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냄은 마음의 자동 발화 장치 (20150501. 대구)
<성냄의 종류 아홉 가지, 싫은 대상에 자애를 형성하는 법>
우리 저 뒤에 보살님은 의자에 앉아요. (수행자 : 괜찮아요) 괜찮아요?
올해는 붓다야나 선원에서는 붓다의 날 행사는 안 하죠. 교단행사를 같이 하고,
(수행자 : 예. 저희들은 특별하게 얘기한 게 없었어요) 그러면은 교단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보통 이런 선원이 설립이 되면 꼭 해야 되는 게 몇 가지가 있거든. 붓다·담마·상가의 날, 까티나 날, 그다음에 안거 이런 것 정도는 해야 되는데, 붓다의 날은 어쨌든 경주에서 하기로 했으니까 거기서 같이 보도록 하고, 그 대신에 올해 안거는 여기서 실행해나갈 겁니다. 안거를 마쳐야 계를 줍니다. 안거는 동일하게 여기서, 아마 올해 안거가 며칠인지 모르겠다. 7월달일 건데 아마 7월말 경일거야. 윤달이 있어가지고 ᄋᆞᆷ 그렇게 될 겁니다.
(수행자 : 스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붓다의 날에 안 하기로 했다는 이런 말씀이 아니라 아직 저희들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고,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라는 그 말씀이었습니다.)
모르니까 못 하는 거지 뭐.
부산에서는 붓다의 날 할 거고, 뭐 특별한 것은 없고 붓다의 날 기념하는 거니까, 어쨌든 안거는 그대로 하고, 올해 까티나를 할 수 있을런지 없을지 그거는 그때 보고, 그렇게 합시다 이.
자! 교재 한번 봅시다.
오늘은 「성냄은 마음의 자동 발화장치다」 하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초가 있으면 요즘 초 켜는 것은 이걸 뭐라 그래요? (라이타) 라이타 똑딱 하면 불이 가스가 착 나와서 이렇게 켜지죠? 그와 마찬가지로 분노가 착 일어나면 그런 조건들만 되면 딱 불이 붙게 되는 거라. 그 똑딱 하는 게 나무 옆에 대면 그냥 그거 다 태워버리는 거라. 그 분노라고 하는 것이 그마만큼 무서운 거라. 일어났다 그러면 그냥 자동적으로 불이 붙는 거와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스님이 부산에서 대구로 승용차를 이용해가지고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차가 브레이크가 고장났으면 어떻게 될까? 한참 신나게 달리면, 고속도로는 보통 100키로 놓고 오잖아. 100키로 놓고 오는데 브레이크를 밟는데 브레이크가 고장났어. 그럼 어떻게 조치해야 돼?
화가 난 것은 성냄이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브레이크가 고장나니까 어떻게 돼요? 여러분들이 성나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거라. 말도 잘 못하고 행하는 것도 즉시 바로 성이 나게 되면 바로 행하지도 못하고 뭘 하지도 못하고, 그냥 성냄이 주인이 돼버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그차 주인은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차의 속도에 따라서 그 차가 그냥 가게 되는 건데, 그런데 그리하더라도 주인이 할 것이 있죠? 어디 가서 부딪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상깜빡이를 켜든지 그렇지 않으면 경사진 데가 있으면 경사진 데를 올라가든지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를 안전하게 대야만이, 그리고 속도가 늦어져야만이 그 차는 멈추게 되는 거라.
성냄도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어떤 경우든지 성냄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성냄을 조절 못하고 그냥 놔둘 것 같으면 브레이크가 파열된 차와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어떤 방식으로든 작은 피해를 입히든 아니면 안전하게 하든 그렇지 않으면 그냥 크게 대형 사고가 나든 그거는 본인이 해야 될 일입니다. 여자분들은 브레이크가 안 든다고 그러면 차가 이성을 잃기 전에 자기가 먼저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무서워갖고 “아앜” 하다 보면 그냥 크게 사고가 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냄은 마음의 자동발화장치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떤 조건만 탁 맞아 떨어지면 금방 그게 불이 붙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이 붙는 건 좋은데 문제가 뭐냐면 성냄 지혼자 있을 거 같으면 불이 붙어도 크게 번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성냄이 일어나면 반드시 뭔가가 결합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불난 데 그냥 더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경우가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이걸 성냄이 일어나면 어쨌든 그 불이 안 나기를 바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성냄에는 뭐가 결합되기 때문에 그럴까?
