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 (20180406)

담마마-마까 2022. 8. 31. 15:44

*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 (20180406)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닮아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이면 성별과 관계없이 습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식을 얻고, 거기서 나아가 진짜 지혜로 전환합니다.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 어떤 옷을 입든지(재가의 옷이든 출가자의 가사이든) 관계없습니다. 성별도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종교뿐만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일류대학을 나오면 그만큼 훌륭하다고 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상한 논리입니다.

 

「사람의 속성·직함이 아니라 능력을 보십시오. 삶의 방법을 보십시오」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무조건 부정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혜의 개발에는 속성에 의한 제한은 없습니다.

진리에 들어맞은 노력이면 반드시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시대부터 진리를 체험한 성자에는 재가자도 있고, 여성도 있었습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팔정도에는 미신도 신앙의 요소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차별하던 시대, 자신은 타인과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던 시대에 부처님은 평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말리까 부인이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 빠세나디 왕에게 짧지만 엄하게 훈계하셨습니다.

 

「여자아이라고 실망하는 (그런 생각은) 천한 것이다」라고.

남자든 여자든 누구라도 삶의 방법에 의해 훌륭한 인간이 되거나 그렇지 못한 인간이 되거나 합니다. 마음에는 남녀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마음의 흐름이기에 모든 차별을 불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전에서 재가자가 깨닫거나 여성이 깨달으면, 강조하는 것은 선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훈계를 위해서 입니다.

「나는 00이니까···」 라고 변명하지 마라, 노력하면 해탈로 나아간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경전에서 찟따 거사는 아나따삔디까 장자같이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지만, 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재가자였습니다.

상응부 경전의 찟따 상응편에 보면 찟따 거사의 탁월함이 드러납니다.

 

◆ 장로들의 의문을 해결한 찟따 거사

 

'saṁyojana'nti vā, āvuso 'saṁyojaniya dhammā'ti vā ime dhammā nānatthā nānābyñjanā udāhu ekatthā byañjanameva nāna'nti?

 

saṁyojana(결박·구속·집착)와 saṁyojaniyā dhamma(속박되는 대상·현상).

 

1) 이 둘은 말과 의미가 다른 개념이다,

 

2) 아니다. 말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나타내는 두 개념이라는 논란이 장로 비구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saṁyojana는 마음이 내키지 않도록 한군데에 머무르게 하는 속박입니다.

코끼리를 말뚝에 사슬로 연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연결된 코끼리는 쇠사슬의 길이의 범위에서 평생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찟따 거사가 이 논쟁에 해답을 제시합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흰색 소와 검은 소를 밧줄로 연결했다고 합시다.

흰색 소가 검은 소 때문에 묶였다고 해야 할까요? 혹은 검은 소가 흰색 소 때문에 묶였다고 해야 할까요?”

 

장로들은 대답합니다.

“흰색 소가 검은 소 때문에 묶인 것이 아니라 (검은 소가 흰색 소 때문에 묶인 것도 아니고) 밧줄이 속박입니다.”

 

(찟따 거사)는

“이처럼 눈이 색의 속박은 아닙니다.

색이 눈의 속박도 아닙니다.

색에 대해서 마음에 일어나는 애착이 속박인 것입니다.”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에 대해서 애착이 속박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정답은 1)saṁyojana -결박·구속·집착과 saṁyojaniyā dhamma -속박되는 대상·현상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애착·집착으로 속박되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애착이 일어납니다.

눈이 속박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도 속박은 아닙니다.

육근(흰색 소)도, 여섯 개의 대상(검은 소)도 번뇌가 아닙니다.

 

애착이 생기고 생명은 속박되어 버립니다.

취향과 욕심, 기호에 감정이 붙어 버립니다.

그래서 애착에 chandarāga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의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수단으로서 자애로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의 괴로움이 없어질 테니까」라는 시점에서 자애가 가치를 지닙니다.

자애로 보면 집착에 연결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스님은 개인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루라도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다른 스님들이 설명할 수 없는 붓다의 위대한 진리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라고도 생각합니다.

 

살아있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먹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때는 자애로 내 자신의 일시적인 가치를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셨습니다.

부처님 진리의 가르침조차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뗏목에 비유합니다. 뗏목은 위험한 강을 건너기 위해서 만든 것이며, 뗏목을 타고 안전한 경지에 이릅니다. 강을 건너면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처럼 붓다가 말씀하신 진리도 해탈에 이를 때까지 사용해야 합니다.

