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죽음 3.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20090525)

담마마-마까 2021. 3. 3. 10:38

https://youtu.be/Ff2Hj-sXGz4

* 죽음 3.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20090525)

 

이번 시간에도 저번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는 통상적으로 자살이라고 하는 죽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것이 꼭 나쁜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다음에 두 번째 시간에서는 죽음에 임했을 때 임종에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세 번째, 죽고 나면 어찌 될까? 하는 얘기들을 해가지고 해보겠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애요? 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다음 세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은 다음 세상이 없다는 얘기네! 안 가봐서 모르겠어요? 또 다른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애요? 알고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이 죽고 나면 어찌 되는지 아는 사람? 아는 사람 없어요?

그러면 다음 세상이 있다 아니면 없다 하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 그것도 확신 못 해요? 다음 세상은 있다. 그것은 경전을 봐서 그렇겠지. 부처님이 윤회가 있다, 육도윤회가 있다 하니까. 그런데 본인이 확신할 수 있어요? 다음 세상이 있는지? 어, 그럼 부처님은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것은 얘기하지마라 그랬는데.

(수행자 질문)

뭐 그냥 말 그대로지. 다음 세상이 있는가 없는가?

(수행자 질문)

아니. 나를 대입시키지 말고. 내 말고 다른 세상을, 내가 죽고 나서 뭐 내 그대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몸을 받아서 다음 세상으로 갈 것인지 그거는 둘째 치고, 그런 다음 세상이 있는가 하는 겁니다. 내하고 연결되는 세상 그게 어떤 형태로 바뀌든지 간에 있는가 없는가 그런 얘기 중에 있습니다.

(수행자 대답)

하아, 그것도 참 맹목적이다 이. 그리해도 어쨌든 종교 중에서 다음 세상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종교가 있을까? 다음 세상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종교 있습니까? 다 불교를 포함해가지고. "죽고 나면 완전히 끝난다. 끝이다!" 하고 얘기하는 종교 봤어요?

(수행자 대답)

기독교가? 어쨌든 다음 세상은 있는 거잖아. 그 어떤 경우든지 다음 세상에 대한 얘기들을 다들 하고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왜 그럴까 하는 거라. 왜 그렇게 다음 세상에 대한 얘기들을 할까?

(수행자 대답)

음, 그것도 하나의 정답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지금 만약에 이 세상에서 끝나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좀 안 아까워? 아무것도 없이 제로상태가 되어버린다? 사실은 인간은 그걸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다음이 있어야만이 내가 조금 더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다음 세상으로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전부 끝나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믿고 싶어 하진 않을 거라.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세상에 도덕적인 것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뭐 이 세상이 어찌 살아도 살다가 그냥 끝나버리는데 지맘대로 하고 살게 되겠지 뭐.

 

기독교도 꼭 마찬가지죠. 이 세상에 살다가 하느님을 믿어서 천국에 간다는 걸 얘기를 하고,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로 알라라고 하는 신을 믿어서 그외에는 절대 다른 것을 허락하질 않죠. 그러면 다른 신을 믿을 것 같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얘기하는 것을 들어봤습니까? 그거는 없죠!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편하게 그냥 아미타불을 염불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뭐 극락에 간다 하는 얘기는 있죠? 그런데 지옥에 간다 하는 얘기는 없죠!

동양적인 종교하고 서양적인 종교하고 차이점이 그런 것들입니다. 서양적인 종교는 오직 절대 유일신 신앙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분법적인 그런 논리들을 펴는데, 동양적인 종교는 대부분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금은 관대합니다. 관대하더라도 어쨌든 다음 세상을 어느 종교든 다들 얘기를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 같애요?

다음 세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은 모른다!

그걸 알려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겠어요?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려면?