「나」, 나라고 하는 것이 결합을 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좀 뛰어나다 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좀 남보다 못하다 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뭐 다른 사람하고 거의 비슷하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어떤 경우든지 결합이 되게 됩니다.
한번 봐봐요. 여러분들이 성낼 때 그거 결합 안하고 성냄 지혼자서 일어나고 있는 경우가 있는가. “니가 뭔데?” 그래서 성냄은 무서운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성내는 것은 경전에서는 스님은 조금 전에 자동차를 비유로 들었지만, 뭐라고 표현하냐면 "흥분해서 콘트롤이 안 되는, 주인 말도 듣지 않는 마차를 끄는 말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말은 흥분이 되면 주인 말을 듣지 않습니다.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소리가 들리지가 않아. 그러면 지 날뛰는 대로 마차는 그냥 이리저리 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동차 브레이크 파열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아라한이 돼야 이 성냄을 완전히 멈출 수가 있는데 경전 곳곳 또는 율장 곳곳에는 보면 성냄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죄로서 다스리고 있다는 거라. 아라한도 아닌데 죄는 지을 수밖에 없는데, 죄를 다스린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말이 좀 이상하잖아. 왜 그럴까?
왜 중죄로서 다스릴까? 지혼자서 성나가지고 그냥 날뛰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자기 혼자의 문제로써 끝나버리는데, 그게 죽음을 맞이하든 아니면 뭘 하든 간에. 그런데 대부분은 성냄은 혼자 문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밖으로 표출되는 것, 또 안으로 표출되는 것 이런 두 가지 종류들의 성냄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은진이 있으니까 은진이 예로 들어볼까? 은진이 엄마에게 은진이가 뭘 잘못 해갖고 성질을 돋궜어. 그럼 은진이 엄마가 은진이한테 “이게 그냥” 때리지는 않고 “이게 그냥 말도 듣지 한 하고” 하면서 탁 했다, 이건 죄가 될까 안 될까? 때리지도 안 했는데. 빠찟띠야(pācittiyā)라고 해가지고 참회해야 되는 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는 뭐 그냥 때리기는 때렸다, 예를 들어서. 근데 전혀 아프게 때린 것도 아니고, 아픈 도구를 가지고 때린 것도 아니고, 자기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그러는데 어쨌든 아이를 갖다가 이런 종이 하나 가지고 “이건 마라” 이렇게 탁탁탁 했다고 치자. 그것도 빠찟띠야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경전 곳곳을 들여다보면 성냄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조그만한 잘못이라도 성을 내가지고 표출이 됐다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은 "너는 죄인이다" 하고 지금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성내는 자는 나의 제자들이 아니다." 하고 선언을 하게끔 됩니다.
전에 언제 스님이 그런 얘기를 했죠? 한국분들은 성냄이 많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수행한다고 하다 보면 성을 잘 낸다고. 그런데 일단 성내는 모습이 드러났다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스님이면 스님 취급을 안 하고, 일반인일 거 같으면 가까이 할려고 안 해. 그 사람들은 이미 성냄이 그마만큼 무섭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라.
동남아시아 사람들 잘 성내는 사람 없죠? 그런데 한번 성냈다 그러면 완전히 그냥 폭발을 해버립니다. 그것도 사실은 성냄의 일종인데, 잠재해 있는 것도 성냄의 일종인데 사실은 그렇게 치면 지나 내나 똑같이 성내고 있는 거라.
그런데도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더 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라.
성낼 때 여러분들 대부분 어떻게 돼요? 성냄이 일어날 때 어떻게 일어나던 가요?
성냄을 관찰해 본 사람? 수행에서. 그냥 될대로 그냥 확 한번 저질러버리고 끝내버려요?
(성낼 때도 알면서 성냅니다. 제가 보면서)
알면서 성낸다? 그런데 아는 것이 있으면 성이 나질까?
(성내는구나 알면서도 그게 제어가 안 돼갖고 탁 낼 때도 있습니다.)
(몸이 막 따가워요. 따갑거나 가슴 부위가 가렵거나 좀 더 심해지면 올라와요. 목에 이렇게 탁 올라오고, 막 따갑고 가렵고 가슴부위가 미지지지직 하면서 가렵고 온몸이 따가워지고 좀 있으면 목에 뭐가 올라오고 그런 게 있습니다.)
