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붓다야나 선원 마지막 법회-오력의 균형 (20180720)
오늘은 대구 붓다야나선원 법회의 마지막 정기법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은 법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내준 프린트물은 전에 쭉 해왔던 칠각지, 칠각지 마지막 프린트물인데, 이 부분은 내일 서울법회 때 스님이 설명을 할 거니까 그거는 내일 음성법문을 듣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칠각지 끝나고 다섯 가지 장애 부분에 대한 걸 조금 자세하게 했으면 하는 그런 아쉬움은 좀 있습니다. 왜냐하면 칠각지하고 다섯 가지 장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지금 우뻭카 삼보장가 평정각지라고 하는 건데, 평정각지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우뻭까' 라는 것은 '우빠, 이카띠'가 합성어가 됩니다. 따라가면서 그것들을 고요한 상태에서 그대로 관찰한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들을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고요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평온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냉정한 상태"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죠. 되게 냉정하다고 이렇게 탁 자르듯이 착 잘라버리고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지극히 냉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를 물리치는 작용들을 하게 되고,
그리고 수행에서 또 대구에서 좀 못했던 경우는 오력에 대한 거,
다섯 가지가 균형이 잘 맞춰져야만이 이게 수행이 잘 돼 나가는데 그 오력에 대한 것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하나씩 분석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도 있었는데, 그 부분은 못했습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뭉뚱그려가지고 그냥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력 중에 뭐가 뛰어난지를 잘 모르죠. 뭐가 부족하고 뭐가 더 과하게 넘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법에 대해서 탐구하고 그대로 자꾸 실천할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좀 더 이게 진짜일까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면서 분석을 해보고 그것을 경전에 비춰봐 가지고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하는 것들 조사해 보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만의 견해들을 이렇게 확립해가지고 그 견해 외에는 다른 것들은 맞지 않다 하고 그것을 인제 경전을 근거해가지고 이렇게 풀어 쓰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각각 조금씩 조금씩 틀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면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만은 수행에서 균형이 안 맞아서 사실은 그렇습니다.
내가 조사하고 또 좀 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틀림없이 하는데 아, 이것이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해서 집착하는 것은 없긴 한데, 그것들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깐 부처님이나 담마나 상가에 대한 믿음들은 또 오히려 약해져버립니다.
처음에 저도 태국 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태국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이 영 맘에 안 들어. 그냥 하는 둥 마는 둥 이렇게 보이고 하니까 그때 인제 큰스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은 한국 사찰에 가면 일주문에 가면 사천왕이 있죠. 사천왕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어요?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인데 서로 마주보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밖을 보고 있습니다. 밖에서 오는 잡귀들 몰아내려고 하면서 절대 부처님을 향해서 보는 적이 없습니다. 사천왕은 한 번이라도 부처님한테 예배한 적이 있을까? 없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굉장히 쇼크를 받았어요.
내가 출가한 스님이기 때문에 좀 더 부처님 곁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다른 태국 스님보다도 더 열심히 수행하고 또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너는 그 안에 있지만 너는 한 번도 부처님에 대해서 예배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사천왕과 똑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그때 퍼뜩 든 느낌이 ‘아, 내가 수행해서 빨리 결과가 안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에 뭐가 부족했고 뭐가 과잉이었는가’ 하는 걸 그때 딱 눈치를 챘었습니다. 근데 아마 여러분들은 그 얘기해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은 뭐가 부족한지 뭐가 지나친질 잘 모릅니다.
