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 1. 불교는 자살을 금지하는가? (20090509)
뽀야데이(보름날) 때 주제 하고는 안 맞을지 모르겠는데 내일 모레 또 행사가 있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가지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불교는 자살을 금지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누구 속시원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부처님은 자살을 금지했는가? 자살을 금지했다, 또 다른 사람은? 없어요? 다 자살을 금지했다고 보고 있어요? 그러면 자살한 사람들은 어떻다는 거라? 거기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요? 부처님 법을 아는 사람도 자살한 사람들이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도 많이 자살을 했거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의식이 없는 사람들, 요즘 병원에서 호흡기를 떼가지고 죽음을 맞게 하는 것. 그러니까 살아갈려고 하는 그 의지 자체가 없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용인하는가? 불교에서는 용인하고 있는가 하는 그런 얘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럼 과연 자살은 불살생계를 어긴 것이 되는가? 하는 세 가지 부분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불교는 자살을 금지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깁니다.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하는 걸 얘기하는 근거로는 대부분 뭡니까? 그렇지. 불살생! 부처님은 살생하지 마라고 했는데 살생을 하는 경우가 되니까.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까. 그런 것들이 근거 조항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자살은 절대 안 된다, 무조건 금지하고 있다고는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
부처님 당시 때 왁깔리라고 하는 비구 스님이 있었습니다. 전에도 한번 왁깔리에 대한 걸 스님이 한 번 설명을 한 적 있죠? 왁깔리가 병이 들어있을 때 하도 부처님 볼라고 하니까 부처님이 가서 "왁깔리야 내 몸을 볼려고 하지 말고 담마-진리를 볼려고 해라. 진리를 보는 자는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하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하는 내용 혹시 기억납니까? 그걸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똑같은 왁깔리입니다.
왁깔리가 옛날에 부처님 당시 때 제자들은 결제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부처님 있는데 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수행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왁깔리도 다른 곳에 있다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럴려고 가다가 병이 들었어. 뭔 음식을 잘못 먹어가지고 그렇게 병이 들었는데 병이 들었으니까 부처님한테 가지도 못하고 해서 인제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도자기 굽는 사람 집에 실려가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병은 심해지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그 옆에 있는 시자한테 부처님한테 가서 내가 지금 병이 들어서 부처님을 뵈러가지 못한다고 얘기해라. 그래서 부처님이 허락이 된다면 나에게 좀 와서 나를 좀 봤으면 좋겠다 하고 말씀을 좀 드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왁깔리가 굉장히 부처님을 좋아했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없으면 허무함을 느낄 정도라. 그러니까 만날 부처님 옆에서 붙어있을려고 그랬지 한시도 떠날려고 하지 않는 그런 스님입니다. 그러니까 지는 병이 들어서 죽겠는데 부처님은 저 저쪽에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데 거기 가질 못하니까 할 수 없이 부처님을 오시라고 청하는 거라.
부처님이 왁깔리한테 갑니다. 그때 인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왁깔리야,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뭐할 것이냐? 나를 볼려고 할 것 같으면 담마-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만이 곧 나 여래를 보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왁깔리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픔이 점점 더 심해지느냐, 아니면 점점 더 약해지느냐?"
"아이고, 부처님 도저히 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더 심해지기만 하지 약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 나는 니가 아픔이 점점 더 약해지기를 바라겠다. 그래서 빨리 쾌차하기를 바라겠다. 그래서 이 몸은 무상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냐?"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냐?" 괴로운 것입니다. "이 몸뿐 아니라 느낌도 무상한 것이냐? 괴로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오온에 대해서 쭉 부처님이 설명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왁깔리야, 니가 지금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부처님"
"후회할 일은 없고, 그럼 니가 이때까지 도덕적인 행위들 계율들을 잘 지키오면서 살아왔느냐?"
"부처님, 나는 부처님 말씀 따라서 잘 살아왔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러면은 니가 후회할 일도 없고 또 일상생활에서 잘 살아왔는데 뭘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인제 부처님이 떠납니다.
떠나고 나서 왁깔리가 가만히 보니까 인제는 내가 죽음을 맞아야 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을 참기도 힘드는 상황인데 부처님이 부처님 처소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아, 왁깔리가 생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걸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자를 보내가지고 왁깔리에게 내 말을 전해라 하고 얘기합니다.
"왁깔리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니가 죽는다고 해가지고 죄로 인해서 니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해서 더러워지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임종해도 괜찮다 하고 얘길합니다. 죽음을 맞아도 괜찮다.
왁깔리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자살을 하는 거라. 어떻게 보면 부처님이 자살을 유도한 것처럼 보이죠?
또 다른 일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제 왁깔리는 이게 자살이냐, 아니냐 하는 걸 가지고 많이 논란이 일기도 하는데, 고띠까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 같은 경우에는 출가해가지고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인제 어느 순간 마음의 해탈을 얻었어. 마음의 해탈을 얻었는데 그러고 나서 계속 수행을 해야 되는데 수행을 안 했던 거라. 그러니까 옛날로 또 돌아가버리는 거라. 그렇게 무려 일곱 번을 마음의 해탈을 얻고 다시 또 돌아가고 이렇게 살거든.