그거는 맞기는 맞는데 그런데 그거는 이미 성냄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 내가 알고 있는 거라. 그때라도 그 현상을 알아차리면 돼. 알아차리면 멈추는데 사실은 그전에 알아차리는 게 가장 좋죠. 더 증폭되기 전에.
또 다른 사람? 성냄을 관찰하는 거. 수행들 안 하지?
마음이 흩어져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성냄이 딱 일어나는 순간에 마음은 대상하고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서 마음이 탁 흩어져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성냄이 일어날 때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은 그걸 어떻게 알아차리느냐 하면 갑자기 대상이 몇 개로서 착 분산되는 느낌, 그러고 나면 성냄이라는 게 탁 올라오면서 여러 가지 느낌도, 입에서 경련이 일어난다든지 아까 같이 몸에 여러 가지 반응들이 일어난다든지 이렇게 진행돼나갑니다.
알아차림이 꾸준하게 하고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이 탁 흩어질 때 ‘응?’ 하면서 알아차렸을 거 같으면 성냄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탁 제어가 되는데, 이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만날 농땡이 부리고 있으니까 대상을 일상적인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이미 성냄이 일어난 상태에서 일어나는 느낌들만 관찰을 하고 있으니, 그게 관찰이 돼나가지나? 안 되지. 오히려 증폭돼버리지!
예를 들어서 성냄을 다스리기 위해서 자애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는데, 처음에 자애수행 무르익기 전에 피해야 될 대상들이 뭐가 있어요?
원수 같은 놈 그거 하지 마라 그러죠? 처음부터는. 원수 보면 내가 성이 나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자애수행의 첫 번째 대상이 아닙니다. 나중에 가서 대상이 되는데, 그럼 실제로 나는 이 사람이 미워 죽겠는데 자애수행을 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못한다는 얘긴데, 그럼 어찌 해야 돼? 그럼 자애수행 하지 말아야 돼?
그렇다고 해가지고 나에 대해서 자애수행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하더라도 이 사람 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 그리하고 마음은 편해졌더라도 또 이사람만 보면 성질이 나는데 어떡할 거라? 그럼 이 사람하고는 자애수행을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어떻게 해야 돼? 어쨌든 하기는 해야 될 거 아니라? 풀기는 풀어야 될 거 아니라? 나중에 그 부분에 대한 얘기도 조금 하겠습니다.
어쨌든 알아차림을 놓치고 있으면 이미 성냄이 일어나고 나서 그 이후의 상황들을 여러분들은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은 성냄을 다스리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런데 또 다행히 좋은 게 뭐냐면 그렇게 하더라도 성냄이 진행되는 것을 이렇게 관찰하고 있어도, 자기는 그걸 알아차렸다고 하든 뭘 했든 간에 진행이 되더라도 그게 사그라드는 경우들도 있고, 폭발하는 경우들도 있죠.
그런데 아까 그걸 여기서는 성이 난 걸 알아차린다고 얘기하는데 그거는 사실은 알아차림은 아닙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은 선한 마음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있으면 성냄이라는 악한 마음은 없어져버려야 됩니다. 그게 사실은 알아차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성내는 마음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그걸 알아차림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게 느낌이 일어났든 그게 강하게 돼있든 알아차림이 분명할 것 같으면 그것은 거기에서 딱 멈춰버립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이 돼다가 좀 사그라들기도 하고 안 그러면 폭발하기도 하고 해가지고 결국은 끝장 보고나서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하는데, 그런데 앞의 전자 같은 경우는 왜 그렇게 될까?
만약에 은진이가 스님을 한대 탁 때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데 하여튼 탁 때렸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 되나? 은진이가 나보다 약하지. 그럼 반대로 은진이가 나를 탁 때렸다, 그러면 내가 화내고 안 내고 하는 것은 내 문제인 것이고, 그럼 그다음에 은진이는 화가 났기 때문에 나를 때린 걸 거 아니라?
그런데 저 화가 갑자기 탁 사라질 때가 있어요. 그건 왜 그럴까?
때릴 땐 때렸는데 내가 다시 “이노무 자식” 하면서 때릴 걸 걱정하면 “어?” 하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탁 화내는 것은 사라져버립니다.
