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류과에 이르는 길 −법수행과 신수행− (20171020)
1. 예류과와 예류도(예류향)
완전한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의 순서를 밟아 마지막에 완전한 깨달음인 아라한과를 증득합니다. 최초의 예류과에 도달하면 인간과 천상에 7번까지 윤회하는 동안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으므로 먼저 예류과에 도달하는 것이 발심하여 부처님의 수행법에 힘쓰는 자의 당면 최대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또한 그렇게 되기까지 어떠한 준비단계가 있는 것일까요?
2. 예류과에 이르는 두 가지 준비 단계 − 법수행과 신수행
우선 예류과를 향한 준비단계가 어떠한 것인지 고찰해 보겠습니다. 네 가지 사문과(四沙門果)를 해설한 경전에는 때로는 예류과보다 약한 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信) ∙ 노력(精進) ∙ 알아차림(念) ∙ 삼매(定)∙ 지혜(慧)〕의 오근이 충만하고 원만하면 아라한이다. 이것보다 약하면(tato mudutarehi) 불환자이다. 이것보다 약하면 일래자이다. 이것보다 약하면 예류자이다. 이것보다 약하면 법수자(随法者 dhammānusāri)이다. 이것보다 약하면 신수자(随信者 saddhānusāri)이다.〔SN V, 200〕”
예류과를 향하는 자에 관하여 법수자와 신수자의 둘의 이름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신수자는 법수자보다 더욱 더 약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 이렇게
명기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예류과를 향하는 둘 중에서 법수자가 신수자보다
상위라고 하는 순서는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둘 중, 법수자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는 부처님을 조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na heva kho Buddhe ekantagato hoti abhippasanno). 법(法)을 조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 상가를 조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 그는 민첩한 지혜(捷慧)가 없고, 신속한 지혜(速慧)도 없어서, 해탈(아라한과)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이 자에게는 믿음의 뿌리(信根)∙ 노력의 뿌리(精進根) ∙ 알아차림의 뿌리(念根) ∙ 삼매의 뿌리(定根)∙ 지혜의 뿌리(慧根)의 특질이 있다. 또한 이 자에게는 여래가 설한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조금 이해되고 받아들인다(tathāgatapaveditā cassa dhammā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ṁ khamanti). 마하나마여! 이 자는 지옥 혹은 악생・악도에 떨어질 일은 없느니라(aganta). 〔SN V, 377〕”
완전히 삼귀의 하지 않았기에 예류과 이상을 증득한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향한 오근이 갖추어져 부처님의 설법에 대해 지혜에 의해 조금은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면, 그 자는 사후에 악도에 가는 일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고통 속에서도 불법을 만날 수 있는 선취(善趣), 즉 인간이나 천상에만 태어날 수 있다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법에 따라서 예류과를 향하는 법수자입니다.
신수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됩니다.
“어떤 자는 부처님을 조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 법(法)을 조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 상가를 조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 그는 민첩한 지혜(捷慧)가 없고, 신속한 지혜(速慧)도 없어서, 해탈(아라한과)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이 자에게는 믿음의 뿌리(信根)∙ 노력의 뿌리(精進根) ∙ 알아차림의 뿌리(念根) ∙ 삼매의 뿌리(定根)∙ 지혜의 뿌리(慧根)의 특질이 있다. 또한 이 자에게는 여래에 대해 조금의 믿음(信)이 있고, 조금의 애락(愛樂)도 있다(tathāgate cassa saddhāmattaṁ hoti pemamattaṁ). 마하나마여! 이 자는 지옥 혹은 악생・악도에 떨어질 일은 없느니라.〔SN V, 377〕”
완전히 삼귀의 하지 않았기에 예류과 이상을 증득한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향한 오근이 갖추어져 여래에게 조금의 믿음・애락이 있다면 그 자도 사후에 악도에 가는 일은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래에게 믿음・애락을 가지고 예류과를 향하는 이 자를 신수자라고 불립니다.
3. 법수자・신수자 이하인 자
중부22 Alagaddupama-sutta(사유경 蛇喩經)에는 법수자・신수자뿐만 아니라, 그 이하인 자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교법이 이처럼 잘 설해졌을 때(evaṁ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수법, 수신의 비구는 전부 정각으로 가는 자이다(ye te bhikkhū dhammānusārino saddhānusārino sabbe te sambodhiparāyanā).
비구들이여! 나의 교법이 이처럼 잘 설해졌을 때, 나에게 조금의 믿음(信)・조금의 애락(愛樂)이 있는 자는 전부 천상으로 가는 자이다(yesaṁ mayi saddhāmattaṁ pemamattaṁ sabbe te saggaparāyanā). 〔MN I 141〕”
수법・수신 이하에 위치하는 이 자는 부처님에게 조금의 믿음(信)・조금의 애락(愛樂)을 가지기에 신수자의 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교법이 설해졌을 때」라고 일컬어지기에 법수자의 한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이 수법・수신 이하인 자는 정각으로가 아닌 「천상을 향하여 간다」고 설명됨에 그치니 아직 깨달음의 길로부터 물러서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부처님에게 조금의 믿음(信)・조금의 애락(愛樂)을 가지기에 범부라고도 말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류향의 법수・신수자보다는 못하지만, 부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부처님 종족 성(姓)이 되다」는 의미인 gotrabhū(種姓)를 성자들인 사향사과(四向四果) 아래에 위치한다고 설명하는 경전도 있어서〔AN IV 372〕, 이 gotrabhū(종성)들은 「천상으로 나아가는 자」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MN 22〕.
