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불교 전도는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20170922)

담마마-마까 2022. 8. 25. 11:51

* 불교 전도는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20170922)

 

부처님은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진리를 설했습니다. 전도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명 이상이 부처님의 아래에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먼저 최초로 제자가 된 다섯 명의 비구, 부호의 후계자였던 야사와 그 친구 오십사인, 그래서 부처님을 비롯한 61인의 아라한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은 60인의 아라한을 각 지방으로 전도 활동을 위해서 파견하면서 자신은 우루웰라 강가에 수도장을 지어 수행하고 있던 천명의 수행자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의 리더는 깟사빠 3형제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이 천명의 수행자들은 종교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다양한 종교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장남인 우루웰라·깟사빠는 자신은 깨달음을 이루어 성자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다는 관습은 없었습니다. 바라문들은 신들에 대해서 의식을 행하거나 일반인의 기도·점 등의 의식을 행하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깟사빠 3형제는 타락하고 있던 바라문교에는 흥미가 없었고 자신들의 힘으로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3형제가 목적으로 하는 점은 어느 정도까지 부처님과 공통됩니다. 부처님은 「먼저 진리를 깨달고 나서, 같은 목적으로 수행하는 분들에게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초창기의 부처님은 같은 목적으로 노력하는 동료를 선택하여 효율적으로 포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면 부처님은 손쉽게 전도 활동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일도 가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앞에 두고 모두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출가 전에 싯닷타 왕자의 하인으로서 일을 하고 있던 다섯 명의 동료조차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것을 용이하게 인정하지 않고 설법마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이 납득할 때까지 부처님은 시간을 들여 설득했습니다. 우루웰라 강가에서 수행하고 있던 천명의 수행자들도 그와 같이 그들이 부처님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지 않아 1060명의 해탈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지만 전도 활동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의 45년간의 전도의 역사에는 「부디 진리를 설해주세요. 기대하고 있습니다!」라는 호조건은 없었습니다. 모두 부처님을 비난·모욕하기 위한 틈을 찾고 있었습니다. 가끔 부처님에게 반대하는 데모까지 일어났습니다. 출가한 제자들의 사이에서도 트러블이 일어났던 것이 불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꼬삼비에 살고 있던 비구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상가의 화합이 없어졌습니다. 부처님이 「사이좋게 지내세요!」라고 훈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개입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로 내쳐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혼자 숲속에서 한 마리의 야생 코끼리와 함께 3개월간이나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아무리 일어나도, 불교는 급속히 인도 사회에 펼쳐진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1):탐구 정신

 

고대 인도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바라문 카스트의 사람들은 권력과 재산을 얻을 목적으로 종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세계는 바라문만의 특권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왕족의 사람들과 일반인의 사이에 바라문의 권위에 반대하는 운동이 천천히 나타났습니다. 자기 스스로 정신의 평온함을 찾아 구하는 종교가가 잇달아 나타나서 많은 종교철학이 주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가들 사이에서는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 일상 습관이 되었습니다. 정신의 평온함을 추구한 새로운 활동은 그 목적에 이르지도 못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낳았습니다. 아무도 납득할 만한 대답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찾아 구하는 흥미의 불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 해탈에 이르러 괴로움을 넘었다」라고 공표하자, 사람들의 사이에 「이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자」라고 하는 기분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솔직하게 듣는다고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과 논쟁해 그 가르침을 논파할 목적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한 것은 철학 사상이 아니라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를 논파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탐구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급속히 펼쳐졌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만으로는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이유(2):개방된 진리

 

종교의 가르침은 아무리 노력해도 닫힌 조직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2개의 사회로 헤어져 버립니다.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있었으므로 새로운 종교라도 어느 특정의 사회집단 안에서만 펼쳐집니다. 다른 카스트의 사람들은 그 종교 조직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교가들도 다양한 교리·수행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일반인은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반대하거나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완전하게 개방된 진리를 설했습니다. 사회의 상식을 벗어나는 의식· 수행 방법 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진리를 듣기 위해서 사람의 카스트도, 성별도, 연령도, 지식수준도, 재력도, 사회적 지위도 묻지 않았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은 마음의 평온함을 솔직하게 구하고 있는 것인가?」

 

이유(3):믿는 것이 아니라 납득한다.

 

종교의 결점은 「믿음」입니다. 창조론, 영혼의 존재, 사후에 가는 영원한 천국, 신 등 증명 불가능한 개념에 근거해 가르침을 폅니다. 이러한 종교 개념이 올바르다고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증명하려고 하면 모순이 되어 버립니다.

 

알기 쉬운 예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나는 창조론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창조론을 믿는 사람은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증거이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창조하지 않았으면 사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에 있는 모순은 ① 만약 삼라만상이 누군가에게 창조되었다면, 피조물인 내가 그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② 만약 누군가가 「나는 그대를 창조했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당신을 창조한 것은 누구입니까?」라고 하는 의문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③ 「창조가 없으면 존재는 없다」라는 정리를 만들기 전에, 창조야말로 존재의 이유인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④ 창조된 것인데도 진화합니다. 창조된 채로 현상이 멈춰 있지 않은 것도 창조론이 가지는 모순입니다.