여러분들이 화가 지속되지 않고, 그러니까 고속도로에 브레이크 파열된 차가 많지 않고 정상적인 차가 많은 이유는 뭐냐면 그 스스로 자기애, 자기 자신을 방어할려는 마음, 자기 자신을 사랑할려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그게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있기 때문에 그게 그나마 그래도 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나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는 돌아가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자기애도 엄밀하게 볼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두렵다'
그런데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성을 낼 때는 나라고 하는 생각이 결합돼가지고 성을 내고 뭔가를 행동을 했는데 나중에는 성냄이 사그라들 때도 보면 거기도 꼭 같이 나라고 하는 것이 결합돼가지고 사그라들고 있다는 거라.
참 우스운 얘기죠? 성냄이라는 게.
그리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것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도 성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성냄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화를 내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비꼬는 것들, 남에 대해서 비방하는 것들, 악한 마음들을 가지는 것들, 싫어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들 이런 것들이 전부다 성냄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경전에는 성냄을 크게 네 가지 또는 성냄을 크게 아홉 가지로 분류를 해놓고 있는 겁니다. 뭐 뭐가 있느냐면,
기본적인 성냄인 도사(dosa),
그다음에 웨라(vera)라 해서 겉으로 표출되지는 않지만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들,
그다음에 우빠나하(upanāha)라 해서 원망하는 것들, 어리석어가지고 자꾸 그것에 대해서 망상해가지고 그것이 증폭되는 것들,
그다음에 막카(makkha)라 해가지고 남을 보면 결점만 자꾸 찾으려고 하는 것들, (위선·악을 숨김, 얕봄-다른 사람의 덕을 경시하는 것)
그다음에 빨라사(paḷāsa)라 해서 남을 보면 그냥 경쟁할려는 생각들이 자꾸 일어나서 끊임없이 다툴려고 하는 것들, 남이 사돈이 논 사는 걸 보면 배아파 하는 것들, (비교함-다른 사람의 덕을 과소평가한 뒤 자기를 그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특징)
그다음에 잇사(issā)라 해서 질투하는 것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기 질투하는 것)
그다음에 맛차리야(macchariya)라 해서 인색한 것들, 뭐 아무리 잘해도 ‘그게 뭐라고’ 이렇게 마음을 먹어버리는 것들,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것)
그다음에 둡바짜(dubbaca)라 해서 반항하는 것들, 뭐하면 뭔가 꼭 반발심을 먼저 가지는 것들,
그다음에 꾹꿋짜(kukkucca)라 해서 후회하는 것들,
그다음에 브야빠다(byāpāda)라 해가지고 크게 성냄이 일어나서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들 (지나친 분노, 해치려는 마음)
이런 모든 것들은 모든 게 다 분노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싫어하고 하는 것들, 후회하고 하는 것들, 성내는 것들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분노의 영역에 속합니다.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이 성냄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생에서만 그렇게 습이 들었으면 괜찮은데 과거생부터 그렇게 습이 들었으면 얼마나 끊기 힘들겠어. 그러니 다른 것들은 수다원에서 없어지고 일래과, 불환과에서 없어지고 하는데 이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끊어내기 힘들다는 거라. 습이 그마만큼 오래도록 들어있고 견고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끊어지기 힘들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것들을 끊어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번 성냄이 일어나는 것들을 곰곰이 한번 보십시오.
어쨌든 원인부터 제거를 해야 성냄이 좀 덜 습관 될 거 아니라. 그거 안 하고 성냄을 끊어낼 방법은 없습니다. 습관지어지는 것들,
감각적인 욕망. 감각적인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냄은 견고해집니다.
뭔가 욕심부리고 탐내고 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냄은 강해집니다.
괜히 여러분들 끼리도 편 갈라갖고 나는 니가 좋다 해쌌고 이런 것들이 다 성냄을 쌓는 것들이라. 그럼 니는 좋으면 너는 그럼 싫다는 거잖아. 요것도 성냄을 쌓는 거라.
어쨌든 좋고 싫고 하는 것들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냄을 자꾸 강화시켜버린다는 거라. 그런 것들은 내 자신의 감각적인 욕망들 좋고 싫음을 채워주기 위해서 일으키는 거구나 마음을 먹고 그것들을 자꾸 버려내버려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인색한 것.
인색한 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인색함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인색함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을 그냥 포근하게 좀 해봐. 뭘 그렇게 그냥 어렵게 해싸?