(수행자 대답) 그렇지. 그게 정답이지. 죽어 보면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죽어버리고 나면 그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알 거라?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맛지마 중부경전에 보면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이 왕자는 대단한 유물론자였습니다. 죽고 나면 끝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거든. 그리한데 거기에 대한 확신도 사실은 가지고 있지 못했단 말이라.

그래서 스님을 불러가지고 물어봅니다.

모든 종교가들이,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들이 사람이 죽고 나면 다시 또 태어난다 어떤 형식으로든. 끝이다 하고 얘기하지는 않는데 내가 봤을 때는 죽고 나면 끝이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데 이거 다 흩어져버리고 그냥 끝나버린다.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물어봅니다.

스님이 그럽니다.

우리 부처님은 그리 얘기한 적이 없다. 물론 몸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만은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하고 얘기한 적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윤회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 그러면 뭔가가 윤회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왕자는. 아무래도 왕자니까 사형당하는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자기가 콘트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당하는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해봅니다. 만약에 영혼이라든지 본래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어디 다른 데 재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몸이 죽을 때 호로롱 빠져나가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죽여봤어. 정신차려가지고 딱 지켜보니까 사람을 죽여도 그걸 볼 수가 없거든.

 

그래서 이거는 잘못된 방법이다 해가지고 다시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측정을 해봅니다. 영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무게가 있을 것이니까 죽기 전의 사람의 몸무게 하고 죽은 후에 사람의 몸무게 하고 재보면 차이가 나게 될 것이다. 차이가 나면 그때 뭔가가 빠져나갔다는 거라. 그래서 몸무게를 재봤어.

죽기 전에 사람 몸무게가 무겁겠습니까? 죽고 나서 사람 몸무게가 무겁겠습니까? 예? 죽고 나서가 더 무거워요? 재봤어요? 똑같애요? 실제로 재보니까 죽고 나서가 더 무겁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 해봤죠? 아이를 등에 업었을 때 아이가 잠들지 않은 애 몸무게 하고 잠들어 있는 애 몸무게 하고 차이가 나죠?

이것도 잘못된 거야. 빠져나가면 가벼워져야 되는데 오히려 더 무거워지니까. 그래서 이건 아니다.

 

그런데 요가에서 보통 얘기할 때 영혼이 어디 존재한다고 그럽니까? 차크라에 다섯 차크라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그럽니다. 그럼 이걸 갖다가 일일이 벗겨보면 이 속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피부도 벗기고 아주 얇게, 그다음에 살갗 하나하나 이렇게 잘라가지고 벗겨봅니다. 그리했는데 아무리 그렇게 벗겨내봐도 영혼이 발견되지를 않거든.

 

물론 스님이 윤회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 왕자를 설득을 합니다.

이 왕자의 입장에서는 과학적인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맞습니다. 당연히 윤회하는 주체는 이 속에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형태로써 증명을 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 거라. 그러니까 죽고 나면 당연히 끝이다 하는 것이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종교는 사후세계를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라. 뭔가 특별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하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자,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사후에 대해서 얘기를 해봅시다 하고 얘기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가 99.9 % 입니다. 그런데 인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살아있는 부분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얘기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얘기들이 자꾸 등장을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여러분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티벳 사자의 서」 같은 경우들이 하나의 경전으로써 정립되어있죠? 죽고 나면 이렇게 죽었을 경우에는 이렇게 된다. 저렇게 죽었을 경우에는 저렇게 된다 하고 정립을 해놓은 경전입니다. 어쨌든 그런 경전이 점점 더 많아지게끔 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처음에 어떻게 얘기했느냐 하면 '아빤나까(Apannaka)' 라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노 퀘스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문이 들지 않는다. 의심할 바가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빤나까 빠띠빠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오직 유일한 길이다' 하고 보통 해석을 합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다른 선택할 게 없다는 거라. 오직 그 하나이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도 없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되거든.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죽고 나면 윤회한다. 이렇게 두 개가 서로 충돌해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그때 인제 부처님이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답했을 거 같아요? 그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아빤나까!' 어느 쪽 편을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빤나까 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잘 살아간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또 공경받게 됩니다. 사후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는 어쨌든 그렇게 잘 살아가게끔 됩니다. 당연히 사후가 있을 거 같으면 그 사람 죽고 나서 좋은 세상에 태어나겠지. 지금 나쁜 일을 하고 있을 거 같으면 당장 나쁜 과보들을 현세에서 받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남에게 욕을 듣게 되고 그 사람은 친구가 없어지게 되고 당연히 죽고 나서 나쁜 세계에 떨어지겠지. 이걸 아빤나까라고 얘기합니다.

