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테라와다 신행생활 - 보호경(parittā) (20180414)

담마마-마까 2021. 4. 3. 19:32

https://youtu.be/bfxrW8HASdg

* 테라와다 신행생활 - 보호경(parittā) (20180414)

 

빠릿따(parittā)라는 것은, 우리가 출가한 스님들이 처음에 계를 받고 나면 뭣도 모르고 탁발을 나가거든. 그때 인제 큰스님들이 얘기하는 것이 "탁발 나갈 때 처음에는 두 가지를 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처음에 하는 것이 부처님 명호, "아라항 삼마 삼붓도 윗자 짜라나 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 하는 그 부처님 명호 열 가지를 쭉 외우면서 탁발을 나가라" 하고.

그리고 탁발을 받을 때는 자애게송, 조금 전에도 스님이 여러분이 탁발할 때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혼뚜" 하든지, "이당메 다낭 수키 혼뚜" 한다든지, 아니면 "아웨랑 혼뚜" 하든지. "이와 같은 보시공덕으로 행복해지기를" "이것을 인연으로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하는 그런 게송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라 그럽니다.

 

"부처님 명호를 걸을 때는 외우고, 그다음에 탁발을 받을 때는 자애게송을 하라" 그렇게 합니다. 왜 그럴까?

대부분 처음 출가하는 스님들은 걸어갈 때 딴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기 쉽습니다. 또 탁발을 받을 때도 아무 생각 없이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속에서 잡념들이나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고, 또 공양받고 한 것들에 대해서 항상 공양 올린 사람들한테 공양을 올린 공덕이 있게끔 하기 위해서 그렇게들 합니다.

 

조금 전에 부처님 명호 외우는 거 하고 자애게송하고 그거는 뭣에 속할까?

그런 것이 바로 '빠릿따(parittā)'에 속하게 됩니다.

그 빠릿따라고 하는 게 '빠리(pari)'라고 하는 것은 빨리어로 '주위' '주변에'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뜨라(tra)' 라고 하는 것은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비롯한 내 주위를 보호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 보호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적인 조건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열 가지 명호는 진실한 거죠? 완전하게 번뇌로부터 떠나시고 법을 잘 설하시고 하는 것들은 진실한 겁니다. 또는 그 부처님이 설한 법이라든지 자애게송을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마음이 맑아진다든지 아니면 행복해진다든지 하는 그런 효과들을 가져오고, 쉽게 말하면 그걸 따라함으로 인해가지고 진리 따라서 나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진실하고 진리 따라서 나아가는 형태들을 띠기 때문에 법이 그사람을 보호하게 되고, 또 법을 따라서 그사람을 지키게끔 되는 형태들을 띱니다.

 

쉽게 말하면 빠릿따라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행하고 있는 다라니라든지 각각의 기도문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거 하고는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하는 빠릿따는 철저하게 기본적인 원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릿따를 하면 어떤 이익들이 있을까?

물론 주석서나 이런 데는 17가지의 이익이 있다, 11가지 이익이 있다, 각각의 얘기를 하는데, 그걸 전부 간추려보면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이익이 있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경전 독송을 한다든지 게송을 독송한다든지 하는 데는 큰 의미가 없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첫 번째가 그것을 독송함으로 인해가지고 내 자신에게 불··승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나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분명하게 들게 된다는 겁니다.

아, 부처님이란 분, 부처님이 설하신 것들, 그것을 따르는 성스러운 제자들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정립이 되게끔 됩니다. 그런 믿음이 가장 먼저 바탕이 되게 됩니다. 그런 바탕이 되기 때문에 게송을 독송함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지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빠릿따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향해 나아가는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깨달음으로 향해 나아가는 진리 따라서 갈 것 같으면 나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가르침에 대한 확신들이 분명하게 들게끔 된다는 겁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들, ', 이게 맞다!' ', 이것이 바른 길이다'' 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들이 분명하게 들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항상 얘기를 하는 부분인데, 여러분들 죽고 나면 이 입은 아무 소용이 없죠? 썩어버리고 불에 타가지고 없어져버리고 아무 소용도 없는 쓸모없는 것들이 됩니다.

