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 (20160304.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26. 09:00

https://youtu.be/BwMHHMVdS9w

*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 (20160304. 대구)

 

오늘은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교재는 교단 홈페이지에 몇년 전에 스님이 글을 올렸던 내용들입니다. 한자도 바꾼 적이 없어요.

 

대부분 글을 쓸 때 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틀리는 부분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먼저 찾아보게 됩니다. 그게 틀리는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이게 내용상으로 분명하게 결론이 나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 그러고 나서 이게 다른 사람들한테 혹시 위화감을 주는 부분이 없는가 하는 그런 것도 살펴보고, 그렇게 해가지고 글을 보통 씁니다.

 

그렇게 쓰다가 보면 어떨 때는 그걸로 인해 사람들이 언짢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가끔씩 그럴 때가 있어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바른 것이냐, 아니면 사람들 마음을 편안하게 놔주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그런 것이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게 맞을 거 같아요? (수행자 : 사실을 바르게 전해주는 것)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봤을 때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꼬삼비 비구들이 싸움이 있었을 때 부처님이 그랬거든. 사실은 꼬삼비 비구들의 싸움은 여러분들이 다 알죠? 지금도 스님은 부산에서는 화장실에 내 그릇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고 나면 물로 가지고 항상 뒷물을 해요. 물로 뒷물을 할 거 같으면 변이 그 물에 묻어나오잖아. 그러면 그 물을 변기에다가 싹 버려버리거든.

꼬삼비 비구들의 싸움은 그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거라. 그릇에다가 뒷물을 하고 나서 버리고 나와야 되는데, 이 스님이 급한 일이 있으면 깜빡 잊고 그걸 버리지 않고 나왔거든. 요즘말로 할 것 같으면 비데 썼는데 화장실 변기 물을 내리고 나와야 되는데 물을 안 내리고 그냥 나온 형태지. 뒤에 들어간 사람이 냄새가 나니까 “스님, 왜 그 물을 안 버리고 나왔느냐” 그렇게 하니까 그 스님이 “아, 내가 실수했다. 깜빡 잊어버리고 나왔다” 이렇게 한 건데, 그렇게 해가지고 어른들 스님들 간에는 그렇게 문제가 정리돼서, 잊어먹을 수도 있지, 사실은 별거 아닌데. 그런데 밑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그게 문제가 커지는 거라.

 

계율을 가르치는 스님이 “변기에 물을 안 버린 건 어쨌든 실수니까 참회해야 된다!” 한쪽에서는 “스님이 잘못했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그리고 큰스님들간에 얘기가 끝난 건데 네가 왜 그걸 건드리느냐? 넌 뭐 잘못한 거 없느냐?” 이렇게 해가지고 싸움이 두 패로 나뉘어가지고 벌어지게 된 거라.

 

그러니 부처님이 가서 그것을 조정하려고 그럽니다. “싸우지 마라” 부처님은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 하는 부분에 일체 얘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싸우지 마라. 화합하라” 그러면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을 알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냐? 아니면 너희들이 그렇게 사실을 알려고 하면서 흘려버린 시간 동안에 위대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냐?" 하고 얘길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사실을 알려고 허비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툼이 있으니까 항상 탐·진·치에 젖어있게 되는 거라. 그 시간 동안에는 깨달음으로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는 거라.

그럼 위대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부처님이 봤을 때는 의미없는 것을 가지고 다툼을 하고 있다는 거라. 차라리 그런 거보다는 서로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고 할 거 같으면 큰 문제되지 않는 거니까, 그러면서 지금 해야 될 것은 지금 위대한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하다 해서 위대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도 이 꼬삼비 스님들은 이해를 못 합니다. 사실을 밝혀야 된다는 거라.

 

그 일화를 떠올리면서 스님도 가끔씩 그럴 때도 있습니다. 이거 아무리 부처님이 한 얘기지만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사람들이 또 하나의 분쟁거리를 만들지 않을까? 또는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자신들의 견해하고 충돌하기 때문에 마음들이 나쁜 마음들을 먹지 않을까 하는 것들이 참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마음 먹었을 경우에는 다툼하기 바쁘고 또 그렇게 나쁜 마음을 먹은 것들이 또 다른 방향으로 튀기 때문에 그동안에는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면으로 봤을 때는 ‘그냥 너는 네식대로 살아라’ 그러고 사실을 안 밝히고 사실을 묻어두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할 때도 가끔 있습니다.

