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은 망상의 부산물이다. (20160603. 대구)
오늘은 「영혼은 망상의 부산물이다」 하는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영혼이 있습니까? (수행자 : 아니요) 확신해요?
(수행자 : 실체하는 것은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셔서...) 그건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거고.
만약에 영원불멸하고 변하지 않는 뭐가 있다고 만약에 가정하게 된다면 그게 여러분들하고 관계있습니까? 변하지 않는 건데 여러분들 소원은 어떻게 들어줘? 뭔가 그 자체만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는 뭔가가 들어갈 수도 없고 빼낼 수도 없습니다. 다이아몬드에 뭔가를 집어 넣을려면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만약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게 여러분들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여러분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소원을 들어주겠어, 아니면 그것이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죽고 나서 그것이 나한테서 빠져나가서 영원불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 아니야?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하죠?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하도 무아에 대한 것들을 자꾸 듣고 하니까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 하는 걸 이해는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영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는 아니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혼이라는 개념도 자꾸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자이나교를 예를 들어보면은 영혼이 여러분에게만 있다고 얘기를 안 하죠? 어디에든 다 있다고 그럽니다. 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그러고 심지어 먼지에까지도 영혼이 있다고 그럽니다.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그것이 실체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먼지가 어떻게 존재를 하고 물이 어떻게 존재를 하느냐 생각을 하게 되고 관념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겠죠.
그래서 자이나 수행자들은 몸에 먼지가 묻어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걸 털어내면 죽이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먼지가 묻어도 안 털어냅니다. 그래서 옛날에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몸이 되게 더러웠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그렇게 먼지에도 영혼이 있다 해서 그 영혼을 죽이기 싫다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옷을 입어라. 그러면 먼지를 털어낼 이유도 없는 거고 옷은 나중에 벗어버리면 될 거니까 갈아입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자꾸 비판을 하게 되니까, 나중에는 자이나교도들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씻지도 않는 형태를 취하다가 나중에는 바뀌어서 깨끗한 흰옷을 입는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 자이나교도들도 그렇게 바뀌게 되고. 그게 자이나교 같은 경우입니다.
'모든 곳에는 영혼이 깃들어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런 영혼이 있다고 상정을 하게 됐을까?
여러분은 죽고 나면 끝이다 할 것 같으면 허무하겠죠? 그래서 자신이 윤회하는 것들을 상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힌두교도든 자이나교도든 기본적으로 윤회하는 것은 누가 윤회합니까? 여러분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변하지 않는 영혼이 윤회를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죽고 나면은 어느 종교에서는 하늘나라로 영혼이 간다든지, 이렇게 상정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속에 있던 그 영혼이 빠져나가서 그렇게 윤회를 한다고 여기게 되는 거죠.
불교는 윤회한다고는 얘기하지만, 그런 영원불멸하는 뭔가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얘기 안 하죠? 불교의 윤회는 그렇게 얘기 안 하죠?
불교의 윤회는 여러분이 지은 행위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이 또 다른 생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하고 다른 것 같지만 어찌 보면은 여러분의 연속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개체지만.
그래서 똑같은 윤회라고 하더라도 불교에서 보는 윤회와 다른 종교에서 보는 윤회는 그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차이가 있죠?
불교에는 어떤 특정한 개체가 윤회한다고 보지 않고, 다른 종교들은 특정한 어떤 개체가 윤회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어떤 것, 그것이 여래장이라고 하든 불성이라고 하든 영혼이라고 하든 진아라고 하든 뭐든 간에 그것이 좋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거라? 그건 여러분들한테 존재한다고 일반적으로 얘기합니다. 어디에 존재하는 거라? 여러분 몸에 존재하는 거라? 마음에 존재하는 거라?
