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만의 이해가 마음을 향상시킨다. (20171201)
우리는 희망이 없으면 좀처럼 노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노력하는가 하면 어떠한 희망이나 목적이 있어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노력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게으름 피울 뿐입니다. 불교는 이 「게으름」을 몹시 싫어합니다. 부처님은 게으름 피우는 사람을 소와 같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정진·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순간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노력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진·노력이라는 것은 뭐든지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정진(Sammā vāyāma), 「도덕적이고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올바르게 컨트롤하며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4개의 항목으로 정정진을 완성합니다.
■ 지금까지 해온 악행을 그만둔다.
■ 지금까지 했던 적이 없는 악행은 앞으로도 하지 않는다.
■ 지금 하고 있는 선행을 완성시킨다.
■ 지금까지 했던 적이 없는 선행을 일으켜 한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날마다 어제보다 좀 더 좋아지도록 노력한다.」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을 경책하고 향상시켜 성장시킵니다. 그래서 정정진에는 마지막이 없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하면 수행은 끝나지만, 해탈한 사람은 해탈해도 게으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해야 할 일은 모두 이루어 끝냈다. 수행을 완성했다」라고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인생도 자는 시간을 2시간으로 줄이고, 신체가 망가지고 지쳤을 때에만 쉬시고, 그 이외에는 계속 노력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보다 좋은 일을 하라, 보다 도움이 되는 것을 하라고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보다 좋아지고 싶다」라고 올바르게 정진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희망입니다. 불교는 희망을 가지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올바른 희망을 가지고 수행해서, 수행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이루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상의 희망은 「깨달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희망이란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실행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날마다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가장 컨트롤하기 힘든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져 있거나 생각이 올바르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래서 항상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고를 바르게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욕구나 성냄, 질투, 게으름 등의 나쁜 감정을 없애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희망인 것입니다.
동시에 「보다 훌륭한 인간이 될 것이다」라는 목표를 가지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상태는 불만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어제 보다 좋아지도록 노력하자」라고 적극적인 목표를 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만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불만이 없어지면, 또 다음의 불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때는 또 「좀 더 좋아지자」라고 노력합니다. 이와 같이 해서 불만을 쭉 느끼며 관찰해보십시오. 불만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보다 좋아지자」라는 희망과 정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불만은 희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불만을 없애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만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사람은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불만 이것을 빨리어로 Dukkha(둑카)라고 말합니다. 둑카는 우리가 해탈할 때까지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둑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의해 우리의 마음은 성장하고 진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철저하게 모든 것에서 불만을 이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불만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희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스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들었다면, 분해서라도, 자만심을 가지고라도, 자신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라고. 그분은 할 수 있었는데, 왜 나는 할 수 없는가? 그분도 노력했는데, 왜 나는 노력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타인과 비교하는 것은 자만심이며, 사실은 나쁜 일이지만, 경전에서 부처님은 그러한 기분을 가지고서라도 해탈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욕구를 가지고 욕구를 경고한다.」는 것으로, 「자신도 깨닫고 싶다」는 욕구를 만듭니다. 누군가가 깨달았다면 몹시 분하여 「나도 하겠다.」는 큰 희망을 만들어 노력합니다.
올바른 희망을 가지고 마음의 불만을 조금씩 없애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최종적으로 일체의 불만을 없애어 최고로 행복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불만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 대략적이어서 분명히 「이것이 불만」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이 불만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자신의 불만은 무엇인지, 무엇이 어떻게 불만인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합니다. 그렇게 알면 그것은 없앨 수 있는 불만인지, 없앨 수 없는 불만인지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 수 있으면 불만을 해결하는 길도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어딘지 모르게 불만……」이라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만약 「없앨 수 있는 불만」이라면, 실제로 없애도록 노력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불만이 사라지면 다음의 불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때는 또 다음의 불만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없앨 수 없는 불만」이라면, 단호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이나 희망, 욕망을 여러 가지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너무 대략적이고 애매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는 않는가요? 이때도 현실적으로 「자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되고 싶은지」생각해 봅니다. 만약 「이 꿈은 너무 크다. 있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해서 망상하고 있다」라고 알면, 「이것은 자신에게 무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곧바로 포기하고 침착할 수가 있습니다.
희망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현될 수 있는 희망입니다. 이것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단순한 꿈으로 터무니없는 망상으로부터 일어난 희망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하다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포기하십시오.
불만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애매하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눈에 안대를 씌운 사람이 숲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눈에 안대를 쓰고 있는 사람이 혼자서 숲속에 들어왔다면, 안보이기에 나무에 부딪치거나 돌에 채여 구르거나 뱀에 물리거나 벌이나 벌레에 물리거나 미로에 빠지거나 하여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눈에 쓰고 있던 안대를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뱀이나 위험한 짐승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숲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이 어디인지, 서쪽이 어디인지 방위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례차례 걸어서 이윽고 숲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비록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해도 눈이 안 보였을 때만큼 위험한 것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에 부딪힐 없이 안전한 길을 선택해서 걸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만이라는 숲에서 미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눈에 씌운 안대를 제거해서 분명히 「보는 힘」을 가집니다. 무엇을 보는가 하면 불만의 위험성입니다. 불만의 위험성을 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압니다.
이와 같이 숲의 위험성을 보는 사람이 숲의 위험을 피할 수가 있듯이, 불만의 위험성을 보는 사람이 불만을 넘는 길을 압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불만을 보는 예리한 이해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 증거로 세상은 항상 고민이나 혼란, 스트레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예리한 이해력을 기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지혜의 완성자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마음의 예리함을 무디게 하는 나쁜 감정을 하나하나 공부하는 것입니다. 질투나 성냄, 낙담, 인색함 등의 나쁜 감정은 마음의 예리함을 흐리게 합니다. 주변 사람에게 경쟁의식을 가져서 그 사람에 대해 적대심을 만들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상대를 넘어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상대를 넘어뜨리기 전에 자신이 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쟁심은 좋지 않다, 타인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것을 공부해서 더러운 감정을 피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불교를 공부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덕 중에서도 매우 높은 덕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칼날처럼 명쾌해집니다. 마음으로 나쁜 감정은 어떤 것인지, 좋은 감정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분석해서 구별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실천입니다. 마음의 더러움을 최종적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순간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위빳사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며, 가장 효과적이고 뛰어난 실천법입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 > 법문 교재(프린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 (20180406) (0) | 2022.08.31 |
---|---|
감사(upakāra)의 마음 (20180309) (0) | 2022.08.31 |
성자는 속박을 끊는다. (20171110) (0) | 2022.08.25 |
예류과에 이르는 길 −법수행과 신수행− (20171020) (0) | 2022.08.25 |
불교 전도는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20170922) (0) | 202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