 

아마 한국에 테라와다 불교가 좀 많이 퍼져있고,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그런 것들이 서서히 바뀌어져 나가고 또 드러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가끔씩 그래도 바르게 알려줄 필요성은 있다 하는 것들이 어찌 보면 지금 스님이 처해있는 입장에서의 내 몫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끔은 하는 적도 있습니다.

가끔은 욕을 먹는 일이 있고 가끔은 또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들이 있고 하더라도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매를 맞는게 안 낫겠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씩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과연 이게 이 사람들 이 분들한테 현명한 방법일까? 그런다고 해서 크게 바뀔 것 같지도 않는데, 하는 생각을 할 때는 좀 글을 쓰는 것이 어떨 때는 조심스러워질 때가 사실은 있습니다.

왜 그럴까? 보통 여러분들이 다툼이 있을 때는 뭐 때문에 다툰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다툼이 없을 때는 뭐 때문에 다툼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까?

(수행자 : 자기하고 의견이 같을 때는 안 다투지만, 나와 다르다고 그럴 때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깨달음을 이룬 분들의 공통된 특색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에는

 

첫 번째, 잘 듣는 훈련들이 돼있습니다.

그것을 경청한다고 그러죠. 잘 듣는 훈련들이 돼있습니다. 듣기만 잘 해줘도 사실 문제의 반은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문제로 인해서 마음이 안 좋아져 있던 아니면 화가 나있든 아니면 욕심이 일어났든 간에 듣지를 않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만약에 다툼이 있을 때는 먼저 살펴봐야 되 는게 ‘아, 내가 지금 저 사람이 하고 있는 얘기들을 잘 듣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두 번째 부분, 공감해 주는 것.

뭔가 불편하고 괴롭고 또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뭔가 얘기하는데, “그래 니가 괴롭겠다!” 하고 공감을 해주어야 되는데 “그게 뭐 괴롭노?” 이래버리면 공감이 안돼버리는 거라. 그 얘기를 잘 들을 거 같으면 그 말에 대해서 먼저 수긍을 하게 된다는 거라. 니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걸 분명히 내가 인식을 해야 되는 거라. 그게 두 번째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잘 듣고 그 말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말들에 대해서 그 입장에 대해서 공감을 해줄 줄 아는 것, 그게 두 번째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내가 항상 이해당사자라고 하더라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들.

이게 이렇게 됐을 때 관계없는 사람들이 봤을 때 이걸 어떻게 볼 것인가? 별 쓸모 없는 것으로 보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이해당사자가 돼있으면 자기들은 쓸모없는 일이 아니고 굉장히 지금 현재는 중요한 일이 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깨달은 자들은 항상 그것들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자기가 이해당사자이든 아니든 간에.

그래서 부처님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거보다는 지금 해야 되는 일들이 뭔가 하는 것,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지금 해야 될 일이다 하고 그 얘기를 할 수가 있게끔 되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깨달음을 이룬 분들의 공통적인 것들이, 항상 마음에는 사무량심을 가지는 것. 자·비·희·사 사무량심을 항 상 지니고 있다는 거라.

 

이게 인제 불교적으로 잘 이해를 하고 실천 해가지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분의 말은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그분의 행위들이나 모든 것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상태가 돼있을 때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는 보면 여러 가지 다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그 다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꼬삼비 비구들의 분쟁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조그만 일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그래서 부처님 말을 안 듣는 경우들도 많았고, 또 부처님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도 있었고, 또 부처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어도 부처님을 떠난 분들도 있었고, 부처님을 욕한 사람들도 비방한 사람들도 있었고, 각각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이 그 당사자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평정함은 잃지 않는 상태라는 거라.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돼있다는 거라.

 

여러분도 설혹 다툼이 있을 때 그래도 이 다섯 가지만 기억을 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그래도 잘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경전에서 설한 것이 「다툼이 있을 때 다섯 가지 처방전」으로써 설명을 해놓은 겁니다.

 

그 밑에 보면, 그들은 말합니다. 다툴 때는,

 

1.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현재의 감정만을 말해라.

