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죽음 2. 임종의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090511)

담마마-마까 2021. 3. 2. 10:35

https://youtu.be/2r3k8U7HodY

* 죽음 2. 임종의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090511)

 

··· 죽음에 대한 것들은 한 세 번 정도 나눠가지고 해야 될 것 같애요. 저번 시간에 한 번 했고, 오늘은 임종 때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부분은 좀 많이 놓치는 것 같애요. 임종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앞으로 제사 의식을 하더라도 이 임종 때의 의식들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또 이것들을 도입을 빨리 하도록 해야 됩니다. 49재 한번 잘 지내봐야 그거 별 소용이 없거든요. 차라리 돌아가시기 전에 임종 때 하는 것들이 오히려 훨씬 낫습니다. 그때 태국 같은 경우에는 스님들 초청해가지고 경전을 조금 독송하고 그리고 인제 돌아가실 분과 살아있는 분들에게 법문을 하고 또 스님에게 공양올리고 하는 것으로써 대체를 합니다. 그 부분이 부처님 법에도 맞고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알아야 되는 부분이어서 죽음에 대해서 얘기할 때 오늘 이 시간이 두 번째 시간으로 임종 때의 법문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죽음에 이르른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에 만약에 문병을 갔다, 뭐라고 합니까? "빨리 돌아가시오" 하고 얘기합니까? 그렇게 얘기는 안 하죠! 금방 내일 죽는 줄 알면서도 “빨리 쾌차하십시오. 건강하게 빨리 일어나십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합니까? “뭐 잡숫고 싶은거 없어요? 내가 다 사줄게요.” 보통 그런 얘기하죠?

과연 이게 바른 것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부처님 때 당시 상황에 대해서 예를 들어서 얘기를 하고, 통상적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는 법문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사위성 - 사왓디에서 정육점을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직접 뒷마당에 가서 소를 잡아가지고 그걸 요렇게 정육점에다가 걸어 놔가지고 그걸 사람들에게 판단 말이라. 그런데 이 사람은 고기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밥 때 앞에 고기가 있어야 밥을 먹어. 그러니까 아무리 장사가 잘 되도 자기 먹을 거는 반드시 남겨두고 고기를 파는 거지 자기 먹을 것을 없애 가면서까지 팔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날도 자기 먹을 거만 딱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다 팔았어. 인제 팔 거는 없으니까 다시 소를 잡기 전에는 장사를 못 한단 말이라. 그래서 인제 부인한테 남아있는 고기 이거 가지고 요리를 해놓으시오. 나는 강에 가서 몸 좀 깨끗이 씻고 그리고 오겠소. 이러고 요리를 맡기고 갔다고.

 

그 사이에 누가 잘 아는 분이 한 분이 와서 고기를 팔아라고 그러는데 팔 것이 없다. 저기 걸려있는 거 저거는 뭐냐? 저거는 우리 먹을 것이다. 아이고 안된다. 오늘은 반드시 우리 마누라가 애를 낳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가지고 영양보충을 시켜줘야 된다. 사정사정 하다가 안판다 판다 해쌌다가 어쨌든 다른 사람이 고기를 가지고 가버렸어. 그러니까 부인 입장에서는 고기가 없으니까 일반 채소를 가지고 저녁을 준비를 해놨는데 이 사람이 와서 보니까 고기가 없거든. 어떻게 된 거냐. 고기 하라고 그랬는데. 내가 고기 없으면 밥 못먹는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이랬느냐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자초지종을 얘기를 합니다. 그래가지고 고기를 가지고 갔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거라. 그래가지고 뒷마당에 가서 소를 보고 어쨌든 고기를 취해야 되니까, 그렇다고 소를 갖다가 죽여버리면 그다음날 팔면 맛이 없다네.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참 사람들도 잔인해. 여러분들도 그러지. 맛있는 거 먹을라고 일부러 살아있는 놈 부글부글 끓여가지고 뭐 하고 이렇게들 하지? 참 잔인한 거라이.

