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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하는 수행(坐禪) (20150814)

담마마-마까 2021. 12. 29. 09:01

* 앉아서 하는 수행(坐禪) (20150814)

 

앉는 자세는 가부좌[그림ⓛ]나 반가부좌[그림②] 또는 반가부좌의 자세에서 위에 얹은 다리를 앞에 편안하게 내려놓아도 좋다[그림③]. 얼굴은 정면을 향한 상태에서 눈을 가볍게 감고, 입은 가볍게 다물고, 목과 등을 반듯이 펴고, 허리를 앞쪽으로 약간 밀고, 엉덩이를 약간 뒤로 빼면 안정된 자세가 된다.

 

왼손을 아랫배 앞의 발 위에,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놓고 오른손을 그 위에 가볍게 얹어 놓는다든지[그림③], 양손을 양쪽 무릎 위에 손바닥을 위로하여 가볍게 놓는 등[그림④],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편안한 곳에 손을 놓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한다. 앉아서 하는 수행을 위해 수행자는 어떤 형식에 얽매인 자세를 고수하기 보다는 스스로 편안하고 바른 자세로 앉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세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몸을 살펴보면 호흡에 의하여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으로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나오고 숨을 내쉬면 배가 들어간다. 수행자는 배가 나올 때 ‘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주시하고 배가 들어갈 때 ‘사라짐’ 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주시한다.

 

만약, 배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손바닥을 배에 가볍게 대고 주시한다. 그러면 배의 오르고 내리는 움직임이 손바닥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다. 어느 정도 배의 움직임이 명확해지면 손은 다시 원위치 시킨다.

 

이 과정에서 만약 수행자가 호흡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바꾸어 너무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혹은 너무 강하거나 약하게 하면 쉽게 피곤해질 수 있다. 뿐만아니라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어지러움 등, 여러 가지 부담을 느끼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호흡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의식을 가하지 말고 쉬어지는 대로 자연스럽게, 부드럽고 꾸준하게, 그리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배의 움직임이란 현상과 움직이는 과정에서 인지되고 느껴지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대상을 관찰할 때 이름(명칭)을 붙이는 것은 주시할 대상(현상)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모든 현상에 걸맞은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특히, 이 방법은 처음 수행을 시작한 수행자들의 산만한 마음을 주시의 대상으로 모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이름붙이든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 현상 자체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때때로 현상에 이름 붙이기가 애매할 때는 그 상태를 알고 있다는 뜻으로 ‘앎’, ‘앎’, ‘앎’이라고 알아차리기도 하고, 이름 붙이는 것이 알아차림에 방해가 될 때에는 이름 붙이지 않고 그 현상만을 주시한다.

 

수행에서 알아차림이란 몸과 마음에서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편견, 관념, 생각, 의도 없이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온 정신을 모아 인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마치 시냇가에 앉아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듯이 객관적인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즉,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알아차림으로 수행자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숨을 들이쉴 때 나오고, 내쉴 때 들어가는 배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나아가 배의 움직임이 저절로 길거나 또는 짧거나, 명료하거나 불분명하거나, 배가 일어나는 상태에서의 변화, 팽만감, 피부, 근육 등의 움직임, 또 배가 사라지는 상태에서의 여러 가지 변화, 등을 자세히 알아차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현상의 일어남과 바라보는 주시가 일치되어 정확하게 조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스스로 움직이는 배의 움직임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움직이는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작용이 밀착되어 동일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어렵지만 수행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단계를 거쳐 면밀한 알아차림을 얻게 될 것이다.

 

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면 몸의 여러 곳에서 통증, 가려움, 저림, 답답함, 경직, 열기, 피로 등, 다양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면 수행자는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에 알아차림하여 그 현상에 따라 ‘통증’, ‘통증’, ‘통증’ 또는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주시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머리가 뻣뻣함’, ‘얼굴이 간지러움’, ‘손이 아픔’, ‘허리가 아픔’, ‘다리가 저림’ 등으로 느낌과 현상이 발생한 부위까지 이름 붙이지 말고, 단지 발생한 느낌과 현상만을 ‘뻣뻣함’, ‘간지러움’, ‘아픔’, ‘저림’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처럼 그 상태만을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철저하게 알아차림하면 그 현상은 차차 사라지게 된다.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와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한다.

