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0년 일상수행법문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 보살편 dhamma32 (2003)

담마마-마까 2024. 10. 27. 16:24

https://youtu.be/df4kFd3C4LM?si=ROyIgWAs9QaeXSXj

 

*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 보편 dhamma32 (2003)

 

7. 보살편

붓다의 세 가지 몸(삼신), 붓다의 공적, 붓다의 가르침의 세 부분(삼장)

불교는 성스러운 진리 그것일 뿐이다

불교는 당시 인도의 다른 가르침과 같은가, 다른가

중도와 팔정성도

수행의 3원칙

 

자, 그다음 장 한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30페이지죠. 오늘부터 할 장이죠. 조금 더 하다가 쉽시다 이. 오늘 아직 시작도 못 했습니다 이.

보살, 윤보살 그러지? 장 보살 그러지? 여기 말하는 보살 하고 우리가 말하는 윤보살 하고 같은 겁니까? 예? 같은 거라 틀린 거라? 똑같습니까?

그럼 여기 보살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수행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윤보살 그래? 확신합니까? 그러면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수행의 과정에 있는 남자들은 보살 아니네 그럼? 그럼 보살이라 안 하고 그래서 생겨난 게 '처사, 거사' 그러는 거라?

그래서 인제 애초에 썼던 보살의 개념하고 지금의 그 보살의 개념하고 좀 틀리죠? 지금은 그냥 여자 불교도들을 통칭하는 말로 보살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애초에는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죠?

 

보살(菩薩)의 원어가 뭡니까? 보디삿따(Bodhisatta)라고 그러죠!

보디삿따 빨리어로, 보리 살타(菩提薩埵), 보리살타 그러잖아요.

이 ‘보디(Bodhi)’라고 하는 게 뭡니까? 보리수나무를 뭐라 그래요? '마하 보디(mahā bodhi)' 그러죠. 거기도 보디 나오죠.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 할 때 '삼보디' 그것도 보디 나오죠. 보디란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보디가 뭡니까? 그러니까 '보리'입니다. 우리 그 보디를 갖다가 음사한 게 보리라.

보리가 뭡니까? '깨달음' 아닙니까!

'삿따(satta)'는 뭡니까? "삿따 삽베 수키 호뚜" 할 때 삽베 삿따(sabbe satta) 할 때 뭡니까? '삿따 - 중생' 다 그렇게 쉬운 단어들이라.

'보디삿따(Bodhisatta)' 할 것 같으면 뭔 뜻입니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중생'이라는 뜻이라. 쉽게 말하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존재, 살아있는 생명들 그걸 보살이라 하는 거라. 거 미리 다 써놨네.

 

근데 이제 보통 통칭해 가지고 보살이라 할 경우에는 처음에는 애초에 어떤 뜻으로 써 있어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과정들 여러 가지 선근 공덕을 쌓아왔다고 그러죠. 무수한 생 동안, 10가지 선근공덕을 쌓아오는 과정 동안 있어 왔던 그 부처님 과거생의 모습들을 보살(菩薩)이라고 통칭해서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보살일 때는 새로도 태어나기도 했고 남자로 태어나기도 했고 천신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여러 모습으로 태어났단 말이라. 쉽게 말하면 그런 모든 부류들이 다 보살에 해당이 되는 거라.

그러니까 "보살(菩薩)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수행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하고 정의를 내리게 되는 거라. 이게 인제 뒤로 후대로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절돼 나가죠.

 

맨 첫 마디에 보면 상좌부의 불교인들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왜 그래요?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님이 돼야 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왜 그러는 거라?

일반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을 갖다가 부류로서 나타내면 어떻게 부류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뭐래요? 성문, 연각, 독지불 이런 얘기들 하죠. 성문하고 연각하고 같은 겁니까? 틀리죠! 독지불도 틀리죠! 아라한도 틀리고! 그러면 성문이나 연각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아닙니까? 다 깨달음에 이른 분들이죠. 그리고 또 붓다도 있고, 이런 여러 형태들이 있다고.

그럼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부처님만 얘기하는 게 아니죠?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이 돼야 될 이유는 없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예를 들면 누구나 다 공부를 해서 요즘, 우리 정 선생님한테는 미안하지만은 의사가 되면 돈 많이 번다 하니깐 다 의사 된다고 하면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다 의사가 되고 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누가 환자 할 거라? 환자 할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돼? 의사가 무슨 소용 있어?