2.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지 마라.

3. 한 가지의 사건으로 다툴 때는 그 한 가지에서 여러 가지로 확대하지 마라.

4. 가족이나 친척을 들먹거리거나 끌어들이지 마라.

5. 잘못했으면 빨리 인정하라.

6. 합의하여 해결하였으면 다시는 그것을 끄집어내지 마라.

7. 이기려 하지 마라.

8. 삼가해야 할 말은 끝까지 삼가라.

9. 먼저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라.

10. 오래 싸우지 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그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들이 약간의 효과는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해결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뭔가 아주 매운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 혓바닥에 불이 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지금 빨리 물을 마시든지 해서 혓바닥이 화끈거리는 걸 해결을 해야 됩니다. 그게 급선무인 것이지 다른 것들이 급선무가 될 수가 없다는 거라. 혓바닥에 불이 났는데 지금 그걸 해결하지 않고 “이거 누가 이 음식 가져왔어?” 해가지고 성질낸다고 해가지고 혓바닥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문제의 본질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지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자꾸 다른 것들을 문제를 삼을려고 하고 또 그것으로써 해결할려고 할 것 같으면 해결은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너가 가져온 고추 때문에 맵다고 한참 다투고 싸우고 나면 혓바닥에 있는 매운 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을 거거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는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똑같은 것들로 또 문제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리고 그 사람하고 다투면서 실제로는 나한테 혓바닥에 불이 났는데 다른 사람하고도 불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라.

그래서 문제는 항상 본인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문제가 일어났으면 문제가 일어난 데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데서 그걸 찾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을 때 자신이 욕망에 빠졌는지 아니면 갈망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뭔가 집착하는 것이 없는지 그런 것들에 빠져있지 않을 거 같으면 또 그것을 잘 응시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 문제의 본질로부터 분명히 벗어나게 돼있습니다.

그 문제의 본질로부터 벗어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내 혓바닥에 화끈거리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고 ‘아 그게 요렇게 해가지고 사라지는구나’ 하는 것을 보고 나면은 그러고 나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야, 네가 가져온 고추가 되게 맵더라. 그래서 내가 되게 화끈거려서 한동안 혼났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웃음이 돼버리는데, 그렇지 않고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그 문제를 들먹일 거 같으면 싸움이 돼버리는 거라.

다툼이 있을 때는 어떤 경우든지 본인에게서 문제를 자꾸 찾을려고 해야 되지, 밖에서 문제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부처님의 이 처방전 다섯 가지의 원리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종교다 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게 지혜와 자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상·고·무아로써 문제를 보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지혜로운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상·고·무아로 본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 항상 자비의 마음이 없고 다른 대상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그것도 문제의 본질을 잘못 해결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는 항상 두 축과 같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지혜와 자비는 뭘 하기 위한 걸까?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겁니다.

지금 현재 해야 될 것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그것들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르다고 해서 바른 것들로써 딱 정립이 됐다, 그러면 바르다고 정립이 됐다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깨달음에 이르느냐는 거라. 그렇게 이르렀다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채로 외우고 한 사람들은 벌써 해탈하고 남았게.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그리고 모든 걸 다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해탈하고 동등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꼭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지는 못한다는 거라. 가끔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누구하고 말다툼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이겼기는 이겼는데 가슴에는 찝찝한 게 남아있습니다. 이겨가지고 왜 찝찝할까? 이긴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이긴 거보다도 차라리 그렇게 다툼이 있을 때 자기 자신하고 싸워가지고 이겼으면은 더 큰 즐거움이 있는데 ‘아, 내가 왜 이런 문제도 잘 뛰어넘어 갔구나’ 하고 스스로 확인하고 알게 될 거 같으면, 그거 다툼은 ‘아, 이게 별문제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뿐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는 더 큰 즐거움 더 큰 기쁨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의 처방전 >

 

1. 첫 번째가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자애(mettā, 멧따, 慈愛)를 실천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자애를 실천하려면 먼저 자애수행을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에게 자애수행을 먼저 합니까, 자신에게 먼저 합니까? (수행자 : 자신에게 먼저 합니다.) 자신에게 먼저 해야 되는 거라. 자신에게 먼저 하고, 그다음에 그 자애가 자신에게 충만했다 싶을 거 같으면 상대방에게도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먼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상대방에게 아무리 해봐야 그거는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지금부터 자애게송을 하나 알려드릴 테니까 적을 수 있는 사람은 한번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자애게송은 경전에 나온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까라니야멧따숫따 부터 멧따바와나, 멧따숫따 여러 가지 자애와 관계된 것들이 있습니다. 그거를 전부 통틀어 가지고 했습니다.

