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위협하는 적 (20160610. 대구)
오늘은 「인생을 위협하는 적」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살아가는 것 좀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죠? 누구든지 아마 바라는 걸 겁니다. 경전에는 "살아가는 것에서 승리에 이르는 길과 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그렇게 나옵니다.
먼저 승리에 이르는 길 첫 번째는, 지금 재가자 입장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 첫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경전에서 말하는 재산은 풍족할 정도로 모으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만큼만 재산을 모으고 나머지 부분은 모으는 것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비상시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인생이 행복하게 되는 첫 번째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행복하게 될려면 "대가를 바라지 마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뭔가를 줬으면 돌아올 걸 생각하지를 말아라는 거라. 주든 안 주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식들을 키워줬으니까 자식들이 나에게 뭔가를 해줘야 된다. 아니면 자식이면 부모가 당연히 뭔가를 해줘야 된다. 하는 그런 돌아오는 거, 대가를 바라는 것들을 하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자주자주 법을 듣고 출가한 스님들을 잘 시봉하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적어도 그것만 할 거 같으면 재가생활을 할 때 크게 불편함은 없이 살아가는 것들인데,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인생은 그래도 좀 잘 살았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파멸에 이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마 여러분들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것들일 겁니다. 뭣 때문에 파멸에 이르러요?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술 많이 먹고 노름하고 또 뭐가 있어요? 하여튼 재산탕진하고 이런 것들이 해당이 됩니다. 보통 그게 여러분들 알고 있는 건데
첫 번째가 술이나 마약에 빠지는 것. 그거는 뭐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면 그것도 위험에 빠지는 일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노는 것 좋아하는 것.
춤이나 노래, 파티, 무슨 모임 해갖고 만날 그런데 휩쓸려가지고 가는 것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내기하는 거 좋아하는 것.
걸핏하면 우리 뭔 내기할까 하면서 내기하는 거 좋아하는 것. 이런 것들도 있고.
왜 그러냐면 내기할 경우에는 내가 이기면 상대방이 나를 원망하게 되고, 상대방이 이기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분해한다는 것, 그래서 내기하는 것들을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하고 자꾸 어울리는 것.
그런 것들이 파멸에 이르는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경전 따라서 그렇게 살면 성공하는 방법과 파멸에 이르는 길들을 잘 알아서 그대로 할 거 같으면 괜찮기는 한데, 그거는 좀 가짓수가 많으니까 그걸 딱 한 마디로 줄이면 뭐가 될까?
인생에 있어서의 안전대책! 그게 보통 얘기하는 것이 '소욕지족'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소욕'이라고 할 때 욕구가 적다고 할 때의 빨리어는 '압삣차따(appicchat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욕구가 적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요구하는 것이 적다(소요)'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 태국에 있을 때 한국 스님들이 우리 수행처에 수행하러 온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스님 한 스님이 엄청나게 물건이 많은 거라. 뭣 때문에 저렇게 물건이 많나, 그 사람들은 일주일 있다가 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주일 있을 건데 뭐 저리 많나 해서 봤더니 고추장 된장 깻잎부터 해가지고 밥통까지, 그런데 그것까지는 음식이 안 맞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 하는데, 베개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어요. 베개가 뭔 필요가 있습니까? 베개 안 줄까 싶어서 베개가져왔는가 하니까, 딱딱하고 하기 때문에 자기는 그렇게 해가지고는 잠을 못잔다는 거라. 그래서 참 저렇게 요구하는 것이 저렇게 많아가지고 저 집 절은 재가자들이 좀 힘들겠다, 만날 뭘 요구할테니까. 여러분들은 요구하는 것들이 적어야 됩니다.
욕구가 적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요구하는 것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나는 즐겁다 하는 거라. 어디 나가서 밥 먹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은 그 식당에서 주는 숟가락 젓가락 가지고 쓴단 말이라. 그런데 요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꼭 자기 젓가락 숟가락 가져가서 먹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게 습관인데, 자신은 그게 나쁘다 좋다 관념을 떠난 거지만 그것들이 생활화되다 보면 뭔가 자꾸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거라.
