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인생을 위협하는 적 (20160610)

담마마-마까 2022. 3. 26. 09:10

* 인생을 위협하는 적 (20160610)

 

우리들 주위에는 인생을 위협하는 경쟁 상대나 적의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이 적을 몰살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모두 아군으로 바꾸어 버려야 하는지 어느 쪽의 삶의 방법을 걸어가야 할까요? 또한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불안을 부추기거나 낙담하게 하는 자신이라고 하는 적이 있습니다.

 

몰살 작전은 항생 물질과 약물, 세균전 등으로 몰살시키는 방법입니다. 대테러 동맹과 테러 집단, 이러한 관계에서 보이듯이 특정한 생명을 이 세상으로부터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마음속에 사는 검은 마라를 쓰러뜨리는 일도 어려운 일입니다.

 

외부의 세계를 「적·아군」으로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것은 사는 것을 복잡하고 어렵게 할 뿐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적·아군」은 자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무지, 탐욕, 성냄, 질투, 적의, 고만, 무기력, 나태, 후회 등에 의해 「마음」의 방향성을 결정하면, 그 「마음」이 자신에게 있어서의 최강의 「적」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적으로부터는 도망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적」을 가진 사람은 주위의 세계도 살기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물(현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는 지혜, 자애, 배려, 상부상조, 정진, 노력, 밝음, 겸허 등으로 「마음」의 방향성을 정하면, 그 「마음」 자체가 자신의 최강의 「아군」이 됩니다.

그 「아군」은 결코 자신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아군」을 가진 사람의 세계는 주위도 자신의 행복을 가져오는 「아군」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세계를 「적·아군」으로 구별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일은 멈추고, 내재되어있는 진정한 「적·아군」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기에 모든 것을 아군으로 만드는 작전은 불교가 채용하는 삶의 방법이 됩니다. 불교의 실천으로서 자비의 명상, 이성과 도덕, 실황중계라는 3가지 작전으로 모든 생명을 아군으로 만들고, 마음의 검은 마라도 쓰러뜨려 인생의 완전 승리자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1. 자비의 명상-생명의 부적은 단 하나, 자애입니다.

 

이것에 의해 현실에 있는 적은 모두 아군이 되어 줍니다.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부정하는 마라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게 됩니다. 자비의 명상에 의해 어느 생명도 행복하길 바라고 아프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비록 싫은 사람이라도 살 권리를 빼앗을 수 없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 결과 어느 생명도 행복하면 좋겠다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됩니다.

 

더욱 더 실천을 계속하면 자신의 생명은 주위의 생명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에, 어떤 생명이라도 행복하면 좋겠다고 하는 기분이 일어납니다. 나도 다른 생명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지만 여러분도 각각 노력해 주십시오 라는 기분입니다. 이제 이렇게 되면 자아의식도, 적아군도 넘어섭니다. 여기까지 마음이 성장하면 주위의 적은 없어지고, 서로 서로 지지해서 서로 살리는 아군투성이라는 마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① 무슨 문제가 일어나도, 자비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지? 라고 생각할 여유를 마음에 가져 봅시다.

 

2. 이성과 도덕-계가 없으면 붓다의 가르침은 실천되지 않습니다.

 

우선 불교에서는 언제 어떠한 때라도 번뇌는 용인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탐욕, 성냄, 무명의 마음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라도 억제하거나 떨쳐버리는 것, 이것이 없으면 불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비록 번뇌가 강해도 그것을 뛰어넘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것, 번뇌로 얼룩지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 이것이 오염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청정하게 되어 가는 길, 해탈에의 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번뇌를 용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번뇌를 그대로 두고 알아차림(사띠)의 기술만을 배웠다고 해도 윤리적인 가치의 판단 기준을 가지지 않으면 잘못된 알아차림(micchāsati:사념)이 되어버립니다.

 

재가자가 지켜야 할 5개의 계가 있습니다. 죽이지 않는다(=생명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훔치지 않는다(=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 않는다), 불륜이나 잘못된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술이나 마약 등으로 이성을 잃는 상태를 피한다고 하는 오계입니다. 이것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 명상수행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 한 괴로움을 없애는 명상수행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계를 무시하면서 나는 행복하게 되고 싶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을 걷고 싶다, 라고 바라도 무리라는 것이 불교의 결론입니다.

