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하는 자격을 갖추는 것 (20160722. 대구 우안거결제)
은진이는 오늘 결석하고 왔나? (수행자 : 체험활동 중에서 대체하는 걸로 했습니다.) 오늘 무슨 체험할라고? (여기에 --- 들어가 있더라구요.) 그래 잘했다. 어쨌든 은진이가 왔으니까 가치가 있도록 해. 학교 간 것보다도 가치가 있도록.
부처님 가르침의 두 가지 특징 중의 하나가 '아리요' 라고 하는 거거든.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부처님이 직접 설하고 한 것들은 아리요 라고 그래서 '성스럽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왔으니까 세속적인 거 할려고 하는 건 아니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또 그대로 따를려고 하는 그런 것, 그게 하나의 특징이고,
또 하나는 '앗타상히따'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치가 있는 것들' 입니다.
은진이한테는 뭐가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온 보람이 있도록 가치가 있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결제를 한다고 했으니까 결제가 끝날 때는 ‘아, 참 가치있게 내가 세 달을 잘 보냈다’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부처님 가르침 대로 따르지 못했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은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조금 따라 하든 아니면 3개월을 다 따라 하든 그것에 관계없이 조금 따라 했으면 조금의 가치가 있을 거고, 많이 했을 거 같으면 많이 가치가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은진이도 오늘 가치 있도록 하고, 정 없으면 스님이 나중에 팔찌라도 줄게. 그거라도 가치 있게 가져가든지.
작년에 붓다야나 선원이 결제를 하고 올해로 두 번째입니다.
올해는 뭐 할거라 결제 때? 각자 마음가짐을 조금 새롭게 해야 됩니다.
결제라고 하는 것은 다른 곳 하고는 다르게, 불교의 결제는 그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좀 더 열심히 배울 수 있다든지, 수행을 조금더 열심히 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 자기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것이 이 결제입니다.
그렇지 않고 전과 동일하다 할 것 같으면 결제의 보람이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다 나름대로 이번 결제 때는 ‘아, 이것은 하지 말고 이것은 해야 되겠다. 어떻게 생활하겠다’ 하는 것들을 오늘은 다 다짐들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일단 여러분들에게는 편법을 써주는 거거든. 일주일에 한 번씩만 올 수 있도록 했으니까. 원래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율장에 나와 있는 것은 재가자들은 결제를 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3개월 동안 그 사원 내에 머물러야 됩니다. 사원내에 머물러야 그 결제가 성립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성립이 안됩니다. 나갈 경우에는 7일 밤을 넘기지 않고 돌아오는 것들인데, 재가자들은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별로 없습니다.
나갈 수 있는 조건은 법을 설하러 간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참회할 일이 있어가지고 참회하러 간다든지, 아니면 거기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 이 사원이 불에 탔다든지 아니면 도둑이 많이 끓는다든지 이런 조건들 때문에 나가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사실은 나갈 수 있는 조건들이 안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결제가 되면 무슨 청들이 많습니다. “법문 좀 해주십시요”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법문하기 위해서 나가야 되는 거고, 그럴 경우에도 다른 때는 자기가 가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자기가 모집해가지고 뭔가 법회를 만들 수도 있지만, 결제기간 중에는 그것조차도 스님들은 안 됩니다.
누가 반드시 청을 했을 경우에! 청을 했을 경우에만 마지못해서 나가는 듯이 나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런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나갈 조건은 사실은 차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어쨌든 이번에 결제를 보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설마 결제 끝나고 나면 이름 지어준다고 하니까 이름 받을려고 온 건 아니지? 올해 새로 오신 분들이 좀 있기는 있는데, 그것도 불교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하나의 가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거는 그냥 명칭입니다. 수행에서도 실재하는 것들이 수행 대상인 것이지, 껍데기 형태들이나 모양들이나 불려지기 위한 명칭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수행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수행을 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항상 하고 결제를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어쩔 수 없이 못했는데 내년에는 결제를 되도록이면 우리 붓다야나 선원에서 스님들 결제를 할려고 그러는데, 올해는 대중 스님들이 전부 모여서 경주에서 결제를 했는데 내년에는 만약 여기서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또 준비해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결제 때 스님들은 반드시 목욕가사를 받고 나서 결제에 들어갑니다.