 

다음 세상이 있고 윤회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이냐? 그리고 윤회를 안 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이냐? 지금 현재의 삶의 방법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 하는 걸 얘기할 때 부처님은 아빤나까(Apannaka) 라고 얘기합니다.

다음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 그거 증명하고 그것 가지고 토론하고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다는 거라. 확실한 것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하는 그런 겁니다. 그걸 부처님은 아빤나까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 그런 것인데 그러면 죽음의 순간은 그럼 살아갈 때는 분명히 틀림없이 잘 살아가야 된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이치입니다. 잘못 살아가면 지금 당장 나에게 불이익이 있고 나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을 잘 살아가야 됩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죽는 순간은?

죽는 순간의 논리를 비유해 놓은 게 뭐냐면 아이들의 경우를 비유를 많이 해놓았습니다. 여러분들 애들 길러봤으니까 게임기의 경우 돈 백 원 넣으면 얼마 동안 할 수 있는 것들, 그러면 하다 보면 당연히 게임오바가 됩니다. 게임오바가 되고 나면 애들은 어떻게 합니까? 엄마한테 졸라갖고 한 번만 더 하게 해주라고 그럽니다. 그럼 어쨌든 백 원 또 넣으면 언제가는 그것도 시간의 길이는 있지만 또 게임오바가 되게끔 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의 논리도 그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보통 마지막 게임오바가 탁 뜨면 포기해버리면 그만인데 대부분은 포기를 안 합니다. 아쉬워가지고 또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 죽음의 마지막 순간도 몸이 숨이 끊어지는 때도 그와 같다는 거라.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폭발하는 때가 이때라고 그럽니다. 더 살고 싶다는 것.

그 에너지로 인해가지고 뭔가가 다시 또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 엄마를 졸라가지고 백 원을 더 타내야 되듯이 분명히 게임오바가 됐는데도 끝나버렸는데도 그 강한 에너지로 인해가지고 엄마한테 졸라가지고 백 원을 타내거든. 그래서 다시 또 하게 되는 거라.

그 에너지로 인해서 다음생이 정해진다 하고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어가지고 그게 다음 세상을 바뀌어지는 게 아니고, 그 살고 싶은 강한 에너지로 인해서 다음 생을 끌어당기게 된다는 거라.

 

그렇지만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다음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생에 어떤 형태로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엄밀하게 볼 것 같으면 여러분은 아닙니다. 여러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른 부류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만약에 여러분들이 행복하다 할 것 같으면 불교적인 얘기로 할 것 같으면 과거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이래가지고 지금 그런 행복한 생활을 누린다고들 보통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과거생으로 인해서 그런 것인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과거생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행복한 거는 지금 행해오는 것들로 인해서 행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살든 못살든 아니면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다 공통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불교를 믿고 있으니까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한국적인 불교를 얘기할 때 아미타불을 염송을 하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아미타불이 마중을 온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로 인도한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사자의 서' 형태와 거의 비슷합니다. 사자의 서는 그런 것들을 이미지화시켜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 생이 어떻게 된다 하는 것들을 책으로써 정립해놓은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잘 살아왔을 거 같으면 아미타불이 마중을 오더라도 아, 내가 행복한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강한 살고 싶은 욕망이 분출한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게임오바 됐을 때 일으키는 반응과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잘살아왔을 때는 그런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서 아미타 부처님으로 인해가지고 극락세계로 간다고 칩시다.