그래서 AN, IV,372 ff 에서는 『세상의 최상의 복전인 인간(puggala)』즉, 불제자의 상가에 9종류가 있다고 하고 사향사과(四向四果)에 더하여 gotrabhū를 내세웁니다. 예류향의 법수・신수자보다는 못하지만 부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석가 「성(姓)이 되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AN에서는 세상의 최상의 복전에 10종류가 있다고 하여, 여래응공정등각자(如來應供正等覺者), 벽지불(壁支佛),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 혜해탈자(慧解脫者), 신증자(身證者), 견도달자(見到達者), 신해탈자(信解脫者), 법수자(法随者), 신수자(信随者)를 들고 나서 마지막에 gotrabhū(種姓)를 들고 있습니다.
중부 142경(MN III, 256)에서는 부처님께 출가하였지만 악행을 일삼는 비구들을 gotrabhū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범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류향에도 속할 수 없는 자입니다.
4. 종성에 이르는 과정
먼저 이 고뜨라부(種姓)에 이르는 과정에 대하여 사마디 수행법과 위빳사나 수행법으로 나누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이라는 세계가 있습니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불교가 독자적으로 발견한 위빳사나 수행과 인도종교의 공통인 사마디 수행이 있지만, 사마디 수행의 경우는 위빳사나와 달라서 쉽게 알 수 있는 특색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안‧이‧비‧설‧신이라는 五門(오문)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으로부터 얻는 정보는 ‘올바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을 토대로 하는 그 정보의 채널을 초월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의 차원을 뛰어넘으면 거기에서 제1선정이 생겨납니다. 意門으로부터의 인식이라고 하더라도 오문 등의 정보를 기반으로 해서 마음이 제멋대로 환각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입니다. 선정은 사실 오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 없이 마음만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식을 오문에 의존하는 욕계인식(欲界認識), 물질은 있지만 오문에 의지하지 않는 색계선정(色界禪定), 물질 그 자체가 없는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으로 세분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에서 意門의 인식은 2종류가 있는데, 색계선정과 무색계선정이라는 오문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입니다. 또 하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불교 독자적인 ‘인식’입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개의 덮개가 있습니다. 이 다섯의 덮개(장애)가 모두 벗겨지면 色界 제1선정입니다. 오문에 의지하지 않는 선정의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선정을 방해하는 장애의 첫 번째는 탐욕(kāmacchanda, 貪慾), 욕심부림입니다. kāma란 ‘욕망’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안‧이‧비‧설‧신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으로 아는 세계는 대단하지 않다. 좁은 세계다’라고 이해하면 사마디 쪽으로 마음이 기웁니다.
수행이 잘 진척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수행하더라도 오문, 신체에 관한 것을 중요시해서 수행은 뒷전으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고 있어도 ‘빨리 수행이 끝나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그 외에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가 되는 테마는 ‘신체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한 수행으로는 사마디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수행을 할 때에 ‘7시에는 끝나야 한다. 왜냐하면 아침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는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주가 된 목적이 사마디가 아니라, ‘어쨌든 7시까지는 수행을 하고, 아침밥을 먹고 싶다’라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표를 만들어서 ‘8시에서 9시 30분까지 수행을 하고, 9시 30분부터 11시까지 이런 책을 읽고’라고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는 욕계의 차원을 넘어서기 힘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마디 체험은 1만 명에 1명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수행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말입니다. 이 오문, 신체를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면 인식의 덮개(장애)는 벗겨지지 않습니다.
2번째는 성냄의 덮개(지나친 성냄, 악의, byāpāda)입니다. 성냄으로 마음이 억눌려져서 닫혀져 있습니다. 성냄도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싫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냄이고, 들리는 대상에 대해서 ‘싫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냄이며, 장시간 앉아 있어서 ‘몸이 아프기 때문에 싫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냄입니다. 그러므로 성냄도 신체와 관련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욕계를 떠나서는 없습니다. ‘수행을 하고 싶지 않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경우도 싫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성냄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이 하고 싶은가’ 라고 물으면 꽤나 많은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욕계인 신체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서 그쪽은 욕구입니다. 욕구와 성냄이라면 양쪽 모두 욕계의 오문과 관계있는 정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사마디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3번째의 문제는 thīna-middha(혼침과 졸음)입니다. 이것도 신체에 있는 현상입니다. ‘보며 즐기고 싶다’, ‘들으며 즐기고 싶다’, ‘접촉하며 즐기고 싶다’라고 계속 행하고 있으면, 즐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몸은 지칩니다. 보면 눈이 피로해집니다. 들으면 귀가 지칩니다. 접촉하면 몸이 피로해집니다. 왜 피로해지는가 하면 물질이 五根(오근)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오근도 물질입니다. 두들겨 맞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는 어느 날 티슈를 잘게 찢어 뭉쳐서 귀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조금 깊게 넣어서 티슈가 고막에 닿았습니다. 아파서 깜짝 놀랐습니다. 고막은 소리가 와 닿는 곳으로 티슈가 조금 닿았을 뿐인데도 아픕니다. 실은 소리가 닿을 때도 같은 이치로 아프고 피로해집니다.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색깔과 모양이 닿으면 아프고 피로해집니다. 코도 냄새를 맡고 있지만 냄새를 맡기 위해 미세한 물질과 닿아야만 합니다. 그것도 또한 피로해집니다. 신체에 물질이 닿으면 피로해집니다. 앉아 있어 봅시다. ‘앉는 것은 즐겁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앉아 있어도 결국은 지칩니다. 그러므로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어 일어서거나 자세를 바꾸기도 합니다. ‘잠자고 있는 것은 즐겁다’라고 생각하지만 자고만 있어 보십시오. 나중에는 몸이 피곤해집니다. 잠자고 있을 수 없게 되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에만 신경 쓰고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피곤함과 졸림, 수면입니다. 이 혼침, 졸음은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 현상이지만(잘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생길 수가 없다), 수행을 할 때도 몸의 현상에 신경이 쓰이면 ‘몸은 나른하고 지쳐서 이미 틀렸다. 더 이상 싫다’라고 느끼면서 피로해져서 졸리게 됩니다.
