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0년 일상수행법문

바르게 도의 길에 이르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2000 1202)

담마마-마까 2024. 7. 27. 15:01

https://youtu.be/2RukhUyOidY?si=zOuhfDxlKsRKKlOQ

 

* 바르게 도의 길에 이르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2000 1202)

 

어쨌든 오늘은 법문이 이어지고 나서 수계식이 있을 겁니다. 근데 이렇게 사람이 없어가지고 어떡하나, 수계식 할 사람이..

자, 편하게 앉고 눈을 감고 스님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통도사에 구하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말을 잘 들어서 알고 있을 그런 큰 스님입니다.
이 구하스님이 어릴 때 출가를 해가지고 얼마만큼 수행을 열심히 했는지, 동진 출가를 하니깐 위에 있는 어른 스님들이 막 시켜 먹거든.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하니까 그게 굉장히 힘들다고. 그래서 이 어린 동자승인 구하스님이 뭐라고 다짐하냐면은 ‘아, 나도 제발 좀 시켜 먹었으면 좋겠다’ 그런 다짐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인제 세월이 흘러가지고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주 큰 스님이 됐거든.

그러니 그때가 이제 일제시대이기 때문에 서울 같은 데 나들이를 한번 가면 10리 밖으로 스님들이 도열을 해있었다고 그럽니다. 쭉 도열을 해가지고 구하스님을 맞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갈 거라. 그게 인제 어릴 때 그 소원을 결국 인제 푼 격이 된 거라. 남을 부릴 수 있는 위치에까지 왔으니까.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본인 스스로는 굉장한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근대사를 빛낸 스님 중에서 깨끗하게 잘 중답게 살아가시던 분 중의 하나에 꼽힙니다. 세속적으로 존경받는 분이 아니라 스님들 사이에서 그렇게 존경받는 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남을 인제 부리는 위치까지 올라온 구하스님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상당히 거만했을 것 아니라. 일제시대 때니깐 그중에 이제 어떤 사람이 일본 순사한테 연락을 해가지고 “구하 스님을 죽여버려라” 이랬거든. 그래서 인제 일본 순사가 구하스님 앞에 가서 뭐 자기 나라도 아니니까 뭐 그냥 큰 거리에서 죽이든 말든 관계없는 거라. 그때까지만 해도 승려라고 하는 계층 자체가 그렇게 존경받는 계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큰 길가에서 구하스님 가는 걸 갖다가 권총을 갖다가 목에다 툭 댔어요. 일반 스님 같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 같으면 자지러지게 놀라든지 아니면 아이고 내가 잘못했다고 싹싹싹 빌었을 거라. 근데 구하스님은 당당하게 그 순사를 탁 쳐다보니까 그 눈빛이 얼마나 빛이 나는지 순사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제 당당하게 살아갔던 분인데, 이 어르신도 인제 수행을 잘 해나가면서 처음에 원력을 했던 것이 '내가 남을 부리는 위치에 한번 있어 보고 싶다' 하는 그런 원력으로서 결국에는 우리나라에서 큰 빛을 낸 분으로서 자리를 잡음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법회에 동참을 하든 아니면 수행을 하든 어떤 그런 자기가 원하는 원력이 없을 것 같으면 이루어지기가 참 힘이 듭니다.

 

'내가 이번 법회 때는 스님 말씀을 귀담아 들어서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다 듣겠다.'
'이번 법회 때는 내가 수행을 하는데 적어도 30분간은 명확하게 알아차려서 앉아있도록 해보겠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하기 힘들어집니다.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를 갖다가 금강보좌라 한 것도 그게 금강석으로 만들어졌다 해서 금강보좌가 아니고, 그런 강인한 마음으로써 앉아있었다 하는 뜻으로서 금강보좌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다짐들을 하고 원력을 세우지 않을 것 같으면 안 된다" 하는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이제 수계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삼귀의 오계를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듣기 싫어하는 경우들도 있을 겁니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도저히 뭐 하는지도 모르겠고 또 무엇 때문에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 그냥 우리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걸 갖다가 하면 될 것을 뭐 할라 저렇게 혀도 잘 안 돌아가는 걸 갖다가 할려고 하는가?' 그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근데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세계 불교도 대회에서 규정해 놓은 것이 "삼귀의 오계는 반드시 빨리어로 하라"고 규정을 해놨습니다. "비구 계본도 빨리어로 하라" 이렇게 규정을 해놨고.

