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
1. 원저자의 생애
(해설) 청전 스님의 해설에 의하면 샨티데바스님은 7~8세기 경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대승의 중요 사상을 널리 선양한 중관학자였다.
남인도의 사무라스트라 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꿈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을 때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라는 말을 듣고 왕위 계승에 회의를 품게 된다. 드디어 왕위를 계승하기 전날 밤에 왕궁을 몰래 나와 나란다사(대학)에 가서 비구가 되었다.
2. 입보리행론
많은 큰스님 밑에서 폭넓게 수학하면서, 은밀히 삼매를 닦으며 무위행에 들어갔다. 그래서 겉으로는 항상 먹고 자고 놀기만 하는 그런 스님으로 보였다. 나란다사(대학)의 전통인 큰스님들이 경을 외우는 법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적천 스님의 차례가 되었다. 나란다사의 대중은 이 스님의 입에서 도대체 어떤 경문이 나올 것인지 의심을 하며 모여들었다. 적천스님은 법좌에 올라 “여태까지 외웠던 것을 송경할까? 아니면 지금까지 없었던 것, 즉 새로운 것을 외워볼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대중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외울 것을 요구했고, 이에 적천스님은 대승의 모든 뜻이 결집된 이 <입보리행론>을 설하였다.
3. 입보리행론
제9장 지혜 바라밀품 34장의 ‘만일 사물과 비사물들이 마음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 형상은 구분이 없어지고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 완전히 평정되리라’ 이 게송을 송경할 무렵, 적천스님의 몸은 사라지고 오직 음성만 하늘에서 들려왔다. 대중은 이 모든 송경을 듣고 기억해, 놀라움과 기쁨으로 이 경을 기록해 두었다. 이후, 적천스님은 다시 나란다 절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찾는 제자들에게 스님 방 어딘가에 써 둔 경론을 참고해 더욱 수행할 것을 당부했는데, 그것은 <대승집보살학론>또는 <제요경집>이다 참고로 대승집보살학론은 한글대장경 249번, K-1121(33-996)에 번역되어 있다.
4.입보리행론의 내용
이곳 티베트 망명정부가 자리한 다람살라에서는 달라이 라마께서 집전하는 법회의 시작과 끝에, 다음과 같은 티베트말 게송을 함께 합창한다. 우리말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보리심의 귀한 보석이며 보리심을 아직 일깨우지 않은 이들은 일깨우고 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기울지 않도록 하며 보리심은 항상 위로위로 증장할지어다".
바로 이 논문이 보리심을 일으켜, 실천을 통해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설하는 논이다. 전체는 10품으로 나누어진다.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1. 선서의 법신을 지니신 보살과 예경 받으실 모든 분께 정례하오며 보살의 율의에 들어감에 대하여 경에서와 같이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해설) 적천 보살께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 즉 입보리행론을 지으면서 불법승의 삼보와 함께 올리는 예경입니다. 보살의 율의란 곧 보리심을 발하여 보리행을 하는 것으로 악을 억제하고 선행을 하는 모든 율의를 거두어들이는 섭율의계, 선법을 거두어들여 깨달음을 얻는 섭선법계, 중생을 구제하는 섭중생계가 그것이다.
2. 이전에 없었던 것을 여기에 말한 것은 없습니다.
뛰어난 글 솜씨 역시 나에게 있지 않으니 그래서 다른 이를 ‘위한다’는 생각 또한 저에게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바른 습을 들이기 위해 이를 짓습니다.