"왓상 왓산따낭 다-미"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결제기간 동안에 목욕가사를 공양올립니다." 하는 게송입니다.
재가자들은 반드시 스님들에게 목욕가사를 올리도록 그렇게 돼있습니다. 어느 사원이든지 결제 당일 때는 반드시 목욕가사를 올리도록 돼있습니다.
목욕가사는 이런 가사하고는 틀리게 조의가 없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냥 천쪼가리 하나, 밑에 아랫가사 형식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여법하게 스님과 같이 결제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공양물들을 많이 가져들 왔던데 좀 많이 먹을라고? 오늘은 팔계를 지켜야 되니까 저녁 못 먹으니까 좀 많이 먹을라고 가져왔나?
태국의 예를 들면, 공덕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특별한 날, 우안거 결제날이나 불교행사가 있는 날이나 특별한 날에 공양올리는 것들은 공덕에서 어느 정도의 레벨이 될까? 어느 정도 될 거 같애요? 저 밑에 해당이 됩니다.
가장 좋은 공덕은 여러분들이 출가해서 출가자의 길을 간다든지, 아니면 자기 자식들을 출가를 시킨다든지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 공덕이 크게 나타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공덕이 크게 나타나는 것들이 이런 선원을 보시를 한다든지 아니면 선원에 물품이 부족한 것들은 물품을 갖다 놓고 아니면 부서진 곳이 있으면 부서진 곳을 보수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그다음으로 공덕이 큰데,
그다음으로 공덕이 큰 것이 이런 특별한 날에 지키는 팔계, 팔계를 잘 지키는 것이 오히려 공양물을 올리는 것보다도 더 훨씬 공덕이 크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오늘은 공양물을 안 올렸더라도 팔계만 잘 지키더라도 훨씬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런 특별한 날이나 불재일에 공양물 올리는 것들이 그다음으로 공덕이 되고, 그다음에 까티나 가사 때 공양물 올리는 것, 이런 것들이 공덕이 이루어지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단지 그냥 공양물을 올리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자신이 출가자와 다름없이 살아가게 될 때 재가생활을 하면서도 '브라흐마짜 위하라'라 해가지고 범천과 같은 생활을 할 때, 항상 자·비·희·사의 마음을 지니고 삿된 마음 일으키지 않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이 오히려더 큰 공덕이 된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번 결제 중에는 그런 것들을 따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중에서 꼭 이번 결제 때 스님이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결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놓은 것은 작년에 법문을 참조를 하든지, 아니면 올해 마하보디 선원에서 법문을 한 것을 참조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중복되지 않게끔 그런 부분은 빼고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올해는 우리 붓다야나 선원에서는 「말하는 자격」을 갖추도록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자격」 갖추고 있습니까?
경전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입안에는 독기가 있다" 독기가 있기 때문에 입을 벌려가지고 말을 하는 순간에 그 독기가 해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되고.
또 경전에는 뭐라고 하는 구절이 있느냐면, "말은 따발총 같이 사용해서는 안된다"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냥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말을 ‘다다다다다다’ 쏟아내서는 안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것들은 말을 하는 조건에서 주의해야 되는 표시이기 때문에 적어도 "말하는 조건을 갖춘 자"가 되도록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빨리어 용어로 '미따바니' 라고 해서, '말하는 자격을 갖추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말을 할 때 그냥 말하지 말고 생각을 하고 나서 말을 하는 것.
그다음에 말하는 것들에 주안점을 두지 말고, 그러니까 말은 최소한으로 하면서 요점을 간추려가지고 그 사람에게 완전하게 이해되게끔 전달하는 것, 이걸 빨리어 용어로 미따바니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내용이 내가 말할려고 하는 것이 뭔지를 알아야 됩니다. 생각없이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막 하다가 보면 나중에 사람들이 내가 그말 안 할려고 했는데 했다면서 후회하게 되는 것들, 그런 말은 안 된다는 거라.
일단 자신이 뭘 말할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이해가 되고 나서 말을 하는 습관들을 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을 했을 때 자기 자신을 해치지도 않을 뿐아니라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가?
또 그 말을 할 때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는가?
그래서 그 편안한 것으로 인해서 그 상대방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 상태가 됐을 때 그 사람은 "말하는 자격을 갖춘 자가 된다" 그게 '미따바니' 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스님이 조금 몸이 좀 불편합니다.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스님이 그 부분을 강조합니다. 말을 할 때 말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라.
