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에는 게으름이라는 병이 있다. (20160701. 대구)
원래 20일이 결제날이거든요, 수요일이. 교단에서는 당겨가지고 17일날 아마 하는 것 같고, 우리 붓다야나 선원은 언제 할까? (수행자 : 안 그래도 스님한테 여쭤볼려고 마음먹었었는데요.) 수요일이니까 수요일하고 가까운 목금요일, 그주 금요일날에 그렇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수행자 : 20일 21일 날요?) 그렇죠.
결제들어가면 오후에는 수행을 같이 합니다. 결제기간 동안. 수행문답도 좀 하고 그렇게 할겁니다.
자! 오늘은 제목이 「마음에는 게으름이라는 병이 있다」하는 것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게으름이라고 얘기하면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들을 게으름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만약에 돈을 벌어야 될 사람이면 돈을 벌어야 되는데 안 벌고 있다면 게으름 피우는 것입니다. 엄마가 자식을 돌봐야 되는데 안 돌보고 있으면 그것도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거는 아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부분인데, 그런데 불교에서는 게으름이라는 걸 그거 하나만 정의해놓지를 않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감정에 좌우되는 것도 게으름 부린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얼마든지 여러분 마음은 여러분이 조절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걸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그냥 한다. 만약에 낼 시험인데 오늘 공부해야 되는데 "안 해" 하고 하는 감정에 좌우돼버릴 것 같으면 공부를 안 해버리고 게으름 부리게 되고.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자기가 욕심부리지 말아야 되는데 그걸 욕심부려버리면 그걸 또 훔칠려고 한다든지.
그래서 이와 같이 탐·진·치에 좌우돼가지고 감정이 좌우되는 것도 게으름 부린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정의가 뭐냐면, 뭘 했기는 했는데 얻는 것이 없을 때,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에도 게으름 부린다 하고 얘기합니다.
업의 법칙으로 볼 것 같으면 뭔가 당연히 결과가 나오긴 나오는데, 현상적인 것으로 볼 거 같으면 분명히 뭔가 다른 결과들이 나타나야 되는데,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고는 있는데 수행진척이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시험만 보면 만날 꼴등한다, 이럴 경우에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도 게으름의 일종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어떤 경우든지 게으름은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주의하지 않으면 그 게으름을 막을 방법이 없다 하는 겁니다.
"마음이 향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길, 또 하나는 반대 방향으로 게으름 부려서 편안하게 될려고 하는 길, 그 두 가지 길이 있다.
그래서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길을 걸었다고 하면 우리는 보통 그걸 '위리야(vīri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할려는 마음이 없는 것들을 빨리어 용어로 '알라시양(ālasiyaṁ)'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게으름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게 되는 길 하고는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라.
감정에 좌우되더라도 행복하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성질부려가지고 그게 본인도 행복하게 되지도 않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안 되는 것이고. 또 마찬가지로 뭔가 결과가 나타나야되는데 수행을 어느 정도 하면 수행이 진척이 돼야 되는데, 진척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은 힘들고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게으름을 부리면 어떠한 경우든지 행복의 길과 반대의 방향으로 간다." 그게 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불교적인 정의입니다. 쉽게 말하면 해탈하고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게으름이라고 하는 건데, 그런데 게으름 안 부리는 사람 있을까?
좀처럼 드뭅니다. 본인은 게으름 안 부린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지금 아이가 아파도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나가서 회사일을 봐야 된다. 그건 첫 번째 항목에는 맞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런데 반대로 볼 것 같으면 아이 돌보는 일도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인데 그 할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거라. 그리고 감정들도 항상 일어나게 되는 거고, 또 좋은 결과들도 일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뭐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라.
보통 우리 몸에는 항체라는 것이 형성이 됩니다.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은 그 바이러스하고 싸우는 항체가 몸에서 생겨나가지고 그 바이러스를 이겼다고 할 것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똑같은 바이러스가 들어올 거 같으면 항체가 형성돼있기 때문에 인제 그 병에 걸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안되는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그게 뭐라? 감기라고 하는 것.
감기라고 하는 바이러스는 항체가 형성돼도 또 바이러스가 다른 형태로 들어오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감기는 한번 걸렸다고 해가지고 평생 안 걸리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항상 감기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감기의 바이러스와 같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항상 주의하지 않을 거 같으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일어난다 하는 거라.