인색하지 읺으려면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마음들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 경우에는 여러분은 전부 다 못난이 입니다. 그런데 뭐 조그만 거 더 남들보다 낫다고,
처음에 출가했을 때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진주 연화사에서 있었는데 거기 주지스님이 차를 샀어요. 그때 소나타인가 뭔가를 샀어요. 그러니까 같이 있던 도반 스님이 자기도 똑같은 소나타를 그것도 똑같은 색으로 샀어요. 그런데 기계를 가지고 아무리 만들어도 뭔가 조금 차이나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스님이 어느 날 보니까 둘이서 싸우고 있는 거라. 뭐 때문에 싸웠는가 보니까 똑같은 차인데도 아, 나는 여기가 조금 더 니보다 빛이 난다, 너는 여기가 조금 더 틈이 내보다 크다, 이것 갖고 시비가 돼가지고 둘이 싸워가지고 나중에는 차를 밟고 난리가 난 거야.
자기가 조금 더 낫다고 해도 그냥 니 차가 더 낫다고 해줘버리면 아무 일이 없었을 건데, 그거 하기 싫어가지고, 내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에 나중에는 차를 부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르게 되는 거라. 인색하면 그러는 거거든.
마음에 인색함이 있을 거 같으면 파괴본능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인색함들은 자꾸 버릴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하나가 여덟 가지 세간법 알죠?
칭찬하고 비난받고, 부자고 가난하고, 누가 나를 존경해주고 나를 존경하지 않고, 또 두 개가 뭐지? 하여튼 여덟가지 이것들이 세간법인데,
[※세간팔법(lokadhamma) : 윤회하는 세계에서 명백히 존재하는 8가지 법
①이익(lābha) ②손해(alābha) ③명성(yasa) ④치욕(ayasa)
⑤칭찬(pasaṁsā) ⑥비난(nindā) ⑦즐거움(sukha) ⑧괴로움(dukkha)]
여덟 가지 세간법들에 대해서 부적절한 대응을 할 경우에 일어나집니다.
그걸 잘 대응해야 되는데 쉽게 말하면 자기가 아무리 지금 현재 명예가 높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 명예에 대해서 “니 그거 뭐 명예 높은 게 뭐라고 그렇게 잰채하냐?”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어! 내가 그렇게 잰채 했구나’ 하고 알아차렸으면 ‘내가 다음에 조심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되는데 이걸 잘못 대응하고 있는 거라. ‘어, 자식 봐? 지가 내보다도 아무것도 없는 게 뭐, 왜?’ 이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사실은 명예가 부든 뭐든 간에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그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는 거라. 지금 자기가 올라와 있는 위치,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그건 안 변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것에 대해서 침해를 하게 되면 뭐 그냥 잘못된 대응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여덟 가지 세간법들은 그렇게 부적절한 대응들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화가 일어났을 때 ‘어!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화를 냈지?’ 하고 가만히 돌아보라고. 대부분은 보면 이 부적절한 대응들을 하고 있는 거라. 세간법들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그 사람은 십년전에 나보다도 훨씬 더 돈이 많았을 수도 있고, 십년 전에 나보다도 훨씬 더 유명한 스타일 수도 있는데, 지금 내가 조금 더 낫다고 아니면 조금 더 낮다고 그것을 잘못 대응해가지고 스스로 자살하는 경우 아니면 남들과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질투라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우짜면 될까? 이걸. 우짜면 될까? 그냥 냅둬버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안 된다니까.
가장 좋은 게 뭐라? 여러분들 수행하고 있으니까. <성냄에 대한 해결책>
‘성냄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걸 탁 내버려버리면 탁 끝나버립니다. 그것 같이 간단한 게 어딨어? 그래서 수행자만큼 성냄을 버려버리기 좋은 사람들도 없습니다. 여러분 수행자 맞죠? 쬐끔 부끄러워? 그럼 더해. 수행을!
그거는 성냄이 일어났을 때 성냄을 버릴 줄 알면 그거는 수행자라.
성냄이 어떤 상태에서 일어났든 간에 그것이 설혹 느낌이 일어난 걸 알아차렸다, 아니면 경련이 일어나는 걸 알아차렸든, 아니면 두드려 패고 나서 알아차리든 간에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것들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그걸 버려버리게 됩니다.
