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손함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20201205)
오늘은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보통 마음을 한번 관찰해보면 좋고 싫음이 먼저 일어날 겁니다.
좋고 싫고 하는 것들이 먼저 일어나고 나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분노도 일어나고 또 탐욕도 일어나고 또 오만한 것들도 일어나지고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지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좋고 싫음의 뒤에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잘 관찰하면 '이것도 별거 아니네' 하고 알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일어나지는 평범한 마음에서 누구든지 보통 일어나지는 그런 마음이라고 알면 됩니다. 많이 겪다 보면 많이 무덤덤해지죠. 그래서 그것들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이렇게 됩니다.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이거 뭐 별거 아니네' 하는 마음이 들면 그다음부터는 영향을 좀 덜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내고 욕심부리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는 크게 많이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은 잘 없습니다.
그런데 딱하나 그게 뭐냐면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어떤 마음들이 있을까?
'자신의 의견에 매달리는 것' '이 길로 가면 내가 깨달음에 이르겠는데' 아니면 자신의 수행에서 뭔가 새로운 현상을 봤다, '이게 뭘까?' 하는 것에 매달리든지, 아니면 이걸 남한테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든지, 그런 것들이 보통 일어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나라고 하는 것', 사실 나라고 하는 것은 생존욕구가 없어지고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사라져버리는데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둔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부분에 대한 얘기를 오늘은 간단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오늘이 올해 마지막 법문이죠. 앙굴리말라라고 잘 알죠? 몇 명을 죽였습니까? (999명) 어쨌든 뭐 99명이라고 하든 999명이라고 하든 많은 수를 죽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됐습니까? (예) 어째 가능할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려면 악한 마음이 가득했을 건데.
앙굴리말라는 아라한이 되고 나서도, 쉽게 얘기하면 여기 산에서 돌이 굴러떨어져요. 그게 떨어지는데 어디 떨어질지 모르잖아. 그런데 꼭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앙굴리말라한테 가서 떨어져요. 다른 사람한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그런 것도 아닌데 우연적으로 가는 것들도 그렇게 되는 경우들이 많았거든. 그마만큼 악업의 결과는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도 받아야 될 것은 받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앙굴리말라에서 자꾸 간과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왜 죽였을까? 사람을 왜 죽였을까? 그리고 그렇게 많은 수를 죽였는데도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렀을까?
여러분이 참 악한 일들 많이 하죠? 많이 합니다. 그런데도 왜 깨달음에 대한 가능성이 있을까? 악한 일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아이고, 도저히 이생에서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질러가지고 깨달음하고는 관계없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 왜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셨을까?
똑같은 경우입니다. 하나가 빠져있고, 안 있고의 차이입니다.
법이 여러분들보다도 위대하게 쌓아놔져서 그렇습니다.
법이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까? (예) 그럼 법이 위대하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잘못했으면 '아, 이건 법에 위반된 거네' 하고 생각을 하고 빨리 그러면 교정을 해야 되는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하거든. 생각으로는 법이 위대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걸 마음 깊이 법이 위대하다고 알고 있지를 못하다는 거라.
앙굴리말라는 오로지 본인이 해탈에 이른다는 일념하에서 거기에 이르는 것들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무조건 믿은 겁니다. 그 마음에는 뭐가 있겠어요?
겸손함! 법에 대한 겸손함!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
경전에도 보면 "겸허하고 겸손한 것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수행을 하고 불교를 배우고 법문을 듣고 해가지고 깨달음에 해탈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겸손함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불완전합니다. 아직은 완전한 단계에 이른 아라한이 아닐 경우에는 누구든지 다 불완전하다는 거라. 불완전하고 그리고 어떤 경우든지 충동에 인해서 뭔가를 행하게끔 됩니다. 또 삶에서는 그런 충동이 있어야만이 살아가게끔 됩니다. 그런 충동이 없으면 여러분이 돈 벌 필요도 없고 밥 먹을 이유도 없고 하긴 합니다. 그런 충동에 인해서 안·이·비·설·신·의에 자극을 받아서 살아갈려고 하는 마음도 생기는 거고. 이게 어떤 면에서는 좋은 부분으로 작용을 하는데 어떤 부분으로는 나쁘게 작용을 합니다.
「겸손함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좀 더 깨달음에 이르기는 수월해진다」 하는 사실을 항상 먼저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얘기하겠습니다.
첫 번째, 특히 요즘 같은 경우에는 코로나 시대라는 나쁜 조건이 있습니다.
나쁜 조건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꿋꿋하게 견디어 나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삶을 지탱해 나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포기해버리는 경우들도 있고, 그게 장사가 됐든 아니면 일상생활이 됐든, 뭐 어떤 경우든지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이 불완전하듯이 이 세상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라. 완전할 거 같으면 1+1은 2가 될 수 있는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1+1은 각각의 수로써 바뀔 수가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 인생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유들도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라고 해서 그것들에 굴복해서 져버릴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좋을 때는 살고 나쁠 때는 살지 않을 건가? 조건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조건만 온다는 보장을 못합니다.
수행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에게 수행시간이 항상 주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가기 바빠서 수행할 시간이 전혀 안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속에서 본인은 수행시간을 찾아야 됩니다.
걸어갈 때 수행시간을 만들든, 일을 하는 것들을 수행시간으로 만들든, 말을 하는 것들을 수행시간으로 만들든, 본인이 그 조건들을 아무리 나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극복해내고 그것에 승리를 해내야 되는 마음이 돼야 됩니다.
본인이 어떤 것들을 문제를 헤쳐나가게 됐을 때, 그 문제를 다른 사람한테 얘기할 때도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거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하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본인이 그 문제에 대해서 모르면 겸손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악조건을 견디고 이겨내서 승리하게 됐을 때, 본인에게는 겸손함이라고 하는 겸허함이라고 하는 것들이 하나 더 쌓이게끔 됩니다.