그럼 죽기 전에 이 입은 지금은 쓸모없는 것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쓸모있는 것들을 해야 되는 겁니다. 뭐가 쓸모있는 것일까?

말을 할 때 바른말을 하는 것, 그리고 말을 할 때 자비로운 말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쓸모있는 것들입니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쓸모없는 것들인데, 죽기 전에도 살아있을 동안에도 쓸모없는 말들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할 짓은 못된다는 거라.

입으로 하는 것들은, 독송은 어떤 경우든지 입으로 독송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으로 하는 것들은 쓸모있는 것들 가치가 있는 것들을 해야 됩니다. 이익이 있고 행복이 올 수 있는 것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독송을 할 때는 그러기 위해서 마음속에서 자애의 마음을 지녀라" 하고 얘기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경전이나 여러 가지 보호게송들을 독송을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 스스로 자비의 힘들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아, 이게 나에게는 큰 힘이 되는구나,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위안이 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말을 할 때도 항상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게끔, 경전독송이 아니라도 말을 하게끔 자꾸 연습이 돼야 됩니다.

그게 세 번째입니다. 자비의 힘이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이런 빠릿따들을 독송함으로 인해서 오는 효과들이 몸과 마음이 청정해진다는 겁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리고 선한 방향으로 마음이 이동을 하게끔 됩니다. 계를 지키는 거라든지 수행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부수적인 효과로써 가져와지는 것들입니다.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깨끗해지고 고요해지지 않으면 계를 지키는 것도 어렵고, 수행하는 것도 어렵고, 삼매에 드는 것은 더더구나 어렵게 됩니다.

그마만큼 몸과 마음이 청정해진다는 것은 빠릿따를 계속적으로 독송함으로 인해서 오는 효과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빠릿따로 인해서 얻어지는 이익들입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해석을 하면 경을 독송함으로 인해가지고 업장소멸이 된다든지, 아니면 열반에 이른다든지, 아니면 제사도 경을 독송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도가 된다든지,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효과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만 하고 말지, 뭐하러 수행하고 뭐하러 또 내가 선한 행위들을 자꾸 하라고 하겠어? 그런 것은 없다는 거라.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끔 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면, 어릴 때 아마 겪어봤을 겁니다. 애가 울다가도 엄마가 안아가지고 도닥거리면서 자장자장자장 하면 마음이 포근해지면서 잠이 싹 든다든지, 그런 것들을 아마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빠릿따를 독송하면서 얻어지는 효과가 뭐냐 하면 조금 전에 거는 자기 자신에게 오는 이익들입니다. 삼보에 대한 믿음이나 확신들이 들고, 진리에 대해서 확신들이 들고, 자비의 힘이 생기기도 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빠릿따를 독송하면서 얻어지는 다섯 번째의 이익은 더불어서 나와 주변 다른 이들이 함께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이들이 나에게 해칠려고 하더라도 내가 빠릿따를 독송할 때 그 힘이 강하면 그 파장이 미쳐서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이 사그라집니다. 부처님이나 부처님 제자들의 일화에서 무수하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엄마가 자장가를 해줬을 때 아이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자애경을 독송을 할 때 자애경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도 편안해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에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져버립니다.

 

그게 이 빠릿따가 가지는 효과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은 이 빠릿따라는 것들을 용인을 했을까?

