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20170811)
◆ 존속하기 위한 영양 ◆
우리의 신체는 끊임없이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금방 망가져 죽어버립니다. 매우 연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형광등과 같습니다. 항상 전기가 흐르지 않고 잠시라도 끊어지면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전기가 끊어진 순간 형광등의 빛도 사라집니다. 형광등은 편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전기를 넣어 주면 어둠을 추방합니다. 스스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는 것은 그렇게 편한 일이 아닙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자신의 힘으로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쉼 없이 신체가 망가져 죽는 순간까지 에너지를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귀찮아서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시적으로 멈춘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론적으로 그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여러 가지 구조가 있습니다.
◆ 괴로움이라고 하는 위협 ◆
그 구조란 「괴로움」이라고 하는 위협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사람은 호흡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일단 호흡을 멈추어 보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길어도 2~3분 정도입니다. 그 사이에 괴로움이 철저하게 공격합니다. 괴로움이 반드시 이깁니다. 호흡을 멈춘 사람이 져서 다시 호흡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인 것입니다. 호흡을 멈추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이라도 참지 못할 괴로움을 느낍니다. 생명은 이 괴로움이 무서워 계속 끊임없이 호흡합니다. 호흡을 해서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생명에는 그럴 자유가 없습니다. 괴로움에 위협당해 생명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을 잇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는 더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영양입니다. 우리는 하루 세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신체의 세포에는 끊임없이 영양이 필요합니다. 삼시 세끼를 먹어 영양을 신체 속에 모아둡니다. 신체가 그것을 소비하며 살아나갑니다. 자동차의 연료탱크에 연료를 넣어 둡니다.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것은 그 연료를 계속 소비하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는 항상 연료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이 이 신체도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신체에 영양을 주지 않는 것에 도전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반드시 괴로움이 공격해 옵니다. 모인 영양이 줄어들면 공복감이라고 하는 괴로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무시할 수 없니다. 그런데도 먹지 않고 있으면 신체의 여러 곳에서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최후에는 뇌가 공격을 받습니다. 환각을 일으켜 머리를 이상하게 합니다. 먹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를 부수어 버립니다.
영양의 경우 하나 더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에 영양이 되는 것을 맛있다고 느낍니다. 미각에 매료됩니다. 집착합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지만 「맛있는 것」을 찾아 먹습니다. 이와 같이 당근과 채찍기능으로 우리는 생명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 자극이라고 하는 영양 ◆
존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더 필요합니다. 신체라고 하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마음에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주지 않으면 다시 괴로움에 위협당합니다. 신체에 무언가가 접하는 것, 귀에 소리가 접하는 것, 코에 냄새가 접하는 것, 눈에 밖의 세계가 비치는 것, 혀로 맛을 느끼는 것 등은 마음의 영양이 됩니다. 즉 안·이·비·설· 신·의에 색·성·향·미·촉·법이 접촉되면 에너지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정리해 불교에서는 촉이라고 하는 양양소라고 말합니다. ·
그런데도 영양은 부족합니다. 망상하거나 생각하거나 해서 마음이 스스로도 영양을 만듭니다. 이 경우도 위협과 달콤함이 일하게 됩니다. 만약 사람의 눈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무서워하거나 불안에 떨 것입니다. 귀가 이상해져도 같은 것입니다. 맛을 느끼지 않게 되어도 불안해하고 무서워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괴로움은 육체적 괴로움보다 어렵습니다. 배가 고파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이상해지거나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면 참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불안이 공격합니다. 간사하게 마음은 고민이나 괴로움, 불안도 영양으로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영양이므로 존속할수록 점점 괴로움에 빠져 버립니다. 그런데도 영양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이 고민이나 괴로움을 영양으로 하는 것은 그치지 않습니다.
