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자는 속박을 끊는다. (20171110)
해탈이나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라한이 되는, 인간을 초월해서 성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사고는 개념의 회전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성자들의 정신 상태입니다. 그러나 번뇌에 더러워져 있는 범부들의 마음으로는 진리를 알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사고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결국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주관에 근거한 사고·망상의 회전인 것입니다. 다만 생각했다고 해서 새로운 지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속에서 가지고 있던 개념을 휘저어 형태가 다른 개념을 조합할 뿐입니다. 아이의 레고 블록 놀이를 생각해 봅시다. 가지고 있는 레고 블록을 멋대로 조립만 하는 놀이입니다. 무엇을 조립해도 같은 레고 블록입니다. 레고 블록으로 「집」을 만들어도, 그곳에 집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이 가진 기능의 무엇 하나도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잘 놀았다」라는 마음이 끝나면 블록을 다시 원래의 상자에 담아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고를 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은 레고 블록 놀이와 닮아있습니다. 그래서 성자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려는 것은 오근(안·이·비·설·신)의 정보에 근거해 사고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레고 블록으로 「집」도 만들 수 있듯이 우리에게도 비슷한 사고의 편성으로 성자란 누군지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레고 블록으로 조립한 「집」은 진짜의 집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얼토당토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편할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미지에 도전하자
부처님은 바른 깨달음과 해탈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에 하나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해탈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번뇌로 덮여 있는 인간에게 해탈을 이해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이란 개념에 붙은 라벨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의 경지를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해탈자는 세상의 차원을 넘었으므로 무엇을 넘었는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에 반해 해탈자는 분노를 멸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의 멸진자란 해탈에 이른 사람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사용된 수단을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설명하고 나서, 해탈자는 그것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우파니샤드 철학같이 부정형을 사용해서 설명할 의무로부터 도망만 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자를 설명할 때는 「우리도 이와 같이 실천해야 한다.」라는 교훈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알았다는 생각으로 거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정진하려는 의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을 수 없는 존재욕구
그럼 부처님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Sabbasaṁyojanaṁ chetvā 일체의 속박을 끊어버려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Saṁyojana란 속박입니다. 속박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계속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습니다. 간단한 말로 하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 모르지만 살아가고 싶고, 죽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만은 확실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왜 당신은 살고 싶나요? 왜 죽고 싶지 않나요?」라고 물어보면 솔직히 머뭇거립니다.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고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호흡하고 있나요?」라고 물어보면, 이것에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부는 속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합니다. 「살아 있으면 재미있다. 삶에는 무엇인가 소중한 의미가 있다. 사는 것은 즐겁다」 등등의 대답을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그때의 기분으로 망상해서 말하는 대답이지, 진지하게 생각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컨대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마음은 확실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릅니다. 부처님은 속박이라고 하는 정답을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네? 속박? 뭐야 그게?」라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속박 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성 죄수가 형무소에서 자식을 낳아 길러도, 그 아이는 형무소에 있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이 살고있는 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생명은 한량없는 과거부터 속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릅니다.
속박이 오해를 부른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안, 이, 비, 설, 신, 의라고 하는 감각 기관(육근)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고, 듣고 싶고, 향기를 맡고 싶고, 맛을 느끼고 싶고, 신체로 느끼고 싶고, 머리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 들리는 것, 향기가 있는 것, 맛볼 수 있는 것, 접하는 것, 생각되는 것(개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로부터 떨어질 수 있습니까?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속박입니다.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자극을 계속 받는 것입니다. 이 자극에 의해서 마음이 생멸이라는 물결을 휘젓고 회전합니다.
마음이 어떤 자극도 받지 않는 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정의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상으로 접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대상으로 접하지 않는다는 순간은 찰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마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나, 나라고 하는 실체, 생명, 에고, 영혼」 등등의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순간순간에 일어나고는 사라지지만, 사라지는 순간에 새로운 대상을 인식해서, 새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마음에는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결함이 있습니다. 그 결함을 「속박」이라고 말합니다.
애착을 발견하자
속박의 설명은 어렵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속박에 대해 배우는 편이 좋습니다. 우선 자신의 신체에 속박되고 있다. 신체에 애착이 있다고 하는 편은 알기 쉽습니다. 애착이 있다는 것은 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산에 애착이 있다. 지식에 애착이 있다. 가족에게도, 애완동물에게도 애착이 있다. 나라에도 애착이 있다. 먹을 것에도 애착이 있다. 보는 것, 듣는 것 등에도 애착이 있다. 놀이에도, 여행에도 애착이 있다. 애착이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애착이 있는 곳에 속박이 있습니다. 애착이 없는 상태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착이 없어졌다」라는 경우는 실은 애착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애착 대신에 분노의 감정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분노도 애착의 일종입니다. 분노의 대상도 마음을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애착이 있다는 것은 속박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해탈자의 마음은 모든 속박을 끊고 있습니다.