4번째는 uddhacca-kukucca(들뜸과 후회)입니다. 들뜸과 후회가 나타나는 것도 욕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들뜸이란 흥분상태, 머리가 혼란한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닿거나 해서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대상을 다른 사람도 모두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자주색의 옷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모두 자주색의 옷을 찾습니다. 그래서 여러 잡지를 보고 탐구를 합니다. 그러한 정보가 눈이나 귀로 들어올 때마다 머리가 혼란합니다. 그러므로 들뜸이란 안‧이‧비‧설‧신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하더라도 ‘나의’ 판단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 판단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걷고 있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걷고 있지만, 앞서 가는 사람은 ‘이 사람은 잘못 가고 있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뒤따라오는 사람도 ‘당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이런 상태이므로 불완전하고, 당연히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다’라고 곧장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행한 것에 대해서 ‘안한 것이 좋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과 안 한 것에 대해서 ‘하는 것이 좋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 이 2종류의 마음의 침체가 후회입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역시 물질의 세계, 안‧이‧비‧설‧신의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들뜸과 후회, 모두 물질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욕계에 사로잡혀버
리는 것입니다.
5번째의 덮개는 vicikicchā(의심)입니다.
인간은 무엇 하나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투성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五蓋, 다섯 가지 장애는 우리가 안‧이‧비‧설‧신이라는 욕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말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5개가 있는 한, 마음은 높은 경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수행도 잘 안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도 사마타 수행도 잘 되지 않습니다. 수행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전부 깨끗이 ‘무의미하다. 어리석다’라고 욕계의 세상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버려버린 사람에게만 수행의 희망이 있습니다. 버리면 그것만으로 사마디가 생겨납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버려버리는 사람은 위대한 지혜가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통제되어 있는 세계에서 활동하면서 五門으로부터의 정보에 의존합니다. 그곳에 조금만 틈이 있으면 환각을 만들어 意門으로 망상을 합니다. 그 2가지만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마음은 그 2가지의 기능만을 행합니다.
그럼 마음으로 철저하게 사실만을 알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마음이 변합니다.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안‧이‧비‧설‧신의 세계보다 위로 가져가는 것, 오염되어 있는 인식이 아니라 순수한 인식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세계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이고, ‘마음에 순수인식을 하게 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입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으로는 왜 깨달을 수 없는가?
불교에서도 ‘그것은 순수한 인식이기 때문에 정확히 올바르다’라고 순수한 인식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인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했다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눈이나 얼음 위에서 잘 달리지 못하고 날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눈이나 얼음 위에서 능숙하게 빠르게 달리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활강하면서 금메달을 땁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그것으로 어떻게 되는가요? 얼마간의 돈을 벌거나, 선망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끝납니다. 순수한 인식을 얻는 것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같이 대단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식은 인식이기 때문에 인식을 초월한 사물의 실상을 본 것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방법은 소리를 중심으로 수행할 수도 있고, 눈으로 보는 대상을 중심으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설명하는 방법은 우선 무엇을 보기 위한 색깔과 모양으로 대상을 만듭니다. 대상으로 하는 것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의 4가지 원색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그런 색의 종이 등의 재료로서 직경 30cm 정도의 원을 만들어서 수행을 위한 도구를 만듭니다. 혹은 지, 수, 화, 풍 물질의 4요소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 합니다. 가장 취급이 쉬운 흙을 30cm의 원형으로 만들어서 수행을 위한 도구를 만듭니다. 물을 보고 수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을 보면 물의 요소를 체험할 수 있고, 흙을 보면 땅의 원소를 볼 수 있습니다. 물에는 물의 요소가 많고, 흙에는 땅의 원소가 많으며, 공기를 보고 수행하면 바람의 요소를 보기 쉽습니다. 그리고 빛을 직접 보고 수행하기도 합니다. 우선 수행하기 위해 보려는 어떤 대상을 정해서 준비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경우에는 준비가 중요합니다. 대상을 정해서 만들뿐만 아니라 몸에 맞는 음식물을 제대로 먹고, 몸을 깨끗이 하며, 수행하는 장소도 깨끗이 하여 철저하게 수행을 위한 환경을 만듭니다. 자신의 머리를 혼란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로부터 떠나고, 세속적인 관계로부터도 전부 멀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편 길이 정도의 적당한 크기의 원을 청색 또는 황색등의 종이로 만듭니다. 진지하게 결가부좌를 할 필요는 없으므로 긴장을 풀고 앉아서 그 대상을 아무 생각 없이 지그시 응시합니다. 그 때에도 온갖 잡념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도록 명칭을 사용합니다. 청색을 보고 있다면 ‘푸름, 푸름’이라든가 ‘청색, 청색’ 등 적당한 명칭을 계속 염송합니다. 염송하면 그 명칭에 방해되어 머리는 망상하지 않게 됩니다.
