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가져야 할 4가지 특색, 그리고 중도의 이해 (20151015)
오늘은 「인간이 가져야 할 4가지 특색」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제 어떤 스님이 한 분 찾아오셨어요. 와가지고 그 스님 요점이 뭐냐하면 테라와다 불교가 좋긴 좋은데 너무 타이트하다. 한국에서는 한국적인 상황에 맞게끔 조금 바꿔야 된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너무 밖으로 좀 많이 벗어나 있으니까 그거 빨리 바로잡도록 해야 된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중도가 아닐까 자기는 생각한다고 그렇게 얘길 하더라고.
중도 얘기 많이 들어봤죠? 어떤 게 중도일까? 한국에서는? 중도가 한국에서 다르고 외국에서 다르고 태국에서 다른 건 아닐거 잖아?
그래서 중도를 잘못 이해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왜 그러냐면 경전에서도 그렇게 적어놨거든. "육체적인 쾌락에 치우치는 것, 그다음에 고행을 하는 것, 그 양극단을 떠나는 걸 중도라고 한다" 하니까 자칫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라.
육체적인 부분에 즐거움과 괴로움을 떠난 상태의 어떤 것들을 하면 그게 중도라고 생각을 하기가 쉬운 거라.
중도는 그런 게 아니죠? 맞습니까? 아니라? 대답을 안 해?
그런데 육체적인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즐거움을 추구할려고 합니다. 괴로운 것이 있으면 괴로운 것들을 피할려고 어떤 식으로든 육체적으로는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과연 육체적인 중도가 있을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육체적인 중도를 취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중도라고 하는 것들을 경전에서 한번 뽑아봤습니다.
주석서에는 이렇게 돼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다시 보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이때까지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다시 보니까 그것은 맞는 게 아니었다 하는 겁니다.
"육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에 의존하는 단순한 것이 중도가 아니다.
첫 번째, 모든 것을 고정개념으로 사용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첫 번째 중도이고,
그다음 두 번째가, 마음이 탐·진·치로부터 더러워지지 않는 바른 생각,
그다음에 마음이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하는 말들,
그다음에 그런 행위들,
그다음에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할려고 하는 노력들,
마음이 여러 가지 대상에 인해서 흩어지는 것을 멈추는 것,
이런 것들이 중도다" 하고 분명하게 못을 박아두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으로 인해서 중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과 행동과 마음에서 탐·진·치에 물들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객관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지금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그것들을 「중도」라고 한다.
그래서 중도에 대해서 개념들을 잘 받아들여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중도라는 핑계를 대고 어떤 것들로부터도 떠나는 상태가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져야 할 네 가지 특색 중에
첫 번째가 지금 행하고 있는, 지켜나가고 있는 계율이 설득력이 있는가?
가끔씩 애들한테 얘기하면 왜? 왜? 하고 물어봅니다. 벌레가 있다. 벌레 죽여서는 안돼. 그러면 애들이 그럽니다. 왜? 왜 죽여서는 안되는지 그걸 설득을 못하면 애들은 이해를 못해요. 그거 설득시킬 수 있겠어요?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설득시킬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설득시킬 수 없을까? 말로써 설득시키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조그만한 거라도 죽이는 것들을 보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아이는 당연히 이 곤충이나 조그만한 동물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미 마음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왜"라고 물어볼 필요성이 없어져 버립니다.
설득력은 그런 것입니다.
본인이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것들에 대한 설득력이 없어져 버립니다.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안 하게 됩니까? 부모가 거짓말을 안 하는 습관들을 쭉 들여와서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 것들을 보고 애는 거짓말 안 해야 된다는 것이 딱 박혀버리게 됩니다.
설득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켜야 될 것들을 잘 지키고 계율들을 잘 수지하게 될 때 그것은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녀야 되는 첫 번째 덕목이 그런 것들입니다.
자! 그렇게 보면 설득력이 있도록 지금 하고 있는가?
오계를 예를 들어봅시다.
"죽이지 마라." 안 죽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자애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는가? 자애의 마음이 없을 경우에는 죽이는 행위는 언제든지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럼 그런 자애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 상태에서 죽이지 마라 한다고 해가지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는 거라.
두 번째 "거짓말하지 말아라." 과연 다른 사람들, 특히 자녀들에게 자신이 뭔가를 할 때 꾸준하게 하는 정신력들, 뭔가를 할 거 같으면 그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을 바른 방법으로 달성해나가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거라.