10종류의 속박
수행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을 앞당기기 위해서 부처님이 친절하게 속박을 10종류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1) 유신견 (sakkāya-diṭṭhi,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입니다. 자신의 고귀한 생명은 육체라고 하는 오해),
(2) 의심(vicikicchā, 망상에 대한 애착입니다. 진리인 무상·고·무아·연기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我)가 아닐까, 이러하지 않을까 마음이 방황하는 상태)
(3)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관습에 달라붙는 결박, 의식·의례·결정·계 등에 대한 애착입니다),
(4) 욕탐(kāma-rāga, 색· 성·향·미·촉에 대한 애착입니다.)
(5) 분노(paṭigha, 색·성·향·미·촉이라고 하는 대상에 애착할 수 없는 경우에 나타나는 분노),
(6) 색탐(rūpa-rāga, 명상이라도 해서 초월한 차원인 ≪범천≫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애착),
(7) 무색탐(arūpa-rāga, 명상이라도 해서 신체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정신만으로 살 수 있는 차원인 ≪무색계 범천≫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애착)
(8) 아만(māna, 자신이라는 기분을 중심으로 해서 사물을 인식한다고 하는 애착)
(9) 도거(uddhacca, 굳이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고 혼돈 상태로 아프다고 하는 애착. 그런 사람은 취한 상태, 마약을 복용한 상태, 흥분상태를 좋아합니다.)
(10) 무명(avijjā, 이것은 모든 속박의 두목입니다. 진리는 무상·고·무아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온갖 것에 애착하므로 모든 현상에 속박됩니다.)
속박의 발견과 단절
수행하면 진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명이 얇게 되어 갑니다. 무명이라는 두목이 약해지면 부하인 유신견 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해탈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속박이 4개의 단계에서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류과에 이르면 (1)유신견, (2)의심, (3)계금취가 끊어집니다. 일래과에 이르면 (4)욕탐과 (5)분노가 약해집니다. 불환과에 이르면 (4)욕탐과 (5)분노가 끊어집니다. 아라한과에 이르면 남는 모든 속박이 끊어집니다. 불환과까지 끊어지는 5개의 속박은 5하분결, 아라한과가 될 때까지 끊어지지 않은 5개의 속박은 5상분결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속박에 10 종류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속박은 신체에 대한 애착, 색·성·향·미·촉에 대한 애착, 자신이 있다고 하는 애착과 의심입니다.
의심은 재미있는 속박입니다. 사람들은 신들의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초능력의 이야기 등을 말하면 재미로 듣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의심입니다. 붓다가 말하신 진리를 들으면서도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정도에서 멈춥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확신까지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종교가 있으면 그 종교가 말하는 형식적인 삶의 방식에 속박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형식적인 삶의 방식을 좋아합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익숙한 생활 패턴을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계금취라고 하는 속박입니다.
일반인들은 욕구나 분노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지만, 수행해서 그것을 끊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행하면 주관이 사라지고 이성이 나타납니다. 그때 처음 3가지의 속박이 끊어집니다.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성자의 경지
성자가 속박을 끊었다는 것을 일반적인 말로 하면, 살고 싶다는 존재욕구가 없어진 것입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마저 없다면, 마음에는 고민, 슬픔, 두려움 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에는 어떤 흔들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자의 마음은 인간이 이해 가능한 모든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자의 마음은 이러한 것이라고 가리키는 단어는 어떤 언어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란 개념에 붙은 명칭인 것입니다. 일절의 개념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의 심경을 말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드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무엇이든 정의 내려 단어로 말해야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부처님은 열반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대승 불교에서는 공과 무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단어를 만들어도 의미가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개념을 토대로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작다」라는 단어를 이해해 보십시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겠지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뭔가의 개념과 대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작다」의 이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욕구가 없는 마음, 속박이 없는 마음, 무집착의 마음, 열반을 경험한 마음 등의 말이 있어도 이해는 듣는 사람의 개념에 의해 바뀝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로는 올바르게 의미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열반·해탈·깨달음 등의 단어를 들어도, 머릿속에서 개념을 휘저을 뿐 이해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속박에 대해 말하고, 성자의 마음은 속박이 없는 마음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속박 때문에 우리는 한량없는 고민, 괴로움, 슬픔, 불안 등이 있습니다. 마음은 요동치고 있습니다. 초조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협박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살아가고 싶다는 속박마저 없으면, 모든 고민, 괴로움, 슬픔, 불안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어떤 조건과 만나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자의 마음입니다.
● 이번 포인트
• 해탈의 경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우리는 속박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 애착의 발견은 속박의 발견입니다.
• 언어의 한계도 이해합시다.
• 모든 괴로움을 넘은 사람이 성자입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 > 법문 교재(프린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upakāra)의 마음 (20180309) (0) | 2022.08.31 |
---|---|
불만의 이해가 마음을 향상시킨다. (20171201) (0) | 2022.08.25 |
예류과에 이르는 길 −법수행과 신수행− (20171020) (0) | 2022.08.25 |
불교 전도는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20170922) (0) | 2022.08.25 |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20170811) (0) | 2022.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