점점 보고 있으면 눈을 감아도 그것과 똑 같은 모양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순수인식의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어째서 눈을 감아도 보이게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눈을 뜨고 보더라도 ‘이것은 청색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머리입니다. 보통 사람은 눈으로부터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면 머리가 잠들어 버립니다. 정보가 없으면 마음은 언제나 유분심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곧바로 잠이 듭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 보고 있으면 보입니다.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눈으로부터 정보가 들어오고, 들어 온 정보를 머리로 영상화한 것입니다. 결국 눈으로부터의 정보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영상화는 머리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역으로 말하면 머리로는 자유롭게 무엇이든 영상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색이면 청색이라는 이 동일한 대상만을 계속 봅니다. 그것은 대개 2~3시간에서 4시간 동안은 응시하면서 수행해야 하지만, 길어지면 1개월이 될지도 모릅니다. 만약 배가 고프면 음식을 즉시 먹어치우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재빨리 돌아와서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일한 대상만을 응시하고, 동일한 정보만을 인식해 가면 마음이 학습합니다. 그러면 그 대상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보이게 됩니다. 머리가 그 인식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더욱 안정되어 있는 장소로 갑니다. 방에 있다면 열쇠를 잠그고 앉아서 머리로 보이는 대상을 보며 계속 동일한 말을 되풀이하며 수행을 합니다. 그러면 더욱 순수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청색을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아가 푸른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머리만의 작용입니다.
이 푸른빛은 안‧이‧비‧설‧신에 의지하고 있다면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도 머리의 작용이다. 마음의 작용이다’라고 알고 있는 사람만이 구체적으로, 강렬하게 순수한 푸른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의식을 더욱 강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빛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그곳에 집중해서 더욱 수행합니다. 그러면 상당히 크게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에 제1선정이 생겨납니다. 소위 일체감이 생겨납니다.
이 선정이 나타날 때는 차원을 부수는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보고, 그러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아도 빛의 대상이 보였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차원을 부순 것으로는 아직 되어 있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순식간에 일체감이 생겨나서, 마음이 지금까지는 의식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의식하는 것도 없어지고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단지 인식이 흘러갑니다. 그러한 일체감 같은 자신의 의식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계속 자신의 의식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자신의 의식이 없어지게 되고 인식만이 흘러갑니다. 그 순간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르막길에서는 계속 차의 액셀레이터를 밝고 올라가야 합니다. 오르막이기 때문에 계속 강하게 밟아야 합니다. 계속 밟다가 어디쯤에서 조금 평탄한 곳이 있으면 그 전까지 강하게 밟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밟지 않아도 차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와 같은 순간이 마음에 생겨납니다. 계속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자신의 의식이 없어지고, 휙 마음이 흘러갑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선정에 드는 순간으로 마음의 차원이 비상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수인식의 세계는 사마디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색계와 무색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선정에 드는 사람의 마음은 상당히 강렬하고 강합니다. 욕계에는 의지하지 않습니다.
‘눈이 없어도 보인다. 귀가 없어도 들린다. 5개의 창구가 없어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 인식은 생겨난다’라고 납득함으로서 온갖 재주도 부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공기를 보고 수행해서 체험을 얻은 사람은 벽을 보아도 벽의 공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눈을 뜨든, 감든 동일한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 벽의 뒤쪽을 보고 싶으면 보이게 됩니다. 그러한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그러한 재주는 가능한 것입니다.
선정의 길은 일부러 수행을 해서 키우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마음의 차원, 인식의 차원인 것입니다.
누구나 선정에 들기까지는 수년간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고 또 해서 겨우 특별한 경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본 대상을 눈을 감고도 볼 수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수준의 다른 경험입니다. ‘눈에 의지하지 않고 본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일반사회에 머무른 채로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사회로부터 확실하게 떠나라’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푸른색으로 수행해서 선정에 든 사람은 눈을 뜨나 감으나 항상 푸른색만으로 보여집니다. 오랜 시간 그 수행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수행을 그만두고 밥을 먹으려 하면 밥이 전부 푸른색으로 보입니다. 남의 옷을 보아도 옷의 무늬 따위는 보이지 않고 전부 푸른색 일색입니다. 마음이 다른 경로의 정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미 밖의 정보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신경을 써서 남과 이야기해야 합니다. 실수로 ‘왜 오늘 밥은 푸릅니까?’라고 말해버리면 세속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입니다. ‘푸를 리가 없습니다. 밥은 오늘도 흽니다. 당신은 수행이 지나쳐서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저 푸른 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황색셔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 쪽이 낫습니다. 본 것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는 쪽이 낫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사회 속에서의 경험보다 자신의 수행체험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시간 수행을 지속합니다. 그 수행하는 상태 가운데서, 예를 들어 눈을 감고도 수행대상이 보이는 상태가 되면 선정에 들기 위한 준비, 사전준비(parikamma)상태가 됩니다. 아직 요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재료들을 마련하여 전부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요리를 한 것이 아니듯이 선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면 예를 들어 청색을 보고 수행하는 사람이 그로인해 마음이 안정되어 망상개념도 사라지고, 다른 것들도 청색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때는 사마디에 근접(upacāra)해 있는 상태입니다. 사마디에 가까이 다가가 있고, 닮아 있는 듯한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아직 사마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억지로 수행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사마디의 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면 어느 날 마음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사마디가 생길 듯이 순응하여 잡힐 듯한 상태(anuloma)가 됩니다. 그래도 사마디가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보면 ‘이것이 사마디 상태가 아닐까? 아무리 보아도 사마디 상태인데!’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그 상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순응된 마음에서 선정에 들기까지도 시간이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을 거듭하여 마음을 키우고 사마디 상태가 될 정도의 능력으로 향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거의 사마디에 닮아 있는 상태가 되면 gotrabhū(種姓)라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 종성이라는 마음이 생겨나면 다음의 마음은 확실히 선정의 마음입니다. 종성심과 선정심, 이 2개의 마음은 연이어서 일어나기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선정 직전의 마음을 종성심이라 합니다. 그 뿐입니다.
gotrabhū(종성)심도 아직 욕계의 선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부터 마음의 파도가 바뀝니다. 차원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욕계로부터 뛰쳐나옵니다. 종성심은 갓난아기가 이제 태어나려고 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 집의 족보를 씁니다.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욕계의 차원을 뛰어넘은 마음은 사마디(선정)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준비상태, 근접상태, 순응상태, 종성의 단계 다음으로 선정이 생겨납니다.