보통 보면 자애를 할 때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완전하게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조금 더 폭넓게 하는 법을 알려드릴테니까 한번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자신에게 하는 것

내가 행복하기를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고민과 괴로움이 서서히 사라지기를

성냄과 질투 미움의 감정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나에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성냄과 질투 미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대상은 항상 변하여 사라지는 것이라고 관찰할 수 있기를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장래에 집착해서 고민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기를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를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알아차리기를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확대해가지고 할 것 같으면 자애를 수행할 때 조금 더 수월해집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기를’ 하는 걸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할 때, 여기서는 누구보다 다툼이 있는 사람에게 자애를 실천하라 하고 돼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으로 대하기를

나의 마음에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나의 마음이 괴로운 사람과 만나도 인내할 수 있기를

나의 마음이 항상 평안하기를

나이 마음에 더러움이 서서히 사라지기를

내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 수 있기를

모든 현상에 대해서 집착함이 없기를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합니다.

그리고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생명은 없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던 생명은 없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나의 형제가 아니었던 생명은 없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나의 자식이 아니었던 생명은 없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나의 친구가 아니었던 생명은 없다.

 

하고 부처님은 얘기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

 

모든 삶들에 대해서

모든 생명이 나의 형제라고 생각하기를

모든 생명이 나와 평등하다고 생각하기를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생명에 항상 조화로움이 유지되기를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이렇게 하면 됩니다.

공기와 공기는 아무 마찰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자애를 보냅니다.

어느 누구와도 대립되지 않기를, 다툼이 없기를

 

물과 물은 항상 섞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어느 누구와도 조화롭기를

 

태양빛은 항상 어디든지 비추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나의 자애의 마음이 모든 이들에게 두루 미치기를

 

적어도 그렇게만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좀 더 단단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첫 번째 처방전입니다.

 

누구하고 다투었을 때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자애의 수행을 더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지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 돼. 자신에게 자애가 생기고 나서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마음에 적어도 자애의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그 사람과의 다툼은 그치게 돼버립니다. 그게 어떤 다툼이든 간에.

물론 틀린 부분에 대해서 얘기할 거 같으면 사실을 바로 얘기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그 사람을 미워한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을 배척할려고 하는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사실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사실이 더 발전돼나갈 거 같으면, 그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해야 될 일들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은 그 사람이 만약에 열 번 사실을 밝혀가지고 그 사람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뜬다고 할 것 같으면 열 번을 얘기해가지고 밝혀야 되겠지. 그런데 열 번 해도 밝혀지지 않는다 할 거 같으면 열 번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내가 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나는 진리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하게 됩니다.

 

은사스님이 그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고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애들이 떠드니까 (나지막하게) “조용히 해라” 5분 후에도 또 똑같은 톤으로 “조용히 해라” 우리 같으면 서너번 하면 조용히 하라든지, 고함을 지르든지, 아니면 아예 포기해버립니다. 쟤들은 그렇게 얘기해봐야 또 떠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은사스님의 마음에는 애들이 계속 적으로 얘기할 거 같으면 ‘아, 우리도 조용히 해야 된다’ 하는 사실을 인지를 하게 되는 거라. 애들은 조용히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들의 중요함을 모르는 거고, 그리고 수행할 때는 내가 조용히 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조용히 해라 하니까 지금 당장은 조용히 하는데 그다음에는 또 떠들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계속적으로 몇분 간격으로 똑같은 톤으로 얘기하니까 애들이 그때사 탁 아는 거라. ‘어, 우리가 여기서 떠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애들도 조용히 할 뿐아니라 애들도 안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나도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저렇게 흉내를 내봐야 되겠다 해가지고 앉아서 수행을 하는 거라.

