게 밝혀놓은 분은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해탈에 이르고 어느 시점에서 어떤 지혜가 일어나는지, 어느 시점에서 어떤 마음의 상태에 이르는지, 분명하게 밝혀 놓고 그것을 선언해놓은 분은 없다는 거라.
"하면 되겠지", "무조건 믿고 할 것 같으면 너는 해탈에 이르른다" 이런 법이 없다는 거라. 얼마나 정확했으면 2600년이 지나도 다른 분들도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느냐는 거라. 한 번도 틀리게 다른 길로 걸어가는 것이 없고, 한 번도 다른 경험들을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경험들, 모든 진행 사항들, 과정들을 완벽하게 경에서 밝혀놓았습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는 것들을 감춰놓은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 정도의 자신이 있지 않으면, 그 정도의 지혜가 무르익지 않았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누구든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혜에서 부처님을 따라갈 분은 없다는 거라. 그 지혜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지혜입니다. 세속적으로 잘 살기 위한 지혜, 아니면 세속적으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지혜,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만큼 자신이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지 않는 분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으면은 자신이라는 걸 항상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아마 그분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겁니다. 자신은 그렇게 아닌 듯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라고 하는 것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인 것이지, 또는 남들보다 강하지 않은 것뿐이지, 나를 드러내지 않고 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나를 내세우지 않고 법을 설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탈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을 했습니다. 당신이 아파도 법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가서 법을 설합니다. 그 법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고 안 이르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인 것이지 부처님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라. 그 가르침을 듣고 따르지 않아서 오히려 악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죄인 것이지 부처님이 법을 잘못 설한 게 아니라는 거라.
게중에는 삼매에 자유자재로 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현대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스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삼매에 들려면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금 2선정에 들겠다, 바로 2선정에 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거라.
한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10분 20분 넘어가야만이 초선정에서 완벽하게 되고나서 다시 2선정으로 넘어가지고, 거기서 완벽하게 되고 나서 자유롭게 되고 나서 자재하고 나서는 다시 3선정으로 넘어가지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찰나 간에 2선정 3선정에 들 수 있는 분은 없다는 거라. 얼마만큼 자유롭게 되고 자재해야 가능하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찰나 간에 1선정부터 4선정까지, 4선정에서 1선정까지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다는 거라. 우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아무리 뛰어난 인도의 요기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삼매에 들 수 있는 분은 지금까지도 없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이든, 삼매에 이르기 위한 길이든, 또는 바라밀의 성취의 부분이든, 어느 것이든 부처님을 따르는 분은 없었다는 거라. 순룬 스님을 비롯한 앞으로도 누군가가 분명하게 아라한이 만들어지고 태어나시겠지만, 그 모든 분들은 부처님을 능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유일하게 위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우리가 오늘 이렇게 모여서 예경을 드리는 것도 그분을 회상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한 것이지 단지 '아, 부처님은 참 위대하신 분이구나' 하고 회상만 하고 끝나버릴 것 같으면 그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아무리 매번 법회에 참석한다고 하더라도 실천행이 따르지 않고, 또 수행해서 한단계 한단계 진척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도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곧 담마입니다. 담마를 그대로 따르고 실천할 때 우리가 아, 참 부처님께 예경드릴 수 있는 마음들이 생기고, 그런 부처님께 진짜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법이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가 있고, 여러분들이 법을 따를 때 우리는 그 법을 가르쳐주신 부처님에 대해서 예경드릴 자격을 진정으로 갖추게 됩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붓다의 날입니다.
부처님이 오시고 성도하고 또 열반에 드시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하루라도 빨리 내가 수행하고 그리고 바라밀을 쌓고 또 삼매도 집중력도 키우고 하는 것들을 자꾸 닦아나가겠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법문은 여기까지 하고, 프린트물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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