그래서 게으름이라는 용어를 '알라시양(ālasiyaṁ)' 이라는 용어말고 빨리어 용어로 '빠마다(pamād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빠마다라고 하는 것은, '맛(mad)'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번뇌에 휩싸인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번뇌에 휩싸여서 탐·진·치가 일어나는 형태들 이것들을 빠마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당연히 괴로움으로 연결된다는 거라. 그걸 게으름이라고 그럽니다.
번뇌가 자꾸 일어나고 그리고 해탈에 이르는 길하고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게으름이라는 거라.
아까 예를 들었듯이 아이가 아픈데도 회사 일을 한다, 회사 일을 아무리 해봐야 해탈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거라. 내가 혹시 열심히 일해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다 게으름 부리지 않고. 그렇지만 그것도 해탈의 길과는 다른 길이라는 거라.
그런 것들을 일러가지고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은 불교적으로는 아니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해탈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길로 열심히 노력할 때를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마지막 열반에 들기 삼개월 전에 그런 얘기를 합니다.
「appamadena sampadetha(압빠마데-나 삼빠데-타)」
게으름 부리지 말고 빠마다(pamāda)의 반대 압빠마다(appamāda),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그럼 언젠가는 해탈에 이른다는 거라.
그 말 앞에는 형성되어진 것들은 모든 것들은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무너진다는 거라. 태어났으면 죽게 돼있는 거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변하는 것들은 영원할 수가 없는 거고, 그런 것들을 쫓아가지고 계속 나아가는 것은 해탈의 길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압빠마다(appamāda) 라고 하는 것들은 그래서 보통 학문적으로 '불방일'이라고 얘기를 하긴 하는데, 그거는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해탈의 길로써 열심히 나아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들은 어떤 경우들이겠어요? 사띠(sati)를 지니는 것! 그래서 알아차림을 계속적으로 지니는 것들이 게으름 부리지 않는 거라는 거라. 한순간이라도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면은 게으름 부리는 거라.
감기 바이러스는 아주 잠깐 순간에 탁 들어옵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호흡에서 코끝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으면 그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자기가 들어오는 줄을 모르는 거라. 그런데 예민한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탁 들어왔을 때 코끝에서 탁 압니다. 그래서 그걸 몰아내기 위해서 뜨거운 바람을 자꾸 일으켜준다든지 해서 그 바이러스를 몰아냅니다. 감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한순간이라도 그걸 놓쳐버릴 것 같으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나에게 바이러스가 찾아오듯이 딱 들어오게 돼버립니다.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공양 올리기 좋은 대상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느 분에게 공양 올리면 참 좋습니까?” 하고 부처님한테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는데,
첫 번째가 집착이 없는 사람. 어떠한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 나 나의 것 그리고 어떤 소유물에 대한 것들도 집착을 가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양 올리기 좋고.
두 번째가 항상 방일하지 않고 자기관찰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고 항상 사띠를 지니고 있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는 사람, 나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경우도 공양올리기 적당하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마만큼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왜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얘기할까?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럴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든지 게으름을 부릴 수밖에 없습니다.
편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편해지고 싶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다리 구부리고 앉아있으면 그냥 그대로 계속 앉아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괴롭기 때문에 편해지고 싶어서 그걸 펴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는 그것도 게으름이라고 그럽니다.
오히려 그 고통들을 알아차려가지고 마음에서 괴로운 것들을 몰아내도록 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고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마음까지 괴로워져가지고 다리를 펴게 되는 거라. 그거는 수행에서는 피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한 시간 좌선을 한다 그럴 것 같으면 한시간 동안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그 괴로움을 견뎌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은 뭐냐하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조금만 지나면 항상 게으름은 찾아옵니다. 수행이 지금 잘된다 그러면 마음은 고요해져가지고 대상을 찾을려고 안 합니다. 그럼 멍하게 그냥 있는 거라. 자기는 ‘고요하다’고 그러면서.
