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업의 힘 (20090503)
여태까지 여러분들이 쌓아온 것들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겁니다.
착한 일 많이 했어요, 나쁜 일 많이 했어요? 이때까지.
반반 정도 된다 하고 생각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봐요. 아란야님은 적어도 반반은 됐다 그리 생각을 하네. 어쨌든 한 번도 선업을 지어보지 않았다 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그건 또 없네. 어쨌든 한두 번씩은 지었네. 오늘도 어쨌든 스님한테 탁발공양 올렸으니까 선업을 지은 거지. 여기 온 사람들은 선을 안 지은 사람은 일단 없다고 봅니다.
그 힘들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작게 선을 지었든 많게 선을 지었든 선을 행한 것들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것들에 대해서 과소평가해서도 안됩니다.
부처님은 "선(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불과 같고, 씨앗과 같고, 또 바나나 줄기와 같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불은 조그만 불씨지만 그것은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산불을 내서 산 전체를 태워버리게 된다 하는 겁니다. 씨앗도 조그마한 씨앗이지만 그게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아주 큰 아름드리 나무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바나나 줄기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잘게 1센치 두께로 해서 자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선 뿌리가 나서 새로운 바나나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쌓아온 선이 아주 하잘 것 없고 조그만 선(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 사리불 존자 밑으로 출가한 분이 있었습니다. 출가 수행을 한다고 해서 끝까지 출가자의 길을 다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제자는 하다가 수행도 잘 안 되고 하니까 환속을 하게 됐어요. 환속을 하면 당연히 경제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좋은 일에 종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쁜 일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나쁜 일을 했는데 도둑질을 했거든.
당연히 옛날에는 도둑질을 할 거 같으면 사형에 처합니다. 국법에 인해서. 그런데 이 도둑질이 너무나 나쁜 죄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이 일주일간 이 도둑질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나서 마지막 날에 목을 베게끔 합니다.
평평한 곳에다가 못을 박아놔 놓고 그 위에 사람을 눕혀가지고, 눕히면 어떻게 되겠어요? 몸이 그 송곳에 다 찔려가 피가 나고 할 거라. 이걸 인제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일반인들에게 그걸 보여주는 거라. 매일 세 번씩 그렇게 몇 시간씩 그 고문을 당하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 목을 짜르도록 그렇게 합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 하는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 도둑질한 사람의 입장에서 봐선 굉장히 가혹한 형벌이 됩니다.
사리불 존자가 어느 날 가만히 있다가 보니까 자기 제자가 그런 형벌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은 거야. 아무리 나쁜 도둑놈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옛날에 한때는 자기 제자였는데 그런 소식을 듣고 사라불 존자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그 형벌을 받는 자리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 형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또 사리불 존자가 나타나니까 사리불 존자를 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데 사리불 존자가 향하고 있는 곳이 그 도둑질을 한 사람을 향하고 있거든. 그래서 사람들도 아, 저 사람하고 사리불 존자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갑다 해서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니까 그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 사리불 존자가 오고 있는 걸 봤어. 그때사 인제 자기가 한 잘못에 대해서 뉘우칩니다.
아, 인제 내가 내일되면 저 위대한 스승님 하고 작별을 해야 된다. 나는 내일되면 처형당한다 하는 생각들을 해서 마지막으로 그 스승에게 예배하고 싶어. 그리고 그래도 내가 출가생활을 해가지고 크게 얻은 것은 없어도 출가생활 할 때 참 행복했고 또 그래도 선정 일부는 내가 얻은 기억은 있거든. '아, 그때가 참 좋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내일 내가 처형당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 내일은 내가 죽는다. 이 죽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죽음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죽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숨 안 쉬면 죽는 거라.
아, 코끝에가 죽음이 일어나는 장소구나. 그 코끝에서 죽음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 아무리 내가 지금 고문을 당하고 있어도 숨을 쉬고 있으면 죽지는 않는다. 그런데 내일 확실히 죽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거든.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코끝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관찰을 합니다.
거기에다가 집중을 해서 호흡을 알아차리다 보니까 호흡이 완전히 가라앉아버립니다. 내가 사리불 존자를 경배하고 아, 인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어져버리고, 내가 도둑질했다는 생각도 없어져버리고, 내일 죽는다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어져버리고 오로지 호흡과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만 일으킵니다. 그렇게 쭉 하다 보니까 완전하게 그 호흡에 일치를 하게 됐거든.