인도 당시에는 '가야뜨리 만뜨라'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신을 찬송한다든지 그걸 함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업장소멸이 되고 또 신이 나를 보호한다든지 이런 효과들이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께왓다 라고 하는 재가자가 부처님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수행을 하다 보면 신통이 열리는데 그 신통을 부리는 것을 용인해 주십시요.” 그 신통 중에는 말을 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요하게 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준다든지, 하는 것도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것을 딱 거절합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신통을 부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간단히 주문을 외워서 신통을 부린다 하고 안다." 쉽게 말하면 다라니나 아니면 가야만뜨라와 같이 만다라 같은 것들을 외워가지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가지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그러한 신통을 보고 사람들이 청정한 믿음을 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서커스 구경하듯이 한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봤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당사자 입장에서는 만약에 그런 효과를 본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거기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러면 계속적으로 그런 신통을 부려줘야 된다는 얘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거하고는 관계없는 사람들은 꼭 광대가 서커스 하는 것을 재밌게 보듯이 그것을 보고 재밌게 박수치고 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믿음을 일으킨다든지 수행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든지, 아니면 스스로 공덕을 쌓아서 좋은 업을 만들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주문을 외우는 것들은 일정한 효과는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있는데 이것을 자칫 잘못 사용을 하면 오히려 사용 안 하는 것보다도 못하는 역할들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아마 대승불교권에 가신 분들은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뭐하면 무슨 행사 무슨 행사 무슨 행사 계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안 하면 뭔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고 해가지고 그 문제가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또 다음에 또 뭔가를 해야 돼.

그러니까 부처님이 생각할 때는 그것은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하는 거라.

 

그래서 딱 선을 정해놨습니다. <빠릿따의 역할, 이익이 아닌 것>

이 빠릿따라고 하는 것, 그리고 경을 독송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까 같이 아기가 편안함을 느끼듯이 그러한 역할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편안함을 느끼고 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도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조건들은 될 수가 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다든지, 재앙을 물리친다든지 아니면 복을 쌓는다든지 아니면 업장을 소멸한다든지 하는 이런 효과들은 없다 하고 분명하게 선언을 하게끔 됩니다.

 

재앙을 물리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자기 자신에게 오는 재앙들을 물리칠려고 할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자애가 충만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마음에 자애가 충만되면 충만될수록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자애가 충만되면 혹시 나쁜 천신들이나 아니면 다른 동물들이 나를 해코지 하려고 할 때 그것들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 스님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습니다. 태국 북부 쪽에서는 탁발을 나갈 때는 어둠이 채 걷히기 전에 나갑니다. 그러면 앞에 뭐가 있는지 사실은 잘 모를 때도 있습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그런데 항상 스승이 얘기하기를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고 알아차리면서 걷는 것이 아닐 거 같으면,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걸어라” 하고 얘기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지니고 걸을 것 같으면 적어도 그날은 뱀한테 물린다든지 하는 것들은 없어. 자애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적어도 그런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내가 자애롭게 마음을 지니고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나쁜 짓을 할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거라.

 

또 하나는 복덕을 증장시키고 싶다, 복을 많이 쌓고 싶다. 그것은 경전독송 하는 것으로만 하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거라. 복을 많이 쌓을려면 계를 잘 지키든지, 보시를 한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법을 듣는다든지, 이런 것으로 인해서 복을 쌓을 수 있는 것이지, 맹목적으로 경전독송만 한다고 해가지고 복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거라.

복덕을 증장시킨다는 것은 그걸 할 수 있는 열 가지 행위들을 분명히 부처님은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업장을 소멸한다는 것, 업장소멸 할 수 있습니까? 한번 지은 업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선한 업을 지었든 악한 업을 지었든 그것은 반드시 결과를 낳게끔 되는 것이지, 경전독송 한다고 해서 업장소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완전한 해탈을 얻어서 이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돼버렸을 때 업이 더 이상 다음 생에서는 작용을 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리게 됩니다. 그게 업장소멸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업장소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부처님이나 각각의 보살들이 나를 보호해준다? 여러분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라져버린 해탈·열반에 든 부처님이 여러분 앞에 나타날 도리도 없고, 다른 불보살이라는 것은 개념적인 겁니다.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 몸과 말과 마음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알아차릴 때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이 빠릿따를 독송하는 것과 그리고 거기서 얻어지는 이익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할 수가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 남방 불교국가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빠릿따를 참 많이 행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많이 행하는 게 보통 스리랑카 같은 경우들입니다. 저녁 예불시간이 끝나고 나면 대부분의 사원에서 이 빠릿따를 합니다.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빠릿따의 목록 순서를 요일별로 정리를 해가지고 24가지 분류로써 구분을 해놓았습니다. 또는 버마 같은 경우에는 빠릿따의 종류를 11가지 종류로 구분을 해놓았습니다. 태국도 거의 비슷하게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빠릿따를 많이 독송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빠릿따를 해서 얻어지는 이익과 빠릿따를 해도 얻어지지 않는 이익에 대한 것들은 분명하게 구분을 한다는 거라.