 

우리의 몸에는 항상 여러 가지 감각현상(느낌)이 일어난다. 하나가 사라지면 곧이어 또 다른 하나가 일어난다. 그중에 상기, 통증, 가려움, 답답함, 저림 등의 불쾌한 육체적 현상은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두드러진 것을 반드시 선택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인내는 수행의 필수적 요소이다. 혹시, 초보수행자가 어떠한 자극, 아픔, 열기, 차가움, 등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의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그러한 느낌에 대하여 의식할 만큼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현상을 알아차림하며 ‘나는 답답하다’, ‘나는 덥다’, ‘나는 아픔을 느낀다’, ‘나는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 이러한 불쾌감으로 인해 괴롭다’라는 등, ‘나’라는 생각(자아관념)을 가지고 현상을 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남에 그와 같이 복잡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그리고 또 다른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또 다른 ‘마음’이 연이어진 것뿐이다.

 

초보수행자들이 수행 중에 몸의 자세를 바꾸거나, 구부리고, 뻗고, 어떤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원인은 통증 때문이다. 수행자는 통증을 피할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인내심이 열반으로 이끈다’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통증이 생기더라도 움직이지 않고 자세를 바꾸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자세를 바꾸지 않고 통증을 인내하고 계속 주시한다면 통증의 실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한 통증이 일어나면 혐오, 싫어함, 회피 등의 충동이 일어나 심신을 긴장시킨다. 이때 용기 있는 수행자는 그 고통스러운 느낌을 피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으로 정면 대결한다. ‘나는 이 통증으로 인해 어떠한 일이 생길지라도 그 실상을 보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긴장을 풀되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통증이라는 현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을 일치시켜 ‘통증’, ‘통증’, ‘통증’하며 놓치지 않고 주시하면 통증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통증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다음 통증의 느낌은 있으나 아파하는 자가 없어 혐오나 회피하는 마음이 사라지며, 하나의 통증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생멸하는 흐름이 보이며, 아픔이 사라지고 반복하여 자극하는 현상만이 남아있다가 또 다른 현상을 보이면서 힘을 잃고 사라진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일어난 통증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통증이 사라지는 과정을 정확하게 보게 된다. 이처럼 사라짐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오랫동안 주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자세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 커지게 된다. 수행자는 이러한 욕망 또한 놓치지 말고 ‘욕망’, ‘욕망’, ‘욕망’ 하면서 알아차려야 한다. 욕망을 알아차린 이후에는 편안한 자세로 바꾸기 위해 움직이려는 ‘의도’를 주시한다. 그리고 실제로 자세를 바꿀 때에도 앉은 자세에서 팔을 뻗고, 다리를 잡고, 내리고,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실제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하면서 자세를 바꾼다.

 

수행자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이전에 행위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처음에는 의도를 보기가 어려우나 반복을 통해 점차 많은 의도를 찾게 될 것이다. 의도란 행동에 앞서 나타나는 정신적 작용으로 움직임에 앞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대체로, 우리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행동해 왔다. 하지만 수행자로써 우리는 자세를 바꿀 때에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의도와 함께 일어나는 움직임을 세밀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이러한 주시는 그의 집중력(samādhi)이 향상되고 수행이 무르익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의도와 행위의 인과관계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특정의 움직임이 그치고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오르내림을 알아차림한다.

