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20090503)
생은, 살아가는 것은 불확실한데 죽음은 확실한 것들입니다.
불교 게송 중에서 굉장히 유명한 말입니다. 아마 이 구절을 모르고 있는 분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죽음은 확실하다고 할 것 같으면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죽음을 잘 이해해야 되고 또 살아가는 생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서 죽음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거라. 왜냐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매달려서 많은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누릴려고 그렇게 노력들을 합니다. 어쨌든 아기가 태어나서부터 젊고 또 나이가 들고 하다가 가족이나 친척들을 다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 사실을 보고 피할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에 덮혀있기 때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실제적으로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단지 무섭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써 무섭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내 자신이 죽는다. 또 내 가족이 죽는다 라고 하는 현실에 직면해서 그것을 아, 죽음을 받아들일 만한 용기가 없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에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지 바른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 법을 따르는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공포,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자신의 죽음 자체가 두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두렵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죽을 때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두려워하지마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대부분 체념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두려워하면서 죽는 사람은 드물다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병원에서 통계적으로 나온 얘기들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애착을 가지는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내가 아니면 내 영혼이 영원히 가서 살기를 바랍니다. 또 천국이나 극락이나 하는 곳에 가서 살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지킬려고 하는 본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공포를 넘는 방법은 있습니다. '나'에 집착하는 생각을 버려버리면 죽음의 공포를 넘어설 수 있다 하는 겁니다. 내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들을 밖으로 향하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그 생명들이 이로움이 있기를 하면서 이로움이 있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쪽으로 자애를 바라고 또 자애로운 행동들을 하는 것들로 인해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버린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죽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해야 될 책임을 완수할려고 힘껏 노력하게 된다는 거라.
살아있는 한은 이렇게 죽음을 비롯해서 병도 반드시 방문하게끔 되어있습니다. 병 없이 살아가는 사람 없고 죽음을 피하는 사람도 없다는 거라.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서 그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현상으로부터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스트레스가 생긴다고 그럽니다. 그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서 몸에 병을 일으킨다 하고 현대 심리학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나마와 루빠' '마음과 물질이 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고정되는 실체는 존재를 하지 않는 거고, '나'라고 하는 고정적인 실체도 존재하지를 않는 건데, 단지 내가 지은 여러 가지 행위가 다음 생을 만들어내는 업의 결과로 인해서 또다른 생을 받아서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입니다.
그 업은 어떤 신이나 구세주가 떠맡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가 지은 행위는 자기가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자기 자신을 섬으로 해서 힘껏 노력하라 라고 얘기를 합니다.
내가 슬퍼하고 한탄한다고 해가지고 내 친척이나 내 가족들이 죽음을 멈출 수가 있고 이 윤회하는 것들을 멈출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되겠지.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사람은 죽으면 누구든지 내 가족이든 친척이든 누구든지 간에 자기 업에 따라서 새로운 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거라. 죽음에 이르게 될 때까지는 내가 무덤까지 갈 때까지 옆에서 시중들고 모든 걸 행해나갈 수가 있지만 그것뿐이라는 거라.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거라. 다음생으로 가는 것은 내 도움으로 인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그사람이 행한 행위로 인해서 가는 것뿐이라는 거라.
이 건물도 언젠가는 부서져 무너지게 돼있고, 산도 세월이 흐르면 바다로 바뀔 수가 있고, 호수가 생길지도 모르지만은, 그래서 변함없이 확실한 것은 조건지워진 것은 어떤 것도 없다는 거라.
그렇지만은 죽음만은 확실하다는 거라. 모든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죽는다 하는 거라. 그렇지만 부처님은 이 죽음으로 인해서 육체가 한 줌의 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름이나 영향력은 남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우리 인류에게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은 지금도 기억을 하고 있다는 거라. 살아있을 때 그렇게 살아라는 거라. 그것이 생의 본질이라는 거라.
그 생의 본질을 모르면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죽음을 한탄하고 슬퍼하는 겁니다. 생의 본질을 안다고 할 거 같으면 누구든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가 이 윤회하는 것들을 완전히 끊기 위해서 열반을 구할려고 더욱더 노력을 하게 된다는 거라.