종성심까지는 욕계이지만, 다음의 jhāna(선정)부터는 색계입니다. 수행을 하여 선정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이 초선정은 욕계 제1선정이 됩니다. 더욱 수행을 하여 더 위의 선정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도달한 선정이 무엇이든 선정에 도달하는 때의 마음의 경로는 준비상태, 근접상태, 순응상태, 종성의 단계 다음이 선정이라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준비상태의 마음이 길어지거나 근접상태의 마음이 길어지면 선정이 생겨나도 강하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선정은 한 순간입니다. 선정에서는 시간관계가 사라지기 때문에 본인은 긴 시간으로 느낄지 모릅니다.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사건으로 마음의 차원이 바뀌어버립니다.
선정에 이르는 4가지 마음을 축제에 비유해 보면,
우리는 자신의 집에 있고, 거리에서는 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축제에 참가하고 싶어서, 축제를 하고 있는 거리까지 계속 걸어가는 모습이 우리가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parikamma(준비상태)입니다.
거리에 나서면 축제의 소리나 흥청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upacāra(근접상태)입니다. 큰북 소리가 들려오기도 해서 ‘축제하는 곳과 가까워졌구나!’라는 상태입니다.
더욱 다가가서 축제 장소의 거의 앞까지 오면 대부분이 이제 보이거나 들립니다. 그것이 anuloma(순응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축제를 벌이고 있는 장소에 발을 들이밀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gotrabhū(종성)입니다. 지불해야 할 요금을 지불하고 ‘이제 입장권을 받았다’라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대로 입장해서 축제에 참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gotrabhū(종성)은 입장권을 갖고 들어갈 자격을 완전히 얻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입장권까지 갖고 ‘이제 한 발 앞이 축제 장소이므로, 그럼 되돌아가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리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을 때나, 다가갔을 때나, 거의 앞에까지 왔을 때에는 돌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앞에까지 갔지만 와보니까 돈이 부족했다’라든가 그러한 경우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에 열중하더라도 준비가 부족한 경우는 parikamma, upacāra, anuloma만 생겨나고 사마디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수행에 수행을 해서 마음의 상태를 완전히 갖추어진 시점에서 겨우 gotrabhū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gotrabhū의 마음이 생겨나면 다음에는 반드시 선정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선정이 생겨나는 시스템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이 생겨날 때도 동일한 시스템입니다. parikamma, upacāra, anuloma, gotrabhū의 순으로 생겨나고, gotrabhū가 생겨나면 다음은 반드시 magga-citta(도의 마음)과 phala-citta(과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사마디 수행에서 jhāna-citta(선정의 마음)이 생기는 대신에 조금 다른 마음인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이 생겨날 뿐입니다.
위빳사나의 경우에 마음은 어떻게 차원을 초월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선정의 경우 종성심으로 입장권을 산 후 선정에 듭니다. 선정 앞의 종성심으로는 더 이상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활동하지 않게 됩니다. 종성심부터는 마음에 이미 오개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오개를 억제해버린 것입니다. 억눌러버린 순간에 선정이 생겨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선정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라는 깨달음의 4단계가 생겨납니다.
보통의 사람이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으려 하면 맨 먼저 나타나는 것은 예류도의 마음입니다. 우선 종성심까지는 선정의 마음 경로와 동일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결과로 최초로 도달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종성심 다음에 예류도의 마음입니다.
종성심에서는 번뇌를 억제해버립니다. 억제는 했지만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특별한 마음인 예류도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 도의 마음의 특색은 번뇌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 번뇌가 완전히 사리진 마음, 번뇌를 차단한 마음을 도의 마음이라 합니다. 이 마음이 생겨나면 번뇌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번뇌는 종성심에서 이미 억제되어 있지만 예류과에 이른 사람은 3가지 번뇌를 완전히 차단하여 끊습니다.
첫 번째의 번뇌는 유신견입니다. 수행하기 이전에는 사물이 존재한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었지만, 수행의 결과 사물에는 사라져 없어지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분명하게 압니다.
두 번째의 번뇌는 계금취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행’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관습이나 습관은 많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주관으로 추측하고 고안한 방법입니다. 세간에서 행하고 있는 수행이라는 것은 증명이 되지 않은 어떤 개념을 믿고, 그 개념을 경험하기 위해 구축한 방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 영원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개별적인 나(個我)>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개인의 <개별적인 나>의 큰 바탕이 되는 <큰 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큰 나>를 <진짜 나(眞我)>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인간의 최종의 목적은 個我를 眞我와 일체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만들어냅니다.
증명되지 않는 망상개념을 기반으로 해서 어떠한 방법을 만들어내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올바른 수행은 되지 않습니다. 이상이나 개념을 쫓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고안하면 그 방법이 유효한가, 아닌가는 명확해집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그와 같은 방법인 것입니다. 인식은 사고나 주관으로 왜곡되어 있으므로 사고나 주관에 좌우되지 않도록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합니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 무상인 것을 무상이 아니라고 거꾸로 인식하고 있던 것을 발견합니다. 그 발견과 동시에 세간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고행이나 종교적인 의식, 의례 등은 무의미하고 효과가 없다고 압니다.