 

열 번을 해가지고 가능하다고 하면 열 번을 합니다.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이라도 가능하다면 그렇게 얘기를 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다 싶은 경우에는 아예 조용히 해라 소리를 안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런다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아, 쟤들이 지금은 저렇게 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조용히 해라 소리를 안 하는 거라. 그냥 놔줘버리는 거라. 그런데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저런 데서 떠들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 알 수 있을 때는 한 번만 “조용히 해라” 합니다.

“조용히 해. 안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는 조용히 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수행해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론 그말 듣고 그 아이들이 조용히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그와 같은 상황이 됐을 때 ‘아, 우리가 조용히 했어야 되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그때는 자기가 떠들고 있었다는 거라. 그렇지만 조용히 해라 하고 말한 스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방해받지는 않는다는 거라.

사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것들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 자애를 실천하는 방법, 다툼이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딱 그거 먼저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보십시요.

나하고 자꾸 다툼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자애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됩니다.

저 사람이 진짜 자애가 있어가지고 내 틀린 것들을 자꾸 바로 잡아줄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것들을 자꾸 나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인지? 그럼 그 사람을 보면 압니다.

자애가 있는 경우에는 내가 틀린 것들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자기는 애써 하고 있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나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더 들을 필요가 없는 거라. 왜? 자애가 없는 상태에서 그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 깨닫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는 거라. 이거나 저거나.

 

그래서 그 밑에 그렇게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자애 행위를 할까’ 하는 것으로서 측정되어 집니다.」

여러분이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어리석음으로 인한 건지는 자신의 마음에 자애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왜 그런데 이렇게 자애를 자꾸 강조할까?

 

첫 번째,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마음에는 자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선설 어쩌고, 성악설 어쩌고 하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항상 길러지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자애를 기르지 않으면 내 마음에는 자애가 없어.

왜? 자애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선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요소입니다. 마음을 결정짓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라는 거라. 그 요소는 길러지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태어날 때부터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몸과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자애는 마음에는 원래는 자애가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언제든지 자애가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것보다도 더 비참한 것이 어디 있어? 그러면 자신의 마음에 자꾸 자애를 기르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스님이 스리랑카에 있을 때 쓰나미가 일어났었어요. 그걸 뭘 보고 알았느냐면 테레비에 보니까 쓰나미로 해가지고 사람이 죽어가지고 물에 둥둥둥둥 떠있는 게 보이더라고. 그런데 방송은 하고 그러는데 그게 너무나 안타까운 거라. 둥둥둥둥 떠있는 게. 저 부모들이나 저 자식들은 그래도 저 시체라도 건질려고 할 건데, 그런데 지금 누구도 그걸 건질려고 안 하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위험성이 있고, 또 그것들이 부패돼있고 하기 때문에 더럽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런데 나만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고 스리랑카에 있던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쓰나미 있고 나서 그 시체들을 처음에 누가 건졌냐면 전부 스님들이 가서 건졌습니다. 나도 가서 건졌고. 우선 지금 당장 해야 되는 것은 저 시체 건져내는 것들이라. 그 스님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한 이틀 그렇게 하니까 그때사 정부에서도 하고 외국에서도 지원도 하고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쓰나미 있고 나서 그 이틀 동안에 그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냥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있는 거라. 그런데 그것은 자애나 까루나의 마음이 아니라. 그것을 슬퍼하고 비참해 있는다고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때 내가 해야 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해야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자애나 연민심을 기를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부분들을 잘 봐야 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가지고 나에게 자애를 키울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해보라는 거라. 그냥 그것들을 보고 즐기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들이 좋습니다.

 

또 다르게 얘기할 것 같으면, 만약에 내가 저와 같은 문제에 빠졌을 경우에 저렇게 쓰나미에 내가 죽었을 때 다른 나와 관계되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보라는 거라. 그럼 그 사람들은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러울 거라. 그럼 그분들에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현재 자애를 행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해야 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에게 자애의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당연히 결과는 나쁜 결과들이 돌아온다는 거라. 나에게 자애의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항상 좋은 결과들을 받는다는 거라. 왜 나쁜 결과를 받는 것을 자꾸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밑에 보면은

「여러분들도 모든 이들이 도반이라는 마음을 길렀으면 합니다.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자애를 행하는 것이 자애의 기능입니다.