의사는 지금 어떻게 됩니까? 그중에서 그래도 열심히 자기가 불굴의 노력으로서 공부한 사람들이 의사 되는 거라. 농땡이 치고 할 것 같으면 의사 될려 해도 돼도 안 해. 그와 마찬가지라. 누구든지 아프다 해가지고 아프기 싫다 해가지고 의사 될 수 없는 거하고 마찬가지라.

 

마찬가지로 붓다(buddha)라고 하는 것이 있다. 조금 전에 의사 얘기를 했으니까 약방문이 여기 있단 말이라. 태종약국 이렇게 차려놨다, 이 속에는 태종약국 안에는 갖가지 약이 있단 말이라. 내가 배탈 설사가 났어, 그러면 지사제 가서 찾으면 돼. 그리고 내가 뭐 어디 다른 병이 있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약만 찾아 먹으면 된단 말이라.

근데 아무리 태종약국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태종약국만 본다고 해가지고 내 병이 나아요? 안 낫는 거라 그거는. 태종약국하고 내 병하고는 별개의 문제라. 내가 낫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약을 가져가서 먹어야 되는 거라.

그러니 각각의 사람들이 꼭 깨달음에 이를 이유는, 그게 아니고 부처님이 돼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기 상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아, 내가 과거생부터 지어온 것이 남에게 베푸는 것이 부족하다’ 지금 괜히 남의 거 보면 욕심내려고 하고 자꾸 집착할려고 하고 할 것 같으면 그런 게 부족한 거라. 지금 현재 부족한 거니까. 그러니까 ‘아 이걸 내가 더욱더 개발시켜야 되겠다’ 해서 그걸 개발시키는 걸 중점적으로 하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라.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물론 목표가 될지언정 부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내가 이런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한 10가지 선근 공덕을 성취한 부처님과 같은 그런 위대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는 걸 아는 거라. 근데 지금 현재 보니까 이마만큼 부족하게 돼있어. 그래서 그 부분을 스스로 메꾸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아라한이나 성문 연각이나 벽지불 같은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는 거라. 그렇다고 부처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게 인제 자꾸 그런 사상이 변질돼 나가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나는 깨달음을 못 이루어도 다른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겠다" 그런 사상으로 바뀌어져 나간다는 거라. 그러니까 "자신의 열반을 미루고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 우리나라에 그런 거 많죠? 가능합니까?

사과 맛을 본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 사과가 맛있다는 걸 안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똑같은 사과가 나타났을 때는 그걸 먹을려고 해. 내가 불환과까지 이르렀다, 그러면 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데 그다음은 아라한과에 이른다는 걸 아는데, 그 아라한과를 안 이루고 내가 열반을 미루고 다른 사람 “니 불환과까지 온나” 하고 끄집어 당기는 사람이 있겠어요?
...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을 쭉 해나가다 보니까 요마만큼 요마만큼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데, 그 성장하는 길을 갖다가 확신이 들어서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갖다가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길을 계속 따라갈려고 하지, 난 여기서 중단하고 있다가 “니 이만큼 온나” 하고 끌어당기겠어, 사람들을?

그건 천만의 말씀이라.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러니 "내 성불을 늦추더라도 다른 사람은 성불에 이르게 하겠다" 나도 성불을 못 이루면서 다른 사람을 이르게 할 수가 없는 거라. 가는 길을 제시해 줄 수가 없으니까. 성불이, 깨달음의 맛을 봐야만이 그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수가 있는 거라. 그러니 성불을 늦추고 다른 사람을 성불을 하게 하겠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언어도단인 거라.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보살들을 신앙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더더욱 더 어리석은 것이 돼 버리는 거라.

그래서 인제 보살의 개념이 이제 여러 가지로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어져 나옵니다.

 

어쨌든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우리들 각자 각자는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해나가는 보살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남 의식하지 말고 내가 가는 길을 오롯이 좇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이.

 

그다음 붓다의 세 가지 몸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 이렇게 3가지를 들먹여 놨습니다.

담마 까야(dhamma kāya), 삼보가 까야(sambogha kāya), 님마나 까야(nimmāna kāya), 그러니까 세 번째 화신 부분은 니르마나 까야(nimmana kāya)라고 되어 있는데, 이거는 잘못된 겁니다. 이는 빨리어가 아니고 산스크리트입니다. 니르마나라고 하는 거는, 님마나입니다. 님마(nimmā) 할 때 마mā 다음에 장음입니다. 그래서 이 장음 표기가 안 된 겁니다. 님마-나 까-야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응신·화신이라고 그럽니다. 어쨌든 이렇게 3가지로 설정해 놓은 게 삼신(三身) 신앙입니다.