마음은 항상 두 방향이라. 게으름 부리는 방향이라든지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방향이라든지. 노력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고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을 분명히 알 건데 그건 모르는 거라. 그러니까 그냥 편한 상태에서 자신은 뭐 삼매에 빠진 듯이 착각을 하면서 고요하게 그냥 게으름 부리고 있는 거라.
그래서 누구든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게으름은 피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거는 인정해야 됩니다. "내 마음에는 항상 게으름이라는 병이 있다" 하고.
병이 들었으면 빨리 그 병을 나을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게으름이 아니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자! 그 프린트물 한번 봅시다.
맨처음에 부처님이 완전하게 진리를 설했고 그렇게 지도를 했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는데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인데 그것을 확인해가지고 진리에 이르는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생겨나고 많이 생겨나야 되는데, 실제로는 그런 사람은 드물다는 거라. 왜 그럴까?
경전에는 분명히 열심히 노력할 거 같으면 7년 안에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도 최대수치로 잡아가지고 7년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아니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 같으면 6년 안에도 된다. 더 열심히 하면 그보다도 더 적게 걸린다는 거라. 심지어 일주일만에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것까지도 적어 놓았습니다, 대념처경에는.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되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거라.
사람들은 가끔씩 그렇게 얘기합니다. "너무 어려워요, 부처님 가르침은."
실제로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 같은 경우에는 누군가가 출가를 한다 할 거 같으면 맨 먼저 배우는 것들이 율장을 먼저 몸에 익혀라 하고 얘기합니다. 계율을 먼저 익히고 나서 그러고 나서 경전을 자꾸 익히도록 하라. 경전이 익혀지고 나서는 그다음에 논장 아비담마를 하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만약에 예를 들어서 아비담마부터 먼저 해버렸다, 아비담마라고 하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계·정·혜에 대해서 풀어놓은 겁니다, 아주 상세하게. 그러니까 그걸 도표만 볼 것 같으면 머리 아픈 거라.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거라.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그것들을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그걸 다 알아라고 논장을 그렇게 다 해놓았겠어요? 그중에 자기가 필요한 것들만 그 속에서 발췌해가지고 알면 됩니다.
부처님이 사마타 수행법을 40가지를 해놔놨다. 이 세상에 40가지를 다 하는 수행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한테 필요한 거 한 가지 아니면 두 가지만 합니다. 그럼 한 가지, 두 가지 필요한 거 그 아비담마만 해도 돼.
그런데 논장부터 하는 사람들은 이걸 다 알려고 합니다. 지식적으로만 자꾸 할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체험하는 것들은 없고 지식적으로는 그걸 다 알려고 하니까 머리가 터지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어렵다는 거라.
순서가 잘못돼서 그런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경전에 대한 이해가 되고 나면은, 아비담마는 어렵지 않게 다가와집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필요한 것들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전체를 다 습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게 밝히지 못해서 그랬다는 것은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가끔씩은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스승이 지도를 잘못해줘서 그렇다."
스승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냥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는 역할밖에 안됩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스승 밑에서는 수행에 진척이 있는 사람이 없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진척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진척이 없다는 거라. 그것은 스승이 잘못이 아니고 하는 사람이 잘못하는 것이지, 학교에서 선생님이 잘 못 가르쳐준다고 해가지고 그반 애들중에서 전교 1등이 나오지 않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애는 그것 뿐아니라 다른 것들도 자기가 습득하고 해서 충분히 전교 1등이 나온다는 거라.
스승은 단지 그 가는 길만 가르쳐주는 것뿐이지, 자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가지고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낱낱이 알아가지고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건 자기가 해야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대상으로써 보게 될 때 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스승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또 그렇게 더디느냐 하는 거라.
그거는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게으름이라고 하는 거라.
3페이지에 보면 "게으름은 단순한 성격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모든 생명에 있는 뿌리 깊은 본능의 하나이다."
사는 것은 괴로운 건데 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거라, 부정해버린다는 거라. 게으름이 있는데도 나는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고 부정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거라. 변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항상 영원하길 바란다는 거라.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거라.
똑 마찬가지로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놔둬버릴 것 같으면 그대로 인간의 본능대로 그대로 살게 돼버리는 거라. 자기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게으름의 일종인 것이지, 해탈로 나아가는 길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 게으름이라는 병은 고쳐야 됩니다. 누구든지 죽는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날 것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해진다는 거라.