세 번째의 번뇌는 의심(疑 : 지금까지 있었던 혼란상태)이라 합니다. 이미 무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현상에 대해서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는 않을까’라는 애매함이 없어집니다. 일체의 현상은 순간적으로 생겨나서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무상인 것이라고 증명되었으므로 우유부단함은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종성심 다음에 나타나는 예류도심(預流道心)으로 이상의 3가지 번뇌를 남김없이, 또한 생겨남 없이 최종적으로 끊어버립니다. 그것으로 성자의 무리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간에게는 도심이 1회만 생겨납니다. 예를 들면 동일인을 2회 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류도심 다음으로 예류과심(預流果心)이 생겨납니다. 이 3가지의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마음입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마음은 도심이고, 번뇌가 사라진 마음은 과심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에게 예류도심, 일래도심, 불환도심, 아라한도심은 각각 1회만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생겨날 때마다 나머지의 번뇌가 순서대로 사라집니다. 일래도심에서 탐욕(欲 : 욕망)과 분노(怒 : 성냄)라는 번뇌가 약하게 됩니다. 초죽음이 된 상태입니다. 불환도심에서 탐욕과 분노는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아라한도심에서는 끊어버리기 어려운 상위의 번뇌 5개가 사라집니다.
끊어버리기 어려운 상위 번뇌의 첫 번째는 색계에 대한 집착입니다.
두 번째는 무색계에 대한 집착입니다. 색계, 무색계란 범천(梵天)의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아라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보통의 욕구보다 위에 있는 존재욕(存在欲 :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까지 없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아만(慢 : 비교)입니다. 만(慢)이란 빨리어로 māna(마-나)입니다. ‘가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척도로 해서 타인을 비교하거나 평가하거나 가늠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아라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자아의식이 없어지게 됩니다. 재는 척도가 사라진 것입니다.
네 번째는 도거(掉擧 : 혼란, 들뜸)입니다. 혼란에는 2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예측과 준비를 하여 대기하고 있지만 그 순간이 되어서 준비했던 것과 다른 상황이 되는 경우는 혼란해집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나 혼란에 빠집니다. 그것은 일체가 무상이라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파악이 되지 않는 때는 혼란에 빠집니다. 모르는 곳에 가거나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쉽게 도거에 빠집니다. 그것은 지금 순간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우리들에게 쉽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2종류의 도거입니다. 아라한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상을 완전히 알고 있고, 객관적인 관찰능력도 완성되어 있으므로 도거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무명(無明)입니다. 단순하게 무명이란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아는 데 장애가 되었던 의심, 성냄, 탐욕 등이 이미 사라져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진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명이 사라지면 일체의 번뇌가 남김없이 두 번 다시 나타날 가능성도 없어져서 진리에 도달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무명이라는 하나의 번뇌가 4회로 단절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명이 사라지는 것을 별칭으로 ‘지혜’라고도 합니다. 지혜를 빛에 비유해 봅시다. 강렬한 지혜의 빛에 의해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지혜에 의해서 4회로 나누어서 일체의 번뇌가 사라져 갑니다. 그럼 지혜의 빛으로 무엇을 보는가요? 무상을 보고, 일체는 고라고 관찰하고, 무아를 관찰합니다.
도의 마음(도심)의 앞에는 욕계의 마음인 종성심입니다. 종성심 전까지 생명은 속세의 차원에 있습니다. 종성심의 다음에 도심이 나타납니다. 도심은 출세간의 마음입니다. 이미 범부가 아닙니다. 성자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드디어 색계나 무색계와도 관계없이 윤회를 벗어나게 됩니다.
도심(道心 magga-citta)의 다음에 반드시 생겨나는 것이 과심(果心 phala-citta)입니다. 도심으로 번뇌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에 열반을 체험합니다.
그것으로 속행심(速行心) 7개가 아직 하나 남아 있다면 과심의 다음으로 또 하나 속행심으로서 과심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출세간의 도의 과정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을 때는 그러한 식으로 깨달음이 생겨납니다. 일순간의 사건입니다.
5. 예류과와 예류도의 차이
예류도에는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이해하는 지혜타입의 법수자와 여래에의 믿음(信)을 가지는 신심타입의 신수자의 두 종류의 성향이 있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류과에 도달하면 그 차이는 없어져 같은 하나의 예류과가 되는 것일까요?
예류도에서의 성향은 예류과가 되어도 남습니다. 깨달음의 단계를 선정체험의 유무에 의해 일곱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이 경전의 곳곳에 보이나, 그 최초의 둘은 법수자와 신수자입니다. 한편 예류과 이상으로 선정체험이 없는 견도달자(見到達者)와 신해탈자(信解脫者)에게는 각각 법수자・신수자의 성향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중부70경 Kitāgiri-sutta(끼따기리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들 일곱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알려져 있다. 일곱 사람이란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 혜해탈자(慧解脫者), 신증자(身證者), 견도달자(見到達者), 신해탈자(信解脫者), 법수자(法随者), 신수자(信随者)이다.
(ubhatobhāga-vimutto pańńāvimutto kāyasakkhi diţţhippatto saddhāvimutto
dhammānusāri saddhānusāri). 〔MN I, 477〕”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와 혜해탈자(慧解脫者)는 아라한입니다. 양면해탈자는 선정지:止)을 체험하고(심해탈), 혜(관:觀)에 의해 번뇌를 멸진했으므로(혜해탈) 「양면탈자라 불립니다. 혜해탈자는 심해탈없이 아라한에 이른 자입니다.
이 둘은 번뇌를 소멸하고 수행을 완성했으므로 불방일(不放逸)이 될 수가 없으므로 부처님에게 「불방일에 힘쓸 것」이라는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하의 다섯은 전부 아라한과를 향해 「불방일에 힘쓸 것」이라고 지도 받을 단계에 있습니다. 신증(身證), 견도달(見到達), 신해탈(信解脫)의 셋은 아라한향 이하 예류과 이상으로 깨달음의 일부에는 도달한 자입니다. 그 중 신증자(身證者)는 선정을 체험하고 (심해탈), 지혜(慧)에 의해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자입니다.