적어도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귀'에다가 마음을 두고 말을 하라는 거라. 그럼 자기 소리는 자기가 듣게 돼있으니까, 그 소리가 자기도 듣기 싫으면 다른 사람은 당연히 듣기 싫은 소리라. 그래서 귀에다가 마음을 집중해서 말을 할려고 해야 되고.
그래서 말하는 것들이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할 것 같으면 그다음으로 해야 되는 것이, 말을 할 때 '입술이 달싹달싹 하면서, 입술에서 부드러운 느낌들, 또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잘 파악하면서 말을 하도록 하라. 어떠한 경우든지 악한 말들을 하게 될 때는 입술이 마르고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경련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입술에서 느끼는 감촉을 통해서 ‘아, 내가 말을 잘못했다’ 생각하고 빨리 거두어 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입술이 관찰되는 것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가슴', '가슴에서 느끼는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벼워진 상태에서 말을 하도록.'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남을 배려한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반대되는 것들을 말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의 상태에서 말을 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이 조건들을 계속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연습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입속에 있는 독기가 남을 해치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 따발총 같이 다다다다다 생각없이 쏟아내지도 않게끔 되고, 그런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말에는 무게가 있을까, 없을까? 무게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무겁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사리뿟따 존자에게 싫은 소리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아주 자상하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린 스님이 출가했을 경우라고 하더라도, 실수했다고 하더라도, 뭐라하는 법이 없어요. 자상하게 안내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이 봤을 때는 ‘카리스마도 없고 화를 안 내는 것뿐이지 일반 스님들하고 다른 게 없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거는 가르치는 스타일이 성품이 되어서 그런 것인데, 그걸 가지고 잘못 왜곡을 할 것 같으면, 저 스님에게는 무슨 깨달음도 없는 것같이 보이고, 또 그 스님이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따라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이 사리뿟따 존자를 그렇게 비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러지 말아라. 그거는 사리뿟따 존자의 성품이다. 사리뿟따 존자는그런 부드러움으로 인해서 카리스마가 일어나는 것이고, 그런 부드러움으로 인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편안함에 만들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자상하게 일러주는 성품이다. 그것은 아주 좋은 성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너가 따라해야 될 것이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다고 비난해야 될 것은 아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얘기하는데도 이 스님은 지속적으로 그 얘기를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말에는 무게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나쁜 행위를 했다든지,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참회하면 됩니다. 참회하면 되는데, 아닌 사실을 그런 것처럼 잘못되게 얘기하는 것들은 그거는 오히려 더 무겁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렇게 비난하던 스님은 어떻게 됐을까? 수명이 다해지게 되고 업의 결과를 받아서 지옥에 태어난다 하는 경전 구절이 있습니다.
말은 그마만큼 여러분들 인생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켜주기도 하고 하는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말은 조심해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감정이 섞인 말은 전부 악한 것이다" 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해서 남을 이해시킬려고 하고, 그리고 평온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들은 선한 말들이다" 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감정 섞인 말들을 자꾸 할려고 할까? 여러분들 감정섞이지 않고 말할 수 있어요? “아이고, 예쁘네!” “너 싫어!” 이거 전부 감정 섞인 것들이라는 거라. 그렇지 않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이것은 책이다.” “네가 좀 더 행복해라.” 이렇게 말하는 것들이 과연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되느냐는 거라. 감정없이 말하는 것들이. 왜 그럴까? 왜 그렇게 감정 섞여야만이 말이 되게끔 될까?
잘못 착각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걸 보통 스님은 '언어'라고 표현을 합니다. 팔정도에서도 스님이 풀이를 할 때 '말'이라고 안 하고, '바른 언어'라고 적어놓은 이유가 뭐냐면,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만 언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보여주는 행위들, 만약에 돌고래 같으면 음파를 가지고 말을 전달하죠? 그런 음파 같은 것들 이런 것들도 전부 말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배울려고 안 하고, 감정을 섞어서만 말을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 누가 탁 건드리면 싫죠? 누가 나쁜말 나한테 하면 듣기 싫어한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생존욕구'입니다. 더 오래도록 살려고, 뭔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 있어서 남들보다도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게 살고, 그리고 부유롭게 살려고 하는, 그 '생존욕구'가 있기 때문에 감정이 섞여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는 것의 의미를 알 거 같으면 그 생존욕구가 일어나지를 않게 됩니다.
