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3K1X-ODd3I?si=SeH1wNYjkiL6JoWf
* 통나무의 비유_팔정성도, 오온 (2002 0907)
자, 어쨌든 저번 시간에 통나무에 대한 비유를 했습니다.
대충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위험들에 처해서 살아가는가" 하는 걸 갖다 뗏목에, 통나무에 비유해서 예를 들어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열반에 이르는 길도 이 통나무와 꼭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과정들을 겪고 또 이겨내야만이 깨달음을 성취한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들이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통나무의 비유에 잘 부처님이 표현을 해놓은 것입니다. 어쨌든 숨을 쉬고 있을 것 같으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고. 숨을 안 쉬면 이미 바다에 도달했듯이 다음 세상으로... 이렇게 넘어가게끔 돼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통나무가 이쪽 언덕에 닿든, 저쪽의 언덕에 닿든, 아니면 둔덕에 닿아서 그쳐버렸든, 아니면 물속에 잠겨버렸든 어쨌든 거기서 끝나는 지점이 그 통나무로써는 일생을 마치는 지점이라는 겁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수행을 해나가면서 아라한과에 도달하든 아니면 불환과에 도달하든 아니면 그런 어떤 사성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냥 생각대로 살아가다가 일생을 마치는 그것도 일생을 마치는 것들입니다.
또한 숨 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살아가든 못 알아차리고 살아가든 그것도 꼭 마찬가지로 일생을 마치는 겁니다. 또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10가지 선근공덕을 성취를 하는 생을 살아갔든 아니면 그런 선근공덕을 쌓을 생각도 없이 막행막식하면서 살아가든 그것도 일생을 마치는 겁니다.
그렇지만은 우리는 잘 살아갔다고 얘기를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스스로에게도 물론 얘기를 해야 되고, 다른 사람들도 “참 저 사람 같으면 참 생을 잘 마감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될 때, 그때는 수행자들은 깨달음에 이르러서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고, 또 일반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참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공덕을 잘 쌓아가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할 것 같으면 칭찬받듯이 그런 뜻입니다.
어쨌든 공덕을 쌓든, 아니면 내가 깨달음에 이르게 되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중단을 하고 죽음을 맞이하든, 그 모든 과정들은 다 한 생 한 생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 한 생 한 생들이 모여서 무수한 생들이 이어지게끔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윤회를 하게끔 돼 있고 또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좋은 생을 지었으면 좋은 과보를 받아서 태어났을 것이고, 나쁜 생을 살았을 것 같으면 나쁜 과보를 받아서 태어났을 것이고, 그렇게 살아왔단 말입니다.
그런 흐름들 자체를 멈추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는 언제 다시 이런 부처님 법을 만나서 깨달음에 이르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통나무의 비유를 한 것은 "열반에 이르러라" 라고 비유를 해놓은 것이지. 다른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님한테 이 법문을 들을 때는 반드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법문을 들어야 됩니다.
'내 수행에서 얼마만큼 도움을 받을 것인가?'
'아, 내 수행 정도가 어느 정도 와 있구나'
하는 걸 갖다가 깊이 있게 생각을 하면서 법문을 듣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번 시간에도 얘기해 왔지만은 모든 것을 버려버리고 법문 듣는 데만 열중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나무의 비유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꼬삼비의 갠지즈 강변에 계실 때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강물에 떠 있는 것을 보시고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통나무를 가리키며 부처님에게 말했습니다. 아,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말했다는 거죠.
"만약 저 통나무가 이쪽 강변이나, 저쪽 강변으로 밀려가지 않고, 또한 강 한가운데에서 가라앉지도 않고, 돋아있는 둔덕 땅 위로 떠밀려 올려지지도 않고, 사람이 가져가지도 않고, 신들이 붙들어 가져가지도 않으며, 소용돌이에 말려서 강바닥에 잠기지도 않고, 썩어서 부식되지 않는다면, 저 통나무는 떠내려가 바다에 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갠지즈강이 흘러가는 길은 결국 바다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들아! 그대들도 강변 어느 쪽으로 내몰리든지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높은 둔덕 위로 내던져지지도 않고 사람이나 신들에게 붙잡히지도 않고 소용돌이에 밀려 가라앉지도 않고 썩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나아가는 길은 반드시 열반을 향하고 있을 것이며, 그대들은 해탈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삼마딧티(sammā diṭṭhi)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열반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듣고 부처님 제자가 세존 부처님께 여쭙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부처님이
"이쪽 강변은 우리 정신생활의 6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 육체적 감각과 마음이라는 것 이런 6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쪽 강변은 6가지 바깥 경계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다섯 감각대상과 의식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라.