알아차림만 분명할 거 같으면! 그것은 딱 떨어져버립니다. 성냄이 일어났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성냄의 속성을 알 것 같으면 절대 그것 따라서 내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냄의 속성은 간단합니다.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두 순간도 함께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성냄은. 딱 순간입니다. 순간순간 순간순간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 순간 변하는 그거 하나만 한번만이라도 딱 분명하게 알면 거기서 딱 끊어져버립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성냄에 대한 해결책,
뭐 성냄을 관찰할 마음도 아직 안 되고 그럴 마음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무조건 참아. 무조건 참아라. 무조건 인내하는 수밖에 없어. 그때는.
그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나를 그 사람이 죽일려고 하든지, 아니면 내가 성이 났든 간에 혀를 꽉 깨물든지, 숨을 헐떡헐떡헐떡 해가지고 다른 대상으로 돌려가지고 뭘 하든지 간에 성냄을 일단 참아야 되는 거라.
성냄은 참지 않으면 그것은 증폭 돼버립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는 반드시 그것은 참아라.
천태지관법이라고 하는 대승경전에 있습니다. 천태소의지관 인가 천태지관이라고 하는 경이 있는데, 거기에는 맨 처음에 수행을 할 때 가르치는 것이 수식관부터, 숫자를 세는 거 하나 둘 셋 넷 해가지고 열까지 세고, 그다음에 아홉 여덟 이렇게 쭉 해나가는데, 그런데 이게 일반 수행에서 적절하게 유용하게 쓰여지는 게 뭐냐면 이런 대상들을 만났을 때, 그 대상 만나면 ‘하나,둘,셋,넷,,,아홉,열까지 세고 그다음에 다시 아홉,여덟,,,’ 이렇게 수를 세든, 아니면 그 호흡을 ‘흡토흡토흡토’ 하든지 그래서 수식관 다음에 지관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천태지관법이. 그래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반복해서 하도록 그렇게 하는데, 그게 인내하는 방법들입니다.
우선 그게 가능한데 인내해가지고 완전하게 성냄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죠? 그 대신에 아까 성냄은 뭐라고 그랬어요? 순간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탁 바뀌고 나면 이 사람을 봐도 인제는 성이 덜 나와있는 거라. 마음이 이미 바뀌어버렸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또 다른 조건을 만나면 또 뭔가 이상한 것이 불편한 마음이 됐다 그러면 또 튀어나오는 거라. 그래서 인내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유용한 방법 중에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해결책이 자애 수행을 하라.
자애수행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자애수행은 맨 처음에 뭐부터 먼저 한다고? 자기 자신부터!
자기 자신부터 하다가 어느 정도 된다 그러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존경하는 대상들, 그게 어느 정도 된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싫은 사람들에 대해서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대상까지는 어느 정도는 가능한데, 싫은 대상으로 하는데 싫은 대상을 하는데 참 자애형성이 잘 안된다, 그럼 어찌 해야 돼? 다시 존경하는 대상으로 넘어가야 되는 거라.
자애 수행은 그 패턴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다가 존경하는 대상으로 넘어갔는데 그게 잘 안된다,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와야 되는 거라.
싫은 사람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게 잘 안된다, 그러면 다시 존경하는 대상으로 넘어와야 되는 거라.
항상 그렇습니다. 그레서 그거 반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싫은데 저 사람에 대해서 자애마음을 내야 되는데 참 잘 안된다, 그러면 다시 또 존경하는 대상으로 해서 수행을 해가지고 마음을 바꾸고 나서 다시 싫은 대상으로 했을 때는 그래도 조금 나아진단 말이라. 그래도 조금 지나면 또 안 된다, 그럼 다시 또 돌아와야 된다는 거라.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렇게 자꾸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줄 모른다? 그럼 뭐 자애수행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지. 그건 자애수행을 해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는 거라. 그냥 글자 붙잡고 있는 것밖에 안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내가 원한이 없기를’ 그거 글자 붙잡고 있으면 뭐 할 거라? 공염불 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진데.
그럴 때는 자애를 형성을 시키고 나서, 그 자애게송들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애를 형성할 때는 형성할 대상들을 만들어야 됩니다.