경전에 그래서 영혼 영혼 하는데 영혼이 어디 있는가? 해부를 해봅니다. 죽을 때 그러면 영혼이 빠져나오는가? 실체하는 거 같으면 실체하는 것이 분명히 보여야 된단말이라. 실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런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고 실체하는 존재를 얘기합니다. 그럼 탁 죽으면 뭔가가 영혼이 어떤 형태로든 쏙 빠져나가야 될 거 아니라? 탁 죽어보니까 그렇게 빠져나가는 게 안 보이는 거라.
그럼 몸의 어디에, 신체의 어디에 존재하는 거 같아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아주 미세하게 조사를 해봅니다. 해보면 될 거 아냐, 눈 하나씩 다 조각내보면. 조각낼 때 실체하는 것들은 반드시 빠져나가게 되는데, 그런데 몸을 다 그렇게 분해를 해봐도 그것이 존재를 하지 않거든.
그러면 마음에 존재하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존재한다 그럽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또 어디에 있는 건데? 어떤 사람 어떤 종교에서는 심장에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존재한다. 그러면 그 마음이 존재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마음도 아까 몸을 해부했을 때 뭔가 실체가 드러나야 되는데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거라. 쉽게 말하면 뭔가 영원불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으로 개념으로써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라는 거라.
그런데 왜 3000년 넘어 쭉 내려오면서 그 사상이 그대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올까? 지금도 여러분들도 마음속에서는 테라와다를 배우다 보니까 영혼이라는 실체가 없다 하는 사실은 알지만, 그거 그대로 그냥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게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죽고 나서 49재 할 이유가 없지.
그렇게 된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들 뭔가 행위를 했다. 행위를 하고 나서 뭔가를 ‘아, 내가 그때 무슨 행위를 했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하는 것은 실제 그 행위하고는 다른 거죠? 그거는 내가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실제 행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죠. 단지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내가 뭔가를 했지’ 하고 마음속에 딱 담아두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실재하는 겁니까? 대답 못 하겠죠?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꼭 마찬가집니다.
뭔가를 하고 나서 뒤에 뭔가를 생각하고 하든지, 개념화시켜가지고 가슴에 딱 담아두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는 거라.
‘누가 나쁜 놈이다.’ 뭔 나쁜 행위를 했는지는 몰라도 내 마음속에는 ‘저놈은 나쁜 놈이다’ 마음을 먹게 되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그게 실재하는 것 같으면 항상 나쁜 놈이라는 것이 나에게 존재를 해있어야 됩니다, 그런 변하지 않는 것들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오해가 풀렸다. 그럼 그 사람은 그전에는 보는 족족 나쁜 놈이었는데 이제는 나쁜 놈이 아닌 거라.
변하지 않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생각도 바뀌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바뀐다는 거라. 그런데 영원불멸하다는 것은 실제로는 없는데도 자신은 그렇게 가슴에 영원불멸하도록 담아두고 있다는 거라.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나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단지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조건으로 인해서 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것뿐인데, 그 마음이 10년 후의 마음하고 똑같다고 자꾸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럼 10년이 지났든 20년이 지났든 그 사람을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왜 그렇게 착각을 하게 될까? 변화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무상하다고 변화하는 것이다 하고 알 것 같으면 그거는 그런 실체라고는 생각을 안 할 거라. 단지 그 조건에서 그때 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고 생각한 것뿐이라고 알지 그것이 항상 실체로써 존재하지는 않게 되는데, 변화를 모르는 거라.
여기 불이 들어와있습니다. 이건 지금 보는 거나 아니면 1분 후에 보는 거나 똑같이 불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은 끊임없이 뭔가 전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면서 계속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변화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 보는 거나 1분 후에 보는 거나 계속 불이 들어왔다고 알게 되는 거라.
만약에 이것들을 전기를 중간중간에 자꾸 탁탁 끊어준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럼 어떻게 될까? 안 그러면 이걸 천천히 한다든지. 그럼 이거는 실체가 있다고는 얘기를 안 합니다. ‘불이 자꾸 들어왔다가 끊어지네’ 하고 얘기하지 ‘항상 켜져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 마음이 그런 변화를 따라잡을 만큼 예리해져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 이거는 항상 존재해있는 것은 아니네’ 하고 알게 되는 거라.