 

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러한 불교도가 하나로서 통일될 수 있는 것은 뭐냐 할 거 같으면 다른 것이 아니다, 불교도임을 표방하는 말 이것이 하나로서 묶어주게끔 돼 있다 하는 겁니다. 남방불교든 북방불교든 대승불교든 상좌부 불교든 어떤 불교라고 하더라도 하나로서 불교도라는 이념으로써 묶어주는 것이 일반 재가신자에게는 삼귀의와 오계, 아니면 삼귀의와 팔계이고, 스님들에게는 비구계 그다음에 사미계 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것들은 부처님이 말했던 원래의 언어 빨리어로서 독송을 해야만 한다 하고 규정을 해뒀던 겁니다. 각 나라 언어로써 다 틀립니다. 그렇지마는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이 부분은 반드시 따라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강하고, 또한 빨리어로서 이렇게 독송을 하다 보면 은연 중에 부처님이나 부처님 법이나 성스러운 제자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법의 눈을 뜨려고 할 때 그때는 필히 여러분들이 알려고 합니다.

지금은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해도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알려고 하질 않습니다.
'왜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야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갖다 품어본 적이 그렇게 없었을 겁니다. 근데 이제 조금 지나다 보면 그런 의문을 분명하게 품게 돼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인도에는 바라문교가 왕성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때입니다. 바라문교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바라문이라고 하는 특정 계층 최상위계층이 인도를 지배하게끔 만든 사회입니다. 그런 또 종교집단이고.

그래서 리그베다나 아유르베다나 여러 가지 베다를 볼 것 같으면, "바라문은 어디로 태어나느냐 하면 인간의 입으로 통해서 태어나고, 그다음에 왕족 계급들은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서 태어나고, 또 일반 평민들은 일반적인 자궁을 통해서 태어나고, 하층민들은 발바닥을 통해서 태어난다" 이런 가설까지 정해놔 놓고 그것을 진리이듯이 믿어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도 왕족계열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서 태어난 거라. (수행자 질문 : ...)

왕족 계급이었죠. 왕족 계급.

 

예. 그랬는데 그런 바라문 중에서도 특별나게 또 자기들이 잘났다는 바라문들이 있게 되어있거든. 그런데 입을 통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 정수리, 머리 꼭대기, 꼭대기를 통해서 태어난다 하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 종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만큼 자존심이 강하겠어요.
그런 종족들은 부처님의 말씀은 귀에도 안 들어와. 왜? 바라문보다 낮은 계층의 왕족 계급이 출가를 해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분이 깨달음을 이뤘던 어쨌든 간에 내보다 하층계급이다는 거지. 그러니 그런 부처님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바라문들은 바라문들끼리 똘똘똘똘 뭉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바라문이라 해서 전부 다 그 바라문교를 믿었던 건 아닙니다. 그중에는 또 부처님을 믿고 삼보를 의지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라.

어느 지방에 이렇게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바라문 부부가 있었는데, 부인은 부처님을 믿었고 남편은 바라문교를 믿고 있었거든. 그리하더라도 부인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해서 공양청을 하게 되고 또 남편은 바라문교를 중심으로 해서 공양청을 하게 돼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공양청을 올리고 했지만, 딱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문제되는 것이 없었다 하는 거라.

남편이 바라문들을 갖다가 요즘 말할 것 같으면 요기(yogi)이죠. 요기들을 갖다가 초청해가지고 할 때는 지극정성으로 그 부인이 시봉을 했거든. 물 떠오라 하면 물 떠다 주고 밥하라 하면 밥하고 이렇게 다 해 왔는데, 또 스님들을 초청할 경우에는 남편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리는 거라. 사냥 나간다 하면서 집을 나가버려. 그렇게 해가지고 문제가 없었는 거라.