뭐 때문에 삽니까? 사는 목적이 뭐라?
부처님한테 누군가가 사는 목적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답을 했어요? 「괴로움을 분명하게 보고, 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 산다.」
살아가는 것은 변하는 성품들이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은 불만족스럽고 괴로운 것들입니다. 그 성품을 분명하게 봐서, 그 성품으로부터 아, 사는 목적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이해를 통해서 알게 됐을 때! 그럴 것 같으면 더 살려고 하는 욕구도 일어나지 않고, 더 풍족하게 살려고도 하지 않고, 또 더 유명하게 될려고, 또 더 건강하게 살려고도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건강이 파손됐다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지는 않는다는 거라. 어차피 그런 것들은 변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생존욕구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것 같으면, 말을 할 때 항상 감정을 섞어서 말을 하게끔 됩니다.
말하는 데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감정을 섞어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곧 번뇌가 되기 때문에. 보통 여러분들 1800가지, 1500가지 번뇌 그다음에 108번뇌 하는 것들이 탐·진·치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말을 할 때 탐·진·치 세 갈래에 속하지 않는 말들을 하라는 거라.
탐·진·치를 일으킬 것 같으면 틀림없이 나쁜 결과 나쁜 과보를 받게끔 됩니다.
저 먼 뒤에 결과 받을 걸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나쁜 말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나쁜 말을 해야 됩니다. 그럼 누가 먼저 받아? 자기 마음이 먼저 아파! 자기가 먼저 결과를 받게 되는 거라. 자기 자신이 다치지 않고 탐·진·치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또 나쁜 결과로 이끄는 것을 1차적으로 받는 것들을 먼저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이런 감정을 섞어서 말을 하는 습관들을 아예 없이 해라. “그러면 스님, 그러면 나는 말을 못하는 데요?” 그럼 말을 하지마!
말을 안 한다고 해가지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전달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말을 안 하고 그 사람에게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면서 그 사람에게 도움되는 것들 뭔가를 행위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충분히 말이 전달되게끔 됩니다.
말 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렇게 말하는 것들은 자기 인생을 부수는 말의 무게에 짓눌려버리게 됩니다. 말은 그마만큼 무거운 겁니다.
그러면은 어떻게 말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기 봐봐야 없습니다. 아까 얘기했잖습니까? 그 내용은 작년에도 했고 읽어보면 결제 우안거가 뭔지 하는 것은 다 압니다. 똑같은 것을 할려고 내가 여기 앉아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이들 처음에 글을 가르쳐주고 할 때, '어' '머' '니' 하고 배워주면 그걸 완전히 이해하지 않을 거 같으면 다음에 읽을 때 '어머니' 하고 읽지 못합니다. 다른 식으로 어머니를 '아머니' 이렇게 읽든지 다르게 읽게끔 된다는 거라.
여러분 혹시 그런 적 없어요? 자기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면은 그걸 잘못 전달하는 경우. 자기가 확인되고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옮길 때는 반드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게 전달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럼 사실을 왜곡한 것은 누가 한 거라? 자기 자신이 한 거라. 죄를 짓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본인이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들에 대해서 말을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것이 말하는 조건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선원은 그렇지 않은데, 무슨 큰 백화점이나 이런데 가면 들어가면 회전문이 자동으로 싹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걸 따라서 쏙 들어가게끔 됩니다. 그러다가 가다가 그 사람이 탁 멈춰버리면 회전문 돌아가는 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탁 부딪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의 육근이 그런 자동문과 같으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돼? 부딪치지 않을려면 그걸 따라 들어가야 됩니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 자동으로 안 들리는 사람 있습니까? 보는 것 자동으로 보는 사람 있어요? 자동문입니다, 이것들은. 자동문들은 제어되지 않고 이해되지 못할 거 같으면 그 자동문은 자동으로 그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음들이 반드시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스님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보입니까? 스님으로 보여요? 그게 바로 자동문이라는 뜻이라. 이 소리가 들립니까? ‘잠 오는 소리네’, 아니면 ‘달콤한 소리네’, 자동적으로 자기에게 맞게끔 그렇게 들리게끔 됩니다. 왜 그 생각들을 못하냐는 거라. 자동적으로 나에게 탐·진·치가 일어나게 지금 시스템이 되어 있는데 그 시스템 대로 그대로 지금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비르게 이해했다고 할 것 같으면 볼 때 그냥 ‘보인다’ 하고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들릴 때 ‘들린다’ 하고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자동문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이 육근에 접촉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에서는 반드시 자동문으로 넘어가져야 됩니다. 접촉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만이, 자동문으로 넘어가지지 않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될 때, 그 소리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소리도 알아차리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듯이, 그 말도 소리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지 그것이 동일한 것으로써 쭉 들리지 않게끔 됩니다. 접촉하는 것들만 그대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렇게 들리게끔 된다는 거라.