강 한가운데 가라앉는다는 것은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을 말하고,
마른 땅에 내던져진다는 것은, 마른 땅에 높아 있는, 솟아 있는 땅에 내던져진다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향상을 그르치는 자만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가져간다고 하는 것은 모든 시간을 사람과 어울리는데 빼앗겨서 온갖 시시한 일에는 신경을 많이 쓰면서 정작 중요한 자기 수행에는 뒷전인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신들이 가져간다고 하는 것은 천상세계에 태어날 욕심으로 공덕행을 짓거나 불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소용돌이에 말려서 강바닥에 잠긴다는 것은 세속의 즐거움을 쫓는 데 집착하는 것으로, 이 재미 저 재미를 쫓다 보니까 속된 탐욕의 소용돌이에 말려서 '내가 왜 이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큰 뜻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지내고 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썩어 부식된다고 하는 것은 부도덕하고 계행을 잘 지키지 않고 정신적으로 오염돼 있고 종잡을 수 없는 행위들이나 위선들, 속은 폭삭 썩어 있으면서도 선하고 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게 인제 「상응부 경전」에 나오는 것입니다.
「통나무의 비유경」이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생각을 좀 많이 해야 됩니다.
통나무가 강에서 내려가면 바다까지 흘러가든 아니면 가다 중단해 마치든 흘러가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의 생도 마찬가집니다.
'자-따(jāta) - 태어난다', '아자땅(ajātaṁ) - 태어남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이생을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왜 누구는 이제 다시는 태어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누구는 다시 태어나야 되는 삶을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태어나게끔 돼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남이 있을 것 같으면 '아부따(abhūta)', 원인이 분명히 있다 하는 겁니다. '원인이 있는 것에 대해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 이걸 '아부땅(abhūtaṁ)'이라고 그럽니다. '비롯됨이 없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태어났으니깐 늙고 병들고 죽음의 과정을 맞이하게끔 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 원인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태어나지 않으면 되는 거라. 비롯됨이 없을 것 같으면 우리는 태어남이 없게 됩니다. 원인을 제거할 것 같으면 태어남이 없듯이, 욕망을 제거할 것 같으면 일어날 감각적인 쾌락이 없어진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아까땅(akataṁ) - 만들어지는 것이 없다'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는 ‘내 것,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몸을 받아 지니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내 것 나의 것을 집착하게끔 돼있고 가지게끔 되어있다 하는 겁니다. 태어났다고 하고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에 대해서 집착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만들지마라 라는 거라. 있는 것을 어떻게 안 만들 거라?
그래서 도사(dosa)와 로바(lobha)라고 그럽니다.
집착함이 없고, 집착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얼 강하게 ‘내 것이다’ 하고 붙잡기 때문에 집착은 일어납니다. 또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이건 나하고 틀리다, 나의 사상과 틀리다, 내 것이 아니다’ 하고 배척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화냄이라든지. 집착이라는 것은 우리가 벗어 던져야 될 부분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만들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만들지 않을 것 같으면 당연히 '나,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는 것을 만들지 않게끔 돼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아상카땅(asaṅkhataṁ)' 상카따, 상카라는 뭡니까?
'상카라(saṅkhāra) - 형성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형성됨이 없다' 하는 그런 뜻이 됩니다. 보통 '무위' 그럽니다. 일반적으로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 있죠? 아무 하는 일 없이 있는 것!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꼭 이와 마찬가지라고 그럽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착함이 없고 화냄도 없고 일어날 욕망도 없기 때문에 무위라고 그럽니다.
'형성되는 것이 없다' 하는, '업을 더 이상 쌓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태어났으면 반드시 해야 될 것들이 이런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잘 이해를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그럽니다.