 

근데 딱 하나의 문제가 뭐냐 하면, 부인이 시도 때도 없이 "나모 땃사!" 이러거든. 쉽게 말하면 "그분 존귀하신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그걸 한숨 섞인 소리로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부처님 고맙습니다." 하는 그런 소리라. 우리들도 가끔씩 그럽니다.
한숨이 나올 때나 아니면 급할 때든지 아니면 마음을 모으려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부처님" 하기도 하고 "관세음보살" 이러기도 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 종교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엄마야" 이런다고. 그게 인제 일상화 우리는 돼있다는 거라. 그 부인도 꼭 마찬가지인 거라.

 

어떤 때든 마음을 강하게 집중할 때든 위급한 상황이든 "나모 땃사" 하는 게 그 부인의 일과인 거라. 근데 남편 입장에서는 이게 불만인 거라. 다른 건 다 좋은데 그것이 하나 불만인 거라. 왜 불만인가 하면 바라문들을 초청했을 때 바라문들을 시봉하면서도 "아이고, 부처님 고맙습니다." "아이고, 부처님" 이래 버리면 어떻게 돼? 이 남편은 아는 거라.

이 바라문들 그 요기들은 또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종족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 가지고 공양청을 받으러 갔을 때는 일반 물로서 밥을 한 것들은 먹질 않습니다. 우유를 가지고 쌀을 씻어가지고 우유를 가지고 밥을 해야만이 그걸 먹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부모 때부터 내려오던 것들을 변함없이 지키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같이 머리 싹둑 깎지를 않고 내 길러가지고 우리 상투 틀듯이 이렇게 돌돌돌돌 틀거든. 죽을 때까지 그걸 안 잘라. 수염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옷가지도 마찬가지라. 승려 된다 해가지고 이렇게 가사라고 하는 단일색을 갖다 입는 것이 아니고 가지각색이라. 자기 고유하게 내려오던 복식들을 그대로 고집을 하고 내려오거든.

밥 먹을 때도 바리때나 이런 걸 가지고 먹는 것이 아니고 손을 가지고 손바닥에 받아가지고 이렇게 먹거든. 손바닥에 딱 받아가지고 바로 입안에 넣고.

그마만큼 자존심이 강한 종족인데 그 공양청 받아가지고, "아이고, 부처님" 이러니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어. 그래서 부인을 불러 놔놓고 남편이 하루는 그럽니다. “제발 부탁인데 '부처님 부처님 우리 부처님' 그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부인이 그러는 거라.


"내 다른 것은 다 내가 양보를 할 수 있어도 그것은 내가 양보를 못합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저절로 나와지는 그 소리를 갖다가 내가 우짜란 말이라. 당신이 바라문교를 믿으라 할 것 같으면 내가 바라문교를 내가 믿겠다는 거라. 바라문 교리를 갖다가 외워라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외우겠다는 거라.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는 당신이 어쩌지 못하지 않느냐, 마음속에 있는 걸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걸 갖다가 그걸 내보고 어쩌라는 얘기냐. 그러니까 그것만은 못 하겠다. 부인이 완강하게 얘기하거든. 남편이 화가 나니깐 칼을 들어가지고 부인을 치려고 그럽니다. "그 소리 한번만 더 하면 내 때려 죽여버리겠다."

 

부인이 "나를 죽일라면 죽이시오. 그렇지만 그것만은 안 됩니다." 그랬거든.

남편이 그날 많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부인이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도의 흐름에 든 자, 예류과에 들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변할 수가 없는 거라. 그 부인이 도의 흐름에 든 부분은 마지막 부분에 해드리겠습니다.

 

그런 부인이었기 때문에 어쩌질 못하고 화가 나더라도 다음에 또 바라문을 500명을 초청을 했다, 사람들은 식사 때 초청을 받아올 것 같으면 스님들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든지 이렇게 하질 않습니다.
스님들은 500명을 초청해도 500명이 질서가 정연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위에 스님부터 해가지고 쭉 법랍 순으로 이렇게 앉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흐트러져 봐야 얼마나 흐트러지고 또 지멋대로라도 얼마나 제멋대로일 거라, 크게 어긋남이 없거든.