 

특히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사고를 멈추고 다만 알아차립니다. 말하자면 판단 정지 상태가 됩니다. 만약 번뇌를 태연하게 긍정하는 가치관의 사람이 순간순간 어떤 판단도 하지 않으면 당연히 지금까지의 버릇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지 모르는 매우 곤란한 일이 됩니다. 불선업을 범해서 미래의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오계를 확실히 받아들여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한다.」라는 가치관이 확실히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굳이 「판단하지 않는」 상태를 계속해도 자동적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하므로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빳사나 수행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대전제인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의지가 명확하기 때문에 괴로운 일도 즐거운 일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나쁜 생각이 떠올라도, 다만 있는 그대로 그 사실을 알아차려 가는 것뿐으로 청정도의 수행을 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하므로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 갑니다. 악을 피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으로 집약되어 집니다. 선을 실천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며 자애의 마음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윤리성은 자비로 승화하고, 청정한 마음의 궁극에까지 올라 충만 되어집니다.

 

이런 계를 지키는 방법이 성장해 가는 흐름이기도 합니다.

 

먼저 인과론의 구조를 이해한 다음,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싶기 때문에 계를 지키려고 하는 발상입니다. 오계를 지키면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고, 도둑맞지 않을 것이고, 속여지거나 배신당하거나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이익이나 가치가 있으므로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부터 한 꺼풀 벗어나, 모두를 위한 세상이라고 생각해서 계를 지키려고 하는 발상입니다. 누구나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연히 사회가 좋아집니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계를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이익이나 사회 때문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마음의 청정한 도를 완성하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것의 중요함을 알아 수행에 힘쓰는 것입니다.

 

「죽이지 않는다.」고 하는 계는 분노의 근절로 연결됩니다. 「훔치지 않는다.」고 하는 계는 욕구의 마음이나 탐내는 마음을 멸진시켜 가는 수행에 향상됨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속이지 않는다.」고 하는 계는 진실성을 한없이 추구해 나가는 정신, 사물의 진실된 상태를 보고 실천해서, 무상의 진리나 제법무아의 성품을 검증하는 수행을 완성시켜 갑니다.

 

계라고 하는 윤리는 업론적인 행복을 가져오는 기반이며,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수행의 현장이 되고, 무상·고·무아의 진리를 체득해 나가는 일도 되어 집니다. 즉 계는 불교의 요체입니다.

 

① 먼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인격 향상을 위한 기회라고 알아야 합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인격뿐입니다. 뭐든지 인격의 향상과 연결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언제나 밝게 살아간다고 마음으로 결정하고 행동합시다.

 

② 내가 행복하게 되는지, 나의 친한 사람도 행복하게 되는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게 되는지 라는 3가지 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합시다.

 

③ 부모와 가족들에게 언제 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의 방법을 합시다.

 

④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의 오계를 지키며 살아갑시다.

 

⑤ 지금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도록 해서,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해서 살아 봅시다.

 

⑥ 희망대로 잘되지 않을 때에도 웃는 여유를 가집시다.

 

3. 실황중계

 

불교의 수행은 지금 일어난 감각을 실황중계 하는 것입니다.

 

실황중계에 의해서 망상을 자르는 기술이 몸에 익습니다. 마음의 마라가 나오는 틈을 조금도 주지 않습니다. 과거는 망상입니다. 미래도 망상입니다. 지금을 살기 위해서는 실황중계만 하면 됩니다.

 

더욱 더 실황중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육체와 감각과 마음도 무상하고, 모든 것이 불안정하여 불만족스럽고,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나다!」라고 단언할 수 없는 무아도 실재로서 체험해서 압니다.

 

실황중계는 내가 있다고 하는 기분을 폐쇄시켜 버립니다. 그 결과 자아가 사라집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나」도 「나의 것」도 「나의 가족」도 「나의 생과 사」도 없는 것을 압니다. 나는 없고 다만 인과 법칙이라고 알면 마음은 굉장히 편안해집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실황중계에 의해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알아차리면 「무상·고· 무아」라고 하는 진리가 눈앞에 드러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의 감각마저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무상인 것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실황중계는

① 현재를 살아간다.(망상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② 육체의 움직임은 굽히고 펴고 돌리고 라는 심플한 세계로 안다.(복잡하지 않다.)

③ 항상 실황중계가 계속 변화하는 불안정한 것이라고 안다.(모든 고의 세계관)

④ 내가 있는, 내가 본, 내가 들었다고 하는 사고가 정지한다.(자아가 없는 무아의 세계관)

⑤ 자신의 판단이야말로 올바른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생명 특유의 주관이 정지한다.(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수 있다.)

⑥ 자신의 감각도 무상인 것을 안다.(무상의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