◆ 사고·망상이라고 하는 영양 ◆
이 포인트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분노의 망상, 질투의 망상을 합니다. 나태함의 망상도 합니다. 과대 망상도 합니다. 이것은 네가티브 사고로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망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그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소중한 영양 자원입니다. 마약 중독과 닮아있습니다. 인생을 파괴한다고 알고 있어도 계속합니다. 마음에 있어서는 소중한 영양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망상에 의해 정신적으로 병이 들어있는 사람은 병을 치료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망상을 멈추고 싶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사는 보람이 되어 있습니다. 망상 때문에 병이 든 사람이 병은 치료하고 망상만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성립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의사가 육체의 병을 간단하게 고칠 수 있지만 정신병은 고치기가 힘든 것입니다. 대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환자를 약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안·이·비·설·신은 물질이므로 한없이 영양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코에서는 이 현상을 잘 압니다. 코로 향기를 느껴보면 처음은 잘 알지만 계속해 냄새를 맡으면 향기를 모르게 됩니다. 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핥는 사탕은 달게 느낍니다. 계속해서 핥으면 거의 맛을 모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많은 종류의 반찬을 교대로 먹는 것은 맛을 즐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귀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너무 듣게 되면 청각이 약해집니다. 혀나 코와 달리 원상회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눈도 망가지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 감정의 자급 생산 ◆
육체의 약함을 알고 마음이 영양으로서 오근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망상이나 사고라는 형태를 취해서 마음껏 영양을 자급 생산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사고하지 않는 생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생명에도 생존욕구가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합니다. 이 욕구와 분노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이 감정에 의해 마음에 영양을 자급 생산할 수 있습니다. 생존욕구와 죽음의 공포감이라고 하는 감정에 질투, 미움, 원망, 인색함, 오만, 비하, 허세, 경쟁심 등의 동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고 능력이 없어도 마음에는 존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영양이 남아있습니다. 육체가 망가져도 생명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윤회로서 계속되는 것은 이 이유에 의합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악행을 하지 않는 한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은 생멸하면서 존속합니다. 불교만이 윤회가 생명에 있어서 최대의 위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살고 싶다고 하는 욕구를 키우는 것입니다.
◆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많다 ◆
다시 당근과 채찍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비록 채찍이 있어도 당근이 많으면 사는 것은 반드시 나쁘지 않습니다. 만약 당근이 하찮을 정도로 적고 채찍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면 존속하는 것에 어떤 의미도 없어집니다. 부처님은 사는데 있어서 기쁨은 하찮을 정도로 적고, 괴로움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조사해봅시다.
먹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행복한 행위입니다. 여러 가지로 요리해서 맛있고 즐겁게 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합시다. 재료를 얻는 것, 요리를 만드는 것, 식탁에 준비하는 것, 설거지 등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요? 그것은 행복한 일입니까? 힘든 일입니다. 그 시간과 먹고 즐기는 시간을 비교해 봅시다. 그저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먹는 것이 끝나 있습니다. 그러나 식재료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들여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먹는 시간까지 긴 시간 요리하는데 걸립니다. 설거지도 긴 시간 걸립니다. 긴 시간 괴로워하며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4시간 동안 괴로움을 받는다면 3분을 즐겁게 해 주겠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 3분의 즐거움을 위해 4시간의 괴로움을 받을까요? 눈은 어떻습니까?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눈에 비치는 정보를 조사하면 어떻습니까? 기분 좋은 아름다운 것이 비친 시간과 시시한 것이 비친 시간을 비교해 보십시오. 기분 좋은 아름다운 것이 비친 시간은 하찮을 정도로 적을 것입니다.
얼마 동안 귀에 듣기 좋은 소리가 들어옵니까?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어느 정도 들어옵니까? 인생을 객관적으로 조사해 보면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발견은 존속에 대한 집착을 약하게 합니다. 사는 것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욕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한 의욕을 일으키질 않습니다. 모두 사는 것에 철저하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극락정토가 있다는 신화까지 만듭니다. 더하여 그 신화의 나라에 가는 것이 간단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속입니다. 사후 좋은 곳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면 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너무 게을러서 그 찬스마저도 잃습니다.
◆ 존속욕구의 함정 ◆
이 비참한 상황을 부처님의 말로 설명합시다. 눈·귀·혀 등에 정보가 접하면 사람들은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반드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닌데도 그 얼마 안 되는 일부분에 집착하여 모든 괴로움을 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즐거움을 찾아 구합니다. 즐거움이라고 해도 육체의 자극을 쫓고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평온함」이라고 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쓸데없이 마음이 존속하기 위한 영양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안 되는 즐거움을 위해서 더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현실을 숨깁니다. 사는 괴로움을 속입니다.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자기암시를 합니다. 신화까지 만들어 그것이 진정한 이야기라고 믿습니다. 고생하는 자가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이유도 모르는 말까지 만듭니다. 이와 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최대의 괴로움인 윤회로부터 탈출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하찮을 정도로 적은 당근과 수없는 채찍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당근의 양이 조금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생로병사」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로병사에 집착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윤회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생로병사에 집착합니다. 이 상황을 부처님은 무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번 포인트
•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영양이 필요합니다.
• 오근으로부터 영양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 인생에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위협이 있습니다.
• 살아가면서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습니다.
• 존속욕구가 있는 한 해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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