뗏목이라는 진리도 해탈에 이를 때까지 가치가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것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집착하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 이교도와 찟따 거사

 

찟따 거사의 이교도(나형외도) 친구인 Acela kassapa가 물어봅니다.

「그대는 불교도가 되어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찟따 거사는 「30년이 됩니다」

「그대는 불교도가 되고 나서 무슨 뛰어난 인간의 능력 범위를 초월한 그 무엇인가를 경험한 것이 있습니까?」

 

찟따 거사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의 범위를 설명합니다.

「제1선정으로부터 제4선정까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부처님보다 먼저 죽으면, 부처님은 반드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야 할 번뇌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발표하시겠지요」

찟따 거사는 불환과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이교도인 친구는 몇 십 년 수행해도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의식 의례를 하고 있을 따름으로 정신적으로 성장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매우 분해진 그 친구는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훌륭합니다. 재가자의 신분인데 이 정도의 초월한 지혜를 얻고 있다니! 나도 출가하고 싶습니다. 부탁합니다.」

 

알몸 수행자인 아쩰라 깟사빠는 출가해서 오래지 않아 아라한에 이릅니다. 계율에서는 외도로부터 바로 출가할 수 없지만, 찟따 거사가 그의 보증인이 되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재가자라도 이런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 찟따 거사의 임종

 

여러분도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제 죽는다고 관찰하여 모든 집착을 버립니다.

「자신의 집」이라고 해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자신의 것은 아니게 됩니다.

 

나에게 나의 가족도, 재산도 없고, 나에게는 나의 몸조차 없습니다.

안·이·비·설·신·의 도, 색·성·향·미·촉·법도,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도 나는 아닙니다.

 

「아, 나는 없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실감조차 착각이다」라고 알면 깨닫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다고 압니다. 그것이 올바르게 죽는 방법입니다.

 

상응부 찟따상응편 「Gilānadassana sutta, 병자 문병경」에 보면 찟따 거사가 병이 깊게 듭니다.

그래서 부근에 살고 있던 신들, 정령들이 병문안하러 방문합니다.

 

"paṇidhehi, gahapati anāgatamaddhānaṃ rājā assaṃ cakkavattī" 「거사여, 장래 전륜성왕이 되도록 서원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원합니다.

신들도 결코 「죽지 말아줘」라고는 부탁하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지 말아줘」라고 말하는 것은 집착 그 자체입니다.

 

만약 위독한 상태로 있는데 「죽지 마!」라고 떠들게 되면, 죽는 사람은 화가 나지 않을까요? (죽음을 방해받은) 분노로 사후 불행하게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손이라도 잡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신들은 찟따 거사에게 「장래 전륜성왕이 되세요」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신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찟따 거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전륜성왕의 경지)은 무상하고, 덧없는 것, 버리고 가야 합니다」라고. 불교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이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tampi aniccaṃ, tampi addhuvaṁ, tampi, tampi pahāya gamanīya"

「그것도 무상입니다. 덧없습니다. 그것도 버리고 가야 합니다.」

 

찟따 거사의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은 신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신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찟따 거사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며,

「사띠를 가지세요. 혼란해서는 안 된다」라고 호소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찟따 거사가 혼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사는 「나는 혼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들이 전륜성왕으로 태어나도록 서원해 주세요 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신들에게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찟따 거사님, 왜 신들이 전륜성왕으로 태어나는 것을 서원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에 찟따 거사가 마지막 힘을 모아 주위 사람들에게 설법합니다.

「신들, 정령들은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이 거사는 도덕을 지키고, 선법을 따르고 있다.

만약 장래 전륜성왕이 되겠다고 서원한다면, 그의 희망은 실현될 수 있다.

계율을 지키는 합법한 사람의 성원은 청정해서 법에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Dhammo have rakkhati dhammacārī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을 법이 그를 지킨다)라는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륜성왕(cakkavatti)이란 관념적으로 생각된 「이상적인 정치가」 입니다.

옛날에는 왕정사회였으므로 불교의 입장으로부터 이상적인 왕은 이런 것이라고 만든 존재인 것입니다.

 

왕의 근본적 욕망은 「영토 확대」입니다.

지금도 힘 쎈 나라의 정치가는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고 하는 지배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영토를 넓힌다는 것은 이웃 나라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피해입니다.

 

침략에 저항해 싸우면 양쪽 모두 많이 죽습니다.