 

여러분 조금 있다가 이 법회 끝나고 나면 빠릿따 할 겁니다. 자애게송 할 거죠? 그거 다 빠릿따의 종류입니다. 그런데 자애게송들 옆에 한글로 된 거 한번 다 보십시요.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빠릿따를 독송할 때는 그것들의 방식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스리랑카나 각각의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매일 그거를 하다시피 합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가지고 매일 그것들을 독송하는 것, 만약에 이번 주는 자애게송을 내가 독송하겠다, 그럼 이번 주는 저녁 몇시부터 몇시까지는 매일 자애게송을 하겠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은 자애게송하고 내일은 붓다구나(Buddhaguṇa)- 부처님의 공덕에 대해서 열 가지를 회상하면서 그것들을 독송하겠다, 담마에 대해서 하겠다, 이렇게 정해놓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게 자기 스스로 정해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 보통 자애게송을 하다가 보면 무슨 급한 일이 생기면 독송을 중단하고 다른 일을 보기도 하고 그렇게 할 겁니다. 그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말하면 중간에 끊어져 버릴 것 같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독송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천자문 쓰듯이 일곱 자 쓰고나서 끊어졌다 그러면 그다음에 여덟 자부터 써나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이라는 것은 그 경전 자체가 그리고 그 게송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만이 완전해지는 형태들을 띠고 있기 때문에 끊어지는 형태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애게송 처음 한번 보십시오. "서서있든 앉아있든 누구한테든지 다 한량없는 자애가 생기기를" 그것만 하고 끝났다, 그것으로 자애게송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이 그 하나의 게송들은 반드시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많이 하고, 매일매일하고, 끊어짐이 없이 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리하더라도 의미없이 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거는 그냥 다라니가 돼버립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라든지, 스님은 처음에 해인사로 출가했는데 어디가도 무슨 다라니가 있어요. 변소에 가도 다라니가 있고, 어디 공양간에 가도 다라니가 있고, 전부 그 다라니 하는 게 다야. 경전도 보면 전부 다라니로부터 시작해가지고 다라니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뭔 다라니가 그리 많은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거 한다고 해서 무슨 큰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도 그냥 일상적으로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는 거라.

왜 효과가 없겠어요? 의미를 모르니까 그런 거라. 의미를 모르니까.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다라니로써의 효과가 없습니다.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은 비밀스럽게 의미를 숨겨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에서, 경·율·론 삼장을 통틀어서 다 뒤져보더라도 다라니라고 존재해가지고 요것은 해석하고 하지 말아라 하는 부분은 전혀 없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그게 이해가능 하도록,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에게 맞는 이해, 재가자에게는 재가자에게 맞는 이해, 초심자에게는 초심자에게 맞는 이해가 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빨리어로 써져있는 이유가 그겁니다.

빨리어는 자기가 직접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라는 뜻이라. 빨리어는 글이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는 글이지만 빨리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라는 거라.

그런데 이걸 글로써 써놓을 거 같으면, 이런 구어체가 아니고 문어체로 써야 됩니다. 문어체를 가지고 말을 할려면 말이 좀 이상해져 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밥 먹었어요?” 이렇게 할 수 있는걸 거기서는 글을 적을 때 "진지드셨습니까?" 하고 적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꾸 개념화돼버리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거라.