견도달과 신해탈의 둘은 함께 무색계선정 또는 색계선정도 포함한 팔선정을 체험하지 않았으나, 함께 지혜(慧)에 의해 번뇌의 일부 (삼결 三結)가 소멸한 상태입니다. 양자의 성격의 차이는 그대로 수법, 수신의 둘의 차이에 대응합니다.
견도달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는 지혜(慧)로서 보고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상태이다(pańńāya c´ assa disvā ekacce āsavā parikkhinā honti). 또한 이 자에게는 여래에 의해 설해진 교법이 지혜(慧)에 의해 잘 간파되고 잘 통찰된다. 비구들이여! 이 자는 견도달자라고 불린다. 〔MN I, 477〕”
견도달자는 선정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지혜에 의해 번뇌의 일부(삼결)는 소멸한 상태이고 예류과 이상입니다. 그 특징은 여래의 교법을 지혜로 잘 간파하고 통찰한다는 것입니다.
신해탈자도 견도달자와 같이 선정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지혜에 의해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상태이고 예류과 이상입니다.
신해탈자(saddhāvimutta)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의 믿음(信)이 고정되고 뿌리가 생기고 확정되어 있다(tathāgate c´ assa saddhā niviţţhā hoti mūlajātā patiţţhitā). 비구들이여! 이 자는 신해탈자라고 불린다. 〔MN I, 477〕”
불법(佛法)을 지혜로 통찰하는 견도달자와는 달리 신해탈자는 부처님에의 신뢰가 확고부동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비교를 위해 계속해서 설명되는 법수자와 신수자를 고찰해 봅시다.
법수자는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또한 이 자는 지혜(慧)로써 보고 번뇌가 소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 의해 설해진 교법이 지혜(慧)에 의해 조금은 이해되고 용인되어 있다. 게다가 이 자에게는 신근(信根), 정진근(精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이라는 특질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자는 법수자라고 불린다. 〔MN I, 477〕” 라고 설명됩니다.
여래의 교법을 지혜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지혜타입인 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견도달자와 유사합니다. 양자의 다른 점은 삼결(三結)을 소멸하여 예류과 이상이 되었는지 아직 되지 않았는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신수자의 특징은 신해탈자와 대응합니다. 다른 부분만 고찰해보면,
“비구들이여! 여기에 -----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게 조금의 믿음(信), 조금의 애락(愛樂)이 있다. 게다가 이 자에게는 신근(信根) 내지 혜근(慧根)이라는 특질이 있다. 이 자는 신수자라고 불린다. 〔MN I, 477〕”
이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래에의 믿음・애락을 가진 신순(信順)타입인 것은 신해탈자와 유사합니다. 예류과 이상인가 그 이하의 예류향에 그치는 것인가가 다른 것입니다.
예류과에의 준비단계로서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이해하는 것, 또는 여래에게 믿음(信)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느 타입이라도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류과 현증(現證) 후에도 그 성향은 남습니다.
6. 예류과 현증(現證)에의 불퇴의 길
예류과 현증에의 길을 걷는 법수・신수자는 보시공양을 받을 만한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일원이지만, 예류과 이상인 자와 같이 아라한과를 이룰 때까지 불퇴전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또는 아직 범부나 악도에 퇴전할 여지가 있는 깨달음이 불확정한 단계일까요?
수법・수신 단계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특별한 상태에 이른 법수자・신수자는 불퇴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류과를 현증치 않고는 죽을 수 없는 자가 설명됩니다. 우선 특별한 상태의 신수자가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무상, 변화하는 것, 변이하는 것이다. 〔이,비,설,신,의〕는 무상, 변화하는 것, 변이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라도 이 진리(dhamma)를 이처럼 신순(信順)하고 신해(信解)하는 자는 이렇게 일컬어진다 : 바른 것에의 결정(決定)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신수자이다. 지옥, 축생, 또는 아귀로 윤회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류과를 현증하지 않은 채 죽을 수는 없게 된다(abhabbo ca tāva kālam kātum yāva na sotāpattiphalam sacchikaroti). 〔AN Ⅲ, 225〕”
부처님 자신을 신순(信順)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신순((信順)・신해(信解)하는 즉 눈(眼) 등의 육근, 그리고 이 인용문 아래에 설명하고 있지만, 색(色)등의 육경, 더욱이 육식 등의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행무상의 진실(dhamma)을 신순(信順)・신해(信解)하면, 그 자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진리에 오입(悟入)하는 직전의 단계에 있는 특수한 신수자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신수자는 「바른 것의 결정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즉 언젠가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삼악도에 떨어질 정도의 악업만은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신수자는 금생에서 이미 「예류과를 현증(現證)하지 않은 채 죽을 수 없게 되었기」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예류과에서 아라한까지의 길도 결정되어 있습니다.
특수한 상태의 법수자도 특수한 신수자도 같이 설명되어집니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 이 진리를 이처럼 지혜(慧)에 의해 조금은 이해하고 인용(認容)하는 자는 누구라도 이렇게 일컬어진다 : 바른 것의 결정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법수자이다. 지옥, 축생, 또는 아귀로 윤회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류과를 현증(現證)하지 않은 채 죽지는 못한다.〔 AN Ⅲ, 225〕”
법수자도 부처님이 설하는 여러 가지 교법(dhamma)이 아닌 바로 제행무상의 진리(dhamma) 그 자체를 지혜(慧)에 의해 조금이라도 이해・수용한다면 예류과를 현증(現證)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 특수한 법수자가 됩니다.
이 특수한 수신・수법의 경지를 넘어서면 예류과에 달합니다.