그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한테 거짓말하지 마라 하는 것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남의 물건 훔치지 마라." 자신이 훔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어떠한 경우도 집착하고 욕구를 가지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가끔 대구나 서울 쪽에 가면 스님 드시라 하면서, 그거 뭐라 그래? 동그란 알? (수행자 대답 : 공진단)
어, 공진단인지 뭔지 하는 그런 것들을 줍니다. 그러면 다른 스님들이 있으면 내가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 그거 보고 스님들 눈을 보면 군침을 흘리고 있어. 그거 안 주고 어떡해요. 그래 너 먹어. “괜찮아요 스님? 내가 먹어도 괜찮아요?” 주라 해놓고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그게 되나? 그냥 줘.
뭔가 좋은 것들, 아니면 뭔가를 봤을 때 그걸 훔칠려고 하는 것, 그것은 그것에 대해서 욕구를 가지는 것들입니다. 특히 여자들은 보면 남이 옷 보면 예쁜 거 입으면 그거 사입고 싶어져버리는 거라. 마음에 욕구를 가지게 되는 거라. 그거는 훔치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마음에 욕구가 없을 거 같으면 남의 것을 훔치는 것에 대해서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또 하나는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이나 약품들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자신의 몸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들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라.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들을 참 많이 합니다.
어떨 때는 스님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일 뭔가 법문이 있고 할 거 같으면 법문 준비를 해서 교안을 만들어야 됩니다. 어떨 때는 그걸 못하면, 특히 머리에 생각이 안 나오고 할 때는 밤을 꼬박 세웁니다. 그러면 아침 되면 되게 피곤해. 내 몸을 해치는 건강을 해치는 행위들을 한 거라. 좀 미리미리 하면 될 건데 꼭 앞에 닥쳐가지고 그거 하려고 하니까 밤을 세워야 되는 거라.
자신의 몸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들도 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설득력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 설득력은 다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계율이 밑바탕이 됐을 때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게 첫 번째 인간이 지녀야 될 네 가지 특색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면 꼭 여름에 더울 때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거와 같습니다. 그 사람 주변에 가면 그런 느낌이 드는 거라. 편안하고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것들을 다 따르려고 하게 되고,
부처님 옆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또 그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그분들을 설득하는 능력들이 없고 그분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능력들이 없을 거 같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항상 그 부분은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성격을 바로 잡을려고 할 때도 그렇고 항상 내자신이 떳떳하고 내자신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 때 남들에게도 당당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침착함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침착한지 안 한지?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항상 자신이 침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부처님이 쟤는 침착한 것이 아니다 하면서 그 숲에 악령들이 나타나게끔 한다든지, 아니면 공동묘지에서 수행하게끔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라.
태국에서 참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반드시 결제가 끝나고 나면, 여기도 얼마 있으면 결제가 끝나죠. 결제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십삼 두타행을 해야 돼. 십삼 두타행을 하는 장소가 어디냐면 이런 건물이 있는 곳에서 하는 게 아니고 노지에서 한다는 거라. 특히 공동묘지에서 한다든지 아니면 숲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인적 드문 그런 곳에서 이렇게 두타행을 하게끔 합니다.
처음에는 그게 죽기보다 싫어. 너무 힘든 거라. 수행은 둘째치고 혼자 떨어져있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무서움들. 비바람 맞고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돼. 그런데 그것 때문에 못견디는 거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걸 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
어떠한 자극에도 그것에 대해서 항상 침착한 마음을 지니도록 자꾸 훈련을 시키는 거라. 해마다 그러는 거라. 그러니까 그다음해 돼서 거기 갈 거 같으면 조금 더 나아지고, 나중에는 몇 년 지나고 나니까 빨리 결제 끝나길 기다리게 되는 거라.
거기 갈 거 같으면 자신의 책무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라. 법문해야 되고, 수행지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여러 스님들 가르치는 것도 해야 되고, 거기에 짝 짓눌려있다가 보름이나 이런 기간 동안에는 거기서 부터 해방되는 거라. 거기 가서 있는 게 너무 좋아.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어떠한 자극이 오더라도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여러분은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되도록이면 그걸 줄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리 얘기해도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날 전화가 와갖고, 스님 뭐 때문에 힘들어 죽겠습니다. 아니면 뭐 때문에 슬픕니다.
그래서 어떨 땐 내가 뭐라고 답변해줘야 되노. 만날 똑같은 얘기 반복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자기 스스로 그런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침착하게 만드는 훈련들을 평소에 하지 않았다가 자신이 침착한 줄을 착각하고 있는 거라. 법문만 들어가지고 침착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스님들 같이 강제로라도 그렇게 자꾸 훈련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가 침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으로서 여러분들의 마음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자극하는 것들을 항상 어떤 경우든지 침착하게,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인내하는 훈련들을 해야 되는 거고,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집착하는 것들을 떨쳐내는 훈련들을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항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어떠한 불행한 일들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침착함을 유지해 나가는 것.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은 크게 번지지는 않습니다. 오래도록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는 꼭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그마음이 아물 때까지는 항상 아파.