 

가려움이란 현상이 있을 때에도 수행자에게는 긁기를 원하거나 자세를 바꾸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도 가려움을 없애고자 바로 긁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려운 현상과 긁고 싶은 욕망을 차례로 알아차림해야 한다. 긁고 싶으면 ‘긁고 싶음’, 편안하길 원하면 ‘편안하길 원함’으로 그 욕망의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하면서 가려움의 현상을 계속 알아차림하면 가려움은 사라진다. 수행자는 가려움의 사라짐을 면밀히 알아차린 후에 다시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림한다. 만약, 가려움이 정말로 사라지지 않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손으로 긁어서 이를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긁고 싶은 욕망을 주시한다.

 

그리고 가려움을 제거하고자 긁으려는 [손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긁고 싶음’이라는 욕망과 ‘긁으려 함’이라는 의도를 알아차림하고, 긁어 대는 모든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행동하려는 의도, 그에 수반되는 모든 느낌 [시원함, 개운함 등]까지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한다.

다시 말해서 손이 닿고, 밀고 당기고 할 때 먼저 행동하려는 ‘의도(마음)’, 긁는 ‘행위(몸)’, 손을 제 위치로 옮기는 등의 모든 미세한 동작까지 알아차리고 다시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으로 알아차림을 돌린다. 혹시 불쾌하여 나도 모르게 슬며시 자세를 바꿨다거나, 바꾸면서도 바꾸는 진행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바꾸고 나서야 바꾼 사실을 안다는 등,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자주 움직인다면, 그는 ‘깊은 마음집중(三昧, Samādhi)’을 이루지 못하여 현상의 실상을 확실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배의 움직임이 너무 미세하여 ‘일어남’과 ‘사라짐’이 잘 감지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몸이 앉아있음으로 오는 느낌과 엉덩이가 바닥과 닿음에서 오는 느낌으로 주시대상을 옮겨 ‘앉음’, ‘닿음’하면서 알아차림한다. 이때 배의 움직임이 살아나면 다시 알아차림 대상을 배로 옮겨 평소처럼 배의 움직임과 움직임에서 오는 느낌을 알아차림한다. 혹 ‘앉음’, ‘닿음’을 주시함에도 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앉음’을 알아차림한 후, 오른쪽 다리의 ‘닿음’을 알아차림하고 다음 엉덩이 ‘닿음’을 알아차림한 후 왼쪽다리의 ‘닿음’을 알아차림한다.

 

이런 방법으로 ‘닿음’이라는 알아차림 위치를 세 곳 또는 대여섯, 그리고 그 이상으로 바꾸어가면서 알아차림한다. 물론 아무 느낌이나 현상이 없는 곳을 [생각으로 정해놓고] 닿음의 대상으로 알아차림해서는 안 된다. 느낌이 있는 곳만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알아차림해야 한다. 이 방법은 배의 움직임이 명확하지 않을 때 뿐만 아니라 망상이 많거나 견디기 어려운 현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활용된다.

 

‘앉음’과 ‘닿음’에 대한 알아차림은 ‘일어남’ → ‘사라짐’ → ‘앉음’ → [엉덩이]‘닿음’ → ‘일어남’의 순서이다. 수행자는 ‘사라짐’을 관찰한 후에 [다음의 ‘일어남’이 일어나기 전에] ‘앉음’과 ‘닿음’을 주시한다. 사라짐과 일어남의 사이가 짧기 때문에 수행자는 매우 빠르게 알아차림의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민첩함이 요구되므로 수행자는 망상을 키울 틈이 없다. 하지만 머지않아 마음은 이 틈에 적응하여 또 다른 망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경우 수행자는 망상이 생겼음을 알고 ‘닿음’의 종류를 늘린다. ‘닿음’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늘어날 수 있다.

 

‘오른쪽 엉덩이 닿음’ → ‘왼쪽 엉덩이 닿음’ → ‘오른손 닿음’ → ‘왼손 닿음.’ ‘닿음’ 이 이와 같이 4종류로 늘어났을 때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알아차림한다.