 

종교가는 착각해서 그러한 종류의 쓸데없는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종교 개념이 올바르다고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정직하게 인정하면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종교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은 어느 특정의 종교 개념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올바를지도 모릅니다. 혹은 잘못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일지 아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모두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계속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은 「증거가 있다」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믿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래서 붓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토론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질문하고 공격할 자유가 있습니다. 납득되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납득에 이를 때까지 철저하게 조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도가 된 사람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는 병은 없습니다.

 

무언가를 납득했다면 그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안정됩니다. 강해집니다. 세상의 비판 등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는 타종교를 믿는 분들보다 정신적으로 강했습니다. 부처님이 아니라도, 불교도는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가르침을 남에게 가르쳐 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유(4):이승에서 확인된다.

 

종교의 다음 결점은 목표로 하는 목적지입니다. 목적에 이르는 것은 사후입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올바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죽고 나서 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그러한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인다기보다, 종교 조직이 사람들의 정신을 납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올바를지도 모릅니다.

 

불교가 말하는 목적은 사후의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 이생에서의 해탈입니다. 깨달음입니다. 해탈이란 무엇인지 일반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해탈은 모든 고민, 괴로움을 넘은 상태이다」라고 설명됩니다. 「정신의 완전인 자유」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해야 할 일을 다 해서 끝냈다」 「수행을 완성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자유롭게 되었다」 등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해방되었는지 아닌지는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고민, 괴로움이 사라졌는지 아닌지도 스스로 압니다. 붓다의 실천 방법은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천하면 오래지 않아 진리에 이릅니다. 가르침이 올바른지 아닌지는 죽기 전에 확인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다른 종교보다 붓다의 가르침에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 외의 이유

 

부처님과 제자들의 생활 습관, 부처님의 설법의 방법, 사람의 어떤 질문에도 정중하게 대답하는 태도, 속세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에도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 시대를 거쳐도 가르침이 낡지 않는 것, 모든 생명에 대해서 무제한의 자애를 실천하는 것, 정치의 세계·경제의 세계·학문의 세계·일상의 삶의 방법 모두 붓다의 가르침을 사용할 수 있는 것 등,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현대의 불교 학자는 자유롭게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합니다. 그러나 그 연구자들도 불교가 어떠한 가르침인지 결론지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철학이다」 「불교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처세술이다」 「불교도 종교이다」 「불교는 심리학이다」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불교의 차이

 

종교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사후, 영원히 산다」라고 믿는 세계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마음의 기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연구하는 흥미마저 가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기능은 대학의 심리학 연구소에서 배우는 것이고, 영혼을 정화하는 작업은 교회같은 종교기관에서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의식·의례가 있습니다. 영혼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를 실증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의례들이 존재합니다. 물로 영혼을 맑게 한다, 불로 영혼을 맑게 한다, 단식으로 영혼을 맑게 한다, 특정의 식사를 섭취해 영혼을 맑게 한다, 비는 것이나 고행하는 것으로 영혼을 맑게 한다, 세례와 참회를 하는 것으로 영혼을 맑게 한다, 일반 사회로부터 완전하게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영혼을 맑게 한다, 이상한 복장을 몸에 두르는……등등의 방법이 무수히 있습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붓다는 명확하게 「영원불멸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인과 법칙이므로, 모든 현상은 무상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한 사람의 나발행자를 만났습니다. 나발을 길러 씻지 않기 때문에 머리는 이투성이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또 옷 대신에 사슴의 가죽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사슴의 가죽은 딱딱해서 걷기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 수행자는 「자신은 성실한 수행자이다」라고 오만한 태도로 있었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행위입니다. 사슴의 가죽을 입고, 더러운 신체로 고생해도, 존재도 하지 않는 영혼이 정화될 리는 없습니다. 결과는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수행자는 고행하는 자신을 고행하지 않는 이들과 비교하니 오만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은 분노·질투·미움·오만·무지 등으로 격렬하게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에게 이와 같이 말을 합니다. 「당신의 나발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사슴의 가죽에도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번뇌가 우거져 있습니다. 당신은 외형을 정돈하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에도 종교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해서 과학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늙어 망가져 가는 육체를 정돈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은 마음을 맑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맑게 하기 전에, 마음이 어떻게 더러워져 있는지, 왜 더러워지는지, 더러움은 어느 정도 있는지 등을 명확하게 알고 나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실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밖에 드러나는 것만을 신경쓰는 의식·의례·기도·공양·기원·신앙·미신의 신비적인 세계입니다. 불교는 이런 종교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정돈해서 맑고 깨끗하게 하는 구체적인 세계입니다.

 

● 이번 포인트

 

• 불교의 전도는 어려운 일입니다.

• 다른 종교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 불교는 신뢰감이 생겨서 납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 불교는 진리를 발견하는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