우리 선원에 얼마 전에 누군가의 부모님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우리 부산에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한 일년반 정도 다녔을까 2년 정도 다녔을까, 그랬는데 매주 화요일만 되면 와서 항상 수행을 해요.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스님이 가서 할 일이 뭐 있어? 가서 조의금을 내고 나서 스님이 그냥 조의금만 내고 나올 수는 없으니까 오후에 갔는데 뭘 먹고 올 거야, 뭘 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염불 한마디 해주고,
그러니까 누구든지 죽음 맞는다는 것을 해주고, 그 유가족들한테 여러분들도 죽음이 항상 찾아오는 거니까 그걸 부정할려고 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좀 더 선한 일을 하면서 잘 살도록 해라 하면서, 그 공덕들을 돌아가신 분께 자꾸 회향하도록 하라 얘길하고 왔어요.
그런데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삼일 동안 그러고 나서 딱 끝냈다는 거라. 스님 한번 다녀가고 나서 그것으로 자기 가족들은 만족한다는 거라. 49재도 필요 없고 따로 묘를 써가지고 하는 것도 필요 없고 그냥 화장해가지고, 누구든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고 돌아가신 분을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살려낼 수 없는 분한테 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거고,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업에 따라 다음생을 태어났는데 내가 49재를 한다고 해가지고 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게 필요 없다는 것을 아는 거라.
그래서 그냥 스님 잘 보내고 잘 털고 왔습니다. 그냥 그것으로써 종쳤습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참 잘했다. 참 잘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살아있을 동안에 더 열심히 살려고 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것들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필요 없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은 하지 않고 차라리 그것보다는 다른 것들을 한다는 거라.
게으름도 꼭 마찬가집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이 그것으로부터 피할려고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자꾸 그걸 합리화시키는 거라. ‘나는 지금 게으름을 안 피우고 있다.’
불교적으로는 그건 틀림없이 게으름인데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일어나고 나서 내가 항체가 생기면 안 생기는 것이 아니고, 감기 바이러스와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끊임없이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끊임없이 나는 그 게으름하고 싸워야되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래서 게으름은 열심히 수행해야 되는데 수행하지 않게끔 만들어줍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그건 줄 알고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우스개소리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이드신 분들, 이중에도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60, 70 넘어되는 분들, 태국 같은 데서는 그런 얘기들을 우스개소리로 잘합니다.
"아쉽겠지만 열심히 노력해봐야 깨달음에 못 이릅니다. 그러니 그냥 선한 마음 열심히 가지고 남들한테 피해 안 주고 잘 살도록 하십시오"
그런 얘기를 지금도 자주 합니다. 그건 왜 그럴까? 시기를 놓쳐버렸다는 거라.
공부도 공부할 시기를 놓쳐버리고 나서 나이 들어가지고 할려고 하면 되게 힘드는 거라. 수행은 안 그럴 것 같애요? 젊을 때 사실은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 것이 하루라도 빠른 거라. 그리해야 빨리 시작을 하게 되는데 자꾸 미루는 거라. 그게 게으름이라.
시기를 자꾸 미루고 시기를 놓쳐버릴 것 같으면 그거는 게으름피우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 변명을 합니다. 뭐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법문 들을 기회가 있다, 그러면 그 법문은 다른 때는 없습니다. 그럼 그 시기에는 당연히 법문을 들어야 되는 거고, 수행할 시기에는 수행을 해야 되는데 그냥 다른 일 때문에 그걸 놓쳐버리는 거라.
본인에게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게으름 부리고 있다는 거라. 하기 싫은 거라. 듣기 싫은 거라. 수행하기 싫으니까 수행 안 하고 그냥 가는 거라. 뭐 다른 핑계 대면서. 자꾸 놓쳐버리는 거라.
아마 여기 태반은 그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열심히 해봐야 깨달음에 못 이르니까 포기해. 포기하라니까 아까워? (수행자 : 예) 그럴 것 같으면 지금이 빠른 시기라! 시기는 그것을 안 것이 빠른 겁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시기를 놓친 것들이 얼마나 되는가.