그런데 잘못 살아왔을 경우에, 아미타 부처님이 마중을 나왔을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강하게 안 일어나겠느냐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인을 본다고 했을 때 부처님을 보는 경우가 각각 다 다릅니다. 경전에서 부처님을 봤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황홀하게 ‘아, 좋다’ 하는 마음만 일으키겠느냐? 지은 죄가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볼려고 하질 않습니다. 또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부처님을 볼려고 하질 않는다는 거라. 만날 부처님이 몸은 덧없는 것이다. 몸은 죽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것보다는 추한 것에 대한 얘기들을 하고 하니까 당연히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들은 부처님이 그 얘기할 건데 내가 왜 부처님을 볼려고 하겠어요? 그런 이미지화시킨다는 거라.

 

아미타불도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그리고 많은 세월 동안 만들어져온 그런 이미지화입니다. 그런 이미지화 돼있는 사람이 내가 지금 나쁜 행동들을 많이 한 상태에서 아미타불을 대하게 됐을 때 과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어떤 마음들을 일으키게 될까?

결국에는 무조건 아미타불을 부른다 해가지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물론 가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사자의 서가 꼭 다 맞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얼마 전에 이 앞에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스님이 경험을 한 건데 아주 어린애였는데 이렇게 탁 나가니까 엄마하고 같이 있던 어린애가 걸음도 잘 못 걸으면서 뒤뚱뒤뚱하면서 나에게 달려와요. 그냥 방긋 웃으면서. 그래서 내가 앉아가지고 "이리 온나" 하니까 애가 좋아가지고 그냥 뒤뚱뒤뚱 하면서 계속 오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얼른 애기를 안는 거라. 안으면서 저리 가더라고. 그런데 아이는 얼굴을 자꾸 내쪽으로 돌리는 거라. 그런데 엄마는 왜 그러면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스님한테 애기가 가는 것을 거부했을까 하는 얘기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다른 종교인이거든. 아마 모르긴 해도 그 사람은 다른 종교나 아마 기독교를 믿을 거라. 애가 스님한테 가면 뭔가 잘못될까 봐서. 그런데 애기는 그런 생각이 없었거든. 과거생하고 나하고 인연이 있었든지 없었든지 간에 그런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오게 되는데 엄마 같은 경우에는 무서운 파동이 일어났다는 거라.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런 파동이 일지 말라는 법이 있겠느냐는 거라. 아미타불 부처님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부처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의 마음을 오히려 평온하게 하라.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살아온 것을 뒤바꿀 수는 없다는 거라. 잘 살아왔든 못살아왔든지 간에. 그걸 없는 것처럼 만들 수는 없는데 그래도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 마지막 순간에 일으키는 마음을 평온하게 가질 것이냐 아니면 그냥 아미타불 부처님 보면서 기쁜 마음을 일으킬 것이냐, 아니면 두려운 마음을 일으킬 것이냐 하는 것은 각자가 선택하는 부분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을 침착하게 하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마지막 순간에 아미타불 부처님을 부르는 것도 사실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오히려 더욱더 냉정하게 마음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거라. 왜? 마지막 순간에 일으키는 의식이 다음생을 좌우를 하니까.

 

테라와다 불교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스님들이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정확하게 부처님의 말씀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보고 듣고 믿는 거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다 극락에 간다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삼귀의 오계를 조금 전에 처음 시작할 때 했지만 삼귀의 오계를 한다고 해가지고 극락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냥 건성으로 삼귀의 오계를 할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라.