‘아, 내가 저 사람을 보면 참 편안하다. 아, 참 반갑고 언제 봐도 그 사람을 보더라도 싫은 마음이 안 일어난다’ 하는 대상이 있을 거 같으면 그 대상을 먼저 자기화시켜서 그것을 자애대상으로서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렇게 자애가 형성이 되도록 하라는 거라.
자애가 형성되도록 하고 나서 그 자애가 형성된 것에다 자기를 넣어서 ‘아, 내가 행복하기를’ 해야 그 자애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싫어하는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애형성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자애수행을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그게 안 되면 존경하는 대상으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서 자꾸 그것을 바꾸어라.
그렇게 왔다갔다 해도 결국에는 싫어하는 대상에게 자애형성이 안된다,
그럴 것 같으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존경하는 스승에 대해서 자애수행을 하다가 그다음에 싫은 사람을 떠올리면서 뭐라고 마음을 먹어야 되느냐면,
경전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양쪽에서 큰 톱을 붙잡고 내 몸을 사지를 절단을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라도 성냄을 일으키지 말아야 된다." 그 타들어가는 고통이 있어도 성냄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거라.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성냄이 안 일어난다는 것은 참 힘들죠?
그런데 성냄을 가만히 보십시오.
육체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기도 하고, 마음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성냄보다도 육체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성냄이 훨씬 다스리기가 수월합니다. 안 그럴 것 같애요?
마음은 사고작용들이 개입되고 망상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이 성냄을 다스리는 것이 오히려 힘이 듭니다.
그런데 육체에서 싫어하는 성냄이 일어났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다리가 고통스럽다. 그럼 그 고통으로 인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것 자체가 이미 성냄이라.
그런데 이거는 이 싫어하는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됩니다. 고통의 변하는 속성들이 있습니다. 육체에서 변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깨끔거린다든지 묵직하다든지, 갖가지 느낌들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이 고통도 사라질 뿐아니라 이것 싫어하는 마음도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육체에서 일어나는 성냄은 훨씬 관찰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현재 저 사람에 대해서 마음으로 자애를 방출을 해야 되는데, 그게 안되니까 뭐부터 해야 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성냄이 아니라 육체에서 일어나는 성냄부터 먼저 다스려나가라는 거라. ‘그 톱에 잘릴 때 일어나는 고통 그것조차도 부처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을 일으키지 말아라 했는데, 이거 하나 내가 하지 못해가지고 저 사람에게 자애수행을 한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저 사람에게 다시 또 자애의 마음을 방출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도 또 안된다 그러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나쁜 선하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 관찰하라. 그리고 자신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 선한 말을 했던 것들을 떠올려라. 자신이 행했던 행위들에 대해서 선한 행위를 했던 것들을 떠올려라는 거라.
신·구·의를 깨끗하게 하고 선한 것들을 떠올리도록, 그렇게 하면 마음은 착 가라앉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저 대상 싫은 대상에게 자애를 방출해보라는 거라.
‘어! 내가 그래도 좋은 일 참 많이 했네, 신·구·의로 해가지고. 그런데 내가 이 조그만한 이익을 가지고 저 사람에게 내가 잘 해왔던 걸 깨버리고 싫은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그거는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자애를 할 때는 자애가 또 가는 것이라.
그리해도 얼마 못가서 다시 또 안될 때는 그때는,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그거 모든 순서에는 '다시 존경하는 대상에게 자애를 방출하고' 나서, 그다음 것들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걸 내가 자꾸 얘기를 안 하는데 그건 반드시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내가 성냄을 일으키는 것들은 나에게 해를 준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성냄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지, 자신을 해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해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거라. 저 사람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는 성냄이 일어나서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는 거라. 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느냐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자기 죽을 짓을 하고 있는걸 내가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퍼뜩 마음을 먹고 어!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시 먹고 다시 그 사람에게 자애의 마음들을 가지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리해도 또 안된다, 그다음에는
업에 대해서 관찰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해코지를 하고 나쁜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이 지은 거는 그 사람이 가져가게 되는 것이지 내가 가져가는 것이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나는 저 사람에 대해서 자애수행을 한다면서 내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성냄을 일으킨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내가 가져가는 거라. 자기 거 자기가 챙기지도 못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 사람 것은 그 사람에게 남겨두고 내 것은 내가 만들어가야 되는 거라. 그럼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할 것은 지금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지 성냄이나 싫어하는 마음들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업의 법칙은 분명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사람이 나한테 해코지를 했든 어쨌든 간에 그 사람이 짓는 것은 그 사람이 신구의로 행한 것은 그 사람이 가져가게 되는 것이지 내가 가져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단지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일으키는 마음들은 내가 지은 거기 때문에 내가 가져가는 것들이라.