굉장히 많을 겁니다. 돌아보면 아,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했을 거 같으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 더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가는 방향으로, 부처님 가신길을 조금 더 걸어갔을 건데, 나중에야 돌아옵니다.
태종사에 있는 분이 가끔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있을 때 그냥 수행하라 해쌌고 가르쳐 줄 때 그때 할 건데 고마 스님 떠나고 나니까 인제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스님 다시 오면 안 됩니까?
자기가 시기 놓쳤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걸 알았을 거 같으면 지금 있는 곳에라도 와서 법문을 듣고 수행하면 되는데, 그건 또 안 해. 자기는 태종사에 계속 다니고 싶은 거라. 그런데 그거는 아쉽다고. 아는 것이 바르다고 알 것 같으면 태종사 다니면서 다니면 누가 뭐라 하나? 다니더라도 법문 듣고 수행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가서 해야 되는데 안 하는 거라.
얼마 전에 어느 스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언제 또 올지 알아서 ‘아, 내가 그 수행도 해보아야 되겠다’, 또 ‘이런 집중수행도 해보아야 되겠다’ 할 것 같으면 그냥 가면 되는데 오만 핑계 다대고 그것도 시기를 놓쳐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게으름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때는, 그 시기는 항상 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가 올 때 항상 해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 숨 쉬는 것, 그거는 지금 그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똑같은 숨 쉬는 것은 일평생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또 놓쳐버리는 거라. ‘어, 내가 숨 쉬는 거 놓쳤네’ 내가 지금 행하는 거, 그것도 일평생 딱 한 번 있는 것들입니다. 그걸 또 놓쳐버리는 거라.
알아차림이 없이 지내버릴 것 같으면 그건 백년이 지나더라도 항상 그 시기를 놓쳐버리고, 그러고 나서는 뒤늦게 또 나쁜 마음인 후회하는 마음들이 생기는 거라. 후회라도 안 할 거 같으면 마이너스 1이라도 되는데, 자꾸 후회하는 습관들이 되니까 마이너스 10까지 돼버리는 거라.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시기를 놓치지 않을 때 그 게으름 부리지 않는 첫 단추를 끼우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변명. 시기를 놓치는 거와 동일한 겁니다.
변명거리를 찾는다. 찾으면 당연히 자기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러면서 그걸 자꾸 정당화할려고 합니다. 변명하는 습관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게으름 부리는 것이 많습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 보면 꼭 그럽니다. ‘배가 아팠어요. 뭐 어쨌어요.’ 계속 그런 변명을 찾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려고 해야 됩니다. 변명을 찾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안 했으면 안 했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되는 거라.
“아, 내가 알아차림 놓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알아차리면 되는데, 그러면 적어도 그때부터라도 시기를 바르게 타는데 그걸 변명하고 있는 거라. “나 알아차리고 있는데요.” 성질내고 있으면서 “알아차리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계속 성질을 내고 있는 거라.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성질이 계속 일어나는데도, 그걸 자꾸 변명거리로 삼는 거라. 자신은 알아차리고 있다면서.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이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생기자마자 불선한 마음인 성질-화내는 것은 탁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다른 마음으로 대체되는 거라. 마음은 한순간에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런데도 알아차렸다고 자꾸 변명할려고 하는 거라.
변명거리를 찾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나쁜 행위를 했으면 나쁜 행위를 했다고 분명하게 인정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선한 마음을 내도록 하면 되는 거라. 알아차림을 놓쳤으면 알아차림을 놓쳤다고 분명하게 인정하고 다시 알아차림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라.
그래야 되는 것이지 변명을 찾으면은 계속적으로 나쁜 일 하면서 그걸 정당화할려고 하고 알아차림이 없어도 그냥 그것이 알아차리는 것처럼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게 게으름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게으름의 세 번째 부분이 뭐냐면, 벼락치기 하는 것.
실컷 놀다가 한 번에 뭘 할려고 하는 것. 요즘은 세상이 편해지기 때문에 간단한 걸 가지고 뭘 다 해결할려고 합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평생 알약 하나만 먹으면 밥 안 먹어도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하루 종일 (치를?) 겁니다. 실제 그게 인간의 게으름인데도 그 게으름을 즐기는 거라. 그거는 불교에서 게으름이라고 그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때에 그것을 해야 되는 것인데 하지 않고 나중에 모두어서 하는 거라. 병이 생기기 딱 좋은 겁니다. 세 끼 굶었다고 해가지고 한 끼 동안에 세 끼를 먹었다, 그럼 병 생기는 건 당연한 겁니다. 왜 나눠서 먹어야 될 걸 나누어서 먹지를 못하고 한 번에 먹느냐는 거라. 그건 병 생기는 거라.