 

근본 불교에서 이렇게 3신 신앙이 있었겠습니까? 예? 근데 여기 나와 있잖아. 빨리어로 이렇게 나와 있잖아. 근본불교에서는 삼신(三身) 신앙이 있은 게 아니고, 이신(二身) 신앙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신불과 화신-응신불 신앙은 있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났든 안 태어났든 진리는 존재를 하는 겁니다. 맞습니까? 그 진리 자체를 갖다가 법신불로 보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서 그 진리를 체득한 몸, 몸 자체를 갖다가 화신-응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몸이냐, 진리의 몸이냐에 따라서 법신과 응신으로써 그렇게 구분해 놨던 것은 있습니다.

 

근데 이 보신은 어디서 생겨난 거라? 보신. 조금 미흡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화신이 부처님 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부처님 몸은 어떻게 했어요? 아프기도 하고 또 병에 걸리기도 하고 늙어가기도 했단 말이라. 무슨 진리가 이렇게, 쉽게 말하면 아프기도 하고 늙어가기도 할 것 같으면 좀 체면은 안 서거든. 그러니까 몸을 설정하더라도 변함이 없는 몸, 진리 자체의 몸으로서 육체적인 몸을 상정해 놓은 것이 뭐냐면 이 바로 보신이라. 그래서 인제 삼신 신앙이 생겨난 겁니다.

대승불교에서 생긴 겁니다이. 보신은.

 

이렇게 하고 나니까 조금 뭔가 이상하거든. 불교가 망해 나가면서 인도에서 바라문교가 힌두교로 바뀌었습니다. 힌두교로 바뀌면서 힌두교에는 삼신신앙이 있습니다. '시바, 비쉬누, 브라흐마' 라고 하는 삼신신앙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한다는 것을 각각의 ... 해놨던 겁니다. 힌두교가 불교를 갖다가 흡수하면서 불교의 체계 자체를 새롭게 정립을 한 게 이 바로 삼신 신앙이라는 거라. 그래서 '법신, 보신, 화신'으로써 정리해 놨던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보신 부분이 약하거든. 그래서 교리에 편입시켜 놓은 것이 어떤 것들이냐 하면 부처님이 도솔천에 가서 천신들을 위해서 아비담마를 설했다. 부처님하고 똑같이 생긴 모습 똑같은 말로 하는 형태를 띤 보신을 갖다가 천상에 가서 아비담마를 설했다 하고 상정을 하는 거라. 그리하니까 말이 되죠. 진리를 설한 그 몸은 변하지 않는 몸이거든. 진리를 설하는 것은 육체적인 몸이 설해야 되기 때문에.

 

빨리어의 경전에 어디를 보더라도 이 부분은 없습니다. 천신들이 부처님한테 내려와서 절하고 법을 청해 들었다는 얘기는 많이 있어도, 부처님이 저기 도솔천 가서 법을 설했다는 부분은 없습니다.

근데 삼신신앙이 정립이 되고 나니까, 보신 부분이 아무래도 약하니까 이런 형태들이 불교의 내용으로서 경전 속에 포함이 되게 되는 거라.

그렇게 불교가 조금씩 바뀌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붓다의 공적 부분 하겠습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 그 부처님은 어떤 공적, 우리에게 남겨준 것들이 무언가 하는 부분입니다.

붓다는 무명의 어둠을 몰아내고, 고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무명의 어두움을 몰아냈다, 무명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무명의 어둠이라는 건 뭘 얘기하는 거라? 이 보궁이 어둠침침하니까 촛불 켜놓으니까 무명의 어둠을 몰아낸 거라? 진리를 무조건 설하기만 해서 무명의 어둠을 몰아낸 거라? 뭘 무명이라고 그런 거라?

 

그때 당시에 인도의 상황들을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인도의 상황에서는 범신(梵身)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죠. 신이 있어서 신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또 좌지우지하고 또 그런 신에게 귀의하고 또 예를 올리는 거. 그래서 우리도 그런 신에게 귀의하고 예를 올림으로 해서 내 자체가 곧 범신이 되도록 하는 거,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나는 작은 우주고 범신은 큰 우주다" 그래서 그런 우주가 합일되는 지점에서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나타나지고 한다고 들어왔지 않습니까? 불교적인 것 같아도 사실은 그건 불교적인 게 아니고 인도 당시의 사상적인 흐름입니다.

