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사카뿌자(Vesākha-Pūjā) 특별법문 (20090502)
저번에 이어서 오늘도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부처님 이야기 보다는 부처님 오신 날 웨사카뿌자(Vesākha-Pūjā) 날을 맞아서 뽀야(poya) 날에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게 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한국에는 깨달은 사람에 대한 용어를 보통 세 가지로 씁니다.
불타-부처님, 그다음에 성문, 연각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 세 개에 대한 차이점을 명확하게 아는 사람? 성문은 뭐고 연각은 뭐고 부처님은 뭐라?
부처님이라고 할 것 같으면 보통 '삼마 삼붓다(sammāsambuddha)'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가 있습니다. '완전하게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서 정각을 이루신 분이다 해서 '정각자, 정등각자, 정자각자'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리 하더라도 이 부처님이 이루신 진리-법은 부처님만 이룬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거죠? 옛날부터 있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서 무수한 노력들을 했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 현재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간 고행이라는 과정을 겪었고, 과거 부처님들은 또 다른 노력들을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과거 부처님이나 지금 부처님이나 깨달은 법은 동일하고 그 법을 설한 것은 동일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진리는 똑같은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어떻게 발견했느냐 하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발견했다' 해서 '정각자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인제 부처님이다 하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성문'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그걸 보통 빨리어로는 '아라항(Arahaṁ)'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라한은 뭡니까? 번뇌를 완전히 여의신 분이라는 뜻이죠! 그 아라한은 번뇌를 완전히 여의었지만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지는 못했죠! 어떤 경우든지 부처님의 법을 의지해서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사리불 존자 같은 경우에도 그 앗사지 존자에게 한마디만 들려달라. 그 부처님 말씀을 한마디만 들려달라. 그거 한마디가 없으면 깨달음에 못 이른다는 거라. 부처님의 다섯 명의 제자들 비구들 최초의 비구들도 어쨌든 부처님한테 한마디라도 들어야만이 깨달음에 이르거든. 그러니까 결국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거라. 부처님 이후에 모든 제자들이 꼭 마찬가지로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듣고 나서야 깨달음을 이루었다 해서 성문이라고 그럽니다. 그 '성스러운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는 우리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응공'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응당 공양받을 자격이 있다' 왜 응당 공양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럽니까? 부처님과 같은 똑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응당 공양받을 자격이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성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응공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대승불교에서는 성문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어쨌든 빨리어로는 '아라한'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어쨌든 아라한이라는 것은 사리불 존자든 아니면 그뒤에 야사 존자든 어떤 깨달음에 이르러서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들도 한결같이 다들 법을 듣고 깨달음에 이릅니다.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지만은 어쨌든 그 법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있는 개념이 뭡니까? '연각'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연각. 빨리어로 '빳쩨까 붓다(pacceka-budd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럴 '인연이 돼서 깨달았다' 하는 연각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죠! 그걸 뭐라 합니까? 부처님과 같이 스승 없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룬 것은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완전하게 지혜가 성숙해져가지고 법을 설하는데, 연각은 그러한 지혜가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홀로 즐기다가 열반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을 설하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됩니다.
보통 이 빨리어 '빳쩨까 붓다'를 남방불교에서는 '벽지불'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죠. '독각'도 마찬가지죠. 독각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할 때는 똑같은 그런 뜻입니다. 자신의 번뇌는 해결했지만 법을 펴지는 못하는 부처님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인제 여러분들 개념 정리는 하겠죠?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고 법을 설하시는 분이고 그래서 과거 부처님부터 해서 지금까지는 스물여덟 분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을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벽지불이라든지 연각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었지만 법을 설하지는 못했고, 못했는데 스스로 열반에 들고 나서 그분이 깨달음을 이루었는지 안 이루었는지 우리가 알 수가 없으니까 많은 연각들이 있었겠죠. 그렇지만은 그 연각도 부처님이 계신 시대에는, 부처님이 태어난 시대에는 절대 안 태어난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2,500년 전에 부처님이 태어났던 시대에는 연각이라는 게 없죠.
그다음에 성문은 부처님으로 인해서 부처님 법을 들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모든 제자들, 사리불, 목련, 아난 존자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이 연각에 들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들의 명칭입니다.
그러면 이런 부처님과 연각부터 해서 연각, 성문들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뭐였을까? 과거 부처님의 생애를 가만히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 그냥 느닷없이 깨달음을 이루었겠느냐는 거라. 그렇지는 않죠? 무수한 세월 동안에 여러 가지 바라밀을 행하고 해가지고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각 같은 경우는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법을 설하지 않고 이미 열반하셨기 때문에, 성문 같은 부처님 제자들 이런 분들도 과거생에 인연이야기들을 보면 무수한 바라밀들을 행해왔습니다.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리하더라도 그분들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과거생 어느 땐가 반드시 해야 되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 서원을 세우는 겁니다. '나는 다음생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 되겠다.' 아니면 '다음 생에서 반드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깨달음에 이르겠다.' 뭐 이런 서원들을 세워왔다는 거라.