 

어쨌든 고기를 베어내야 되니까 한점만 베어내면 되니까 어디를 베느냐면 소의 혀를 막 베어낸 거라. 그래가지고 이걸 가지고 부인한테 와서 이걸 가지고 끓이라 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에서 혀를 벴는데 실제로는 뭘 벴느냐 하면 자기 혀를 벤 거라. 그러니까 화가 많이 일어난 사람들은 그런 분별하는 능력이 떨어져버립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어요? 혀 베어 본 사람 있어요? 혀 떨어져 나가 본 사람? 사람들은 보통 그때가 되면 다른 생명의 고통을 이해를 합니다. 실제로 그 소의 혀를 잘라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소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그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죽기 전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니까 이 모든 죄의 원인이 저 마누라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고기를 남한테 줘버렸으니까. 남한테 뺐겼든 어쨌든. 그러니까 불같이 화가 나서 이 마누라고 자식도 눈에 안 보이는 거라. 마누라가 낳은 거니까. 지 새끼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죽일라고 그러는 거라. 그러니까 그 부인이 급히 자기 아들한테 그럽니다. 빨리 피해라. 빨리 도망쳐가지고 가지 않으면 니는 죽는다. 살기 위해서는 도망가라 그럽니다. 그래 아들이 도망쳐가지고 다른 지방에 가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남자는 죽어버리게 됩니다.

 

아들이 어느 집에 의탁해서 살게 되면서 금세공하는 걸 배웁니다. 주인이 이 아들이 하는 걸 보니까 뭘 만들어라 할 거 같으면 아주 야무지게 잘 만들거든. 아, 저 정도 하면 적어도 지 밥벌이는 하겠다 싶어가지고 딸하고 결혼을 시킵니다. 그래가지고 이 금세공하는 가업을 물려줍니다.

인도는 직업이 대를 물려가지고 물려받는 습관들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했던 거를 아들이 물려받고 그렇게 하는 습관들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위지만 어쨌든 딸하고 결혼을 했으니까 가업을 물려주게 됩니다.

그리했는데 만날 백정같은 아버지 밑에서 크다 보니까 교육을 못 받은 거라. 뭐가 바른 건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른다는 거라. 물론 직접 도살업을 하지 않았으니까 생명을 죽이지는 않는데도 그냥 살아갑니다. 그냥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다인 줄 알고 이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애들도 낳게 되는데, 애들은 인제 커서 장성할 때가 되니까 사위성 가서 지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극구 반대를 합니다. 사위성은 자기 옛날에 백정일 했던 아버지가 있었던 곳이거든. 그러니까 자기도 사위성으로 갈 거 같으면 그 백정일을 해야 되는 거라. 인도 풍습에 따라 아버지가 했던 거니까. 그러니까 그 금세공하던 일을 그만두고 백정일을 해야되니까 그게 두려워가지고 안 가는 거라. 그렇다고 아들까지 사위성에 안 보낼 수가 없단 말이라. 왜냐하면 사위성이 부유한 곳이니까 장사를 할려면 잘 사는 데로 가야 되는 거라. 아들은 사위성에 가게 된 거라. 나이가 들고 이제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결국은 이 사람마저도 사위성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됐는데 이 아들이 하루는 생각을 합니다. 인제 아버지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 아버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여러분들 만약에 살아있는 부모님이 살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부처님은 그래도 부처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은 똑같이 부모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하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를 대할 때 부처님 같이 그렇게 존경하고 할 일을 다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자식이라 할 것 같으면 곧 죽음에 이르른 부모들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맛난 거 많이 사주면 돼? 여행 많이 다니게 해주면 돼?

아들이 생각한 게 뭐냐 하면 아, 생전에 내가 부모님을 위해서 공덕을 짓도록 하고 그 공덕을 부모님께 회향하도록 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한국에서 간혹 그런 거 하죠? 생전예수재 해가지고 그러죠? 부모님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일가친척이라든지 자기의 인연 닿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써가지고 이렇게 예수재를 지내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내가 지은 공덕을 회향하고 전위시키는 그런 형식으로 하죠. 그런데 간혹 보면 생전예수재 한다면서 돌아가신 사람들도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생전예수재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하는 건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써넣기도 하거든. 그건 자기 자신한테 하는 건 아니고 자기 자신은 이미 그 공덕을 지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이미 돌아와.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써넣을 필요는 없죠. 단지 살아있는 분들 중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 또는 선한 일들을 많이 안 하고 악한 일들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그 공덕을 지은 것을 그분들에게 회향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생전예수제를 결정을 합니다. 지금 생전예수재 하는 방식하고는 틀립니다. 지금 생전예수재 하면 똑 제사같이 그렇게 지내는데 그런 거는 아니고.

이 아들은 생전예수재를 어떻게 지냈느냐면 부처님하고 부처님 제자들을 초청해가지고 생전예수재를 지냅니다. 그분들에게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또 필요한 물품들을 올리고 또는 가사를 올리고 하는 이런 형식을 취합니다. 그래가지고 그런 것들을 하고 나면 부처님이 반드시 공덕회향을 합니다.