그런 범신 사상을 과감하게 부정인 게 바로 무명의 어둠을 몰아내는 경우가 됩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고 부르짖었던 겁니다.

 

또 뭐가 있겠어요? "니는 천하게 태어났으니까 천민의 신분으로 있어야 되고, 나는 바라문으로 태어났으니까 경도 읽을 수 있고 호의호식 할 수 있다."

계급 의식, 그런 불평등한 계급제도를 타파하려고 노력했다는 겁니다. 그래 이게 중요한 일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때 당시에는 어떤 면에서 혁신적인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저 북한이 주체사상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보고 북한에 가서 쉽게 말하면 “주체사상 틀렸다” 이렇게 얘기할 사람 있습니까? 맞아 죽습니다. 맞아 죽어.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했느냐 하면 바로 그런 것들이라. 인도 당시에는 전부 그런 사상들이라. “그거 아니다” 했다가는 맞아 죽어. 그런데도 과감하게 얘기를 했다는 거라.

 

그래서 이 뒤의 부분은 34페이지 보면 전쟁터에서 코끼리가 자기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참아내는 것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욕이나 불친절한 말을 참아낼 것이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질책들 위험들을 갖다 감수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왜 그렇겠어요? 그것이 바른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좇아서 출가를 하게 된 것이고, 진리를 체득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 진리 따라 살아가는 거라. 그래서 그런 진리를 체득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서 틀린 것은 틀리다 하고 얘기할 수 있었다는 거라.

 

또 부처님이 해나갔던 것 중에 보통 우리는 부처님을 뭐라고 그럽니까?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길을 가시다가 길에서 열반하신 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얘기는 뭡니까? 무조건 부처님이 뭐 길에서만 지내서 그런 얘기를 합니까? 길이라고 하는 건 사람이 다니는 곳이라. 사람이 또 모이는 곳이고.

다시 말해서 적극적인 현실 참여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예가 어디서 나오냐면 단편적으로 앙굴리말라라고 있죠. 사람들은 부처님한테 다 “가지마라”고 그래. 사람을 죽여가지고, 이거 뭐라고 그래요 이거? 손가락 잘라가지고 가는 미치광이한테 누가 가려고 하겠어요? 누가 그걸 제도하려고 하겠어? 다 그리 만류해도 부처님은 가잖아. 가서 앙굴리말라 제도해가지고 오거든.

"나는 이미 멈췄는데 너는 왜 멈추지 못하느냐" 하면서 "나는 이미 악행을 멈췄는데 넌 왜 멈추지 못하느냐?" 과감하게 얘기를 하는 거라. 어느 누가 그 가서 칼에 맞아 죽으려고 그런 소리를 할 거라?

 

사람들이 물 때문에 싸움박질해서 전쟁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 전쟁 가운데 가가지고 “싸우지 마시오. 싸우지 마시오. 물이 중요합니까? 사람 피가 중요합니까?” 어느 누가 가서 얘기할 거라?

요즘 미국에서 아프간 막 때려 부수고 하니까 다 박수치고 군대 보내고 쌀 보내고 같이 동참들을 하고 하잖아. 어느 누가 그렇게 기세등등할 때 그 싸움터에 가서 싸움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거라. 미국이 조금 약해지면 싸움하지 마라 하고 또 얘기들이 나오겠지 여론들이. 근데 직접 싸움박질하는데 가서는 그렇게들 안 한다는 거라.

근데 부처님은 그 싸움박질하는 데 가는 거라. 가서 싸우지 마라고 이제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런 적극적인 현실 참여가 있었다는 거라.

 

죽어간 사람 “내 아들 살려내시오. 살려내시오.” 하고 얘기하니까 사람들은 다 그러겠지. “참 안됐습니다” 같이 울어주고 이렇게는 하겠지. 어느 누가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딨어. 니도 죽고 다 누구도 죽는다. 그런데 뭘 그리 슬퍼하느냐?” 하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거라. 그걸 은유적으로 비유해 놓은 게 겨자씨 구해오라는 얘기잖아. “죽지 않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만 구해와 봐라. 내가 니 아들 살려낼게” 하고 부처님 얘기한 거잖아. 그래서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했던 분이 이 부처님이라. 부처님이 위대한 거, 부처님 공적은 바로 그런 부분들이라.