어떤 서원을 세웠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깨달음에 이르겠다 할 거 같으면 당연히 성문의 위치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겠지. 그런데 내가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겠다 할 것 같으면 부처의 경지에서 부처가 되어서 깨달음을 이루게 되겠죠. 그래서 이런 서원이 없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들이 어떤 겁니까? 그런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바라밀을 행하죠!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을 행하는 거고,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십바라밀을 행하는 거고, 끊임없이 그런 바라밀들을 실천합니다. 실천하지 않고 그러면 그 서원이 이루어지겠느냐는 거라.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더디겠죠. 말과 생각만으로써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굉장히 느려질 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바라밀들을 많이 닦아왔습니다.
과거 부처님들도 그랬고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랬고. 그렇게 해서 보시도 내가 지극정성으로 행해서 그 바라밀을 완성하고, 지혜도 바라밀을 완성하고, 인욕도 완성하고, 그다음에 남을 사랑하는 자애 같은 것도 바라밀을 완성하고, 항상 평등한 마음을 가지는 그런 것들도 완성하고, 노력하는 그런 것들도 완성하고, 이런 것들을 자꾸 완성해왔다는 거라.
그것이 하나의 서원이 될 수가 있고, 그리 하더라도 어쨌든 큰 서원은 '아, 내가 깨달음을 이루겠다!' 아니면 '내가 다음생에서는 반드시 부처님 법을 만나기를 서원한다.' 이런 서원들을 세웁니다.
빔비사라 왕도 세 가지 서원을 세웠다고 그럽니다. '내가 부처님을 볼 수 있기를' 하는 서원, 그다음에 '그 부처님 말씀을 내가 들을 수 있기를' 하는 서원, 그다음에 '그 부처님 법을 듣고 내가 깨달을 수 있기를' 하는 서원. 이런 큰 서원 세 가지를 세워둔 덕분으로 인해서 부처님을 만나게 되고. 또 그 법을 듣고, 수다원까지 이르게 되고 그런 결과들을 낳게 되고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 오신 날에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런 서원들을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서원을 세울 때 내가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 아니면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서원 이것은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는 똑같습니다. 성문이든 독각이든 아니면 부처님이든 깨달음의 경지는 사실은 다 똑같습니다.
그런 서원의 차이들은 있지만 어쨌든 그런 서원들을 세우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은 뭡니까? 내가 지금 현재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고 그렇게 하지만은 뭐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겁니까? '큰 불자가 되겠다' 하는 것,
'마하 뿌리사(mahāpurisa)'라고 그럽니다. '큰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 하는 서원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일 거 같으면 당연히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할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되고 또 바라밀을 쌓기 위해서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걸 자꾸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하 뿌리사 라고 그럽니다.
그런 큰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 하는 걸 스스로 다짐하는 날이 바로 이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는 내 자신이 부처가 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번뇌를 여의어버리고 이생에서 행복을 얻는 길을 가르친 분입니다. 이생에서도 그런 법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그 정도로 아주 자상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열심히 노력해서 수행을 하고 스스로 닦아라 하고 위빳사나 수행법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이 길을 따르는 것만이 바른 길이다 하고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마하 뿌리사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길을 가겠다는 그런 다짐을 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왜? 그 길을 가는 것이 누구든지 불교도가 걸어가야 될 길이고, 또 궁극적으로는 내가 부처가 되고 내가 성문이 되고 내가 연각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라. 그걸 부처님은 "오직 한 길이다. 이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고 그럽니다. 만약에 이 길을 몰랐다 할 것 같으면 다른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인제는 이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싫든 좋든 이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이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바라밀을 실천해야 되고 바라밀을 실천해야 되는 중간중간에 또 몸소 수행을 또 실천해야 되고, 그게 이 오직 하나의 길이다 하는 겁니다.
수행 실천하라 할 것 같으면 그냥 여기 선원에 와서 좌선하는 것만이 다다 하고 얘기를 하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위빳사나 수행은 어디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음을 집중하고 또 마음을 사띠 할 수 있는 대상을 잘 찾아서 그 대상에 마음을 다 실어버려야 됩니다. 그것이 설혹 다른 절에 가서 염불수행을 하더라도 염불수행이 위빳사나 수행이 됩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지극정성으로 거기에 집중을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할 것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이 됩니다. 염불수행을 하든 아니면 열심히 절을 하든, 절을 하더라도 절을 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집중하고 할 것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이 되는 거라.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수행하고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제 여러분들은 오직 하나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웨사카뿌자 웨사카 보름날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큰 서원들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질문...)
예. 잘했습니다. 어쨌든 명호는 어떤 것이든 관계없습니다. 명칭이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 수행이 안 될 때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명칭을 붙입니다. 명칭은 실재하는 것을 잡기 위한 도구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이라고 하든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든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하든 그것도 하나의 명칭입니다. 명칭은 내가 수행을 하기 위한 도구라. 위빳사나를 실천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절을 하든 아니면 기도를 하든, 아니면 부처님을 칭하든 그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거고, 내가 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이고, 또 내가 이 큰 길로 들어서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도구라고 반드시 생각을 하고 거기에 맞게끔 반드시 집중하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 반드시 큰 서원을 세워서 마하뿌리사(mahāpurisa)가 되도록 스스로들 노력하자 하는 말로써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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