수행하러 와가지고 “스님! 아라한이 정말로 있습니까? 이 지구상에 아라한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런 거 물어봅니다. 스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아라한이 100명이 있고 천 명이 있으면 당신들이 아라한이 됩니까?” 아라한이 되는 게 아니다는 거라. 그 아라한은 나하고는 관계없어!
실제적인 것들을 물어봐야 되는 것이지, 나하고 전혀 관계없는 것 그런 것은 실제적으로 나의 수행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그 어떤 구원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도 그랬거든.
"부처님!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아라한이다, 내가 아라한이다, 또 저 사람은 내가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들이 아라한이 맞습니까?"
"수밧다야 그들이 아라한이든 아니든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것이 너를 구원해주느냐? 실질적인 걸 물어라! 깨달음에 이르려고 할 것 같으면 팔정성도가 그 속에 녹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느니라. 그러니 너는 그 여덟 가지 바른길 성스러운 길을 따라가도록 하여라. 그것만이 열반에 이르게 하고 너를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그 8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뭐냐고 나에게 물어보아라. 그럼 내가 대답해 줄 것이니라."
이 뗏목의 비유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이 통나무의 비유를 한 것도 이 팔정성도가 중간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얘기를 한 것입니다. "바른 견해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다." 깨달음에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우리는 바른 견해가 열려야 된다 하는 얘깁니다.
'어떤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고 어떤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떤 것이 즐거운 느낌이고 어떤 것이 즐겁지 않은 느낌인가? 그런 즐거운 느낌도 항상 하는 것이 아니구나. 또 수행해서 이 몸은 항상 하는 것이 아니고 변해 나가고 있구나. 이 마음도 꼭 마찬가지구나' 하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를 하기 전에는 깨달음은 우리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됩니다.
그 삼마딧티(sammā diṭṭhi)는 팔정성도의 처음에 들어가 있습니다.
바른 겨냥 정사유라고 그러죠? 바른 겨냥은 안 그렇습니까? 꼭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알아차림과 바른 집중이 없을 것 같으면 바른 겨냥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바른 겨냥 없이 내가 좌선삼매에 빠지고 지혜가 증득돼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못 이룹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 육근과 육경에 대한 것을 명확하게 이해를 하려고 할 것 같으면 팔정성도를 이해를 해야만이 가능하다 하는 겁니다.
눈과 눈 밖의 대상과 인식하는 마음이 어떤 상태로서 일어나지는가?
그래서 몸과 마음의 상태가 어떻게 서로 작용을 하는가?
하는 걸 이해를 해야만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오온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이 얘기해 놓은,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오온(五蘊, Pañcakkhandha)이죠!
색온(色蘊)이 뭡니까? 색온이 뭐라? 이 몸덩어리입니다. 루빠칸다(rupa khandha)
이 몸덩어리는 보통 뭐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까?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졌다고 그러죠! 그래서 우리는 수행해 나가면서 어떤 것이 땅의 요소고 어떤 것이 바람의 요소다 하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조금 압니까?
이 몸은 어떤 겁니까? 이 몸이 태어났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몸은 반드시 죽게 돼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든 깨달음에 이르지 않든 죽음을 맞이하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으면 남는 게 뭡니까? '루빠칸다(rupa khandha) 이 몸이라고 하는 것, 루빠(rupa)라고 하는 것만 남는다' 하고 말합니다.
살아있든 죽었든 우리는 이 몸은 변화해 갑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 몸에서 나쁜 것들을 참 많이 배출합니다. 때도 나오고 콧물도 나오고 소변이나 똥도 나오고 참 더러운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근데 우리는 그렇게 더러운 것이 나오는 이 몸에 대해서는 애지중지하거든. 살아있으니까!
죽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죽고 나서도 꼭 마찬가지로 더러운 것이 나옵니다. 진물이나 고름이 나오고 썩어 부패해서 냄새가 흘러나오고 구더기들이 흘러넘쳐 가지고 또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은 보기 싫어합니다. 똑같이 나쁜 게 흘러나오는데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은 참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 그 변화의 과정이 단지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단 3~4일 만에 그렇게 엄청나게 변했을 때는 우리는 싫어함을 가지게끔 돼 있는데, 100년 동안 그렇게 변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마냥 내 것인 것 같이 생각 ... 그래서 항상 하는 것 같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내 몸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상해를 입힐 것 같으면 금방 화를 내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또 좋은 것이 있으면 이 몸을 먹여 살리려고 오만 감각적인 것을 쫓아가고 있다는 거라.