또는 이런 대승불교권에 태어난다고 해가지고 테라와다불교권에서 볼 것 같으면 그거는 불교가 아니라. 불교 외적인 요소를 하고 있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간다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생명에는 여러 가지 차원들이 있습니다. 그걸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가지고 수행하는 데서 가끔씩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과거를 회상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나쁜 과거를 회상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대부분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지만은 명확하게 확신을 가질 수는 사실은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개념화되고 있는 지옥이라든지 천상이라고 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거라. 왜? 가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과거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해내더라도 그것이 명확하다고 얘기를 할 수 없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단지 지옥은 이러이러 할 것이다 하고 판단들을 하는 거라.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고 책에서 그렇게 써왔기 때문에. 천상은 그럴 것이다 하고 판단들을 해온 것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지옥을 이해하고 천상을 이해하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살고 싶은 강한 욕망으로 인해서 화가 확 일어났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내가 죽으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강하게 화가 일어났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불교적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다음생이 정해집니다. 그 화내는 것을 먹이 삼아서 다음생을 몸을 받게 된다는 거라.

입은 밥을 먹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화라고 하는 것은 입이 없어도 얼마든지 먹을 수가 있습니다. 분노를 먹이로 했을 경우에는 입이 필요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먹이로 했을 경우에는 똑같이 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거라.

 

가끔씩 지옥에 대해서, 지옥도를 그려놓은 걸 보면 그런 게 있죠. 불을 아주 뜨거운 불을 지옥에 떨어진 사람 입에다가 집어넣어줍니다. 대부분 사람이라 할 것 같으면 그 뜨거운 불을 갖다가 화탕지옥에서 입에 넣을 것 같으면 사람은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은 안 죽죠? 왜 안 죽습니까? 그것이 먹이입니다. 뜨거운 것 화내는 것이 먹이가 되기 때문에 그 먹이가 있는 한은 죽을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지옥은 영원히 그렇게 뜨거움 속에서 지낸다는 거라. 차가운 거는 또 차가운 것대로 그렇게 지옥을 이뤄가지고 영원히 그렇게 지낸다는 거라. 그럼 언제 지옥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까? 언제 되겠어요? 그 먹이가 없어져버리면 죽는 겁니다. 뜨거운 것이 일어나지 않을 때, 화내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 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천상세계는 안 그런 것 같습니까? 쉽게 말하면 그 뜨거운 것 죽음의 공포가 없어져버릴 것 같으면 지옥의 생명이 끝나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천상은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 끝나버릴 것 같으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천상은 그런 겁니다. 천상은 항상 우리가 즐거움을 먹이로 해서 살아가는 그런 세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즐거운 것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게 즐겁다, 그래서 평생 그 음악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 음악 듣는 걸 멈추어야 됩니다. 그런데 천상에선 안 죽고 그 천상세계에 계속 있는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그 즐거운 걸 들어야 된다는 거라. 그 얼마나 괴롭겠어요? 천상도 그래서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니라는 거라. 그 즐거움이 아, 의미가 없어져버릴 것 같으면, 지겹다는 생각이 일어날 것 같으면 천상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천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일어나는 다섯 가지 현상들을 얘기합니다. 그게 즐겁더라도 즐겁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 몸이 항상 보송보송하고 해야 되는데 지겨우니까 어떻게 돼요?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게 되고. 이런 여러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왜 그러냐면 즐겁다는 걸 인제는 즐겁다고 느끼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죽음을 맞게 되는 겁니다.

 

아귀 세계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 가끔씩은 '아, 이랬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 이건 좀 아쉽다' 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좀 더 살고 싶다' 아니면 '좀 더 돈을 벌고 싶다' 이런 뭐 하고 싶다 하는 생각들이 강하게 일어날 때들이 있습니다. 그 '뭐 하고 싶다' 하는 걸 에너지로 하고 있는 게 아귀 세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아, 좀 더 살고 싶은데,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강할 것 같으면 그런 부류들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깁니다.

그런 아귀들도 쉽게 말하면 인젠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 인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 나는 배부르다' 하고 생각이 있을 것 같으면 그 아귀의 세계도 끝나버리게 됩니다.