말로만 아니면 마음으로만 자애를 행한다고 해가지고 자애가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지녔으면 아까 쓰나미와 같이 실제로 그런 행위들이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2.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연민(karuņā, 까루나-, )을 실천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까루나입니다. 연민심입니다.

옛날에 태종사에 있을 때, 일본에 한번 간 적이 있어요. 그때 태종사에서 수국축제 기획하는 단계였는데 수국축제가 가장 잘되고 하는 곳이 일본이거든. 그래서 일본 가서 거기는 어떻게 하는가 보러 가야 되겠다 싶어가지고 일본에 갔는데, 내가 일본말은 모르거든. 영어는 할 줄 아는데, 그래서 수국축제 하는 곳이 어딘지 알려달라 그렇게 얘기했는데, 도쿄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인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도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설명을 못하는 거라. 그러니 무조건 저리로 가라 아니면 버스를 타고 어디 무슨 버스를 타가지고 어디에서 내려가지고 이렇게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물어봤어요. 걸어서 갈 수는 없느냐고 하니까 걸어서 가기는 좀 멀다고 그러는 거라. 그러면서 다들 가는 방법을 얘기를 해주는데, 나는 걸어가기를 원하고 그 사람들은 걸어가기에는 멀다 하고 그렇게 얘기해주는 거라. 안 그러면 아예 모른다고 피해버리는 거라.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까루나의 마음이 그렇게 많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옆에서 들은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도 영어를 전혀 못해요. 그런데도 자기가 알고 있다는 거라.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는 거라. 그러면서 그 먼 길을 그 사람은 자전거를 끌고 있었는데도 그 사람도 자전거를 안 타고 걸어서 그 먼 길을 한시간 너머 쭉 가가지고 거기로 길을 안내해 주더라고.

 

그래서 그분한테 물어봤어. 당신의 목적지가 여기였느냐? 하니까 아니라는 거라. 아닌데 하도 딱해가지고, 저 사람은 수국축제 하는 데를 가보고 싶어하는데 어느 누구도 거기에 데려다주지를 않으니까 자신은 다른 데 갈 일이 있는데도 그걸 팽개쳐놔놓고 자신이 그냥 그렇게 안내를 하는 거라.

그러니까 자전거를 타고 있었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씩 가버렸으면 더 빨리 갈 건데 나는 자전거가 없으니까 자기도 걸어서 가는 거라.

그걸 보고 ‘아, 까루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느낀 적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난처해 있고 슬픔에 빠져있을 거 같으면 그걸 위로해줄려고 그럽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거기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울면 자신도 같이 대성통곡하면서 울어주든지 그렇게 합니다. 물론 그리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립니다. 소통을 해줬기 때문에.

그걸 사람들이 그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심이 있었다고 착각을 하면 안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연민심이 있는 경우에는 그속에 빠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울어준다고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울어주면 되겠지. 그런데 울어주고도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할 거라? 그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는 거라.

 

까루나라고 하는 것은 아, 저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면 괴로워하는 일이 뭔지를 알아서 그것을 없애줄려고 하는 마음들을 까루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 네가 수국축제 가려고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럼 내가 수국축제하는데 데려다줄게’ 데려다주는 거라. 그게 까루나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새벽에 동이 트기 직전에 항상 큰 연민심의 마음을 지니고 세상 사람들을 바라봤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그날 갈 행선지를 정하는 거라. 만약에 부처님한테 그런 연민심의 마음이 없었다 그럴 것 같으면 부처님은 되지 못했을 거라. 그냥 아라한으로서 그 진리의 즐거움을 즐기고 누리다가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해탈하셨겠지.

연민심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연관이 돼있는 겁니다. 연민심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괴로움을 해결해줄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연민심이라고 한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됩니다.

 

혹시 정이 많은 사람 있어요? 정이 많은 사람이면 그 사람은 부처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연민심이 발동할 수 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정이 많은 사람인데 해탈하는 것은 전혀 관심 없다, 그럴 것 같으면 언젠가는 부처가 될 재질을 갖출지 몰라도 지금 현재는 안 일어나는 거라.