 

아들이 먼저 얘기합니다. 부처님 내가 이렇게 공덕을 짓는 것, 이렇게 보시하는 것은 나이 드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이 공덕에 의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처님께서는 그래 그 공덕을 잘 받았다. 그래서 이 내가 받은 공양물들은 상가를 위해서 유용하게 쓰여질 것이다. 이 공덕으로 인해서 너희 부친이 너의 아버지가 사후에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게 그게 생전예수재의 의식입니다.

당연히 부처님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이 아들이 내가 지은 이 공덕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공덕을 지었습니다. 하고 부처님한테 얘기한 건데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안 하는 거라.

 

왜 아무 얘기도 안 하느냐면 정작 나이 들어서 곧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이 아버지는 무관심하거든. 저 뭐 저런 걸 해쌌노? 간혹 여러분들 중에도 아마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 뭐하러 저런 쓸데없는 저런 걸 해쌌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라. 그런 사람한테 아무리 "공덕을 회향합니다" 하더라도 마음이 닫혀 있는데 공덕이 회향이 되겠어? 안 되는 거라 그거는.

 

물론 공덕회향 안 되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 더 간과하는 거는 뭐냐 하면 부처님이 앞에 계시는데 부처님에 대한 모욕이라. 여러분들이 만약에 공덕회향을 그렇게 했는데 정작 공덕회향을 위해서 생전예수재를 했는데 공덕회향을 받아야 될 사람이 전혀 뭐 관심도 안 가진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삼보에 대한 모욕이 돼버립니다.

오히려 생전예수재를 하면서 그 사람에게 더 큰 죄를 짓게끔 만드는 형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부처님이 기분 좋게 아이고, 그래 공덕회향해서 죽은 후에 행복하시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못하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당사자 나이 드신 그 아버지에게 여러분들 혹시 나뭇잎을 봤는지 모르지만은 나무에 달려있는 잎은 아주 싱싱합니다. 계속 두어도 별로 색깔이 바뀌고 그러지는 않는데 저걸 갖다가 한 잎을 딱 떼어놓고 가만히 보십시오. 갓 지나지 않아서 굉장히 시들시들해지고 윤기도 없어질 뿐 아니라 말라비틀어집니다.

부처님이 그걸 비유를 합니다. 당신 인생은 인제 떨어진 나뭇잎과 마찬가지다. 시든 잎이 된다는 거라. 곧 머잖아가지고 저 싱싱한 것은 없어져버리고 다 빠져버리고 낙엽이 돼버린다는 거라. 아주 못 쓸 낙엽이 돼버린다는 거라.

여러분들 인생이 그렇게 된다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렇게 달려 있을 때는 생명이 붙어있을 때는 항상 싱싱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저게 탁 떨어져버렸다고 생각을 해봐. 그 싱싱한 것이 하루도 못 가는 거라. 당신 인생이 그렇다는 거라. 당신 인생이. 떨어진 나뭇잎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죽음의 사자들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거라. 저승사자가 인제 당신 곧 잡아갈라고 온데 둘러싸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있다가 저승사자가 데려가면 당신은 언제 돌아올지 끝이 없는 윤회의 여행길을 떠나야 된다는 거라. 끝없이 계속 반복해서 그 여행을 해야 되는데 당신은 그 여행하는데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뭐 하느냐는 거라. 그러면 여행 떠날 때는 적어도 걸망이라도 챙겨야 되는 거고, 그리고 여비라도 있어야 가다가 밥이라도 사 먹을 건데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여행간다고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지 않느냐? 뭐 하고 있느냐는 거라.

 

물론 곧 죽을 사람에게 "당신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예의에는 맞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한 얘기는 바로 그 얘기거든. "당신은 곧 죽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이 죽음에 이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할 거 같으면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애요? 당장 욕을 하겠지. 당장 뭐라뭐라 할거라. 왜 그러겠어요?

당장 뭐 내가 지금 오전이니까 오후에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다 할 것 같으면 그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라. 아, 그래도 인제 회복을 할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희망이라도 가지는 거라. 또 살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라.

그리고 맛있는거 사드릴께요 하면 기분이라도 좋아진다는 거라. 갖고 싶은 거 없느냐 그러면 뭘 갖고 싶다고 하는 욕심이라도 부리면서 행복해는 하는데, 죽으라 하는데 그거 좋아할 사람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얘길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거라.