근데 바라문교는 각양각색이란 말이라. 파가 여러 파니까, 내가 서로 잘났네 못났네 하기 때문에 그걸 통제하지 못하는 거라. 500명이 한꺼번에 있는 그런 바라문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군데에 초청해서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앉는 것도 제각각일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은 등을 보고 앉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저쪽을 보고 앉기도 하고 반대로 앉기도 하고 각양각색이거든.


그런 데다가 그 사람들은 바리때라고 하는 것들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땅바닥에서 밥을 먹어야 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몸이 구부러지고 펴지기도 하고 각양각색이 될 수밖에 없는 거라. 바리때에 먹을 것 같으면 구부릴 이유가 없는 거라. 바리때가 요만큼 올라와 있는데, 그러니 그냥 이렇게 떠먹으면 되는 거라 스님들은.

근데 바라문들은 그게 안 되거든. 그러니까 시봉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이 드는 거라. 그렇게 바라문들이 먹으려고 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다리를 펴고 먹기도 할 거고, 내 것인 양 모두어 놔놓고 이렇게 먹기도 할 거고, 각양각색일 거 아니라. 그걸 피해가지고 떨어진 음식들을 갖다가 자꾸자꾸 갖다 날라야 되니까, 그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이 부인도 마찬가지인 거라. 음식을 나르다가 뒤에서 한 요기가 발을 내밀다가 이 부인은 발에 걸려가지고 이 부인이 넘어져 버렸거든. 그래도 이 부인은 지극정성으로 시봉을 하겠다는 생각으로서 자기는 넘어지더라도 음식은 안 흐르도록 잘 받친 거라. 받쳤지만 어쨌든 그 부인이 넘어지는 거는 어쩌질 못하는 거라. 중심이 흐트러졌으니까. 그래서 음식은 안 흘렀지만 입에서는 "아이고, 부처님" 마 이 소리가 나와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이 요기들이 혼비박산이 나는 거라. 밥을 먹다가 고마 밥맛이 뚝 떨어져 버리는 거라.

그래가지고 욕을 해대면서 그 집을 떠납니다. 떠나면서 다시는 이 집에 축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면서 재앙을 내리는 게송을 하고 떠나버리거든. 공양 잘 먹고.

그러니까 이 남편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 씩씩거리면서 부처님한테 찾아가는 거라. 그렇다고 부인을 때려 죽일 수는 없는 거고. 그 부인이 지극정성으로 믿는 부처님한테 가가지고 이 사실을 일러바쳐가지고 부인하고 내가 이혼을 하든지 아니면 그 부처님 말을 듣고 부인을 때려 죽여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의 결단을 내리겠다, 이래가지고 인제 부처님한테 가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사문이여!”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존경해서 부르지 않을 때는 보통 '사문'이라고 그럽니다.

“사문이여! 무엇을 죽여야만이 내가 저녁에 잠을 편히 잘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죽여야만이 내 집과 내가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문 당신은 뭘 죽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요하게 앉아있습니까?” 하고 이렇게 물어보거든.

부처님은 이미 바라문이 올 때 지혜의 눈으로 보고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오는가 하는 걸 갖다가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바라문의 말마따나 부인을 죽여야만이 저녁에 편히 자게 되고, 근심 걱정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남편 입장에서는. 안 그러면 부인하고 이혼을 하든지. 이혼한다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죽이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결혼하면 다시는 결혼을 못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렇다고 부인하고 이혼하지 말고 그냥 사시오. 그러면 죽이지 마라 하는 얘기하고 마찬가지라. 아무것도 죽이지 마라 할 것 같으면 밤에 잠 못 자고 밤에 또 일상생활에서 근심 걱정을 하게 돼 있는데, 어떻게 그러면 잠을 잘 자게 할 수 있고 근심 걱정 안 하게 할 수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 입장에서는 죽이라 소리도 못하는 거고, 죽이지 마라 소리도 못하는 거라. 뭐라고 대답할 거라. 이걸 노리고 이 바라문이 부처님한테 얘기를 한 거라. 그때 이제 부처님 얘기합니다.