그래도 안 된다, 그러면 존경하는 스승이나 존경하는 대상에게 자애수행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경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스승의 공덕을 떠올려 보라’. 예를 들어서 ‘아, 스님 몸이 많이 아픈데도 이렇게 나와서 법문해주고 수행지도 해주니 얼마나 고맙노’ 그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이 금방 ‘아이고, 내가 그 공덕 받아가지고 저 사람한테 지금 내가 자애를 일으켜도 뭐라 할 판에 지금 성질내고 있느냐’ 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뭐냐하면 부처님 공덕에 대해서 회상하는 것. 아, 참 저 부처님이 없었으면 내가 이 좋은 거 어떻게 알고 어떻게 할 거냐는 거라. 너무 고맙다는 거라. 그 마음을 탁 일으키고 나면 아이고, 이까짓 거 이게 뭐라고 내가 못하겠느냐는 마음이 탁 일어난다는 거라. 그게 인제 스승의 공덕입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뭐냐면 그렇게 해도 안 된다,
그런데 저 싫은 대상이 과연 이생에서는 나하고 원수간인지는 몰라도 과거생부터 그랬을까? 요즘 그런 얘기하죠? 뭐라 그러더라? 과거의 원수가 부부로 태어났다나? 사랑했으니까 부부로 됐겠지. 그러니까 원수가 과거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보다고 지위 낮고 못난 사람이 과거에는 나보다도 훨씬 나를 먹여 살려주는 주인일 수도 있는 거고, 어떤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러면은 저 원수같은 저 사람도 과거의 나의 어머니 아버지 형재자매였다 그렇게 생각을 일으키면, 자기 얼굴에 침뱉는 일을 왜 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왜 해코지 해? 그걸 떠올리라는 거라. ‘과거에 저 사람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나하고 가장 사랑하는 동무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라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해서 풀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다음생에서 여러분하고 부부로 살아야 되는 거라. 원수로 지금 계속 있었으니까, 어찌 원수 같은 사람하고 다음생에서 같이 지내? 그럼 안돼. 빨리 풀어야 돼.
실제로 그렇진 않죠? 어떻게 원수가 부부로서 만나져?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거고.
그렇게 해도 안 된다 하면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자애수행이 어떤 이익이 있는가?
자애 수행하면 굉장히 많은 이익이 있습니다. 경전에는 보통 열한 가지 어떤 경우에는 열 가지 이렇게 배우고.
한번 해보십시오. 자애수행.
잘 때 자애수행 하면 잠 편안하게 잡니다. 악몽 안 꾸고. 그리고 내가 죽을 때 되어가지고 내 걱정 안합니다. 자애수행이 무르익을 것 같으면 내가 절대 나쁜 곳에 태어나지 않는다. 자애가 굉장히 많은 이익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이익들이 있는 이 자애수행을 하고 있는데, 그 이익들을 내가 지금 얻지를 못하고 있다 할 것 같으면 빨리 마음을 돌려줘야 됩니다.
이와 같이 여덟 아홉 가지로 분류를 해놓고 있습니다.
싫은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내가 자애가 형성이 안 됐다고 하더라도 그 싫은 대상에게도 자애수행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얘기는 뭐라?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성냄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거라. 성냄을 일으키는 자는, 그 사람은 곧바로 나는 깨달음 하고는 관계없이 나쁜 윤회를 받겠다 하고 선언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윤회를 인정하든 안 하든 윤회를 인정 안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로 다음 순간에 악한 결과들을 가져오겠다 하고 선언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자기 죽을 짓 하지마라는 거라.
자! 오늘은 시간이 늦었습니다.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멧따 수행의 이익 11가지 ]
1. 잠을 편안하게 자고,
2. 편안하게 깨어있고,
3. 악몽을 꾸지 않고,
4. 인간에게 사랑받고,
5.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서도 사랑받고,
6. 신들이 보호하고,
7. 불, 독약, 무기로 해침을 받지 않고,
8. 마음이 쉽게 집중되고,
9. 얼굴빛이 밝고,
10. 혼란 없이 죽고,
11. 출세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범천에 태어난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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