그걸 부처님은 「무아」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무아인 것을 알 것 같으면 적어도 영혼도 그와 같이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 무아는 어떻게 해서 알았어요? 실체가 없다는 것은? 변하는 것들을 보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는 그 변하는 것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아, 좀 안 변했으면 좋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그렇게 안 변하길 바라는데 이거는 저절로 자꾸 변하고 있단 말이라.
그걸 보고 ‘아, 참 실체라는 것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거 변하지 않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내 것이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되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거라.
그래서 고(苦) 불만족이라고 하는 것들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무아를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무상은 곧 고이고 고는 곧 무아입니다. 삼법인은 이렇게 한 사이클을 이루게끔 되는 겁니다.
적어도 그렇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개념화시켜서 만들어낸 것뿐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안되죠?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 생각 없이 걸을 때는 내가 왼발을 걸었는지 오른발을 걸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은 스스로 걷는 것을 알 거 같으면 내가 왼발 걸을 때는 왼발 걷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똑같은 속도로 걸어도.
그런데 왼발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도 개념입니다. 왼발은 실제로는 발을 내리고 들어올리고 아니면 나아가고 하는 과정들입니다. 그 과정들이 자꾸 변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걸 그냥 우리는 왼발이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걸을 때 왼발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발을 들어올린다고 알고, 나아간다고 알고, 내려놓는다고 알고,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왼발이라는 개념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변하는 걸 모르면 적어도 그렇게는 하라는 거라.
뭔가 자꾸 개념화시키고 실재하는 것처럼 자꾸 인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천천히 해보라는 거라. 천천히 해보면 아, 이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일뿐이다 하고 알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자꾸 천천히 하라 그러는 것입니다. 뭔가 움직이고 하는 것도 천천히 하고, 무언가를 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뭐든지 천천히 자꾸 해보라는 거라. 그리고 천천히 하면 당연히 그것을 구분해서 보게 된다는 거라. 발을 들어올리는 거하고 내려놓는 거하고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들어올리는 걸 알고 내려놓는 것을 알 거 같으면 그게 변하는 것들이라고 분명하게 보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그렇게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게 기본적으로 망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봅시다.
실체하는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뭔가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데 그걸 뭔가 콘트롤 하는 것이 있을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럼 그 콘트롤을 하고 있는 것은 보고 듣고 맛보고 할 때 그것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실제 볼 때 냄새맡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냄새도 들어오고 보이는 것도 보이고 들리는 것도 들리게 됩니다. 마음을 그쪽에 두면 당연히 그것들을 알게 됩니다. 뭔가 나라고 하는 것들,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들을 콘트롤 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걸 한꺼번에 다 알아야 됩니다. 그게 맞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러분들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
마음은 한 가지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 찰나 간에 하나밖에 몰라. 볼 때는 보는 것밖에 몰라. 그럼 영원불멸하고 뭔가 절대자인 것처럼 돼있는 것은 가짜배기라는 거라.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한꺼번에 다 못해.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의 기능은 그와 같습니다.