 

"원한심을 죽여야만이 밤에 편히 자고, 원한심을 죽여야만이 근심·걱정이 없느니라. 나는 이러한 화내는 마음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평온하고 고요하니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바라문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얘기라. 둘 중에 하나가 답이 나오게끔 돼 있었는데, "죽이라든지, 죽이지 마라든지" 둘 중에 하나의 답이 나오게끔 돼 있는데, 아니 둘 다하고는 엉뚱한 방향으로 얘기를 하거든 부처님이.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얘기라. 아무리 부인이 죽을 죄를 지었던 아니든 간에 화를 내는 건 자기 거든. 증오심을 품는 건 자기 거든. 그로 인해 가지고 잠 못 드는 것도 또 자기라. 근심 걱정하는 것도 자기고.

어떻게 하라는 얘기라? "다른 거는 내둬버리고 니 화내는 거나 잘 다스려라. 네 마음만 평온할 것 같으면 잠 못잘 이유가 없고 근심걱정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난 나를 잘 다스렸기 때문에 근심 걱정 없이 평온하고 고요하게 행복하게 잘 산다. 너도 그렇게 해라." 그런 얘기거든.

 

우리 주변에도 가끔씩 그런 것들이 있을 겁니다. 때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들이 있고,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을 거라. 어떡할 거라? 그건 내버려 두라는 거라. 내버려 둬. 굿을 하든 뭘 하든 내 능력이 닿는 상황일 것 같으면 가능하겠지만, 안 되는 능력 가지고 그거하고 다퉈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라. 그건 냅두라는 거라. 냅두고 니 것만 잘 챙겨라. 그로 인해 가지고 내가 화가 일어나 가지고 근심 걱정하고 잠 못 들 이유가 없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부처님의 그런 말을 듣고 이 바라문은 화들짝하게 놀랍니다. 어느 스승에게 물어보더라도 항상 이분법적으로 말했다는 거라. 이 스승이든 저 스승이든 어느 스승을 초청해 가지고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하든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하고 얘기를 했지, 자기 스스로에게 문제를 만들어서 자기 스스로가 그 문제를 풀어나가라고 얘기한 스승이 없었다는 거라.

여기에 이 바라문은 부처님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다른 것을 다 끊어버리고 부처님 제자가 됐다고 그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인도 부처님 제자가 됐던 것도 꼭 이와 같습니다.

 

강인한 자기의 종족 그리고 성스러운 자기 종족에 대한 자존심이 높을 대로 높아 있는 이 부인도 아무리 종족이 높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행실이 똑바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런 말씀을 부처님한테 들었거든.
들을라 해서 들은 게 아니고 지나가다 들은 거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거라. 내 종족이 아무리 바라문 종족이라 해서 최상위 계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근심 걱정이 없고 또 죽음이 없는 상태로 이끌어주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거든.
내 종족들도 다 태어났다가 병들고 늙고 죽게 돼 있었고, 나도 그렇게 되게끔 돼 있었는 거라. 그러면 내가 젊었을 때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내 종족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되는 부분이지. 그때 이 부인은 화들짝하게 깨달았습니다.

 

행동과 말과 마음에 따라서 높고 낮음이 구분되는 것이지, 종족에 의해서 신분의 귀천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갖다가 확연하게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말도 못하면서 스스로는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개발할려고. 그래서 다른 사람 눈치 봐가면서 부처님 말씀을 자주자주 들었거든. 듣다 보니까 내가 스스로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거라.

어느 날 가서 부처님 앞에 가서 얘기를 듣고 있는데, 사성제의 진리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그대로 흰 빨래에 물이 들듯이 그대로 스며들어버려요. 확연하게 그 소리가 들리는 거라. 그 소리에 마음을 집중하다 보니까

 

'아하, 이것이었구나. 모든 세계라고 하는 것은 조건으로 인해서 생겨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게끔 돼 있다. 모든 조건은 그 원인이 있는 것이고, 원인이 있는 조건들은 반드시 조건 따라서 결과를 만들게 돼있다. 그 결과를 따라가는 길이 반드시 있게끔 돼있구나. 이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유지가 되고 파괴되고 없어지고 이런 과정을 겪듯이, 모든 진리 자체도 그러한 것이구나. 이 몸도 마찬가지로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고 죽음의 과정을 맞이해야 되는 것이고, 모든 사물들 어떤 것이라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사성제 진리를 통해서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이때 법의 눈을 갖게 된다고 그럽니다.