몸에만 병이 생기는 것 같애요? 마음에는 그거보다 더 큰 병이 생겨버립니다. '그리하면 된다'는 병이 생겨버립니다. 한끼 두끼 굶어도 마지막 끼에 많이 먹으면 된다는 마음이 생겨버릴 것 같으면, 앞에는 계속 게으름 부릴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버린다는 거라. 벼락치기 할려고 하는 것들도 게으름을 일으키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게으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 일화를 적어놨습니다. 3개월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숲에 들어가서 매일 같이 수행을 한 사람들은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한사람은 숲에 들어가지 않고 나는 부처님 옆에 있을 거 같으면 더 깨달음에 이르기 쉽다 하면서 부처님 옆에서 부처님만 보고 있는 거라. 수행은 안 하고.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부처님을 안 보고 3개월 동안 자기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니까 그 사람들을 보니까 부럽거든. 자기도 그러면 부처님 위신력으로 하룻밤만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지 하고 노력을 하룻밤만에 할려고 합니다. 3개월 동안에 열심히 쉬고 있다가.
부처님 본다고 해가지고 깨달음이 이루어져? 경전만 읽고 외운다고 해가지고 깨달음을 이루어져? 자기가 해야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밤에 하다가, 태국이나 스리랑카 버마나 이런데 보면 경행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행하는 장소가 따로 딱 정해져있습니다. 대부분이 지대보다 조금 높습니다. 그러니까 밤에 안 보이니까 경행대 밖으로 떨어져버리는 거라. 다리가 딱 부러지는 거라.
게으름 부리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을 망칠 뿐 아니라 그렇게 다리 부러진 스님을 보고 다른 스님들이 그걸 안 돌봐줘? 돌봐주다 보니까 그날 공양청이 있는데도, 그 스님은 공양청 못가는데 이 스님 놔두고 어떻게 갈 거라? 아픈 사람 놔놔놓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피해입히게 되는 거라.
벼락치기 한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자기 혼자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고 전염병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큰 피해를 입히게 된다는 거라.
집에 게으름뱅이 하나 있으면 집안 식구가 다 게으름 부리게 되는 거라. 집에 살찐 사람이 하나 있을 거 같으면 더불어서 다 살찌게 되는 거라. 그와 같은 습관으로 다 바뀌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게으름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향하는 2가지 방향, 게으름 부리는 방향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방향, 그것이 4가지 노력이라고 하는, 4정근이라고 하는 방향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들입니다. 선한 것들을 자꾸 일으킬려고 하고, 선한 것들은 자꾸 할려고 하고, 악한 것들은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악한 것들이 일어났으면 그걸 막을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반대 방향으로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거는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 마음은 언제든지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돼있고, 게으름 부리게 돼있다는 거라. 그걸 막지 않을 거 같으면 감기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마지막에 열반 3개월 전에 유언과 같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름 부리지 마라, 열심히 노력하라."
여러분도 앞으로 한 2주 정도 법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스님 어디 간다고 올려놨었어요? (수행자 : 예. 4일날 태국 가신다고)
아, 그래. 그래서 사사나 스님 전화가 와가지고 “스님 태국 가신다면서요?” 그러는 거라. 네가 어떻게 알았냐 그러니까,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러는 거라. 붓다야나 선원에 적어놨더라고, 뽀록이 나버렸어요. 사람들에게 그런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얘기 안 하고 떠나면서 얘기할려고 했더만, 어쨌든 2주 동안 스님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스님이 없어도, 부산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잘하고 있는데 스님이 없을 때는 스님 법문 틀어놓고 법문을 대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들끼리 또 수행을 합니다. 그렇게 대신 해가지고 게으름 부리지 않고 법회들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주 후에 정확하게 스님이 7월 16일날 돌아오니까, 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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