 

왜 이렇게 부처님이 적극적으로 현실 참여를 했고 또 이런 그때의 사상적인 흐름들을 갖다가 과감하게 부르짖으면서 부정을 했느냐는 거라.

많은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런 분들은 실리를 추구하는 사상가였지, 대중들의 고통을 위해서 사랑을 갖고 같이 나누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거라.

부처님은 그런 대중과 호흡 하기를 원했고, 그런 원력을 세워서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을 갖다가 부처님의 덕성과 자비와 그 깨달음의 경지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얘기를 하는 거라.

 

자, 다음 페이지, 참아요. 2시간 그냥 바로 합시다 이.

 

붓다의 가르침의 세 부분

붓다의 가르침은 경··론 삼장(三藏)으로 나눠지죠.

 

지금의 우리가 보고 있는 경전들을 보게 된 것은 4차 결집 때 처음으로 글자로 쓰여지게 되죠.
1차 결집 때는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그해 안거 때 결집을 하게 되고, 2차 결집은 그 후 100년 후에 사소한 문제로써 다툼이 있게 됐을 때 깔라소카(kālāsaka) 왕이라고 하는 왕 때 제2차 결집이 이루어지게 되고, 제3차 결집은 그 뒤로 200여 년이 흐르고 나서 아소카왕 때 제3차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법이 스리랑카로 전해져서 스리랑카에서 기원전 80년경에 제4차 결집이 있게 되고 그때 처음으로 경이 달라빠따, 타라나무 잎에다가 써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패엽경(貝葉經)이라고 그러죠. 그 경을 우리가 읽고 있는 겁니다.

스님이 얘기하는 것도 바로 이 패엽경에 써진 것들을 -빨리어입니다 그게 - 여러분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가르침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부분은, 경·율·론 삼장 부분은 시간 날 때마다 자주자주 여러분들에게 얘기해 줘야 될 부분입니다.

 

41페이지만 보면 불교는 성스러운 진리 그것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제 "불교란 무엇인가" 첫마디에 많이 물어봅니다.

불교가 뭐꼬? 보통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루 종(宗)자니까 “으뜸가는 가르침입니다.” 뭐 그런 얘기들을 하죠. 부처님이 가르침이 다 불교지 뭐라. 그거 물어보려고 스님들이 사실은 물어보는 사람은 없을 거라. 우문우답이지 그런 거는. 불교는 뭐라요? 음? 불교가 뭐라요? 그래! 바로 저거야! 뭘 어렵게 생각해? 첫머리 스님이 얘기했잖아.
"불교는 성스러운 진리 그것일 뿐"이라고.

 

자꾸 인제 어렵게 생각하니까 불교는 이런 것이다고 자기 틀에다 맞추는 거라. 그 틀은 자꾸 만들면 안 됩니다. 그 틀을 깨부수신 분이 부처님이라. 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틀이 아니라. 부처님이 제자가 없어서, 쉽게 말하면 내가 니한테 다음 왕권을 넘겨주듯이 이 교단을 운영할 수 있는 실권을 넘겨주겠다 하고 얘기를 안 했어요? 어느 누구에게 그런 적이 있어?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편타당한 진리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따라가야 될 성스러운 길이고 그러니까 그럴 필요성이 없는 거라. 니 스스로 노력해서 그런 성스러운 길로 따라가고 그런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르란 뜻이라.

 

근데 불교를 어디 틀에다가 자꾸 넣어 둘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하고 더욱더 어긋나게 되는 거라. 가끔씩 그럽니다. 종파를 나누기도 하고 또한 “이 경이 최고다, 저 경이 최고다”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 기도법이 최고다, 저 기도법이 최고다” 그건 하나의 틀들이라. 그 틀에 불교를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성스러운 진리, 그 진리의 길을 따라가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 진리의 길은 바로 부처님 법의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뿐이지 어떤 틀에 얽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부처님은 국가나 민족 또 교단보다도 우선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성스러운 길, 진리의 길이라. 진리의 길이 우선이었지 다른 것이 우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목련존자가 부처님 종족이 멸망하려고 하니까 그럽니다. 부처님한테 “부처님 부처님 석가종족을 갖다가 신통으로서 여기에서 홱 옮겨 가 저쪽으로 놔놔버리십시다. 딱 감춰 둡시다.” 그러면 멸망 안 할 게 아니냐. 그때 부처님 뭐라고 그럽니까?