이생은 마지막 생은 아니라는 거라. 이생은 내가 태어난 맨 처음 생은 아니라는 거라. 끊임없이 윤회했던 생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지금 현재 살아있을 때 더욱더 번뇌를 없앨려고 하고 해탈을 향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도 아라한이었던 아누룻다 존자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류과에 도달했던 그래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아난다 존자는 눈물 흘리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야, 부처님이 항상 말하지 않느냐? 태어난 것, 조건지워진 것, 만들어진 것들은 반드시 망가지고 그렇게 생겨난 것들은 사라지게 돼있다.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형성된 것들, 우리 몸이라든지 모든 것들의 본질이라. 반드시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돼있다. 부처님이라고 거기서 예외가 될 수가 없다. 이 구조를 완전히 그쳐버리는 것이 니가 해나가야 될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끼사고따미에게도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쓸쓸한 현실이라는 것을 부처님이 눈뜨게 해줬고, 빠따짜라 라고 하는 여인에게도 죽음이 모든 생명에게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라는 것을 얘기를 해서 이 생은 불확실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죽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고 하는 오온이 분해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거라.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물질이라고 하는 두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단순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리석음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오온을 그 현상으로 알지 못하고 실체로 보고 있는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그 오온을 고정적인 '나'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모든 것의 진정한 본연을 알 수 있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볼려고 노력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해서 마하사띠빳타나나 이런 여러 경전을 통해서 수행을 하고 그 현상을 자꾸 지켜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오온이라는 것이 급속히 생멸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자꾸 보라는 거라. 한 번 생겨나는 현상은 똑같은 현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고 두 번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그 오온이라는 것은 각각이 분리돼서 한순간도 멈추는 일 없이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거라. 그 흘러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생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도 멈추는 일 없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생멸을 계속 거듭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 사실을 빨리 알아라는 거라.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고 하는 네 가지 마음의 요소도 물질적인 요소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죽음의 순간에 이르게 됐을 때 이 몸이 부서지고 나면 수상행식은 새로운 물질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 업의 법칙에 따라서 오온이 다시 재편성되는 것이 새로운 탄생이다. 오온이 결합하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고, 오온이 구성되어있는 상태로써 계속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고 이 오온이 분해되어 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라. 그래서 오온이 다시 또 결합하는 것을 재탄생이라고 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런 생을 우리는 무수하게 겪어왔기 때문에 이 생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의 생도 아니고 마지막 생도 아니라는 거라.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는 거라.
불교에서는 죽음의 원인을 크게 네 가지로 얘기합니다.
수명이 다하는 것. 이 목숨이 다하는 것.(Āyukkhaya)
자기가 지은 업의 에너지가 다하는 것.(Kammakkhaya)
죽음과 업이 동시에 다해버리는 것.(Ubhayakkhaya)
네 번째는 얘기치 못한 것들. 사고라든지 아니면 자연적인 어떤 재해로 인한 거라든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수명이 다하는 것.(Upaccedake)
이렇게 죽음을 네 가지로 얘기합니다.
앞에 켜져있는 양초를 예를 들더라도 양초의 심지가 다 타버려도 저 양초는 꺼져버립니다. 죽음을 맞습니다.
심지는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양초를 둘러싸고 있는 파라핀이 다해도 그 업이라고 하는 것이 다해도 저 불은 꺼져버립니다. 죽음을 맞아버린다는 겁니다.
양초와 파라핀이 동시에 다 소멸해도 불은 꺼지게 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겁니다.
또 바람 같은 것이 불어가지고 저 양초의 불을 확 꺼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외부적인 영향으로 인해서. 양초가 꺼지는 것도 저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이렇게 네 가지 작용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는다는 겁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는 죽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라고 생각을 하라. 그 생각이 없으면 죽음을 맞을 때 두려워하게 되고 죽음에 대해서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언제든지 내 죽음은 나를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지금 내가 나의 가족 나의 친지들에 대한 의무나 책임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그걸 완수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을 넘을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태어나는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무명과 갈애를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열반에 도달하도록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오래도록 입어서 닳아빠진 옷을 버리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 닳아빠지고 나에게 작은 옷들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거 누가 아까워하고 두려워하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우리는 그걸 두려워한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내 주변 가족 친척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들을 참기 어려워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인데도 버려버릴 수밖에 없는 건데도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거라.
위사카에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사카의 딸이 죽었을 때 위사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럽니다.
위사카야, 너의 딸이 백 명이면 좋겠느냐? 부처님 나는 백 명이라도 그 백 명을 내 딸로서 가지고 싶습니다. 그마만큼 내 아이가 많으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럼 너는 그 아이가 죽을 때마다 울면서 슬퍼할 것이냐? 사랑하는 사람이 백 명이 있으면 백 번의 슬픔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한 번도 슬픔을 겪지 않아야 되는 것인데 너는 백 번의 슬픔을 겪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고 가족을 가질려고 하느냐?