“누구라도 (제행무상의) 진리를 이처럼 알고 보는 (jānāti passati) 자는 이렇게 일컬어진다 : 예류자이다.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자이다. 정각을 향하는 것이 결정된 자이다. 〔AN Ⅲ, 225〕”
7. 예류과 현증(現證)의 방법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예류과에 도달하기 위한 「진리를 알고 본다」란 어떠한 것일까요?
빨리 경전에서 한 예를 봅니다. 욱가거사는 재가자인 채로 불환과에 도달했지만, 어떤 비구에게 말한 그의 여덟 가지 희유미증유의 일 중에서 두 가지가 예류과 현증(現證)에 관한 것입니다.
“존자시여! 제가 처음으로 멀리서 세존을 뵈었을 때 뵙자마자 세존에 대하여 제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cittaṁ pasidi). 존자시여! 제게는 이 제일의 희유미증유의 일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그러한 저는 마음이 청청해져 세존을 뵙고 공경했습니다. 세존은 그러한 나에게 보시의 말씀, 지계의 말씀, 천상의 말씀, 욕구(欲)의 불이익・해로움(害)・더러움, 이욕(離欲)에 있어서의 이익 등을 순차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AN IV, 209〕”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 부처님에게 신순(信順)했다는 것입니다. 거사자신이 희유미증유의 일을 설명하듯이 이것이 깨달음을 향하는 예류과에 들어간 순간입니다. 그러고 나서 교법을 순차로 배우고, 어느 날 단계를 하나 넘습니다.
“제가 건전한 마음, 유연한 마음, 장애를 벗어난(離障) 마음, 환희의 마음, 청청한 마음이 된 것을 아시고 세존은 여러 부처님의 최승의 교법(dhammadesanā)을 설해주셨습니다. 즉 고집멸도입니다. 예를 들면 흑점도 없는 깨끗한 천이 그대로 바르게 〔염〕색을 취하듯이, 제게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ṁ)」라고 이진이구(離塵離垢)의 법안이 생겼습니다(dhammacakkhuṁ udapādi). 존자시여! 그러한 제가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의 오도(悟道)에 들은 것입니다. 의심을 초월하고 의혹을 떨치고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 이외의 것에는 의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불법승에 귀의하고, 범행(梵行)을 다섯 가지로 하는 학처(學處)를 지녔습니다. 존자시여! 제게는 이러한 두 번째의 희유미증유한 일이 있었습니다. 〔AN IV, 209〕”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즉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보고 얻고 발견하고 오도(悟道)에 들어갔으므로 「영원불멸의 내가 있다」고 하는「유신견」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발견하고 오도(悟道) 에 들어갔으므로 교법에 대한 「의심」도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삼귀의하고 오계를 지니고 다른 스승의 가르침이나 관례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계금취(戒禁取)」도 사라졌습니다.
즉 「이진이구(離塵離垢)의 법안이 생겼을 때 (dhammacakkhum udapādi)」 〔정(正)〕견이 생김과 함께 (sahadassanuppādā) 유신견 ・의심・계금취의 삼결이 끊어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최초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안냐 꼰단냐도 설법을 듣고 있을 때 그대로 법안이 생기고 예류과를 깨달아 그것을 부처님은 「꼰단냐는 잘 알았다 (aňňāsi vata bho Kondaňňo 〔SN V, 423〕」고 칭송하신 것과 같습니다. 갑자기 「아라한이 되었다」가 아니라, 선정에 들지 않고 듣고 있는 채로 진리를 이해・용인하여 예류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세 개의 번뇌(삼결:三結)가 소멸했으므로 예류과를 현증(現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예류과를 현증(現證)한 것일까요?
여기에서는 선정을 체험하고 무상을 발견했다고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정에 들지 않더라도 진리를 듣고 있는 채로 진리를 이해・용인하여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여 그것만으로 예류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즉 무상이라고 그냥 신순(信順)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발견하여 납득하면 「영원불멸의 나」라고 하는 「유신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의심」・「계금취」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 필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찰라 때마다 그야말로 광속으로 변화생멸을 반복하는 미립자 레벨의 신체와 변화 자체를, 그리고 물질보다 빨리 생멸한다고 하는 마음의 변화 자체를, 생(生)하면 바로 소멸한다는 그 순간을 포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행의 끊임없는 생멸・무상을 스스로 발견하면, 제행은 무상하다고 싫어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전이나 아비담마에 의하면 부처님의 시대라면 부처님의 교법에 의해 그 논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수자・신수자의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체험하고 오도(悟道)에 들어가고 납득하여 「유신견」이 실제로 소멸하는 것은 그것을 초월한 예류과 단계입니다.
단계를 초월하는 방법, 광속이상으로 찰나 소멸하는 제행을 「소멸했다. 무상이다」라고 스스로 발견하는 방법은 위빳사나(vipassanā) 이상은 없습니다. 위빳사나는 사마타(samatha)와 쌍벽을 이루는 불교 독자적인 「수행」입니다. 그것은 사마타수행처럼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여 다른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마다 변화생멸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지만 보통 그렇게 포착할 수 없는 눈앞에 나타나서는 사라지는 일상의 현상 하나하나를 매 순간마다 계속 확인(알아차림 sati)하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사띠를 계속함으로써 현상의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지금 순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나 자신은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 찰나 소멸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체험하고 이해・납득하면 「제행무상」의 진리를 보고 얻고 발견하고 오도(悟道)에 들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면 거기에서 제행의 무상을 파악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인용처럼 수행하고 있지 않아도 부처님의 진리 교법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알아차림(sati)으로서 확인하면서 계속 듣고 설법을 들으면서 한 순간이라도 현상이 소멸하는 순간을 파악하고 「확실하게 소멸했다. 무상이다」라고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오도(悟道)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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