‘일어남’ → ‘사라짐’ → ‘앉음’ → ‘오른쪽 엉덩이 닿음’ → ‘일어남’ → ‘사라짐’ → ‘앉음’ → ‘왼쪽 엉덩이 닿음’ → ‘일어남’ → ‘사라짐’ → ‘앉음’ → ‘오른손 닿음’ → ‘일어남’ → ‘사라짐’ → ‘앉음’ → ‘왼손 닿음’ → ‘일어남’ → ‘사라짐’ → ‘앉음’ → ‘오른쪽 엉덩이 닿음’ … 닿음의 종류는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수준에 따라 10가지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림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알아차림 대상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된다. 간혹 어떤 초보수행자는 그가 방황하고 다니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어디에도 방황하지 않았고, 항상 고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시 대상인 즐거움, 괴로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상념, 욕망, 증오, 등의 방황하는 마음상태를 알아차렸을 때, 수행자는 즉시 그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며 ‘망상’, ‘망상’, ‘망상’, 혹은 ‘잡념’, ‘잡념’, ‘잡념’ 등으로 그 상태에 따라 걸맞은 이름을 붙이면서 알아차림해야 한다.

 

이처럼 ‘망상’, ‘망상’, ‘망상’이라 알아차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망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으면 망상의 좀 더 구체적인 부분을 주시한다. 마음이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했을 경우 ‘만남’, 대화하는 상상을 할 경우에는 ‘대화함’, 무언가 계획을 할 경우 ‘계획함’, 무언가 인식했을 때는 ‘인식함’, 행복을 느낄 경우 ‘행복’, 이와 같이 기쁨, 슬픔, 실망 등등 모든 의식의 망상을 알아차림해야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집에 간다’, ‘[어느]장소에 도착함’, ‘산을 봄’, ‘사람을 봄’, ‘무엇인가를 가짐’ 등과 같이 집, 사람, 수풀, 산, 들판 또는 일하는 장소나 목적어에 이름(명칭)붙이지 말고 단지 ‘감’, ‘감’, ‘도착함’, ‘도착함’, ‘봄’, ‘봄’ 등의 동사형에 이름을 붙이면서 망상을 알아차림해야 한다.

 

망상은 수행의 장애가 아니라 알아차림해야 하는 또 다른 대상이다. 무슨 생각이 왜 일어났는가, 어디에서인가, 등 망상의 내용이 아니라 망상이 일어난 순간을 알아차려 생각하는 상태를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망상은 계속 주시하면 힘을 잃고 사라진다. 초보수행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망상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이다.

 

수행자는 망상에 빠져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 실망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또 다른 망상 속을 헤매게 된다. 수행자가 마음이 방황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끝없는 망상으로 탈선하여 헤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마음이 방황하는 동안에는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분명하게 주시되지 못한다.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세밀하게 주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은 또 다른 곳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망상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바로 ‘망상’, ‘망상’, ‘망상’이라 알아차림하여 망상을 제거해야한다. 망상이 사라지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알아차림대상을 돌려 주시해야한다. 그러다 또 어느 사이에 망상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면 다시 ‘망상’, ‘망상’, ‘망상’으로 망상했음을 확인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순간순간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림을 밀착시키면 망상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망상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망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알아차리는 마음과 알아차림 대상인 현상이 일치되면 대상은 더욱 선명해져 정확하게 구별된다. 이 순간 모든 망상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동안에 마음은 방황할 틈이 없다. 따라서 망상이 나타날 수 없으며 혹, 망상을 하였을 지라도 빠르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망상 외에도 수행 중에는 많은 장애가 나타난다. 그중에 졸음은 또 하나의 복병이다. 졸음이 올 때는 ‘졸음’, ‘졸음’, ‘졸음’이라고 이름 붙여 졸음을 알아차림한다. 졸음으로 고개가 처질 때는 ‘처짐’, 눈까풀이 무겁고 답답할 때에는 ‘무거움’, 눈이 쑤시고 아플 때는 ‘쑤심’ 또는 ‘아픔’ 등, 수행자는 이렇게 졸음에 관련된 모든 현상을 알아차림한다. 졸음이 심할 때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졸음’, ‘졸음’ 하면서 어느 틈에 잠에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을 챙겨 알아차림을 시작하지만 어느새 또 꾸벅 졸게 된다. 졸음은 안개처럼 밀려들어와 어느 사이에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잠에 취하게 만든다. 알아차리는 마음도 알아차림의 대상도 모두 잠에 취해 희미해진다. 희미한 대상과 희미한 알아차림이 만나 잠 속을 계속 헤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비능률적이다.

