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이생에서 빚진 것을 갚자 (20180511)
• 노예의 출가
어느 노예가 주인집에서 도망쳐서 출가를 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계율을 정하기 이전의 사건이었습니다. 나중에 정해진 계율에 의하면 속세간의 약속으로서 몸의 자유가 없는 사람들은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속세간적인 약속을 해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율을 정한 것은 불도를 실천할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노예·군인·죄수·사형판결을 받은 사람 등이 도망쳐서 출가했다면 속세간의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왕들에게 있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혼인해서 가정을 가진 사람들도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면 출가를 방패삼아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에 폐만 끼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윤회를 탈출한다며 최고로 맑고 깨끗한 마음가짐으로써 출가하는 상가의 사회도 범죄자·패배자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 상황은 성스러운 상가 조직에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해탈에 도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출가하기 전에 사회와의 약속·계약 등을 해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유부남도 상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 고용살이가 된다면 자유가 없다.
출가한 이 노예는 진지하게 수행하여 아라한과에 이르렀습니다. 성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이 사람과 함께 탁발을 나갔습니다. 부처님이 어느 집 앞에 서자 그 아라한은 자신의 가사로 몸을 단단히 죄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라고 묻자
"스승이시여, 저는 이 집의 바라문에게 몸을 팔린 존재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몸을 팔린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유가 없습니다. 도망가더라도 다시 끌려옵니다.
주인에게 살해당하여도 친척은 호소할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말의 정의를 바꾸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기 힘들어 부자에게 아이를 파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부자는 그 사람을 노예로 사용합니다. 팔린 사람은 비록 어른이 되어도 몸값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예이므로 일을 해도 개인으로써 수입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은 빨리어로 pannabhāra(빤나바-라)라고 합니다. '목숨이 담보가 됐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pannabhāra라는 말은 부처님이 의도적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숨이 담보가 됐었다라는 경우의 올바른 단어는 pānabhāra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anna라고 하는 경우는 pajjati의 과거분사로 '버렸다, 놓아두었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 사용하는 것이므로 사투리가 들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pānabhāra라는 말이 pannabhāra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자신이 이 집 바라문의 pannabhāra로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부처님은 pannabhāra는 arahaṃ이라는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언어의 원래 의미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panna는 '버렸다, 놓아두었다'라는 것입니다. bhāra는 '짐'입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온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사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집착을 버린 것은 괴로움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 사는 것은 빚을 만드는 것
Arahaṃ은 완전한 해탈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완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윤회하는 생명은 모두에게 빚이 있습니다. 자유의 몸은 아닙니다.
오온에 집착하고 있기에 오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에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것조차 빚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양배추를 먹고 살지만 양배추는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서 자란 것은 아닙니다. 양배추는 자신을 위해서 자란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취하는 것입니다. 공기와 물 이외에는 모두 빌린 것입니다. 현대인은 공기를 더럽히거나 물을 오염시키므로 그냥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갚지 못할 빚을 만들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대자연에 대해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라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채무를 완전히 갚는다'라는 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빚을 갚은 것이 됩니다. 그분의 목숨을 지탱한 양배추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생명으로서 목표에 이른 사람이므로 자신들이 협력할 수 있어서 좋았다라는 기분이 되겠지요. 이것은 비유로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학비를 냅니다. 그 아이는 진지하게 공부하고 최우수로 합격합니다. 혹시 배움과 기술로 금메달을 따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신이 낸 학비에 대해서 빚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마음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행하여 아라한이 된다면 일체의 생명은 자신들의 협력이 주효해서 노벨상이라도 받은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성자에게는 생명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어떤 빚도 없는 것입니다. 아라한에 이른 시점에서 일체의 빚을 갚은 것이 됩니다.
성자에게 시주하시는 분들은 최고의 덕을 얻는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으로써 사람은 글자 그대로 자유롭게 됩니다. 모든 빚을 갚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속세간적인 것을 생각하여 몸을 움츠린 아라한에게 부처님은 pannabhāra는 arahaṃ이 아닐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경우 pannabhāra의 의미는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라는 뜻입니다. 보통의 말에 불교의 진리를 바탕으로 다른 의의를 붙이는 것은 그 밖에도 여럿 있습니다.