그런데 냉정한데 해탈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런 사람은 절대 부처가 될 수 없는 거라. 깨달음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아라한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게 더 좋을까? 두 개 다 있는 것이 좋지. 정도 있고, 그다음에 깨달을려고 노력도 하고. 그 두 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데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골라라 할 것 같으면 그래도 정이 있는 것이라는 거라. 그래도 정이 있으면 연민심은 지닐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이익만 자꾸 바라보고 수행을 하려고 한다든지, 자신의 이익만 바라보고 뭔가 앞으로 나아갈려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다른 이들을 공감하는 능력들은 자꾸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다툼이 있을 때는 까루나를 실천할 거 같으면 ‘아, 저 사람이 왜 괴로워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뭐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나에게 자꾸 바락바락 대들까?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다툼은 멈출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도 ‘나는 너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마음 먹어버릴 거 같으면 정은 없고 자기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라. 다툼은 항상 일어난다는 거라.

 

3.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평정(upekkhā, 우뻭카-, )을 실천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우뻭카, 평온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멧따의 마음보다도 더 넓은 것, 까루나의 마음보다도 더 넓은 것, 폭 넓은 것, 그러면서도 거기에 요동하지 않고 항상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뻭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법원의 판사가 원고나 피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그거는 쌍방의 증거라든지 의견이라든지 정리라든지 이런 것들을 조사해서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신의 마음에도 요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요동하지 않고 좌지우지되지 않는 평온함, 어찌 보면 냉정한 겁니다. 냉정함이 그게 우뻭카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뻭카만 있어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해서 4가지를 다 쌓아라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 부분은 다음에 사무량심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얘기할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뻭카의 마음을 기르더라도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4.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것을 사고의 대상(visaya)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네 번째, 시간이 없으니까 좀 빨리 하겠습니다.

그다음에 위사야(visaya)- 대상,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

여러분들 수행 대상은 어떤 겁니까? 안·이·비·설·신·의 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 눈과 귀와 코와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수행 대상은 눈과 귀와 코와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인식, 이것이 수행대상인 것이지 다른 것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 수행대상을 분명하게 해서 그 수행대상이 아닌 것들을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다툼이 있고 한다, 누가 화를 냈다, 그럴 것 같으면 화를 낸 사람이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화가 일어났을 때 그 소리가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소리들린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저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이 화를 냈다 해가지고 그 사람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행대상은 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것으로 인해서 화가 났다, 그것이 수행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대상이 아닌 것들을 대상으로써 할 거 같으면 다툼은 멈추지를 않는다는 거라. 대상을 분명하게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성을 내고 하는 사람들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변하는 현상일 뿐이다 하고 알게 될 것 같으면 다툼은 멈춥니다.

 

5.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각 생명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는 것(kammassakatā)이라는 법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깜맛사까따-(kammassakatā) 자기 자신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화를 낸 사람은 그건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받아야 되는 거라. 나쁜 마음을 먹었을 거 같으면 나쁜 결과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인 것이지 내가 아니라는 거라. 만약에 그 사람이 화를 낸 것에 대해서 내가 다시 화를 냈다고 할 것 같으면, 화를 낸 것은 나라. 그럼 그 결과는 내가 받게 되는 것인데, 나는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화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거라.

'업의 법칙'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더라도 다툼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 밑에 「사리뿟따 존자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양합니다.

1) 몸의 행위는 나쁘지만, 말할 때는 훌륭한 사람

2) 행위는 좋지만, 말은 더러운 사람

3) 행동도 말도 나쁘지만, 이따금 마음을 열고, 이따금 좋은 생각도 하는 사람

4) 행동도 말도 나쁘고, 조금도 마음을 열지 않고, 조금도 좋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5) 행위도 말도 좋고, 마음을 열고, 좋은 생각도 하는 사람」

 

몸과 말과 행위가 좋고 나쁜 것들 어떤 것에도 내가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할 줄 알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자유롭게 될 때 그것이 우리가 목표하는 것들로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마음속에서 미소짓는 사람이 다툼이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입니다.

그 처방전을 잘 여러분들이 기억해놓았다가 다툼이 있을 때 ‘아, 내가 자애가 있는가, 까루나가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뻭카의 마음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뭘 대상으로 지금 하고 있는가, 그리고 업의 법칙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자꾸 상기해가지고 그 다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게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툼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2등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틀렸다고 하더라고 다툼이 없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 생각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