그 생채기를 안 낼려고 할 거 같으면 항상 마음에 침착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야 만이 그 침착함이 마음에 생채기를 보호해주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두 번째는 중요하게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침착하기 위해서 해야 되는 그다음이 뭐냐면 어떠한 경우든지 뭘 하더라도 확실하게 행동을 해야 됩니다.
확실하게 뭔가를 행동을 해서 뭔가를 할려고 해야 되지, 어정쩡하게 뭔가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게 습관화돼놔 놓으면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즉각적으로 자꾸 나타나게 됩니다.
뭔가를 할려고 했다. 그럼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은 자꾸 할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것은 해야만 직성이 풀리도록 성격이 바뀌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꾸 합리화시키도록 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도 안거를 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안거 반드시 할 거라고 했는데 하다 보면 못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하려고 하지 않는 거라. 외부적인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그 자극을 물리치고 안거를 해야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 자극에 못 당해내버리는 거라.
그래서 실행하는 것들이 뭔가를 했을 때는 그것을 반드시 끝마치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인내력들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일관성 있는 삶.
살아가면서 참 이걸 가지기는 참 힘듭니다. 쭉 일관되게 그것을 따른다. 참 힘드는 부분입니다.
스님도 그렇게 해왔었고, 일관되게 해오지 못했었어요. 대표적인 게 대승불교 조계종으로 출가를 했다. 그럼 일관성이 있었으면은 밖에 가서 테라와다 계를 받았든지 어쨌든지 간에 한국에 돌아왔으면 다시 또 한국승복을 입고 한국 생활을 해야 되는데, 일관성이 없으니까 테라와다 승복을 입고 테라와다 하고.
그런데 테라와다 하고 나서는 그뒤부터는 한국승복은 뒤도 보지않고 한국 승적은 아예 던져버리고 테라와다 계로써 쭉 일관성 있게 한다는 거라.
왜 그렇게 될까? 그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어야만이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확신들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임 전가 한다든지 남탓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일관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변명의 구실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먹을 거라고 생각될 거 같으면 그속에 적어도 몸에 나쁜 것들 아니면 아니면 몸을 해치는 것들은 안 넣게 됩니다.
모든 것들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런 확신들이 들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일관성을 유지하면 좋은 것이 뭐냐 하면 시간이 남아돕니다. 자기 할 일들만 반드시 하게 되고 주변 것들을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우리 살아가면서 한번 보십시오. 자기 거 외에 주변 거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내내 '시간 없다' '힘들다' 하고 그럽니다. 자기 스스로 괴로운 구덩이로 들어가고 있으면서.
그래서 일관성 있는 삶을 세 번째로 인간이 가져야 할 특색 중에 하나로써 들어놨습니다.
모든 것들은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거고, 자기 자신이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걸 잊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체험을 해야 됩니다. 반드시 그것을 체험해가지고 아, 모든 것들은 내가 짓는 행위로 해서 선한 행위, 내가 짓는 행위로 해서 악한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 그 결과는 반드시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네 번째 지혜 있는 사람과 어울려라.
어떻게 하면 지혜 있는 사람과 어울릴 수가 있을까?
저 사람이 지혜 있는지 없는지를 여러분들이 어떻게 알아? 모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얘기는 다른 얘기로 생각을 해보면,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얘깁니다.
지혜를 구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 때 그 길에서 그런 사람들을 자꾸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한 단계 앞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능력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들을 항상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는 것 없이, 고요하고 침착한 마음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모든 현상들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변하는 것들이다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지혜를 구해서 나아갈 때 여러분들은 그길을 계속해서 나아갈려는 마음이 생기고 결정심들이 생겨나게끔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그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찾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또 찾게 되는 거고, 그럴 때 그 옆에 있게 되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데와닷따가 뛰어난 사람이고 남들이 행하기 힘든 것들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다가 나중에 결국에는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무얼 보고 데와닷따에게 갔을까? 아, 저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겠다. 저 사람 따라갈 거 같으면 적어도 열반의 끝자락이라도 줄이라도 매달릴 수 있겠다 하는 마음들이 있었는데 가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라. 자신이 그 길을 따라가면은 그게 보여버립니다.
여러분들도 반드시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은 지혜로운 사람 옆에 있을 수가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게 네 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이지 다른 부류의 중생들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인간이 지녀야되고 가져야 될 특색들은 반드시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인간답게 살 수가 있게 되는 것들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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