“아니다. 목갈라나야!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성인들이 추구해 나가야 될 길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부처님이 그런 신통을 못 부려서 안 했습니까? 뙤약볕에 나가 가지고 앉아서 그 군대를 기다리는 거라.

“부처님 부처님요 왜 뙤약볕에 앉아있습니까? 저 저쪽에 서늘한 그늘이 진 나무가 있는데, 거기 안 앉아있고 왜 여기 앉아있습니까?”

"나에게는 종족의 그늘만큼 시원한 그늘은 없습니다." 참 인간적이죠. 종족이 있으면 내가 좀 시원할 건데 네가 내 종족 멸하러 가니 어찌 내가 저 시원한 나무 밑에 있겠느냐. 뙤약볕에 앉아있어야지. 종족이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돌아가게 만들고, 3번이나 돌아가게 만들어도, 결국 부처님은 신통력을 안 부렸습니다. '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다. 과거 전생에 지은 악업의 결과로 석가종족이 멸하게 됐구나' 그래서 진리의 길을 따랐지, 국가를 우선하고 종족을 우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예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를 봅시다. 승려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쉽게 말해서 이런 진리의 길을 따라야 된다는 거라. 다른 내 사사로운 이익이나 아니면 우리 조계종이니까 뭐, 조계종의 이익을 위해서 한다든지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헌신해서도 또한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근데 우리 역사는 그렇지 못했죠.

단편적인 예로 부처님은 "싸움박질 하지 마라, 살생하지 마라" 했는데, 서산대사 같은 경우에는 승병을 일으켰죠. 우리는 서산대사를 위대한 분이라고 얘기하는데,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렇게 죽일 놈이 없는 거라. 민족을 우선했거든. 진리의 길을 우선한 것이 아니고.

 

원광법사, 세속오계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광법사가 저기 뭐야, 화랑도 하면서 세속오계 만들고 했다고 하니까, 참 똑똑한 양반 같지만 부처님이 봤을 때는 참 어리석은 양반이라. 왜 남의 나라하고 싸움박질 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만들어가지고 있느냐는 거라.

그게 이제 어떤 길을 따라가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거라.

 

우리들은 불교는 성스러운 진리 그것일 뿐이다 하는 걸 항상 가슴에 간직을 해야 됩니다.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되고, 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 46페이지 불교는 당시 인도의 다른 가르침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부분입니다.

붓다가 최초의 설법 「초전법륜경」이라고 그러죠.

초전법륜경에서 설한 진리는 그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지만 그분의 구상 지혜 통찰력 깨달음은 참으로 명확한 것이다.
이럴 것 같으면 당시 가르침과 불교는 디르다고 봐야 되겠지. 당시의 가르침과.

 

종교가 해야 될 길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종교가 해야 될 게 뭐겠어요? (수행자 대답 ...)

그렇지! 잘했네. 우리 처사님이 낫구만. 종교가 해야 될 길은 다른 게 있는 게 아닙니다.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올바르게 제시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올바른 방향에서 근원적인 문제들을 갖다가 풀어갈 수 있게끔 바른 눈을 갖게 해주는 것이지, 그 사람을 끌어 가지고 여기에다 탁 갖다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아무리 끌어다 놓으면 뭐 할 거라. 안 먹으면 그만인 거라. 끌어놓을 필요는 없어. 가는 길을 제시를 해줘야지.

 

근원적인 문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르게 살아가는가? 하는 걸 갖다가 올바르게 방향 제시를 해서 그 사람이 스스로 근원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게끔 해주는 것뿐이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가 해야 할 일들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합니까? "여래는 다만 길을 보여줄 뿐이다."

이리 이리 따라갈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른다 하고 길을 보여주는 것뿐이라. 가르쳐 주는 것뿐이라. 그래서 부처님은 한 사람도 중생들을 제도하지 못했다고 그러는 거라. 제도한 거는 자기 스스로 한 거거든. 깨달음 이른 건 자기 스스로 한 거라.

어느 누가 어느 스승이 감히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그 정도로 확신이 서지 않을 것 같으면,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것 같으면 감히 그런 얘기를 못 합니다.
“누구든지 온나. 내가 깨달으면 이렇게 해줄게, 내가 구원해 줄게” 하고 얘기를 하지, 어느 스승이 어느 사상가가 "다만 길을 보여줄 뿐이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거라.

 

바로 종교가 해야 될 거는 그런 거라는 거라. 올바른 방향 제시!