애들한테도 요거해라 저거해라 요구하는 것들이 많고 이런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요구하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출가해가지고 되도록이면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이 뭔가를 시봉하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걸 줄일려고 그러는 거라. 내가 요구하는 것이 적어야만이 재가자들이 편하게 대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구하는 것들을 되도록이면 안 할려고 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그냥 불편한 대로 해도 나는 괜찮다 싶은 거면 그냥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요구하는 것들을 줄이는 것 그것은 소욕이 아니고 소요입니다. 소요!
그다음에 '지족', '산뚯티(santuṭṭhi)'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만족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인데, 원래는 산뚯티라고 하는 개념은 '기쁨이 일어난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으로 인해서도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거라. 남이 나에게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기쁨이 일어나게 돼있든가,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 유용한 것으로써 들을 거 같으면, 내가 내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그 소리가 고맙게 들리는 거라.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쁨이 일어나는 거고.
그게 압삣차따하고 산뚯티라고 하는 소요지족 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만 있으면 인생에는 안전대책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안전대책이 있으면 그래도 참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거하고는 별개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인생을 위협하는 적」이라는 것으로써 적어놨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여러분에게 도움 주는 사람, 여러분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 그걸 보통 자기 자신의 편이고 반대편이다 해서 아군이다, 적군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경전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위의 사람을 적으로 느껴버리는 상황이 되면 자신은 괴롭다."
주변에 적이 많으면 자신은 괴롭다는 거라. 괴로움이 많아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주변에 사람들이 아군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을 거 같으면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오히려 그 사람들로 인해서 자신이 속박돼버리게 된다."
그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지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해줘서 좋은 일들이 일어나게 해줬을 거 같으면 뭔가를 바라게 되기 때문에 그게 속박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진정한 아군과 적군은 밖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밖에서 발견이 안 되면 어디에서 발견이 되는 거라? 자신의 마음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아군과 적군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과 불행이 뒤따라오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성냄이나 분노가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적군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불행하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자애의 마음과 까루나의 마음과 평등한 마음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아군이 되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평온해지고 행복해진다는 거라.
마음이 아군과 적군을 만드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군과 적군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봤을 때 제목에서 얘기하듯이 「인생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여러분들 마음이 개발돼있지 못한 상태가 돼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언제든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바로 개발되어지지 않은 마음이 여러분들 인생을 위협하는 적이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자꾸 알아야되는 것이지 외부적인 것들을 자꾸 신경을 쓰다 보면은 그 사람들은 항상 영구적으로 여러분들의 아군이 되고 항상 여러분들의 적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변하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적군이 되는 경우에는 여러분들은 쓰라린 것들을 맛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두지 말고 여러분들 마음에서 적어도 선한 마음을 자꾸 일으키고 마음을 자꾸 증장시킬 수 있는 것이 되어야 됩니다. 어떠한 아군과 적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증장시켜 놓으면, 그것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버팀목 역할을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군과 적군'은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들을 경전에서 추려보니까 보통 이 3가지로써 귀결되더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첫 번째가 자애 명상.
여기에도 적었지만 「생명의 부적은 단 하나, 자애이다」 하는 것입니다.
부적이 있으면 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잖아. 자애의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은 항상 안전하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적을 다른 데서 찾을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자애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으면 항상 부적을 지닌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뭔가 말을 할 때나 뭔가 생각을 할 때나 뭔가 행동을 할 때 ‘아, 이게 내가 자애를 지니고 자비롭게 지금 뭔가를 하고 있는가’ 하고 판단을 하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불행해지는 것은 없다는 거라.
아무리 진리를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자애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리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경전을 하나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자애를 지니지 않고는 경전독송을 하지 말아라 그럽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건데도. 내 혼자서 경전 독송하고 내 혼자서 부처님 말씀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라는 거라.