살아있어도 이렇게 더러운 것을 뱉어내고 죽어있어도 더러운 것을 뱉어내는 것이 이 몸이라. 이 몸에 대한 인식을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런 이 몸에서 나,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는 거라.
이것이 부처님이 얘기한 루빠 칸다(rupa khandha) - 이 몸이라고 하는 덩어리입니다. 이 몸의 덩어리에는 그 어디에도 항상 하는 것이 없이 변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변하는 나,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가 뭡니까?
웨다나 칸다(vedanā khandha)라고 그러죠. 수온(受蘊) 그럽니다.
느낌의 덩어리, 느낌의 집합체. 느낌, 우리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여러 가지 느낌들이 있죠. 의학계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느낌은 이렇게 2가지 3가지로 얘기합니까? 의학에서?
느낌을 받아들이는 정보는 신경채널이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세포들이.
신경세포들이 받아들이는 건 뭡니까? 즐겁다는 걸 받아들입니까? 아닙니다. 아프다는 것밖에 못 받아들입니다. 의학에서는 아픔의 느낌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뭐라고 그랬어요? "모든 느낌은 고통을 수반한다" 아픔을 수반한다는 겁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있으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즐거운 느낌은 지 홀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1시간 2시간 앉아 있으면 아픈 느낌이 옵니다. 그래서 ‘아우, 좀 누워야 되겠다’ 해서 누워버립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이 오죠? 그 느낌은 어디서 옵니까? 아픈 느낌을 수반했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게 됩니다. 절대 즐거운 느낌은 지 혼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뭐라고 그랬어요? 모든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아픔을 수반하게끔 된다, 아픔을 동반하게끔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다 고통이고 근심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느낌을 우리는 즐겁다 해서 그거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느낌에도 우리는 꼭 마찬가지로 내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느낌들 감각에 대해서 강하게 집착할 필요성이 없다는 겁니다. 아픈 느낌이 아무리 오래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아픈 느낌도 변하게끔 돼 있고, 항상함이 없게 돼 있습니다. 다리를 아무리 하루 종일 구부리고 앉아 있어 보십시오. 그 고통은 나의 고통 나의 아픔이 아닙니다. 단지 신경세포 내에서 아프다고 느낄 뿐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그런 마음 자세로서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내가 아프다는 생각이 일어날 것 같으면 금방 다리를 풀어야 되고, 또 수행을 하려고 하지 않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 느낌에도 나, 나의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 산냐칸다(saññā khandha) - 상온(想蘊)입니다.
이것은 뭡니까? 책상입니다. 이것은 뭡니까? 컴퓨터입니다. 이게 상온입니다. 이것을 ‘이것은 책상이다, 이것은 컴퓨터다’ 하고 아는 것!
이건 어디서 옵니까? 배움에 따라서 오는 거라. 많이 배운 사람들은 이게 컴퓨터인 줄 아는데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이게 컴퓨터인 줄 모르는 거라. 그럼 그 사람들은 상온이 떨어져 있다는 것뿐이라는 거라. 상온은 이와 같은 거라. 단지 그거라. ‘이것은 책상이고, 이것은 컴퓨터이다’ 아는 것뿐이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이기 때문에 이건 ‘나의 책상’이고, 내가 쓰는 컴퓨터기 때문에 ‘나의 컴퓨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이래서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나의 책상을 뺏어간다든지 나의 컴퓨터를 뺏어갈 것 같으면 우리는 남하고 대판 싸우게 되죠. 미국에 큰 빌딩을 누가 폭발을 했다, 그거는 빌딩일 뿐인데 폭발했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저 괘씸한 놈 빈 라덴을 잡아라” 해가지고 폭격하는 거라. 일개 국가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빌딩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폭격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라. ‘나의 책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남이 해코지를 할 것 같으면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상온은 단지 이것일 뿐이라는 거라.