 

육도윤회라는 것은 그와 같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얘기하는 것은 "다음 세상은 스스로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일으키는 마음이 다음생을 선택하고 좌우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마음이 그런 욕구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차원. 완전히 고요함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차원들이 있습니다.

사띠를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에 가겠습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다음 세상은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 부류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끝나버립니까? 그럼 인제는 다음생이 없이 완전히 끝나버린 거네?

(수행자 대답)

그걸 아빤나까라고 얘기합니다. 아빤나까!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지고 마지막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틀림없이 그런 마지막 마음을 일으키겠죠. 원하는 것이 없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냥 알아차리고 있으면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겠죠. 그럼 그것은 어디 간다고도 얘기를 못 하는 겁니다. 그냥 자취를 감춰버리는 거라. 확실한 것들입니다. 그걸 아빤나까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런 상태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평온한 마음으로 사띠만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와 유사한 형태들은 가능하다는 거라. 그것이 다음생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에게 누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어봤을 때 답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아빤나까! 틀림없는 사실이다.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침착한 걸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히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사람이 임종할 때가 되면 꼭 스님을 초청을 합니다. 그러면 스님들이 가보면 천태만상입니다, 사람들이. 뭐 병시중 드는 사람한테 내 뭐 먹고 싶다고 얘기를 하고 그거 사주면 또 다른 거 먹고 싶다고 하고 또 뭘 하고 싶다고 하고 끊임없이 반복을 합니다.

그거는 왜 그렇겠습니까? 마음에 평온함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의 평온함이 있을 거 같으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뿐 아니라 죽기 적어도 일 년 전부터는 죽음을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그런 침착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뭘 원한다는 거라.

그때 스님들이 가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어떨 때는 그럽니다. 아, 이거 집에 뭘 안 가져왔는데, 그거 좀 가지고 오라고 그럽니다. 죽을 때 그거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그거 어디다 쓸 거라?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는 건데 죽음을 곧 앞둔 사람이 그거 찾아서 뭐 하겠느냐는 거라.

 

"오히려 마음을 자애를 더 가지고 자비를 더 방출해라" 하고 얘기합니다.

왜? 침착하지 않는 마음을 누를 수 있는 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체해가지고 자비로운 마음을 자꾸 가져야만이 침착한 마음을 유지해나가는데, 침착하지 않기 때문에 뭐가 먹고 싶다 아니면 더 살고 싶다 하는 마음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 거라. 아쉬운 것들이 자꾸 보이게 되는 거라.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이기적이 돼나갑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을 보면 마지막 순간에 굉장히 이기적이게 됩니다. 자기밖에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그런 침착성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여러분들이 해줘야 되는 것은 그런 침착성을 가지도록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사람이 조금 더 오래 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그것으로 괴로워합니다. 아, 조금 더 살아야 되는데. 내가 조금 더 행복해야 되는데. 당연히 그런 죽을 때 그런 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할 것 같으면 다음생이 불행하게 되어집니다. 또 내가 분해하는 마음이 강할 것 같으면 그 분한 마음으로 인해서 또 다음생이 불행해진다는 겁니다.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가지는 마음은 '내가 언제 죽어도 좋다'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런 침착성을 가져야만이 다음생을 바르게 태어날 수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다음생이 있든 없든 간에 결과를 받지 않게끔 됩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 아빤나까! 정해져있는 것이라는 거라. 확실한 것이라는 거라.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서 다음생이 정해지는 거라.

 

결국은 그 얘기가 뭐냐 하면 다음생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 영혼이 있어갖고 다음생을 가는가 아닌가? 이것도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확실한 것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거라.

 

그것이 부처님이 가르친 것이고 그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본 뜻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 앞으로는 마찬가집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거 생각할 필요도 없고, 육도윤회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다음생이 있느냐 없느냐 이거 알려고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