호흡에 일치가 될 거 같으면 여러분들도 경험을 해봐서 알겠지만은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호흡과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이라는 몸과 마음의 두 작용만 있지 다른 것은 모든 걸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점점 더 집중하게 되고 점점 더 알아차림이 강해지니까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게 됩니다. 실제로 그 송곳에 찔려가지고 있는 몸이 전혀 송곳에 영향을 안 받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피 흐르는 것들도 멈추게 되고 그렇게 한나절 이상 지내고 나니까 당연히 상처는 조금씩 조금씩 아물게 되고, 그러니까 누워있던 형태에서 앉아서 좌선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서 앉아서 좌선할 수 있게 되는 거라.
좌선을 할 때 앉아서 좌선하는 것하고 누워서 좌선하는 것은 참 차이가 많이 납니다. 누워서 하게 될 것 같으면 대상에 빨리 접근하게 되고 알아차리는 것은 있습니다. 그렇죠? 앉아서 하는 것보다. 그래서 대상을 오히려 더 순일하게 관찰을 해나가게 되는데 이게 오래가지 못한다 것이 단점이라는 거라.
왜 그렇겠어요? 그래 잠이 오는데 왜 잠이 오느냐는 거라? 그냥 편안함만 있는 거지. 그러니까 노력할려는 힘들이 떨어지기 때문에, 노력하는 힘이라는 것은 알아차리는 힘을 계속 연속해주는 작용을 해야 되는데 알아차림이 연속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편안하고 고요하고 가볍기만 하니까 그냥 잠에 떨어지고 이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좌선을 해보면 그거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죠? 대상을 금방 알아차리기는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기에는 누워있을 때만큼 그렇게 편안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계속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조금 더 노력의 힘들이 강해야만이 그리고 집중하는 힘들이 강해야만이 그래야만이 알아차리는 힘들이 지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누워있을 때보다 앉아있을 때가 오래도록 수행할 때는 더 용이한 자세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앉아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앉아서 수행을 하다 보니까 아주 용이하게 수행이 될 뿐만 아니라 그러다 보니까 몸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됩니다.
아픈 부위가 있으니까 아픈 부위에 대해서 관찰을 하게 되고 머리끝부터 시작을 해서 발끝까지 전체를 완전하게 관찰을 하게 됩니다. 머리털을 관찰을 하면 머리털 한올 한올을 다 관찰을 합니다. 피부에 닿아서 표층 밑으로 침투해가지고 고름과 엉켜있는 모습이라든지 이런 모든 몸의 대상을 관찰을 하게 되니까 더욱더 알아차림과 집중은 예민하게 되어나가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선정에 더욱더 다가가게 되는 겁니다.
일선정부터 해서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이런 경지에 자꾸 있게 되니까 그전에 출가했을 때는 몰랐는데 인제 아, 수행이 이렇게 나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고 또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구나 하는 사실을 그때사 아는 거라.
그래서 만약에 내가 내일 죽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인제는 아, 스승과 같이 살아야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그런 마음을 일으키자마자 공중으로 몸이 붕 떠서 사리불 존자 있는 데로 가서 탁 서게 됩니다.
군중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랄 뿐 아니라 왕도 아, 저 도둑질을 한 사람은 그래도 조금의 선근공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죽을 운명은 아닌갑다 해서 놓아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제자는 비록 아라한에 이르지는 못했고 과위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출가를 해서 잘 살아가게끔 됩니다.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다는 거라.
출가생활이 힘들고 아무것도 이익이 없었는 거 같지만은 어쨌든 내가 어려울 때 직면해서 보니까 '아, 그래도 그때는 마음이라도 행복했고 내가 조금의 선정이라도 얻은 것이 있구나' 하는 그런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는 거라. 어쨌든 그 조그마한 선업 지은 것들로 인해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됩니다.
내가 지은 선업을 과소평가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선은 불과 같다는 거라. 하나의 성냥으로 인해서 숲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태워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몸에 익힌 선, 조그만한 선이라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불행한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무거운 것들을 피해서 가볍게 할 수가 있고, 위험을 없애서 안전하게 만드는 힘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는 거라. 내가 지었던 선업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씨앗과 같다는 거라. 조그만한 씨앗이지만은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성장하게 되고, 바나나 나무도 아주 잘게 잘라도 거기에는 뿌리가 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 생에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내가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마음과 또 잘 성숙된 집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들은 바로 선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선업에 해당되지 불선업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렇게 탁발공양 올려서 이루는 것도 선이고, 또 내가 계행을 잘 지키는 것도 선이지만은 수행으로써 집중력과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은 더 큰 선업바라밀이라는 겁니다.