마음의 기능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아, 그 마음도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찰나 간에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이구나’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것일 뿐인 것이지 그것이 무슨 그 보는 마음이 특정한 존재가 있어 그걸 볼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보인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라. 하나의 현상에도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다 콘트롤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정부에도 대통령이 있다고 해도 대통령이 여러분들 뭐 하는지 다 압니까? 모릅니다, 그거는. 재정부는 재정부대로 할 일이 있는 거고, 기획부는 기획부대로 할 일이 있는 거고, 단지 대통령이 그걸 콘트롤 한다? 콘트롤 하긴 하겠죠. 단지 그것은 중복되지 않게끔 하고 이런 것들을 콘트롤 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 알고 있어가지고 그것들을 지시를 내려준다? 아마 그러면 그 대통령은 진짜 절대자가 되겠죠. 아마 그런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대통령을 되게 미워할 거라. 지금 인터넷으로 여러분들의 모든 사생활들을 본다 할 것 같으면 되게 싫어할 거라. 그런데 왜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절대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자꾸 개념화시키냐는 거라.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상주하고 변하지 않는 어떤 모든 것들을 콘트롤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관념들이 있을 때 그런 관념들은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요즘은 여러분들 크리스마스날 되면 산타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는 건 압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만약에 뭔 선물이 있으면 산타가 갔다줬어 그렇게 하니까 산타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산타 분장을 하기도 하고 산타에 대한 영화가 나오기도 하고 에니메이션이 나오기도 하고 뭐 그렇게 합니다. 그런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산타가 있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겁니까 그게? 그거는 산타가 있다는 증명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실재하는 산타가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개념적으로 뭔가를 만들어가지고 영혼이 있다고 아무리 얘기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써 존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다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보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반드시 즉시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또 보는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났다가 또 그것도 즉시 사라져버립니다. 꼭 반딧불이 깜빡깜빡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용을 줬을 때 빛이 팍 났다가 그런 조건이 없으면 반딧불은 그 빛을 착 잃어버립니다. 또 다르게 용을 줬을 때 또 빛이 탁 났다가 그 조건이 사라져버리면 불빛도 같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마음은 원래 그런 겁니다. 조건 따라서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것밖에 없다는 거라. 그거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나라고 하는 것들이 실체가 있어서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이 실체가 있다고 아니면 진아가 있다고 하는 것들은, 뒤에서 쫓아와서 튀어나오는 도깨비와 같다" 그렇게 주석서에는 돼있습니다.
실제 나는 뭔가 뒤에서 나를 쫓아와서 팍 뭔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거라. 실제 그러고 나서 무서웁기는 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그 도깨비가 안 보여. 그게 실체하는 것이면 누구든지 다 봐야 되는 것인데 그렇게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또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경험한 외에 인간이 만들어낸 환각일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환상이라는 거라.
그런데 환상이라고 하는 것도 불교와 다른 종교가 보는 것이 다릅니다.
"모든 것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환상이다" 하는 것과, "모든 현상에는 나라고 하는 특별한 것이 존재를 하는데, 지금 내가 더러워지고 하는 것들은 그 실체를 감추는 것이다 하고 생각해서 진아를 감추는 것이라고 해서, 그 나라고 하는 것들 실재하는 것들이 환상이다 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는 거라.
"개념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윤회하는 주체도 다른 종교에서는 실재하는 무언가 나라고 하는 것 진아라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윤회하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라.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 따라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윤회에 대한 설명들도 불교와 다른 종교는 그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흐름은 불교하고는 정반대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음에 나아가는 가르침, 아라한에 이르는 도를 '빠띠소-따 가-미(Paṭisotagāmi)' 그렇게 얘기합니다.
'빠띠'라고 하는 것은 반대방향으로, '소따'는 흐름입니다. '가미'는 간다는 뜻이고, '반대의 방향 흐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영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반대 '영혼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생각할 것 같으면 적어도 불교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참 그러기가 쉽지 않죠? 쉽지는 않는 거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지만 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참 힘들다”하고 얘기합니다.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기 떄문에.
그래도 어떡하나? 여러분이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영혼은 단지 내가 만들어내는 망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부산물일 뿐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각각을 적어놨습니다.
"느낌이 영혼이다. 아니면 마음이 영혼이다. 아니면 영원불멸한 뭔가가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을 해놓은 글을 거기에 적어놨습니다.