경향성입니다. 마음에 그런 자애의 마음이 항상 강하게 돼있을 거 같으면 생각하는 것들은 항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거라. 그리고 불행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해지는 것들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는 거라. 하물며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에는 꼭 같이 자애를 지니고 자꾸 말을 하도록 하고, 행동하도록 하고, 자애를 지니지 않는 상태에서는 말조차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아무리 그게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남을 비난할 목적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옳은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은 상처를 입게 된다는 거라. 그것이 틀림없이 맞는 말이라. 맞는 말인데도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악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아,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저 사람이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저 사람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저 사람이 오히려 행복해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닌다고 할 것 같으면 말을 할 때 조심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해졌을 때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너는 이런 것은 좀 조심했으면 좋겠더라. 나도 잘못하는 것들이 많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행동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애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는 발걸음 하나도 옮기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자애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행위를 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거의 대부분 보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실제적으로는 그것에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해치는 결과들을 가져오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하나의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 자꾸 할려고 하라는 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자애를 지니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의 인생을 위협하는 일들은 사라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생명의 부적은 단 하나 자애이다」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큰 글자로 적어놓았듯이, ‘무슨 문제가 일어나도, 자비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가?’ 라고 생각할 여유를 마음에 가져보라는 거라.
지금 그것을 말하고 그것을 지금 당장 그것을 해야 될 이유는 없다는 거라. 잠깐의 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녔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나서 그걸 해도 그거는 늦지 않다는 거라. 오히려 실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항상 마음에서 자애를 지니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야만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항상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어나는 마음이 악한 마음들을 알아차린다고 잘못 착각할 수가 있다는 거라.
자애의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대상을 설혹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악한 마음으로 마음이 기울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성과 도덕입니다.
감정적으로 뭔가를 자꾸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성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그것들을 자꾸 행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오히려 감정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이익이 많다.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게 이성적인 것과 도덕을 지키는 것.
도덕을 지키는 것은 여러분들 재가자들에게는 오계가 해당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는 참 계를 지키는 것이 힘들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계를 안 지켜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서 그 어기는 것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불교 공부를 하고, 왜 이런 법문을 듣고, 왜 또 수행을 하는가 하는 거라. 이 지긋지긋한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겁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으로 인해서 내가 체험을 분명하게 해서 아, 그런 번뇌들로부터 벗어나져야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인제는 어느 상태에 이르렀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걸 뒷받침해주는 것이 계라고 하는 겁니다. 계는 자세히 뜯어보면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경향짓기 위한 것들입니다. 습관들이는 것들입니다.
습관이 바르게 들어있지 않을 거 같으면 예를 들어서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찰나 간에 마음은 항상 나쁜 마음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거라. 대상을 놓치는 건 둘째치고. 나쁜 마음들이 항상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존재를 한다는 거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 내가 이 상태에 도달해야 되는데, 그 계가 딱 걸려가지고 계로 인해서 선한 습관들이 들어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나쁜 마음들이 한 찰나라도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게 탁 깨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 상태에 이르지를 못하는 거라. 그런 경우들을 자주자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지키는 것들을 자꾸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이 재가자는 이 다섯 가지의 계율을 지켜라" 하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지키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지키겠다고 결정을 하고 그것을 지켜나가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왜 현대 사회에서 그 많은 계가 안 맞는 것들이 없겠어요. 숱하게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주고 또 내가 마음에서 아, 나쁜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또 그것을 두려워하고 하는 것으로부터 방어를 해주게 되는 거라. 그래서 계만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나는 고요해. 나는 좋아. 평온해. 떳떳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계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를 보통 세 가지로 얘기를 합니다.
첫 번째가 인과관계로써의 부분입니다.
아, 내가 나쁜 행위를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나쁜 결과가 있다는 거라. 좋은 행위 할 것 같으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나쁜 결과를 안 받기 위해서 좋은 결과를 받기 위해서 계를 지킬려고 자꾸 한다는 거라. 그게 인제 계를 지키는 첫 번째 부분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계라고 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러한 세상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실천한다고 할 것 같으면 참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거라. 감옥이 필요 없고 경찰관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할 것 같으면 그마만큼 좋은 세상이 어딨어?