그 제자가 과거에 지은 선업으로 인해서 내가 그 선업을 잊어버리고 있을 것 같으면 당연히 죽음을 맞이했겠지. 그런데 그 선업을 떠올려서 그 선업 뿐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수행을 하면서 또 다른 선업을 이루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그 힘으로 인해서 내가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고 벗어날 수가 있었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에 또 하나 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선원에 와서 딱 한번 청소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러우니까 당연히 그것을 깨끗이 쓸고 닦고 해서 그 선원을 깨끗하게 했어요. 깨끗하게 할 것 같으면 자기도 물론 그 깨끗한 걸 밟고 하니까 더러운 것으로부터 오염이 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끔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참 마음이 좋거든. 그러고 나서 집에 가 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당연히 사람이 늙고 병들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었는데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난 거라. 자기가 생각을 해보니 '내가 과거에 좋은 일을 한 게 없는데 왜 내가 천신으로 태어났을까? 당연히 지은 행위로 인할 것 같으면 내가 나쁜 데로 떨어져야 되는데 천신으로 태어난 게 이상해서 간간이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선원에 가서 그것도 내가 다니는 선원도 아니었고 한 번 갔는데 그게 더러워서 진짜 지극정성으로 그걸 한번 청소를 한 기억이 있거든. 그때 인제 후회를 합니다. 내가 조금 더 많은 선을 행했을 거 같으면 이거보다도 훨씬 더 좋은 천신의 몸을 받아서 태어났을 건데 하는 후회가 드는 거라. 그래서 천신의 몸으로 다시 선업을 짓기 위해서 인간 세계로 내려옵니다. 그 어디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는 곳이 없는가 해서 보다가 내려가 보니까 어느 스님이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처가 하나 있거든. 거기 가서 또 비질 할라니까 천신들이 비질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그럽니다. 당신은 천신이다. 아무리 비질하려해도 비질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아무리 선업공덕을 지을려고 해도 당신 힘으로 선업공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선업공덕을 지을려는 사람에게 당신 선업공덕을 지으시오 하고 말해줄 수 있는 것밖에는 없다. 다른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는 거라
사실은 그렇습니다. 천신이라는 것은 선업공덕을 지을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인간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과 같이 대화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오늘 같이 스님들에게 이 바리때 속에 음식 하나 여줄 수 있는 것조차도 없는 거라.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선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밖에 없는 거라. 내가 직접 짓는 게 아니고. 그런 좋은 선업공덕을 지을 수 있는 인간들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선업공덕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진 몰라도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그래서 그 선을 몸에 익힐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때와 기회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거라. 지금 내가 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할 것 같다면 서둘러서 해라는 거라. 서둘러서 노력하라는 거라. 가능한 한 선을 행하도록 노력하고 그 선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아무리 작은 선업도 아까의 예와 같이 큰 공덕을 낳는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만약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뭐가 남을까요?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도 없고 남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나온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은 선업, 내가 지은 불선업 이것만이 발자국으로써 따라가는 것이지 다른 것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선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될 것들이고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또 힘들다고 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마음으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집중력을 키워주면 그것은 선입니다.
아비담마에서도 사띠가 선한 마음의 요소에 들어가지 나쁜 마음의 요소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집중력이 선한 마음의 요소에 들어가는 것이지 나쁜 마음의 요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노력도 마찬가지고. 수행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선을 짓는 것입니다.
그 조그만한 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아라는 거라. 끊임없이 선을 지을 수 있는 기회는 여러분들에게 얼마든지 있다는 거라.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죽음이 여러분들을 데려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선업으로 인해서 그 힘으로 인해서 좀 더 나은 조건들을 만날 수가 있고 이 세상에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선의 힘으로 인해서 좀 더 마음 편하고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선(善)은 아무리 조그만한 선이라고 하더라도 불과 같고, 씨앗과 같고, 바나나 줄기와 같다 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악(惡)은 안 그렇겠습니까? 악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더욱더 증장시키도록 노력하라 하는 겁니다. 선을 증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겁니다.
마음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선을 행하게 되고 그 선의 힘이 언젠가는 일어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것이 이생에서든 다음생에서든.
선의 힘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 선의 바라밀로 인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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