결국은 빨리어로 pannabhāra하고 말하면 모두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였다'라는 의미를 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단어의 정의를 바꾸면 그것으로부터 그 의미가 정설로 됩니다.
Nibbāna(닙바-나, 열반)도 같은 단어입니다. 원래 의미는 '(불)을 껐다, (불이) 꺼졌다'입니다. 이것을 '번뇌의 불길을 껐다, 번뇌의 불꽃이 꺼졌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에서는 누구도 '불을 껐다'라는 의미로 nibbāna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노예의 몸이었던 아라한은 부처님의 pannabhāra = arahaṃ이라는 해석을 듣고 안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빚을 모두 돌려주고 완전한 자격자가 되어 있는 것을 재확인 했겠지요. 이 사건에 대해서 주석서에서는 그것 이상 무엇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망상으로 이야기를 꾸며 보겠습니다.
브라만은 원래 노예를 보고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와 관계 없이 수행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인도의 습관입니다.
출가하여 있는 자신의 노예를 원래 대로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몸값도 받지 않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거기서 부처님은 자신의 제자를 편들어 브라만에게 진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이 가르치신 말의 진수가 담마빠다 게송 402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게송은 직역하면 중요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해석을 담아 설명하겠습니다.
• 자신의 괴로움을 발견한다.
Yo dukkhassa pajānāti (요- 둑캇사 빠자-나-띠) "괴로움을 분명하게 아는 자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는 진리로서 산다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스스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머리로, 개념으로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뜻은 다음의 idheva khayaṃ attano(이데-와 카양 앗따노-)라는 문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idheva는 '바로 여기서'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괴로워하고 있다'라는 것은 전체적으로 가벼운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겪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khayaṃ attano는 '자신은 계속 사라지는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계속 생멸하는 흐름이라고 말하면 알기 쉬울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 일관되게 존재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사물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라진 현상이나 나타난 현상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모두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아기를 본다, 오후에도 아기를 본다, 그러면 같은 아기로 착각합니다. 그러면 아침에 아기를 본다, 사십 년이 지나고 다시 그 존재를 본다, 그 경우는 사십 년 전에 보았던 같은 아기라고 착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같은 아기다'라고 해도 '그렇습니까?'라고 깜짝 놀라는 것 이외에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사람은 변하는 것이다'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무상(無常)의 흐름을 괴로움이라고 안다.
무상이란 사십 년마다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무상인 것입니다. 태어나서는 사라져가는 흐름인 것입니다. 1분 2분의 시간 경과로 관찰하면 그다지 변하고 있지 않다라는 착각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명상 실천하는 수행자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생멸변화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순간 '자신'이라는 마음이 있어도, 다음 순간에는 다른 감각으로 '자신'이라고 표시를 붙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에 대해서 이 관찰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는 오온에 집착하는 것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으로 인해 진리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 생명이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다라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무명 대신에 지혜의 눈이 나타났다라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집착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idheva khayaṃ attano라는 문구는 수행의 흐름을 나타내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는다.
괴로움을 발견한 사람에게는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계속 살고 싶다는 갈애가 없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무엇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살고 싶다고 하는 부담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짐을 내려놓았다, 버렸다"라는 뜻으로 pannabhāraṃ(빤나바-랑)인 것입니다.
visaññuttaṃ(위산늇땅)은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본격적인 자유에 이른 것입니다.
Taṃ ahaṃ brūmi brāhmaṇaṃ(땅 아항 브루- 미 브라-흐마낭) "진정한 바라문이란 이런 사람이다라고 나(부처님)는 말한다."
Brāhmaṇa는 브라만 카스트가 아니라 "성자"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일인칭으로 말하는 경우는 말에 다른 의미를 넣는 것을 나타내어 보일 때입니다. 요컨대 세상은 브라만 카스트의 사람을 브라만이라 말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해탈에 이른 성자를 진정한 브라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에 원래 노예의 주인이었던 브라만도 납득한 것입니다. 그도 예류과의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주석서에 적고 있습니다.
● 이번 포인트
• 출가하기 전에 속세간의 속박을 끊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산다는 것은 무수한 빚을 만드는 것입니다.
• 오온에 집착이 있는 한 빚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 집착을 끊은 성자에게는 빚이 없습니다.
•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부처님은 말의 정의를 바꾸는 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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