내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좀 더 평화롭게 만드는 것들이 계를 지키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수행에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성이 나는 것은 수행에서는 반드시 다스려야 됩니다. 남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성냄이 없는 상태에서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럼 성냄을 방어할려면 죽이지 않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된다는 거라.
또는 마음에서 훔치지 않는 것, 마음에서 욕구가 일어나는 것, 이런 것들을 방어할려면 훔치지 않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청정하게 돼있을 거 같으면 삿된 행위 안 하고 항상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져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비희사의 마음에 머물려고 할 것 같으면, 청정한 생활들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게 되지 않는다는 거라.
탐·진·치를 몰아내는 데는 계율이 바탕이 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들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해탈에 이르게 되는 데는 계율이 밑바탕이 되는구나 하고 분명히 자신이 알게 된다는 거라.
이와 같이 계율을 지키는 것도 그걸 보통 소소계, 중계, 대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와 같은 식으로 진행이 되어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수행만 무조건하면 된다? 그건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수행을 할 수는 있지. 그런데 수행의 장애는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거라. 수행하면서도 성냄이 일어나고, 수행하면서도 졸음이 오고, 나태해지는 성분들이 자꾸 길러져서 그것을 극복하기 힘들고, 그래서 올해나 내년이나 똑같이 졸음이 계속적으로 온다? 자신이 돌아봐야 된다는 거라.
뭔가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남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고 자꾸 성냄이 일어난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된다는 거라. 자신이 계를 잘 지키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끊을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거라. 그마만큼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요체다" 하고 말할 정도가 된다는 겁니다.
첫 번째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을 인격 향상을 위한 기회라고 알아라.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 기른 인격이라는 거라. 훔치지 않는 마음을 가진 것, 남을 죽이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것들이 습관화되어가지고 자신의 인격이 형성된다는 거라. 그래서 뭐든지 인격의 향상과 연결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손해가 난다는 거라. 언제나 밝게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결정하고 행동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계를 지켜서 반드시 생활화하도록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이 계를 지킴으로 해가지고 내가 행복하게 되는지, 그다음에 상대방 나의 친한 친구들이나 가족들이나 동료들이나 상대방들이 행복하게 되는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게 되는지, 하는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거라. 자신만 행복해서도 안 되는 거고, 상대방만 행복해서도 안 된다는 거라. 모든 이들이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들은 계를 잘 지킬 때 그게 가능해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부모와 가족들에게 언제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의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봤을 때 ‘아 나는 참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계를 잘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계는 반드시 지키면서 살아라.
그렇게 했을 때 마음은 청정해지게 되고 마음은 부끄럽지 않게 돼서 지금 할 일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지금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라.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법을 듣고 수행하는 것이라는 거라. 그럼 그걸 해야 되는데, 괜히 계율을 안 지킨 것이 딱 막아가지고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는데’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같이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계를 잘 지키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웃는 여유를 가질 수가 있다는 거라. 잘되지 않을 때라도 웃는 여유는 가질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게 계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두 번째 이성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계율을 잘 지키면 인생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자비의 명상을 하고, 두 번째 계를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으로부터 여러분들을 위협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세 번째가 뭐냐면 실황중계!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반드시 알아차릴려고 하라. 사띠하라는 뜻입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삶은 죽어있는 삶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백 년을 아무리 산다고 해도 하루 잘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 잘 알아차린 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은 해탈에 이를 수가 있다는 거라. 백 년을 살아도 잘살기만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또 윤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실황중계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 분명히 그것들은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어야 되는 거고, 말하고 있으면 말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걸어가고 있으면 걸어가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겁니다.
잘 알아차리도록 만들어주는 밑바탕이 자애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내가 계를 잘 지켰을 때 항상 떳떳한 상태가 됐을 때 그 밑바탕이 되도록 한다는 거라.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들은 반드시 과거로 흘러가지도 말고 미래로 흘러가지도 말고 지금 현재, 지금 현재에 자꾸 머물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실황중계를 정리를 해보면
망상에 좌우되지 않는 것. 지금 현재를 살아갈려고 해야 됩니다.