그러면 나는 지속적으로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거라. 뭔가가 보이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이 자동문으로 넘어가는 것들이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고 순조롭게 육근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가다가 사람이 탁 서는 것과 같이 탐·진·치가 딱 거기에 뭉쳐버리면 사고가 일어난다는 거라. 나쁜 말을 뱉어낸다든지, 아니면 탐·진·치가 일어난다든지.
그래서 소리들리는 것, 말하는 것에서 자동문으로 넘어가지 않게끔 항상 감각기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제어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제어를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에 따라서 천냥 빚을 갚는다고 그럴 것 같으면 말을 조심하게 되겠죠? 실제 그렇습니다. 말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게 됩니다.
부처님도 말을 할 때 자유롭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본인이 완전하게 이해되고 확인된 것이 아니면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육근을 통제해가지고 그 통제된 영역내에서 말을 하고 듣고 보고 했지, 그것을 하지 않고 한 적은 없다는 거라.
내가 말하는데 왜 그 자유도 안 주느냐?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방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조심을 해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
제가 지금 얘기하는 것들 몇 가지는 여러분들이 말을 할 때 악업을 짓기도 하고 또 선업을 짓기도 하고 하는 것들입니다.
말하는 요령이기 때문에 귀담아 듣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진실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말.
어떠한 경우든지 진실을 말해야 되는 거고, 다른 사람을 속여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 난폭한 말들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협박하듯이 말하는 것, 윽박지르듯이 말하는 것.
세 번째, 진실이나 사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부수면서 싸움이 되는 말들.
아무리 옳은 것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싸움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틀린 것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말했을 때 나는 그런 의도없이 진실을 말했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싸움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저기 자신은 거기에서 침묵을 유지해야 되는 거라. 계속 진실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
인터넷에서 지금 막 논쟁이 폭발하는 것은 대부분 여기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말의 무기에 인해서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악업이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순간순간은 계속적으로 변해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 시간은 여러분들에게 일생에 딱 단 한 번밖에 없는 건데 그렇게 소중한 것인데, 괜히 쓸데없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말들로써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
사실을 말해도 될동말동 하는 판에 깨달음하고는 관계없고 배움하고는 관계없는 상태의 말들을 계속적으로 하게 된다는 거라. 무지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잡담만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해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더 중요한 것, 감정이 노출되지 않게끔 자기 자신을 잘 경호해야 됩니다.
감정이 그 말에 섞여서 노출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바로 즉시 중단을 해야 됩니다.
말하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운명도 바뀔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운명도 바뀐다고 생각하고 주의깊게 이해하고 생각해서 말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만약에 이런 조건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으면 딱 그만두어야 됩니다, 말하는 것들을. 그래야만이 여러분은 말하는 조건들을 갖추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무게가 있고 더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이 말입니다. 행위는 행위에 대해서 그것들에 벌을 받고 참회해버리면 그것들은 없어져 버리지만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와는 다릅니다. 평생을 가게끔 됩니다. 그마만큼 그것의 무게감은 중량감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말하는 것의 자격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말을 안 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번 안거 기간 동안은 적어도 「말하는 자격」을 갖추도록 한번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3개월 동안 노력하면 적어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거 아니잖아. 딱 하나 얘기했잖아. 말하는 거! 숟가락 젓가락질하는 것도 어린아이들도 3개월 연습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성인들이 3개월 동안 해가지고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결제가 끝나는 해제 때는 ‘아, 내가 인제 말하는 자격은 갖췄구나’ 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그렇게 안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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