왕의 욕망이란 악으로, 불행의 근원입니다.

다수를 불행에 빠뜨리지 않고 전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위정자는 어떻게든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왕이 감정적이 되면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왕의 첫 번째 희망(영토 확장)은 얼마나 더러운가요?

그리고 왕이 가진 두 번째 희망은 자신의 나라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금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공무원이 부정을 저지르면 데모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군대나 경찰이 가서 잔혹하게 진압합니다.

… 무엇을 해도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왕은 신이 인정하는 존재라는 발상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잘 보면 정치 그 자체가 「악의 축」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악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불교로부터 정치라는 것을 관찰하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악이 없는 왕은 만들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이 전륜성왕입니다. 그러니까 관념입니다.

 

제대로 진리를 지키고, 완벽하게 도덕을 지키는 것이 불교가 말하는 올바른 정치철학입니다.

 

비록 관념적인 존재라고 해도 성실한 사람이 왕이 되어 「최소한 모기가 들이마시는 피만큼도 국민의 피를 흘리지 않겠다」라고 공약하고 정치를 하면, 처음부터 전륜성왕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있는 곳에 머뭅니다.

전륜이 있으므로 국민이 하늘을 보면 왕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전륜성왕은 나라 안에 악이 없게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왕의 두 번째 희망).

그래서 나라가 완전하게 다스려지면 「이 모범적인 정치를 이웃 나라에도 가르쳐 주면 어떨까?」라고 이웃 나라에 갑니다(왕의 첫 번째 희망).

 

이웃 나라도 어쩔 수 없이 전륜성왕을 맞아들여 고맙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륜성왕은 「이 공약을 실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떠날 뿐입니다.

 

결코 전쟁은 하지 않습니다. 그곳의 왕은 고맙게 전륜성왕을 본받은 정치에 힘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전륜성왕은 세계의 사방을 둘러쌉니다. 세계는 지배하지만, 모기 한마리가 들이마실 정도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불교가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존재는 전륜성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추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찟따 거사는 그것도 무상입니다, 덧없습니다. 그것도 버리고 가야 합니다」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리고선 찟따 거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 설법합니다.

「여러분은 이와 경고해야 합니다」

 

Budd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bgavissāma.

「붓다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bgavissāma.

「담마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Saṇg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bgavissāma.

「상가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yaṃ kho pana kiñci kule deyyadhamaṃ,

「무엇인가 보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sabbaṃ taṃ appṭivibhattaṃ bhavissati,

모두 나누어 줍시다,

 

sīlavantehi kalyāṇadhammehīti.

도덕을 지켜, 선법에 따라 사는 분들에게.

 

evañhi sikkhitabbaṃ

여러분들은 이와 같이 경고해야 합니다」

 

거사는 친척에게 불·법·승·보시라고 하는 4법을 지키라며 경고하고 죽었습니다.

돌아가시는 분이 남는 사람에게 설법하고 가셨습니다.

 

1년간 오계를 지키면 「싫은 놈이 빨리 죽기를」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맑고 깨끗한 희망 밖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서원은 실현됩니다.

불교도는 담담하게 진리를 지키면서 살면, 그것을 당해 낼 부적은 없습니다.

그처럼 경고하라고 찟따 거사는 먼저 설법했습니다.

 

◆ 불법승에의 믿음

 

이것은 불법승의 각 항목(덕)을 각자 사실인지 아닌지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만 주문처럼 독송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스스로 조사하는 것으로 불법승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확립됩니다.

 

◆ 보시의 실천

 

먼저 이것은 「주지 않으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구에게 드립니까? 「진리에 따라 수행하는 분들, 마음이 맑고 깨끗한 분들에게 드리세요」라고 거사는 설법합니다.

이 보시의 장려를 종교의 세계는 악용하고 있습니다.

현대 불교도 악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불교는 진리를 일컫는 것입니다.

 

보시의 실천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마음의 집착과의 싸움의 시작인 것입니다.

지혜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소중한 것을 주는 것, 이것을 실천하면 「나」,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의 평온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보시에 의한 마음의 평온함을 체험하는 것은 수행해서 해탈에 이르기 전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입니다.

 

임종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좋은 기회입니다.

이견 없이, 모두 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머리로부터 미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이 마중 나와 주지 않을까, 아미타불이 맞이해 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수행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이러한 4종의 법을 실천해야 한다」라는 기분을 만들어 두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확실히 관리해 두면 임종 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