 

그런데 개념화되지 않고 우리가 이해하고 통상적으로 쓰는 것들로 법을 설하고 그것으로서 가르치고 하라고 분명히 부처님이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분명하게 내가 비밀스럽게 감춰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적으로는 다라니라는 것은 존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라.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그 모든 것들은 이해가능한 것들이 돼야 되는 거라. 만약에 내가 빨리어로 가지고 독송하는데 그것들을 이해하는 상태에서 독송할 것 같으면 전혀 무리는 없어. 문제는 없는데 똑 다라니 같이 아무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하면 그거는 다라니가 돼버리는 거라. 그것은 잘못하는 형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빠릿따를 하는 경우, 경전 독송이나 게송을 독송할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에 빨리어로 한다, 그러니까 빨리어에 능통한 사람들이겠죠? 그럴 경우에는 빨리어의 기본적인 것들을 이해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빨리어에는 변화되는 형태가 있고 그다음에는 장음이 있고 단음이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구분할 수 없으면 의미가 아주 다르게 바뀌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빨리어를 할 때 가장 신경써야 되는 것은 장음과 단음들에 대한 구분들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빨리어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빨리어로 독송하지 말고 한글로 독송하라는 거라. 아니면 한글도 지금 해석해놓은 것이 여러분들한테 의미가 와닿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그것을 따로 해석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독송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독송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독송할 때 기본적인 조건은 반드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독송을 해야 됩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지 않으면 한마디도 입으로 뱉어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경전도 입으로 뱉어내서도 안 될 뿐아니라 일상적인 말하는 것도 뱉어내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이익되는 것, 도움되는 것, 행복해지는 것들을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잠자는 시간에 여러분들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고 나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평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중에 사실은 몇시간 안 됩니다.

 

습관들이는 것이 내가 선한 말들, 이익되는 말들을 하는 것들이 습관이 되는 것이 빠르겠어요? 아니면 반대되는 것이 더 빠르겠어요? 남을 해코지 할려고 하고 남을 비난할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러한 패턴들을 바꾸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경전독송을 할 때든 말을 할 때든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만약에 이게 안 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할 때 높낮이를 없애버리면 됩니다.

지나치게 흥분된다든지 지나치게 가라앉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없이 그냥 평상적인 말 똑같은 말들로써 계속적으로 반복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 스님도 처음 법문할 때 되게 떨리니까 자신 있는 것은 힘이 쎄집니다. 자신 없는 것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하게 돼버립니다. 법문이 끝나고 나니까 큰스님이 불러. 불러가지고 하는 얘기가 “법문은 어떠한 경우든지 높낮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똑같은 말투로 법을 설해야 되지, 법문이 높낮이가 있다는 것은 네 감정에 좌우되어가지고 법을 설하는 것이다” 하는 거라.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설하면서 감정을 실어서 법을 설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은 법문이 재미없게 들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감정적인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정 실어가지고 확 말도 좀 올렸다가 또 재미있게 감정을 끌어내기도 하고 이래야 되는데, 그게 없기 때문에 재미없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감정으로부터 떠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혼났던 기억들이 몇번 있었어요.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말을 하다 보면 어떨 때는 자애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빨리 알아차려야 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평상적으로 말하는 톤으로 계속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소리가 쎄진다든지 아니면 기어들어간다든지 하는 것들이 없이, 어떠한 조건에 따라서라도 똑같은 투로써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로서 비교를 해보면 됩니다.

 

왜 그럴까? 보통 염불 테이프 보면 되게 듣기 좋습니다. 또는 노래 들으면 흥이 나기도 하고 듣기 좋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기억하기도 쉽고 그것을 따라하기도 쉬운데 왜 그럴까? 그것은 감정적인 것들을 계속적으로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기쁨이나 행복이 일어나는 것은 감정적인 것에서 일어나는 거하고 진리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거하고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감정적인 것으로 인에서 일어났을 때는 그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그 감정도 사라져버립니다. 진리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 대상이 사라지더라도 그러한 느낌들은 계속적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진리를 체험했을 때 일어나는 기쁨은 오래갑니다. 거기서 오는 행복은 몇달이라도 그 행복한 상태에서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적인 것은 그거하고는 완전하게 다르다는 거라.