우리가 인식할 때 책상이고 컴퓨터인 것뿐이라. 이 책상은 누구의 책상도 아니고 이 컴퓨터는 누구의 컴퓨터도 아닙니다. 이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뿐입니다. 상온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 상카라칸다(saṅkhāra khandha) - 행온(行蘊). '하고자 하는 것'
빨리 마치고 내려가서 차 먹고 싶죠? 늦게 와갖고 인자서 뭐, 절대 빨리 안 내려가서 스님 법문 다 듣고 내려가고 싶죠? 이렇게 '뭐 하고 싶다'는 게 바로 상온입니다.
'뭐 할려고 하는 의도' 수행해나갈 때 발을 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발을 드는 것이고, 내가 수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해나가는 것,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행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하고자 하는 것에 내가 집착할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윈냐나칸다(viññāṇa khandha) - 식온(識蘊) 입니다.
그건 보통 일반적으로 '마음이다, 인식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뭡니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차이일 뿐이라. 그래서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생물이라고 그러고, 마음이 없으면 무생물이라고 그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마음을 내서 인식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식온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인식하는 것에는 아까 뭐가 있었어요?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저기 지선이 아빠, 엄마. 안 예쁘지만 예쁘다 치고, 그러면 '예쁜 지선이 엄마', 지선이 엄마는 그냥 명칭일 뿐이라. 근데 '예쁜 지선이 엄마' 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쁜지 안 예쁜지 확인을 해야 되거든. 그냥 '지선이 엄마'라고 할 때는 이것을 우리는 뭐라고 그럽니까? 아는 것뿐이라. 아, 지선이 엄마구나 하고 아는 거라. 근데 예쁜 지선이 엄마라고 할 경우에는 아는 것에서 더욱더 또렷이 인식하는 거라. 이렇게 '예쁜 지선이 엄마'라고 얘기할 수 있을 때가 됐을 때, 이것을 우리는 식온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색·수·상·행·식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이 관계를 갖다가 예쁜 지선이 엄마에다 대비를 시켜 보십시오.
지선이 엄마가 저기 있다 - 물질이고 색온이라.
그다음에 ‘예쁜 지선이 엄마다’ 라고 내가 인식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됩니까? 지선이 엄마를 보려고 해야 볼 거 아니라? 봐야 일단 지선이 엄만지 개똥이 엄마인지를 알 거 아니라? '보고자 하는 의도', 행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봐야 되겠지? 보니까 어떻게 돼? ‘지선이 엄마다’ 이걸 뭐라고 그럽니까? 수온 느낌, 느낌도 느낌으로 ‘아, 지선이 엄마구나’ 하는 거 아는 거라요.
그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지선이 엄마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 명확하게 인식을 해야 되겠죠. 형상 작용, ‘아, 여기에 지선이 엄마가 있구나’ 하는 걸 갖다가 내가 지선이 엄마가 저기 있으면 뭐 할 거라? 내가 인식을 해야 되는 거라. '지선이 엄마'다 하고 아는 것, 상온.
내 각막에 지선이 엄마가 맺혔단 말이라. 각막에 맺혔는데, 맺힌 지선이 엄마는 어떻게 돼? ‘참 예쁘구나’ 하고 인식하는 식온. 그래서 ‘예쁜 지선이 엄마’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은 어떻게 됩니까? 따로따로 놀 수가 없다는 거라. 나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색온은 뭡니까? 몸이라.
수·상·행·식은 뭡니까? 마음의 작용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몸이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해. 몸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만 어디 홀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못 해! 이 마음을 찾는다고 심장을 다 뜯어낸다고 마음이 있습니까? 머리를 다 드러낸다고 있습니까? 없다는 거라. 몸과 마음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 서로 관계성 속에서 존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통나무라는 겁니다.
인제 이 통나무에 대한 인식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이 통나무가 바로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이 통나무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 책임이지 부처님 책임도 이 스님 책임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되는 법회에서 이 통나무가 바로 순조롭게 흘러가서 큰 바다에 흘러가듯이 여러분 자신도 바른 부처님 법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스스로 노력들을 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오온에 대한 얘기를, 통나무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에는 이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것 6가지 작용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아무리 알았다 하더라도 이게 어떤 작용들을 가지는가 하는 것들을 중심적으로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 부분들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견해들에 대한 것들을 생각들을 해오고, 인터넷에서 공부를 해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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