 

법의 눈을 갖게 됐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시는 곁눈질을 하지 않게 되는 거라. 내가 바르게 이 길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거라. 이러한 상태를 갖다가 "도의 흐름에 든 자"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인은, 부인으로 인해 가지고 이 종족 자체가 부처님에게 의지하게끔 됩니다. 한 사람 개인의 힘으로써 그 일반적으로 높고 높은 바라문 최상계층에 있는 종족이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지금도 경전에 보면 바라문 종족, 그다음에 왕족 계급, 그다음에 평민 계급, 하층민 계급 이런 많은 계층들이 오직 유일하게 출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그렇게 하지를 못했거든. 자이나교도든 어떤 교도든 육사외도라고 하는 육사 외도든 다 바라문 계급들만 공부를 하게끔 돼있었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사성 계급을 혁파를 해버렸거든. 그런 거 구분 없이 내 제자가 될 것 같으면 하나의 색을 띠게끔 돼 있다. 부처님 제자다 하는 하나의 색으로서 유지가 되게끔 돼 있었거든.

그랬지만은 분포적으로 봤을 때 바라문이 거의 25프로에서 30프로를 차지합니다. 그 계기가 됐던 것이 어떻느냐 하면 다닌사니라고 하는 종족 이 종족의 이와 같은 일화로 인해가지고 부처님 제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목표가 정해질 것 같으면 그 목표에 맞게끔 따라가야 됩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따라서 내가 바른 행을 해나가겠다." 그럼 바른 행을 해나가도록 꾸준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따라서 내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겠다." 그 깨달음만 바라보고 앉아있을 것 같으면 아무것도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왜냐하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내 옆에 있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걸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그 차이인 것뿐입니다.

 

그 발견하는 길은 "어떤 것이라도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는 거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이든 말이든 아니면 내가 걸어가는 것이든 행동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거라. 그 대상 대상에다가 최선을 다할 것 같으면 그 길은 반드시 열리게끔 돼있고 그 길을 따라가게끔 돼있다는 거라.

다닌사니(dhanañjānī)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도의 흐름에 든 자가 됐던 것도 그와 같이 아주 단순한 겁니다. 부처님 말씀 그냥 그대로 들으려고 하는 거 그것밖에 없었어요. 어디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들었었는가? 아니면 수행을 해 봤는가? 그런 거 전혀 없었다는 거라. 일절 다른 건 끊어버리고 딱 그 말씀만 들으려고 노력을 하고 집중을 하다 보니까 그 속에서 사물의 특성들이 드러나게끔 돼 있었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배우고 먼저 와 있다 해가지고 불교 신자로서 고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인제 들어왔더라도 바른 진리를 갖다가 얻고 깨달을 것 같으면 그분이 바로 장로라.

마찬가지로 자꾸자꾸 주변에 있는 것들을 내가 수행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바르게 도의 길에 이르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가지고 얘기를 했습니다.
반드시 하나하나가 주의집중하면서 알아차릴려고, 알아차려 나갈려고 할 때 여러분들에게 그런 길들은 열릴 겁니다.

신발이 몇 개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신발을 벗어놓고 왼쪽에 벗어놨는지 오른쪽에 벗어놨는지 그것조차 구분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그거 하나 벗을 때 마음 집중할 것 같으면 그게 바로 부처님 진리에 나아가는 길이라. 그 속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거라. 아난다 존자가 괜히 자리에 눕는 상태 그 아주 짧은 찰나 간이라. 그 찰나 간에 깨달음을 이루었겠어요?

 

어떤 것이든 마음 집중해서 알아차리려고 했을 때 그 속에서는 부처님 진리가 열린다는 사실을 갖다가 명확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마치고 바로 수계식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