경을 독송하고 빠릿따를 하는 것은 스스로의 기쁨과 행복을 끌어내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일시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감정적인 것을 호소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경전 독송하는 데는 반드시 원칙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선에서 이해하는 말로써 경전독송을 하라.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라.

그 두 가지는 항상 명심을 해두어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이런 경을 독송하고 여러 가지 「불교 의례」를 하는 이유들입니다.

의례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해가지고 죽을 때까지 의례의식들을 끊임없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원칙이 잘 서있지 않을 거 같으면 의례의식에 파묻혀서 그냥 살아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필요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경우들이나, 아니면 남들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해야 된다고 따라가게 된다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의식적인 것 의례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옭아매는 족쇄일 뿐입니다.

그거 없어도 나는 얼마든지 바르게 잘 살아갈 수 있고, 바르게 잘 해탈로 나아가는 길을 갈 수가 있는데 그것들이 여러분을 묶어두는 족쇄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큰 문제가 돼버립니다. 의식과 의례에 매이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진리에서 나오는 기쁨들이나 행복이 있을 때 그것들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38페이지에 보면

「재가자들에게 있어서 빠릿따를 독송하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지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선한 공덕을 쌓기 위한 행위, 종교적 수행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보다 좋은 다음 세상이나, 스스로의 마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만 이 빠릿따가 행해진다고 볼 수 없고, 자신의 세간적인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이른바 현세 이익을 위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의식에 자꾸 매여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출가자일 거 같으면 오히려 그런데 잘 안 매여들어갑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은 그러한 각각의 행사들이나 각각의 의식에 계속적으로 매달려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독송하는 것들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바르게 해나갈 때 적어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 더, 독송을 하고 나서 해야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독송이 딱 끝나고 나면 회향하는 것,

이러한 공덕들을 누구 다른 사람들과 나누겠다든지 내 가족들과 나누겠다든지.

경전 곳곳에 그런 회향을 하라고 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위사카 부인 같은 경우에는 선원을 지어서 상가에 보시를 했단 말이라. 그 공덕이 크다는 거라. 그런데 위사카 부인이 그렇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공덕들을 너희들에게 회향할 것 같으면 너희들도 선원을 지어서 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공덕이 생긴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때 한 것이 뭐냐면 다른 사람들이 "사-두! 사-두! 사-두!" 합니다. "잘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말들을 함으로 인해서 공덕들이 회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함부로 어떤 일이 끝나고 나면 “사-두! 사-두!” 하지 말고 “사-두” 할 때는 회향한다는 마음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참 잘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공덕이 회향되기를"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라.

 

스님들이 공양을 받을 때 축복게송 아누모다나를 하는 경우들도 회향하는 의식들입니다. 공양은 네가 올렸지만 이 공덕이 너한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거라.

한국에는 축원문이라고 해서 개인을 축원을 해줍니다. 테라와다에서는 그런 방식은 전혀 없습니다. 개인이 축원을 부탁한다 하더라도 스님이 축원을 해줄 때는 그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에게 축원을 해주는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그런 회향을 할 줄 알았으면 그다음으로 해야 되는 것은,

아딧타나라고 해서 결정심!

 

이러한 공덕으로 인해서 나에게 무엇이 되기를

다음 세상에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를

죽고나서 내가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기를

이생에서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를

살아가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서 성장하기를

 

스스로 결정심을 내고 서원을 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서원이 다음 생이나 다음 일들을 결정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아딧타나 결정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결정심을 반드시 내게 됐을 때 지금 경전 독송한 것들이 사실은 끝나게 됩니다.

 

경전 독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전 독송하고 나서 회향하는 것도 중요하고, 회향을 하고 나서 서원을 세우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맞는 경전을 독송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스스로도 경전 독송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들, 신심이 확립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이익들을 얻어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41페이지까지 한 것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