망상은 쓰레기와 같다. 여러분들에게 도움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망상을 할 경우에는. 생각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계획 세우는 것?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계획대로 된다고는 누구도 보장을 못합니다. 차라리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보다도 더 못하다는 거라.
망상에 좌지우지 안 될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지금 현재를 살아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돌아보아야 됩니다. ‘어, 지금 내가 깨어있는가?’ 지금 현재 깨어있어서 내가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육체의 움직임은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도록 하는데, 복잡하게 알려고 하지 말고 심플하게 알아라는 거라.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알고, 팔을 굽혔으면 팔을 굽힌다고 알고 폈으면 편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지, 이게 왜 펴질까? 이게 왜 굽혀질까? 그걸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움직임은 그것을 따라가면서 알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대부분은 보면 움직임으로써 거의 이루어집니다, 살아가는 것들이. 그런데 그 움직임을 알지 못할 거 같으면 항상 실수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움직임을 분명하게 단순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앉았으면 앉았다고 알고 일어섰으면 일어선다고 분명하게 알고,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알고, 이렇게 단순하게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지금 현재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계속 변화하고 불안정한 것이라고 알아라.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불안정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불안정하지 않고 딱 안정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생각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행동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변할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꼭 다리를 구부리고 있으면 괴롭기 때문에 펼려고 하는 거라. 괴롭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걸 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것은 항상 그렇게 불만족스럽다는 거라.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거는 변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변하지 않으면 그렇게 알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변하는 걸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계속 변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은 참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다고 마음속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가지고 그것을 불만족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이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내가 있고, 내가 보고, 내가 들었다고 하는 사고를 정지하도록 해야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내가 보고 들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변하는 속성을 지니는 것들은, 나라고 하는 것 특정한 것은 존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단지 내가 지금 현재 사용하고, 내가 이것들을 지금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몸들도 지금 여러분이 이용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확정돼있는 것은 여러분은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 뿐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의 재산이 확정돼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것이 나라고 하는 것이 확정돼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자꾸 소유관념을 가지고 나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피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 다섯 번째가, 지금 현재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깨달음이라고 하더라도 일래과 불환과, 예류과도 꼭 마찬가지 입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결코 진실한 것이다, 바른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것들은 반드시 정지할려고 해야 됩니다.
다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은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주관을 강요할려고 합니다. 요즘은 어린아이한테도 뭔가 자기 생각을 얘기할 것 같으면 그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다 큰 사람들한테 그것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주관일 뿐인데 그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성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강요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길을 자꾸 따라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주관으로 판단하는 것들 주관으로써 개념화시키는 것들은 그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항상 여러분들은 아직은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도 불완전한 거고 여러분들 몸과 마음도 모두 전부다 불완전한 것이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할 일이라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느낌도 불완전한 것들입니다. 자신의 느낌도 무상한 것이라고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서는 안됩니다. 좋고 싫다는 느낌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들도 무상하다고 자꾸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로 얘기해놓았습니다. 그게 실황중계라는 겁니다.
지금 현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이런 이익들을 가지게 됩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고, 지금 현재를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고, 하는 것들을 전부 다 알 수 있는 것들이 실황중계입니다.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지금 현재를 놓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 3가지 자애를 지니고, 계를 잘 지키고, 지금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는 거라. 인생이 항상 수월하고 행복해질려고 할 것 같으면 이 3가지는 반드시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우다나에 있는 글을 인용을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의 아군은 자신의 마음이다."
가장 큰 자신의 아군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이 뭔가를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기울어져 있을 경우에는, 그것이 가장 큰 자신의 아군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언제나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게으름 피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이익이다 하는 겁니다.
인생의 이익을 분명하게 알고, 자신의 마음이 곧 적과 아군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인생을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서, 인생은 여러분들 마음먹은 대로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해지고, 불행해지고 싶으면 불행해집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마음이 하는 겁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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