그러니까 야, 이거는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하거든. 대부분 마음의 해탈을 얻을 거 같으면 오래지 않아서 도와 과에 이르는데 이 고띠까는 좀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과거 전생부터 이어져 온 거니까 숙업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렇다고 주석서에서는 얘기하는데 어쨌든 그런 형태들을 띠고 있는 거라. 그래서 고띠까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이건 안되겠다. 내가 죽어버려야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때 인제 부처님 있는데 천신들이 와서 그럽니다. 부처님 저 고띠까가 자살할려고 합니다. 부처님 제자가 그리 자살을 하도록 해서 되겠느냐. 부처님 가서 말리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삶에 대해서 살아있는 것이 만약에 내가 얼마만큼 살 것이냐? 앞으로 또 몇 년 더 살 것이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명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얼마만큼 살아있을 동안에 내가 그 진리를 이해하고 체험해서 깨달음에 이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고띠까가 자기가 죽겠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그걸 말릴 이유가 뭐 있느냐. 오히려 그 자살로 인해가지고 지금 번뇌를 갖다가 완전히 소멸시킬 수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그것으로 된 거 아니냐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고띠까는 자살을 하면서 칼로 목을 따면서 거기서 오는 느낌들을 관찰하면서 깨달음에 이르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띠까는 아주 평온하게 돌아가셨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이것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이런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리뿟따 존자도 부처님이 열반하는 모습을 도저히 못보겠다 해가지고 먼저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실제로는 본인의 수명이 얼마가 더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은 어쨌든 스스로 조절해가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또 스님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일반인들도 부처님 마지막 열반하실 때 음식을 줬던 춘다 같은 경우도 부처님한테 그 음식을 드린 것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는 사실을 알고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그럽니다. 부처님 도저히 내가 살 용기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버릴랍니다.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그때 인제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니가 죽음을 맞이할 시기가 됐다고 판단할 것 같으면 그렇게 잘 생각해서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죽을 때가 됐으면 죽으라는 얘기라.
경전에서 굉장히 많은 자살 부분이 나오는데 부처님은 그 자살에 대해서 꼭 나쁘다고만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죽음을 맞이하는 자살이 수행으로 인해서 도와 과를 이루게 될 때는 자살을 용인할 수도 있었다 하는 거라.
가끔씩 요즘 장ㅇㅇ씨도 자살을 했고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봤을 때 그러면 자살이 꼭 나쁜 경우에만 해당이 되느냐? 그렇지 않겠죠. 여러분들 지금 만약에 내가 자살을 하는 순간에 관찰해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만 들 거 같으면 오히려 그편이 낫다는 거라. 부처님 생각대로 할 것 같으면.
단지 피하기 위해서, 내가 고통스러운 것들 그런 마음들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나쁜 것이겠죠. 그렇지 않고 수행의 완성을 위해서 번뇌를 완전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그 하나의 수단으로써 도구로써 자살을 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이 용인을 했다 하는 거라.
간혹 자살하는 사람 중에서 아주 평온하게 죽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간혹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살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악도에 다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맞이하는 임종의식이 아주 평온할 것 같으면 사악도에 떨어질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자살했다 해가지고 무조건 사악도에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혹시 주변에 그런 분들이 있으면 그런 마음의 짐들을 벗어던져버려라. 자살이 한 개인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그것이 더 나은 경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일찍 죽고 자살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안타까움을 가지고는 하겠지만은 그것이 그 사람을 대신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오히려 본인 입장에서는 아, 내가 생을 살아가는 것이 이 시점에서 내가 죽는 것이 오히려 더 수행에 도움이 되고, 또 설혹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맞이하는 그런 의식들로 인해서 다음 생에 더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이생에서 내가 더 노력해봤자 도저히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이 못 된다.
깨달음에도 조건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안 맞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조건들이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하나의 방편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는 반드시 수행과 연관시켜서 하라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꼭 첫 번째 아까 얘기했던 자살은 불교에서 자살을 갖다가 금하고 있는가, 아닌가? 물론 원칙은 자살하지 말아라고 그럽니다. 왜?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기 때문에 일찍 몸을 버린다는 것은 그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사람에게는 크나큰 죄악이 된다고 판단들을 하기 때문에 자살하지 마라 하고 원칙은 그렇지만은, 수행에서 오히려 이 몸을 버림으로 인해가지고 더 좋은 결과에 이를 수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걸 용인한다는 거라. 그래서 꼭 자살은 절대 금지다 하고 얘기한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경우, 그리고 주변에서 생명을 포기하도록 하는 문제. 그래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들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마지막 때에 웨살리에 계셨습니다. 웨살리에 있다가 극심한 고통을 맞습니다. 그걸 극복하고 나서 아난다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난다야, 나에게는 굉장히 크고 신비로운 네 가지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인해서 내가 원할 경우에, 여래인 내가 원할 경우에는 얼마든지 생명을 연장하고 오래도록 있을 수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난다가 못 들었어요. 세 번이나 부처님이 얘기했는데 못 들은 거라. 부처님이 결국 생명을 포기하십니다. 그래서 삼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도 큰스님들이 열반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열반할 때는 열반을 하는 때를 예언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많게는 삼 개월 아니면 일주일, 한 달 이렇게들 얘기합니다. 거의 꼭 맞아떨어지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을 예언할 때하고 지금 현재 동남아시아 쪽에 스님들이 예언하는 경우 하고는 조금 경우가 다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경우가 돼버립니다. 왜? 오래도록 살 수 있는데 그 살 수 있는 것을 포기해버린 거라.