사실은 그래서 지식이나 지혜 부분하고 믿음하고 부분이 균형이 맞아야 되는데, 이 균형이 안 맞으니까 한쪽이 계속 지나치다 보니까 이게 수행에서 발란스가 안 맞는 거라. 그래서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그런 계기는 한번 마련될 거라고 봅니다. 문구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스승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스스로를 깨닫든지 해서 퍼뜩 자신이 아, 이게 내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또 금방 캐치를 해내면은 그때 인제 바로 잡아나가는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스님이 그전에는 매달 사찰에서 지내면서 전기세 다른 사람들 평균 내가지고 아주 짬지게 딱 평균값만 딱 전기세 주고 살았었습니다. 근데 아닌 거야 나중에 보니까. 그 방식이 결코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또 하나가 뭐냐면 노력하는 것과 집중하는 것들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아파본 사람들은 이 균형이 뭐가 틀어져 있다는 것을 금방 캐치를 해버립니다. 어디 아픈 부위에 통증이 계속 오고 있단 말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더 한층 노력해가지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관찰해야 될까? 아니면 집중하는 힘을 더 키워가지고 그 대상에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보도록 해야 될까? 어디가 될 거 같애. 이것도 직접 사실은 자기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스님이 머리 아프고 이렇게 쉽게 말하면 핑 돌아가지고, 쓰러지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게 하도 인제 애를 먹이기 때문에 한번 그것들을 관찰한 적이 있어요. 한 번은 굉장히 머리에 통증이 많이 와요. 그래서 그것을 쭉 관찰하니깐 그냥 내 딴에는 평온한 마음에서 한다고 생각을 한 거라.
근데 지나치게 이걸 관찰하려고 하는 마음이 앞섰던 거지. 그러니까 더 머리가 아프고 이거는 머리가 아픈 정도가 아니고 그냥 이게 완전히 부서지는 것 같아요. 부서지는 정도면 괜찮은데 이 세포들이 전부 다 이렇게 분해돼가지고 그 낱낱이 그냥 다 나를 갖다 찌르는 느낌으로 다가와졌습니다.
그래서 그때 자꾸 퍼뜩 든 것이 뭐냐면 ‘아, 지금 내가 지나치게 이것을 관찰하려고 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분명히 무상한 성품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그 고통이 오히려 배가 되고 하지 이것이 가라앉질 않고 있는 거라. 그래서 노력하는 힘들을 탁 줄이면서 조금 더 강한 집중을 탁 했습니다.
그전에는 그냥 대상을 카니까 사마디(khaṇika-samādhi) 같이 그냥 변해가는 그대로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만 계속적으로 볼려고 했는데, 인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중간에 비어있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할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마음이 쉬는 포인트를 찾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니깐 어느 순간에 머리가 완전하게 그냥 클리어 해지는 느낌이 들게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는 쉽게 말하면 고통스러운 느낌이 온다든지 이런 것들이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력과 집중도 직접 본인이 수행해가지고 이것을 균형을 잡는 포인트를 분명하게 찾지 않으면 사실은 힘이 듭니다. 누가 가르쳐줄 수는 있습니다.
“너는 지나치게 지금 노력하고 있으니까 지나치게 관찰할려던 마음들을 버려라” 알기는 아는데 그것을 실천하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너는 집중해 가지고 뭔가 새로운 대상이 자꾸 일어나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자꾸 과하기 때문에 집중하는 힘들을 줄여라” 알기는 아는데 그것을 고치기는 진짜 힘이 듭니다.
근데 그것들이 고쳐지는 때가 뭐냐하면 몸의 아픈 부분이 지병 같은 것들 특히 인제 혈액 계통에서 일어나는 것들 소화기 계통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런 것들은 관찰하기 굉장히 수월합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딱 포인트를 자기가 잡아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면은 그것이 바탕이 되가지고 일상 수행할 때도 이것을 균형을 탁 잡아나가게 되는 거라.
그러면 금방 본인이 원하는 거 삼매에 들려면 삼매에 들 수가 있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에서 어떠한 집착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면 알아차릴 수가 있고 하는 것들을 본인이 캐치를 해나갈 수가 있는 거라.
물론 사람에 따라서 수행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강도가 각각 틀립니다. 그래서 인제 알아차림 겨우 인제 발걸음 떼는 사람이 이걸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발걸음을 뗀다고 하더라도 균형 잡는 것은 일순간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포인트를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나면은 그다음부터는 수행이 굉장히 발전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대구 붓다야나 선원이 개원을 하고 나서 벌써 지금 3년 8개월, 어쨌든 4년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쭉 이어왔습니다. 매주 법회를 하고 매주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지금 한번 여러분들이 돌아보면은 그래도 ‘이 법을 만난 것이 참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아니면 ‘나에게는 참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나마 그래도 성공을 한 겁니다.