그 사람이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근원적인 것들을 갖다가 제시를 해서, 그 사람이 바르게 봐서 바른 눈으로써 할 수 있게끔 해줘야 된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불교는 당시 인도의 다른 가르침과 틀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설한 것은 그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설한 가르침은 바로 지혜롭고 통찰력이 있었고, 바른 깨달음으로 이르도록 하는 데 명확한 것이 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 가르침 그것을 단편적으로 표현해 놓은 게 뭡니까?

삼법인과 사성제, 중도, 팔정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다음 과가 바로 중도와 팔정성도입니다.

여기서 저번 주에 숙제 점검이 있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중도가 뭔가, 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귀옥이는 안 왔으니까 모를 거라. 정 선생! 웃지만 말고 나는 중도를 뭐라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중도 말고 내가 삼법인 사성제 그런 거 자기 나름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얘기를 했죠. 아무거나 얘기해 봐. 떨지 말고. 크게 또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가 애초부터 얘기했어요.

고집멸도 제행무상 제법무아 그게 삼법인 사성제입니다.” 이런 거 하지 마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대답 ...)

예. 그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진리의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중도란 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는 중도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길이다.하고 얘기를 해놨죠.

그 양극단은 뭡니까? 하나는 고행주의고 하나는 향락주의죠. 그 양극단이 전도된 전도 몽상이라. 전도된 몽상에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겁니다.

벗어나기는 누가 벗어나야 됩니까? 자기가 벗어나야 되죠!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문제인데, 어떻게 중도를 잡을 것이냐?

경에는 소나의 예를 들면서 거문고 줄을 탱탱하지도 않고 느슨하게도 하지 말아라, 그것이 중도다.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죽지 않을 만큼 노력하는 것, 그것이 중도다. 또 여러 가지로 표현들을 해놨습니다. 뭐가 중도라? 갈피를 못 잡아.

장봉갑! 이 세상에서 봉갑이가 생각하기를 가장 소중한 것은 뭐라고 생각해요? 뭐가 가장 소중한 거라? 장사하니까 돈 많이 버는 게 소중한 거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뭔가? (수행자 대답 ...) 예? 가족, 또 다른 사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생명이라. 목숨만큼 소중한 거 없어. 지 목숨 없으면 가족도 없고 재산 아무리 모아봐야 소용없어. 그 생명만큼 소중한 건 없는 거라.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 생명을 대신해 줄 거라? 그건 어느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부분이라. 또 누구도 그 길을 갖다가 부정할 수도 없는 거라. 주어진 생명, 주어진 목숨 자체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자기가 보듬어 안고 가야 되는 거라.

우리는 그런 목숨이 소중하니까 어떻게 돼?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거 아니라? 그러니까 살려 하니깐 좀 더 잘 살고 싶으니까 많이 모아야 되는 거고, 또 남들보다 좀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그러는 거고, 또 살려다 보니까 가족이 생기니까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거고, 그런 거라. 이 목숨만큼 소중한 건 없는 거라.

 

그런 목숨, 목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는 거라.

우리는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이 몸을 지탱시키기 위해서 먹고 또 마시고 또 옷을 입고 또 집이 필요하고 그런단 말이라요. 그러면 숨을 쉴 것 같으면 공기도 있어야 되고 또 남새밭에 채소도 있어야 되고, 또 저기 동물 같은 소 같은 것도 있어야 되고, 다 내 목숨을 위해서 다 필요한 것들이라.

 

그러면 내 목숨이 소중하듯이 그것도 다 소중한 것들인 거라. 공기가 오염되니까 내 목숨이 위태로워. 소가 광우병에 걸려 있으니까 내가 못 먹으니까 어떻게 돼? 문제가 발생하는 거라. 소가 전 지구상의 국토의 한 24프로를 차지해요. 지금 소가 최고의 단백질이잖아. 동식물 동물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그거 먹을라고 아우성을 치는 거라. 한쪽에서는 소에게 사료를 먹이기 위해서 곡물들을 갖다가 무제한으로 방출하는 반면에, 그 곡물들 못 먹어서 또 3분의 1은 죽어 가는 거라. 그게 현실이라.

 

이렇게 따질 경우에는 물이든 공기든 자연이든 다 내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되는 거라. 그것이 내 목숨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가지고 물이나 공기를 내 목숨이라고 얘기하는 사람 있어요? 없다는 거라. 다 소중한 것은 안다는 거라.