3페이지에 보면 「영혼이 영원불멸하고 절대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면 사람이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영혼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악행을 하든 선행을 하든 그것은 영혼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영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회는 참 어려운 사회가 될 겁니다. 도덕에 대한 거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게끔 됩니다. 또는 우리가 하는 행위에 의해서 영혼이 더러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영혼은 참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거라. 그러면 더러워졌으면 입은 옷 벗어서 세탁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벗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뭐 좋다고 우상숭배 하듯이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필요가 뭐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영혼은 더러워지거나 아니면 청정하게 만들거나 그럴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은 아니라는 거라. 실제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영혼이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영혼도 변화한다는 의미라는 거라. 그런데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논리로 이걸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라고 하는 것이 다른 데서 말하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들은 보통은 느낌으로 감각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감각이 영혼이다 하는 것도 틀린 것이다 하는 것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그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거라. 그걸 쭉 논리적으로 적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지식적으로만 영혼은 실체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고, 무상한 성품을 자꾸 보도록 해야 됩니다. 무상하다고 알 것 같으면 ‘아, 그런 실체는 없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냥 한 3000년 4000년 전부터 무수하게 망상 지으면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자꾸 여러분들은 영원하고 싶고 안 죽고 싶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될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하지도 않고 반드시 죽게 돼있습니다. 그럼 그거는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이지, 그거는 받아들이면서, 영혼도 영원히 있다는 것도 같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아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들은 증명하지 않는 채 영혼에 대해서 말한다.
• 무상은 곧 괴로움이며 괴로움은 곧 무아입니다.
• 무아는 인연론입니다.
조건 따라서 일어나고 조건 따라서 사라지는 것,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거라.
• 무아를 아는 사람은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런 해탈에 이르게 됐을 때 아, 이제는 나라고 하는 것, 실체는 없다 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은 영혼도 다 포함이 되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영혼은 망상의 부산물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시는 영혼에 대한 것들을 자꾸 마음에 담아두려 해서는 안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저는 하동쪽에서 공부할 때 본성을 본다고 이렇게 하잖아 예. 그러면 저희들은 본성이라는 게 뭔 (도?)라고 생각을 했는데 저는, 그거하고는 지금...
스님 답변 : 본성이 실재하는 겁니까? 그것도 변하지 않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맞지 않는 거고.
본성이든 불성이든 여래장이든 그거는 다 개념일 뿐입니다. 영혼을 만들어낸 것도 개념인 거와 마찬가지로 개념가지고 그렇게 붙잡고 자시고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본성 보니까 본성이 어떻든가요?
수행자 : 저는 거기까지는 안 가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 :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마음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왜 부처님이 마음에 대해서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마음의 요소 심소라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마음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를 해놨겠어요? 그냥 한마디로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하고 한마디 하면 끝이지. 경전을 다 뒤져봐요? 그런 어떤 본성이 있다는 얘기를 부처님이 한마디라도 한 적이 있는가?
수행자 : 그런데 대승쪽에서는 법문 들으면 본래 법신은 청정하다고 그렇게 법문 하잖아 예.
스님 : 힌두교 사상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불교가 그렇게 타파하고 깨부순 힌두교사상을 그대로 들고 온 겁니다. 원래 대승불교가 만들어지면서 인도에서 초기불교는 이미 스리랑카나 남부쪽으로 다 물러나버리고 사라진 상태에서, 불교가 유지하기 위해서 힌두교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신이라는 사상을. 그래서 삼신사상 보통 여러분들이 법신 보신 화신 하는 삼신사상들이 힌두교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래서 그 삼신사상을 받아들일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변하지 않는 뭔가 특별한 것들이 있어야만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힌두교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럼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럼 그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는 거라.
수행자 : 그럼 기독교에서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거네요?
스님 : 그건 내가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을 뭘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변하지 않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도 개념입니다. 본성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영혼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있어야 되는데, 여러분들한테 내가 첫째로 체험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환상으로 내가 체험하는 것 외에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있습니까? 만약에 체험을 했다 치자. 그러면 그 체험은 나만 체험할 수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도 다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지. 본성이 진리라고 할 것 같으면 진리는 누구에게나 통용되어야 되는 것인데, 왜 이 사람의 경험하고 저 사람의 경험하고 다 다르느냐는 거라, 그거는 개념일 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진리는, 실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발견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적용이 돼야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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