거기다가 부처님 가르침이 과연 어떤 것이고, 또 내가 따라야 되는 것이 뭐고 따라가지 말아야 될 것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또 알고 있다고 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또 그것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또 수행해서 탐진치가 일어날 때 어떻게 탐진치를 갖다가 잠재우게 되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사라지는 것들을 보게 됐는지, 수행해서 밖에서 오는 자극이든 안에서 오는 자극이든 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훨씬 용이하게 돼나간다 할 거 같으면 그것도 나름 성공한 거라.
그래도 그런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얻었다 할 것 같으면 스님으로서는 그래도 대구 법회는 참 잘했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겁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빨리 일깨워주고 그것들을 할 수 있는 여건들을 조성해 주는 것이지, 직접 여러분들 마음속에 들어가 가지고 조종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은 여러분이 실천하는 것들을 내가 도와줄 수 있다든지 그럴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스님은 탁 마치고 나면 땡 하고 나면 1분도 안 있고 그냥 쌩 가버리는 거라.
누가 와서 문답하면 문답만 딱 받아주고 나서는 그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인지 어디 사는 사람인지 가정 형편이 어떤 게 문제가 있어 갖고 한 건지 뭐 하는지 일절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으니까, 좀 인간적인 관계를 전혀 안 맺을라고 하니깐 그런 부분이 섭섭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근데 한편으로는 스님이 이때까지 쭉 해왔던 방식이 여기라고 특별하게 내가 뭐 여기 도반들한테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사항도 못 되는 거고, 또 그 방식이 출가한 스님으로서는 아주 홀가분합니다.
오늘 탁 털고 일어나면 어 내가 대구 법회했었나? 여러분들은 섭섭할지는 몰라도, 그게 스님들이 가져야 되는 마음입니다. 물론 또 인연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가지고 스님 법문듣고 수행한다 할 것 같으면 또 거기에 맞게끔 지도를 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내가 일일이 전화해 가면서 왜 법회 안 오느냐 뭐 어쩌느냐 이렇게 했을 것 같으면 아마 여러분들한테 전달되는 것들도 더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런 섭섭한 부분이 있었으면 스님을 조금 용서를 해주고 또 그게 정 마음에 안 든다면 그런 스님을 찾으면 돼.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 같은 스님도 있어야만이 또 다른 또 친절하고 한 스님들도 표가 나고 드러나지고 하는 거니깐 그렇게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쨌든 4년 가까이 이 선원을 유지하고 끌어오면서 또 고생한 우리 말리까님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박수 한번 칩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선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협조하고 또 따라주지 않았으면 이 선원은 아마 일찍이 문을 닫아야 했을 겁니다. 여러분들 각자 각자가 다들 승리자입니다. 승리자 본인과 도반들한테 박수 한번 칩시다.
어쨌든 이제 마치는 시간이기 때문에 다들 고생하셨고,
스님은 스님 소임을 또 다 하기 위해서 또 웅촌으로 돌아갑니다. 또 거기에서 또 새로운 인연들이 만나지게 되고 지금 벌써 또 여기 안 한다 하니까 어디서 또 해달라는 데도 또 있어. 근데 지금은 다 거절을 하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또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런 상황에 맞게끔 또 법을 펼칠 거니까,
여러분들 각자는 조금 멀리 떨어지고 가 자주 보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 부처님 가르침 만난 것들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수행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조금더 자꾸 바뀌어 나가면서 부처님 가족같이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지고 그런 분들이 되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 240704. 위의 법문 녹취내용을 추가함.
위 법문을 녹취, 필사해주신 사깜마님께 감사드립니다. _()_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위 카테고리의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대구 붓다야나 선원에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3년 3월 16일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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