그걸 '위랑'이라고 빨리어로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사띠가 무르익기 전에는 자꾸 놓쳐버립니다. 사띠를 이어나가도 실제 생활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그냥 놓아버립니다. 마음이 불선한 쪽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가능성을 항상 열어둬버리게 됩니다. 나에게 나쁜 조건이 올 수 있는 길을 터주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조건들을 자꾸 탓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에서 본인이 그 조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들을 반드시 찾아야 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여러분들은 한 세 달 정도 스님 얼굴도 못 보고 법문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 수행들을 해야 됩니다. 해마다 보면 이때가 되면 사람들이 느슨해져버립니다. 수행을 안 해버리고, 또 사띠하는 것도 그냥 놓쳐버리고, 왜 그렇게 해마다 자꾸 반복을 할려고 그래요?
무지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자신의 의견에 매달리고 자아에 함몰되는 것들이라고 그럽니다. 본인이 좀 더 겸허해지고 겸손해지면 그러한 것들에 함몰되지를 않습니다. 자아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의견에 매달려서 그것들을 내세울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여러분들은 반드시 악조건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조건은 여러분들이 짓는 것에 따라서 달리 나타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경험으로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왕일 거 같으면 좀 더 수행하기 좋은 조건으로 만들고 좀 더 편안한 삶이 되도록 만들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조건들을 극복하는 힘들이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럴 때일수록 모든 것들을 사띠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날 수 있게끔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보통 안·이·비·설·신·의라고 그러죠.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그것들이 공격을 받고 있는 겁니다. 공격을 받아서 이긴 것이 과연 몇프로나 될까? 소리가 들리면 들린다고만 알아차린 게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스님 소리, 새소리, 좋은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이렇게 구분을 합니다. 귀만 그렇습니까? 눈도 그렇고 맛보는 것도 그렇고 꼭 마찬가집니다. 그냥 맛본다고만 알아차리고, 그냥 보인다고만 알아차리고, 과연 얼마나 될까?
왜 그렇게 안·이·비·설·신·의가 자극으로부터 오는 것들에 대해서 만날 정복당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게 눈이 남의 것이라서 그런 거라요? 자기 건데도 어떻게 자꾸 만날 져?
적이 쳐들어오면 그걸 방어해내고 물리쳐야 되듯이 외부로부터 오는 적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들은 여러분이 자꾸 물리치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이번 달에는 조금 더 이기는 퍼센테이지가 높도록 만들고, 다음 달에는 조금 더 높도록 만들고, 그래서 그것들을 정복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마음은 항상 그런 적으로부터 지기 때문에 더러워지고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본인이 본인의 안·이·비·설·신·의에 대해서 '아, 이번에는 분명히 이것을 정복했다, 이겼다'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라 하는 거라.
그걸 '위짓다 위낭'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육근으로부터 본인이 승리한 자, 그것들을 정복한 자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섯 가지가 다 안되면 하나씩 실천해보십시요. 이번에는 소리들리는 것만 집중적으로 보겠다, 어떤 소리든지 마음에서 물결치는 것이 없이, 동요함이 없이 그냥 소리들린다고만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보십시요.
맛보는 것들로부터 이기기 위해서 맛보는 것들 어떠한 것이든지 좋고 싫음 없이 그냥 맛보는 것으로 인식할려고 자꾸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러한 방법은 경전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냥 씹으면 씹는다고만 알아차리고, 맛이 느껴지면 맛이 느껴진다고만 알아차리도록 자꾸 하고, 삼키면 삼킨다고만 알아차리고,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 그것을 정복하지 못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발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을 뭉뚱그리지 마십시요.
잠이 오면 잠이 온다고 뭉뚱거려버리면 잠에 져버립니다. 그것들을 자꾸 세분화해가지고 실제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 느낌들을 관찰하도록 자꾸 만들면 그것들을 이기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보십시요.
집착하는 대상이 있든지, 아니면 어떠한 경우든지 번뇌가 일어나든지, 그리하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번 해보십시요. 마음이 안 움직인다고 해가지고 마음이 죽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있을 동안에는 마음은 항상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딱 중심을 잡아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조그만한 번뇌가 일어나든지 아니면 마음에 물결이 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하지는 않습니다.
부동의 마음이 될 때 본인은 생존욕이 뭔지를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수행의 크기는 생존욕의 크기와 반비례합니다.
여러분이 좀 더 수행을 많이 하고 수행의 경지가 높아졌다는 것은 마음이 그마만큼 움직이지 않고 딱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3가지를 점점 더 실천해나갈 때,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겸허함·겸손함으로 점점 다가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상장을 좀 전달할 분들이 있습니다.
스님이 이사장 그만둔 거 아시죠? 그래서 스님과 같이 그래도 교단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하신 사무장님과 재무 맡으신 분 두 분에게 거듭 고마워서 고마운 표시를 오늘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하나마님.
【 이 분은 불기 2560년 11월부터 2563년 11월까지 사단법) 한국 테라와다불교 재가운영위원회 회장으로서 한국 테라와다불교 재가운영위원회를 이끄신 공로를 치하하면서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불기 2563년 12월 5일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
그다음에 꾸살리님
【 이 분은 불기 2560년 11월부터 2563년 11월까지 사단법) 한국 테라와다불교 재가운영위원회 재무로서 한국 테라와다불교 재가운영위원회를 이끄신 공로를 치하하면서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불기 2563년 12월 5일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
두 분한테 박수 한번 크게 쳐주십시요.
고생했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8~2022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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