집착을 하면 괴롭고 슬프고 두려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게 되면 그 한 번의 생에 대한 집착도 두렵고 슬플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것을 버려라는 거라.
죽음이 참기 어렵고 싫은 것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죽음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 죽음을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을 자꾸 관찰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죽어갑니다. 대략 의학적으로 보면 일 년에 이 지구상에 칠천만이라고 하는 사람, 우리 지금 이 한반도 보다도 더 많은 인구들이 일 년 동안에 죽어간다고 그럽니다. 매일 한 이십만 명이 죽어간다고 하니까. 우리나라가 일 년 동안에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거라.
그런데도 우리는 그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거라. 왜? 두렵고 공포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을 관찰하라는 거라.
죽음을 관찰하는 첫 번째 이유가 이 공포를 뛰어넘게 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절망에 빠지고 두려움에 빠지기 위해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는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을 관찰함으로 인해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거라.
죽음을 관찰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내 태도가 바뀐다는 거라.
아, 살아있을 동안에 열심히 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다 하고 인생에 대한 견해나 태도가 바뀐다는 거라.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버려버리고 아,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되는 거라.
죽음을 관찰하는 세 번째 이유는 죽음을 맞았을 때 온화하게 죽는다는 거라.
나도 이렇게 죽는다는 사실, 누구든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죽든지 주위 사람들이 죽을 때 편안하고 온화하게 그 죽음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거라.
죽음을 관찰하면 이런 이점들이 있습니다. 죽음을 관찰하는 것에 인해가지고 가치있는 삶을 보내게 되고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늙는다. 그 늙음을 피할 수는 없다.
두 번째가 나는 병이 든다. 그 병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세 번째가 나는 죽는다. 그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네 번째가 나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랑하는 것도 변화하는 거고 좋아하는 것들도 변화하는 거고 그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다섯 번째가 나는 업의 영향하에 있다. 그 업의 과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는 거라.
이걸 매일매일 생각하라는 거라. 늙고 병들고 죽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피할 수는 없다는 거라. 업으로부터 피할 수가 없는 거라. 이 다섯 가지는 항상 잊어버리지 말아라는 거라. 침착한 마음으로 이 생·로·병·사(生老病死) 그리고 업이라고 하는 것들을 자꾸 되뇌이고 관찰함으로 인해서 공포를 넘어서라 하는 거라.
내가 초대하지 않아도 나는 이 세상에 왔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죽음은 내 곁에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렇지만은 그 죽음은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잎이 지면 그 잎이 떨어져서 거기에 영양분이 돼서 또 새로운 잎이 나도록 한다는 거라. 인생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죽음의 순간이 바로 다음생이라는 거라. 진지하게 죽음을 관찰하면 인생에 대해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관으로써 살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살아가는 생명들은 누구든지 업을 소유하고 업의 주인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것이고,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업이 바로 내 친지와 친족과 같이 그 업에 따라서 다음을 상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단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거라.
죽음이 가까이 오면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 한다는 거라. 그런데 나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으면 시중을 들 때도 죽어가는 사람을 안정되게 할 수가 있다는 거라. 지금은 의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은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육체적인 고통들은 압도적인 공포의 대상은 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마음의 공포입니다.
적어도 내 자신이 그 죽음을 바라보는 것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 주변 사람들도 편안하고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방을 편안하고 온화하게 만들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머리맡에서 슬퍼한다든지 울부짖고 아우성치고 한탄한다 해가지고 그것은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편안하고 고요하게 만들어주고 주변 환경 조건들도 그렇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자꾸 들려주고, 스님을 초청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하라는 거라. 배려하고 자비를 가지고 기분 좋게 도움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라는 거라.
적어도 내 자신도 그렇게 죽어갈 때 편안하게 죽어야 되듯이 다른 사람들도 죽으면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살아있을 동안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선한 일들을 더욱더 열심히 해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또 해탈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죽음이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죽은 가족 친지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거라.
오늘 나는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반드시 생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죽음을 맞았을 때 내가 이 몸을 벗는다는 사실, 해방된다는 사실, 죽음과 병과 태어남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로 인해서 기쁘게 맞아들일 수가 있게 되고, 또 내가 살아생전에 부처님 말씀 따라서 선한 공덕 널리 행하고 마음을 닦은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더 환희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거라.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되는 지혜라는 거라.
인간의 지혜는 이렇게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하는 얘깁니다. 생은 항상 불확실한 것이고 죽음은 언제든지 내 곁에 찾아올 수 있는 확실한 것이다 하는 사실을 알아서 내 자신도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되고, 주변 사람들 특히 부모들이나 가족 친지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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