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지혜도 삼매도 깨달음은 아니다 (20160212)

담마마-마까 2022. 2. 12. 09:10

* 지혜도 삼매도 깨달음은 아니다 (20160212)

 

■ 완전한 깨달음은 어떻게 얻는가? ■

 

부처님의 제일 제자는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만큼 부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수행자들이 고민이 있을 때나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 그들을 이끌어 해결책을 알려주는 분은 거의 사리뿟따 존자였던 것입니다.

 

어느 날 사리뿟따 존자에게 우빠와나라는 스님이 찾아와 이런 식으로 질문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여! 「지혜」(vijjā)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존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빠와나는 다음의 질문을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여! 「행」(caraṇa)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행」(caraṇa)이라는 것은 조금 설명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행」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방법」이지만, 일반적인 말로 하면 「도덕적인 삶의 방법」이라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구태여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것, 거짓말도 하지 않는 것, 더없이 올바른 도덕적인 삶의 방법, 계율을 제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말합니다.

또한 명상해서 집중력을 가지는 것, 사마디(삼매)로 불리는 상태를 완성시키는 일도 이 「행(caraṇa)」에 들어갑니다.

 

즉, 이때 우빠와나 스님이 물은 것은 여기까지를 포함한 내용인 마음이 선정상태가 되는 것을 물은 것입니다. 「지혜로 최종 해탈을 얻을 수 없다면, 선정으로는 최종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번째로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행, 이 2가지가 있으면 최종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대답은 역시 「얻을 수 없습니다!」 였습니다.

 

마지막으로 4번째의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행의 어느 쪽에도 관련되지 않고도 최종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역시 대답은 「얻을 수 없습니다!」 였습니다.

 

왜 이러한 질문을 했는가라고 하면, 불교에서 지혜와 행(삼매)이라고 하는 2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수행이라고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도 빠뜨릴 수 없는 불교의 2가지 기둥이라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젓가락」과 같은 것이기에 무엇인가를 잡으려면 2가지 모두 없으면 안 됩니다.

 

우빠와나 스님은 혼란해져 버렸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도 안 되고, 양쪽 모두가 있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양쪽 모두를 떠나서도 안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습니까? 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 지혜에 집착하지 않는 것 ■

 

「만약 내가 지혜(vijjâ)에 의해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면, 집착이 있어도 「깨달았다」라고 하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 됩니다.」…「지혜가 있다」 즉 「모든 것이 보이고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즉 「그 점이 지혜가 있는 자신이 있다」 상태인 것입니다. 자신이 있어서 그 자신에게 「지혜」가 있다고 오해합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무상」에 대한 지혜이므로 자신을 초월한 지혜입니다. 그런데도 「지혜가 있다」라고 할 경우에는 지혜에 집착하게 됩니다. 「지혜가 번쩍였다」라고 하는 것 자체는 깨달음이 아닌 것이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있어도 「나에게는 지혜가 있다」라고 하는 상태로 알면 거기에 얽매이고 집착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집착의 상태이며,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 사마디에 집착하지 않는 것 ■

 

2번째의 질문에 대한 설명도 같습니다. 도덕적인 삶의 방법을 살아간다면 혹은 사마디 수행으로 궁극적인 경지까지 도달했다면 그것이 깨달음일까하고 말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또한 「사마디를 완성했다」라고 하는 집착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면 집착이 있는 상태로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행」이라고 하면 수행하는 것, 좋은 행동을 하는 것 등을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행」에 대한 질문이므로 일반적인 수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지가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행」은 명상의 경험입니다. 명상하면 「사마디」라고 하는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 집중이 일어납니다. 불교에서는 정신 집중도 궁극적인 단계까지 능숙해지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마디 상태에는 8가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최초의 4단계에서는 몸과 마음의 완전한 희열감이 일어납니다. 5번째의 단계에서는 몸에 대한 의식이 완전하게 사라지고 마음만을 느끼게 됩니다. 8번째까지 도달하면 마음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력이 높아집니다. 집중력에는 더 이상의 성장은 없습니다. 8번째가 사마디의 최고정점입니다.

마음이 욕구와 분노로 더러워져 있으면 1번째의 사마디 조차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8번째가 되면 「자신이 있다」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더러움은 완전히 휴면 상태가 되어 있어서 「깨달음」이라고 착각할 우려가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는 사마디, 행(caraṇa)이 있다. 그러므로 깨달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해탈이 아니라 사마디라고 하는 상태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지혜(vijjā)와 행(caraṇa), 양쪽 모두를 완성하면 어떻게 되는가요?

그것도 같은 것으로, 「집착이 있으면서」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여기서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욕구나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매우 일반적인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8번째까지 사마디를 만들고 있는 수행자의 사마디에 대한 집착, 지혜에 대한 집착인 것입니다. 궁극적인 지혜, 궁극적인 단계의 사마디, 그 양쪽 모두가 있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있다」, 선정이 「있다」라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집착이며 깨달음은 아닙니다.

 

4번째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그러면 지혜(vijjā)도 행(caraṇa)도 없이 깨달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일반인도 모두 깨달아 있게 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 깨달음에는 주어가 없다 ■

 

그러고 나서 사리뿟따 존자는 설명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 사마디를 가져 철저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합니다. 자신의 해석도 논리도 일체 없습니다. 모든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 사라지는가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이 초월한 지혜와 초월한 집중력이 있는 사람만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초월한 지혜와 초월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대상을 관찰하고 있으면, 「최종 해탈은 일어난다!」…그것이 대답이었습니다.

 

언어를 초월한 지혜가 나타나도 그것은 해탈이 아닙니다. 모든 현상이 무상이며, 괴로움인 것, 무아인 것을 계속 느끼고 있어도, 정신적으로 침착하고 있어도, 그 자체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모든 것을 관찰해가면 마음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훈련되지 않은 원래의 마음은 「취한다」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수행하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마음이며, 순간순간의 작용이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이 상태에서는 「주어」가 없고, 「주어」없이 「해탈」 「열반」이라고 부릅니다.

 

● 이번 포인트

 

• 지혜도 사마디도 깨달음은 아닙니다.

• 지혜 없이, 사마디 없이,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사람이 해탈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 지혜도 사마디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도구」입니다.

• 해탈은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