 

이처럼 잠자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이럴 때 수행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잠이 깬 알아차림과 잠이 깬 대상(현상)을 밀착시켜야 한다. 혹시 다시 졸다가 깨어나면 절대로 졸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또 신선한 알아차림과 신선한 대상을 밀착시킨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면 웬만한 졸음은 물리칠 수 있다. 수행 중에 알아차림과 대상이 정확하게 밀착되면 잠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졸음이 사라지고 다시 정신이 맑아지면 수행자는 ‘맑아짐’이라고 알아차림한 후, 다시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림한다. 그래도 졸려서 도저히 못 참겠으면 조용히 일어나 걸으며 하는 수행(坐禪)을 하고 잠이 달아나면 다시 앉아서 하는 수행(行禪)을 시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음에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이를 알아차려 ‘욕망’, ‘욕망’, ‘욕망’하면서 알아차림하고, 불만족이나 성냄이 일어나면 ‘성냄’, ‘성냄’, ‘성냄’하면서 알아차림하고, 마음이 흐려져 싫증나고, 권태를 느끼거나 무기력하여 의식이 명료하지 않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경각심을 가지고 ‘싫증’, ‘싫증’, ‘싫증’, ‘권태’, ‘권태’, ‘권태’ 또는 ‘지루함’, ‘지루함’, ‘지루함’으로, 불안정하고 걱정이 있을 때는 ‘불안함’, ‘불안함’, ‘불안함’으로, 이 수행이 과연 나에게 어떠한 이로움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는 ‘의심’, ‘의심’, ‘의심’하면서 그 마음 상태를 알아차림한다.

 

이러한 모든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그 마음 상태를 철저하게 알아차림하면 그 노력에 의하여 장애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특히 알아차리면서 알아차림 대상과 미세한 잡념이 함께 붙어 있을 때에는 ‘잡념’, ‘잡념’, ‘잡념’하면서 이를 더 세밀하게 밀착하여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알아차림과 그 대상(현상) 사이에는 잠시의 틈이 있어서도 안 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면밀한 알아차림이 밀착되어 이루어질 때 수행자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 가지 느낌과 현상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생멸의 현상이므로 어떤 느낌이든지 그 느낌에 따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해야 한다. 특히, 환상이나 영상이 나타날 때에도 놀라지 말고 그 현상이 보이는 대로 알아차림한다. 수행자는 이 수행의 목적이 특별한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소멸에 있음을 명심하고 어떠한 느낌이나 특별한 현상이 나타날지라도 철저하게 주시하여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잘못된 견해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알아차림의 중심대상이다. 따라서 몸과 마음에서 어떤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는 그 현상을 철저하게 알아차림하고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배로 돌아와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면밀하게 알아차림한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을 통해 알아차림이 많이 향상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남의 끝과 사라짐의 끝 사이에 중지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수행자는 이 중지의 부분을 더욱 자세히 보아야 한다. 또한, 수행이 더욱 진전하여 몸과 마음에 모든 현상이 사라지고 관찰할 대상이 없어 아는 마음만이 있을 때에는 그 ‘앎’ 자체만을 ‘앎’, ‘앎’, ‘앎’이라고 알아차림한다.

 

앉아서 하는 수행을 끝내고 일어설 때는 먼저 일어서려는 의도를 ‘일어서려 함’ 하면서 알아차림하고 일어서는 과정에 하나하나 걸맞은 이름을 붙여 손을 ‘듦’, 다리를 ‘폄’, [일어]‘섬’ 하면서 집중하여 알아차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