그런데 지금 동남아시아에 있는 스님들이 열반을 예언하는 경우는 내가 호흡을 관찰함으로 인해가지고 호흡으로 인해서 내가 언제 이 몸 육신이 정지할 것이다 하는 것을 예측해서 그 예측하는 날짜를 삼 개월이다, 한 달이다, 일주일이다 예언을 하는 거라. 그래서 그때 내가 열반에 들것이다 하고 말하는 경우들이기 때문에 경우는 다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이미 팔 개월 전에 본인 스스로 생명을 포기했거든. 더 살아야 된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삼 개월 전에 "아, 인제 내가 삼 개월 후에 열반에 들것이다" 하고 제자들에게 공표를 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때 이 웨살리에서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 말씀을 똑똑이 들었을 거 같으면 "아이고,부처님 우리들을 위해서 더 오래도록 이 세상에 계셔주십시오." 했을 거 같으면 부처님 능력으로 네 가지 신통한 능력으로 인해서 더 오래 살았을 거라. 그런데 이미 이때 거기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을 알고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를 하게 됩니다. 자살은 아니지만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했다는 거라.
주변에서도 생명을 포기를 하도록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도저히 이것은 가능성이 없다. 물론 인간이 그런 판단을 하기에는 좀 무리가 따릅니다. 그래서 의술적인 면에서는 의사는 적극적으로 안 된다고 그러죠. 물론 병원 운영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어쨌든 의학적인 측면에서는 육신 자체가 의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고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살아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데 불교에서는 의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코 살아있다고는 얘기를 안 합니다. 몸과 마음이 다 살아있을 때 살아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지 몸만 살아있다고 해가지고 살아있다는 것은 아니라 하는 얘깁니다. 물론 삼매에 들었을 경우하고 죽음 의식이 죽었을 경우하고는 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생에 대한 포기들을 대부분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용인하는 경우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걸 꼭 카톨릭이나 이런 것처럼 신이 데려가기 전에는 인간이 절대 그거는 하면 안 된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물론 그것도 인간이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또 신이 뭐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못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 신이 데려갈지 알 수도 없는 거니까, 그것도 인간이 만든 것들인데 인간이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은 그래도 그럼으로 인해서 이 사람이 행복하고 또 주변 사람들이 나중보다도 더 행복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길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포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비판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첫 번째, 자살은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생명을 포기하는 부분들도 절대적인가? 그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세 번째가 뭐라 그랬어요? 자살이 불살생계-죽이지 마라 라는 계율에 저촉되는 것인가? 그게 인제 업이 돼가지고 나쁜 과보를 받는다 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누구든지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해코지 당하는 것들을 무서워합니다. 자기 자신이 죽는 거 싫어하고 내가 해꼬지 당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죽는 거 싫어하고 해코지 당하는 걸 싫어한다는 겁니다. 또한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음을 바라지 않듯이 다른 사람들도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해코지 당하지 않기를 바라듯이 다른 사람들도 해코지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그게 불살생의 근본 원리다 하는 겁니다.
그럼 본인이 판단했을 경우에 내가 여기서 자살하는 것이 오히려 수행의 도와 과를 위해서 또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불살생계에 해당이 안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불살생계에 해당은 안 된다는 거라. 불살생계라고 하는 것은 타인, 타인에 대해서 가지는 마음들을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이 오히려 그게 더 이익이 있고 그게 더 수행의 과보에 도와 과에 이익이 있고 행복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살생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게 인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럼 세 번째 자살이 꼭 다 불살생계에 해당이 되는가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게 인제 자살에 대한 불교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해가지고 죽음을 맞았을 경우에 죽고 나서는 어찌 되는가?
이생에서는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꼭 불살생계에도 근본적으로 해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살하는 것도 일부분은 용인할 수가 있고, 또 생명을 버려버리는 것도 용인을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게 해서 죽음을 맞았을 경우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다음 시간에는 죽음 이후에 대한 것들을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모레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08~2010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 3.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20090525) (0) | 2021.03.03 |
---|---|
죽음 2. 임종의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090511) (0) | 2021.03.02 |
생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20090503) (0) | 2021.02.28 |
법문은 귀에 거슬리는 것 (20090503) (0) | 2021.02.27 |
선업의 힘 (20090503) (0) | 2021.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