(해설) 적천 보살 같이 위대한 학자이자 수행자도 스스로의 겸양을 먼저 보이며 자신의 올바른 습, 즉 수행을 위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배움을 자랑하는 이들이 여러모로 새겨들고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3. 선업에 길들여져 나의 믿음은 이러한 신심을 순간 자라게 하리니 저와 선연이 같은 다른 이들도 만일 이 내용을 보게 된다면 뜻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해설) 믿음은 지혜에서 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가 되고 그 이치를 사유하고 이해가 깊어지면 그 이해를 지혜라고 합니다. 첫째, 믿음은 가르침을 듣고 교화를 받아서 생기고 둘째는 열정이 생겨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찾아보는 믿음이며 셋째는 열정이 확신으로 다가올 때 그 확신이 깨달음으로 인도합니다. 선연이 있는 이들이 수행자, 유정들에게는 큰 이로움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4. 이 인간 몸은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인간의 뜻을 이루었으니 만일 이런 좋은 기회에도 성취하지 못한다면 어찌 다음 생에 완전한 기회가 다시 오겠습니까?
(해설) 불교에서는 인간 몸을 받는 것이 천신의 몸을 받는 것보다 더욱 귀하고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수행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 몸을 받고서도 수행하여 삶과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없을 것입니다. 다음 생이 두렵지 않습니까? 생명 있는 존재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봅니다.
5. 마치 구름 낀 칠흑 같은 어두운 밤 순간 번개의 섬광이 모든 것을 드러내듯이 이와 같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 세상의 복과 지혜는 한순간에 생겨납니다.
(해설) 밖으로 남을 도와주게 되면 복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은 모든 것과 소통하는 자비의 뜻이 있고 지혜는 고통을 주는 번뇌 망상을 잘라 없애주는 칼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이 둘이 바로 속박에서 벗어나는 수행의 요체입니다. 위신력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복으로 소통하고 지혜로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불가사의한 힘입니다. 부처님을 복혜양족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두 가지를 원만 구족하였기 때문입니다.
6. 이처럼 선의 힘은 항상 약하고 강한 악업의 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보리심이 아닌 그 어떤 선으로도 악을 조복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해설) 나쁜 습관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몸에 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보리심, 즉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깨닫고자 하는 마음은 이와 같은 악습마저도 버리게 합니다. 대승의 요체는 언제나 중생 구제에 있고 악을 조복 받는 유일한 마음입니다.
7. 무량한 세월동안 [중생의 이로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행하신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리심만이 [중생에게] 유익함을 보시고 이것으로 한량없는 중생에게 아주 쉽게 궁극의 안락을 얻게 하셨습니다.
(해설) 깨닫고자 하는 마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스스로 노력할 때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보리심은 바로 그 인과를 알고 악함을 없애서 선함을 증장하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괴로움이라는 병은 보리심만이 치유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8. 끝없는 윤회의 고통을 없애고 중생이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갖가지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언제나 보리심만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해설)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질리게 됩니다. 세간의 욕망이란 모두 이와 같은 이치라서 더한 욕망이 나타날 뿐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며 태어남을 반복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치를 알아 윤회의 고통을 해결하는 마음은 유일하게 그것은 곧 보리심입니다.
9. 보리심을 일으키면 윤회의 쇠사슬에 얽매인 가련한 자도 보살이라 불리며 세간의 천신과 사람들이 함께 받듭니다.
(해설) 말과 생각과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에 속박당하고 있더라도‘중생 구제를 위해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을 내는 것은 불속에 연꽃이 피듯이 성스럽고 고귀한 마음입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세계중심으로 마음을 확장하고 다음 생까지 넓혀서 지옥중생, 인간만이 아니라 천신까지도 구제하고자 하는 보리심을 내는 이가 바로 보살입니다.
10.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최고의 연금액처럼 깨끗하지 못한 이 몸뚱이를 부처 몸으로 만들고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보석으로 바꾸려면‘보리심’을 견고히 잘 지녀야 합니다.
(해설) 연금액이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리심이 범부를 성인으로 중생을 부처로 변하게 하는 것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보리심을 견고하게 지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 온 누리의 으뜸이신 오직 당신,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로 온전하고 바르게 잘 관찰하시어 값진 보배로 보리심을 인정하시었으니, 중생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이들은 소중한 보리심을 굳건히 지녀야 합니다.
(해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적천 보살은 바로 그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리심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열어 주는 나침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12. 세상의 다른 선업은 파초와 같이 열매를 맺고 나면 시들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 끊임없이 열매 맺고 시들지 않으며 잘 커나갑니다.