진리 따라서 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 다 내 목숨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거라.

 

왜? 부처님이 체득한 진리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호 연관 관계, 상호 연관 관계로 인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이런 관계의 존재일 뿐이지 목숨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 관계가 끊어질 것 같으면 목숨도 끊어지는 거라. 공기 못 마시면 죽어버리는 거고, 관계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인간의 목숨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써 중도(中道)를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중도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도 있게 되고, 저것이 존재함으로 해서 이것도 존재한다"는 연기의 논리, 연기의 논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는 중도를 따르는 길이고 바른 길로 가는 것이 되게 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연기법 게송, 연기법이 뭡니까? 연기법이 어떻게 돼요? 연기의 게송, 조금 전에 얘기했잖아. 이것이 있으므로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 빨리어 원문으로 할 것 같으면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Imasmim sati idam hōti, imassuppādā idam uppajjāti;

imasmim asati idam na hōti, imassa nirōdhā idam nirujjhatī”.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게 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그런 연기의 길 따라 체득해 나가는 것이 바로 중도란 뜻입니다.

그런 길 따라가는 것이 곧바로 바른길, 바른 8가지의 길이란 뜻입니다.

명확하게 이러한 것들을 이해해서 따라가는 것.

 

자, 시간이 다 돼 가는데, 이번 주는 여기까지죠? 다음주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이.

다음주 숙제 「삼법인과 사성제」 나름대로 해오십시요 이. 삼법인과 사성제.

그다음에 「불교의 철학이 어떤 것인가?」 불교의 철학, 정치적인 철학이든 사회적인 철학이든 아니면 종교적인 철학이든 어떤 것이든, (수행자 ...) 예. 정리를 해 오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는 보통 이제 수행을 해나가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수행해나가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것!

‘오늘 내가 여기 앉아서 삼매 체험해보겠다’ 열심히 앉아서 수행하면 삼매 체험 됩니까? ‘내가 몸이 약하니까 몸 좀 건강해지고, 하늘 붕붕붕 좀 날고 싶다’ 수행하면 수행됩니까? 안 됩니다! ‘부처님 한번 보고 부처님한테 성불 한번 받고 싶다’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뭡니까?

이러한 것들을 버려버려야 된다는 거라. 무슨 신비한 체험을 해보겠다든지 아니면 병을 치료하겠다든지 아니면 이렇게 이렇게 되고 싶다든지 아니면 삼매 경험해 보겠다든지, 이런 생각을 버리고 수행에 임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맨 첫째 관문입니다 이게. 원하는 것이 없이 수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인제 수행에 들어가고 나면, 실질적으로 수행해나갈 때는 어떻게 합니까?

보통 그걸 수행의 3원칙라고 그럽니다.

 

「수행의 3원칙」

맨 첫 번째가 뭡니까?

슬로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라. 되도록이면 천천히 하라. (slow)

 

그다음에 뭡니까?

라이트 나우 라이트 히어! 지금 여기서! (Right now Right here)

과거에 내가 어떻게 했든 죽을 짓을 했든 아니면 금덩이 같은 착한 일을 많이 했든 아무 소용없습니다 수행에서는. '바로 지금 여기서' 할려고 해야 됩니다. 아무리 저번 번에 삼매 체험을 했다 해가지고 그거 체험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라. '바로 지금 여기서' 하는 걸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인생은 뭐라고 그래요? 생방송이라고 그러죠! 노래 가사 있대. '생방송' 하라는 얘기라 생방송. 재방송 없어. 녹음해 놓을 수도 없는 거라.

 

세 번째가 감각, 느껴지는 감각을 관찰하라.

그래서 그 감각의 변화를 느끼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이게 인제 수행의 3원칙이 됩니다.

항상 수행해 나가려고 할 땐 이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수행을 해나갈 때는 우리는 이제 앉아서만 수행하지 말고 경행을 자꾸 겸해줘야 됩니다. 아까도 첫 마디에 얘기했지마는 경행은 나태나 게으름들을 갖다가 몰아내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그런 몸과 마음이 신속하게 안정을 가져오게 하고, 몸과 마음이 신속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행이 필수적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간파를 해서 수행에 좀 더 진척이 있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경행과 좌선이 항상 겸비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요? (수행자 ...) 이게 120분짜리라서 2시간 넘어가면 끝나버려, 앞에 것이 지워져 버려.

다음 주는 「22과.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상견 단견」하는 부분 그것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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