(해설) 바나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죽는다고 경전에 나옵니다. 보리심은 생명 있는 존재들의 희망입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천신이든 생명들이 있는 한에는 보리심의 나무는 시들지 않고 커 나가며 깨달음의 꽃과 생사가 없는 열매(열반)를 맺어 중생을 부처로 전환시켜줍니다.
13. 무섭고 큰 죄를 지은 자라도 보리심에 의지하면 찰나에 그 업을 벗습니다.
용맹하게 보리심을 일으키면 모든 공포가 사라지니
의식이 있는 자라면 어찌 이것에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해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언제나 간절하게 간직하고 있으면 어떤 죄업을 저지를 때 곧바로 참회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심이 거울같이 자신의 내면을 되비추는 힘이 있어서 보리심으로 죄업을 소멸시키므로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으면 어떠한 공포도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14. 보리심은 말겁의 불처럼
어떤 큰 죄도 순식간에 소멸시켜 줍니다. 보리심의 이로움이 ‘헤아릴 수 없음’에 대해 지혜의 미륵보살께서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해설) 말겁의 불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길을 뜻합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 해탈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보리심입니다. 이와 같은 보리심보다 더 크고 이로운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15. 이 보리심을 요약하면 두 가지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해설) 보리심을 크게 나누면 발보리심과 보리행이라는 뜻입니다. 보리심은 청정한 의욕입니다. 의욕이 없으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보리심을 일으켰으면 보리행은 당연히 일어납니다.
16. 가는 것을 바라고 직접 가는 것 그 차이를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현명한 이는 이 둘의 차이를 차례대로 알아야 합니다.
(해설) 보리심 일으킴과 보리행은 가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가는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게송입니다. 보리심 일으킴은 원인이라면 직접 가는 실천은 그 결과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그 내용이 같아야 합니다.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일으키므로 이 둘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17. 발보리심 자체만으로
윤회세계에서 큰 과보를 얻지만 보리행처럼 끝없는 공덕을 맺지는 못합니다.
(해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 공덕이 있지만 실제 중생 구제하는 보리행의 실천이 없으면 의미가 퇴색됩니다. 끝없는 공덕이란 보리심이 모든 중생을 부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훌륭한 선한 성질이면서도 이 덕성이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끝없이 수많은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될 때 비로소 보리행의 선한 성질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있는 한에는 보리행의 공덕이 끝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18. 계율을 지니고 유정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퇴전의 마음으로 이 보리심을 바르게 수지한다면
(해설) 보리심의 받아 지니는 조건이 계율입니다. 계율은 도덕성이며 삶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중생을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계율이야말로 최상의 도덕성이며 삶의 궁극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 그때부터 잠에 들거나 방일하더라도 공덕의 힘은 끊임없이 허공과 같이 커다랗게 자라납니다.
(해설) 보리심이라고 할지라도 의욕이 떨어지면 때로는 뒤로 물러나는 수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알아차림을 통하여 계율에 어긋난 행위를 했는지, 사견에 휘둘렸는지 중생 구제의 마음이 물러나지는 않았는지, 두루 살피면 곧바로 보리심을 증장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20. 유정의 두통만이라도 없애려고 한다면 그 또한 유정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이기에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얻게 됩니다.
(해설) 편두통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다고 하는데, 솜씨 좋은 의사는 이 두통만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근심을 없애고 편안하게 합니다. 삶과 죽음의 반복하는 고통을 없애는 것의 공덕에 대해서는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21. 하물며 중생 개개인의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을 없애려고 한다면 중생 개개인을 위해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하려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해설) 중생 구제라는 큰 서원을 세워 실천을 하는 이들을 보살이라 합니다. 보살의 삶은 중생구제에 머물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고 마음을 길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중생들의 정신적인 진화를 위해 즉, 중생들이 공덕을 얻게 하려는 것이 보살의 삶입니다.
22. 이와 같은 이타심이 어떤 유정에게 있겠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 천신이나 신선 또 그 어떤 바라문에게 있겠습니까?
(해설) 입보리행론에서 매우 유명한 게송입니다. 이 보리심이야 말로 부모님의 사랑보다도 천심보다도 더 크고 넓은 사랑과 연민인 자비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는 게송입니다.
23. 이 모든 유정이 일찍이 자기를 위해서 이런 마음을 꿈속에서 조차 내지 않았다면 이웃을 위하는 마음은 어찌 생기겠습니까?
(해설) 보리심을 내지 않고, 더불어 사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약육강식의 축생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꿈속에라도 혹 타인에게 베풀었다면 이것이 바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즉, 남을 도와주는 이타심은 우리의 본성이며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24. 이웃은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일어나지 않는데 모든 중생을 위하려는 마음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이 탁월한 마음의 보배는 예전에 없던 희유한 탄생입니다.
(해설) 보리심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인간 선언입니다. 중생 구제의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자각한다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 곧 보리심이 가장 귀한 보배임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25. 모든 중생에게 기쁨의 씨앗이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영약이 되는 보배로운 보리심의 공덕 모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해설) 이와 같은 보리심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 구제의 서원, 그러기 위해서 위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 이렇게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보리심의 공덕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리심을 보배라고 비유한 것인데 보배는 귀중하다.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의 공덕이야 말로 제일 수승한 것입니다.
26. 도우려는 생각만 하여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보다 수승하거늘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모두의 복락을 위하려는 노력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해설) 배고픈 사람에게 한 그릇의 라면을 사주는 것도 크나큰 공덕을 짓는 일입니다. 불단 앞에 서서 간절한 마음으로 서원을 하는 것도 큰 공덕을 짓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데 일체 중생의 복락을 바라는 마음, 그 보리심의 크고 높은 공덕을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27. 중생은 고통을 여의려고 하지만 오히려 고통 속으로 내달리고 안락을 원하지만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안락을 원수처럼 부숴버립니다.
(해설) 어리석은 중생들은 쾌락을 추구한다면서 더 큰 고통을 추구합니다. 쾌락이란 그 끝이 없어서 마치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더 큰 갈증만 생기는 것처럼 한없는 고통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배경에는 공성의 진리를 모르는 무지가 있습니다. 이 무지를 끊는 것이 바로 보리심입니다.
28. 그 누가 안락이 다하여
많은 고통 속에 빠진 그들에게 모든 복락으로 만족을 주며 모든 고통을 여의게 하고
(해설) 보리심이야말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9. 그들의 무지 역시 없애려고 하겠습니까? 이와 견줄만한 선행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행하는 선지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와 같은 공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해설) 보리심은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선행이며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길로 인도하는 선지식이며 중생의 마음을 궁극적인 의식상태로 이끄는 공덕임을 피를 토하듯이 설파하고 있습니다.
30. 도움에 대해 보답을 바라고 행한 것에도 칭찬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고서 하는 보살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해설) 자그만 돈이나마 기부를 하고 선행을 했다고 칭찬하는 세상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되돌려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선행의 보리심 불자들은 어찌 그런 선행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보리심과 보리행을 행하는 보살들의 그 큰 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31. 몇 안 되는 중생에게 계속해서 음식을 베풀고 어쩌다 한 번 보시를 하고 천시하며 반나절을 배부르게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덕행을 행했다며 칭송합니다.
(해설) 아주 작은 베품이라도 이들이 고마움을 표시함은 당연합니다.
32. 한량없는 유정에게 긴 세월 동안 여래의 위없는 안락을 얻도록 마음의 한량없는 소원을 채워주고, 항상 베푸는 보시에 무슨 칭송의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끝.
(해설) 자그만 선행의 복덕이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 덕행을 칭송합니다. 각박한 세상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행위에 마음을 고양시키는 공덕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데 불보살의 그 한없는 자비심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원허 지운스님의 자비선명상문자서비스~~ 2015. 06. 24 ~ 0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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