죽는 줄 뻔히 알면서 죽는 사람에게 "아, 이제 곧 회복될 것이요, 건강하십시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그 사실을 속이는 경우가 되는 거라. 또 먹고 싶은 거 없느냐 갖고 싶은 거 없느냐 할 거 같으면 그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오히려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죽음에 이른 사람들에게 욕망을 일으켜가 좋을 게 뭐가 있느냐는 거라.

차라리 부처님 같이 그냥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는 것이 더 안 낫느냐는 거라. 지금 죽는 사람은 죽는 것만 해도 괴로워 죽겠는데 오히려 왜 자꾸 주변 사람들이 더 괴로움을 더해주느냐는 거라. 더해줘선 안 된다는 거라. 오히려 죽는 사람의 괴로운 걸 덜어줘야 되는 것이지 괴로움을 더 하도록 해줘서는 안 된다는 거라.

 

임종의 순간에 맞았을 때 부처님이 택한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 인제 내가 죽는구나' 하는 사실로 인해서 위기감을 느껴서 이 위기감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불교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되겠어요? 부처님이 그리해도 이 사람은 못 알아들어. 물론 내가 죽는갑다 하는 생각은 일으키지만은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걸 갖다가 지금 당장 내가 죽는 게 아니니까, 죽음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노력할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렇게 해서 어쨌든 공덕을 쌓았어. 쌓았는데 그 사람에게 회향되지는 않았겠지.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또 부처님을 불러가지고 또 똑같은 것을 합니다. 그때도 부처님이 인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죽음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까 노력해라. 노력해가지고 가장 안전한 경지를 만들어라. 자기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섬을 안 만들고 니가 어떡할 것이냐는 거라. 그래서 하루빨리 열반의 경지에 들어라. 마음에 더러운 것들도 모두 버려버리고 번뇌들을 여의어버린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그래서 성자들 깨달은 사람들의 경지에 들어가도록 노력하시오"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마음으로 만드는 것들을 의지하라는 거라.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마음을 의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마음에 의지할 것 같으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져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죽음에 대해서 더욱더 공포스러워지고 더욱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버립니다. 번뇌는 더 생겨나버리고 그렇게 되니까 불행한 경지 나쁜 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마음을 의지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렇게 죽음을 맞았을 때는 죽는 자들이 경지에 이르를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안전한 경지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을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삼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부처님이 한 번 더 얘길 합니다.

인제 수명이 다했다 하는 거라. 죽음이 마중 나와 있는 상태에서 그 죽음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노잣돈도 마련하고 진짜 여행 떠날 준비를 하라 그러면서 사물의 집착을 끊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임종의 순간에 부처님이 했던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벙법으로 부처님이 얘기했을까?

물론 경전에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부처님이 설법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이 나이 드신 아버지가 수다원과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죽음을 맞이하겠죠. 그런데 그 죽음에 이르기 전에 수다원과에 이를 때까지 부처님이 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스님들이 추정하기를 임종 때 자비명상 하는 방법 자애수행 방법에 대해서 부처님이 얘기를 했다든지 아니면 이 몸, 이 몸의 괴로움, 죽을 때 얼마나 괴로워? 그 괴로움에 대해서 관찰하도록 해서 그 집착하는 것들을 여의도록 만들어서 수다원에 이르르게 됐다 하고 그렇게 얘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건 구체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했는지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통상적으로 스님들이 테라와다 불교의 스님들이 임종 때는 반드시 찾아갑니다, 그 사람에게. 여러분들이 불교도들이 사람들이 죽고 나면 한국에서는 49재를 대부분 하듯이. 거기에서는 49재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는 반드시 스님들을 초청합니다. 한 스님을 초청하든 아니면 여러 스님을 초청하든 그거는 그 집안 형편에 따라서 하지만 반드시 초청은 합니다. 그때 가서 하는 법문들의 내용들을 보면 아, 부처님도 적어도 이 나이든 노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유추를 해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나이든 죽음에 이르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스님 말씀을 한번 잘 들어보십시오. 눈을 감고, 인터넷에는 언젠가는 올려줄게요. 일부러 자꾸 적을려고 하지마.

인제 여러분들이 곧 죽음에 이르렀다 하고 생각을 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죽음을 회상하면서 눈을 감고 스님 말씀을 한번 잘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앞으로 여러분들 주변에 나이 드신 분이 있고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 때 설혹 아직 한국에서는 스님을 초청할 형편이, 그리고 문화가 안 돼가지고 초청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대신하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눈을 감고 여러분들 앞에 부처님이 앉아있는 것같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마음을 고요하고 침착하게 하면서 마음을 집중해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집중해서 말을 듣도록 하십시오.

여러분들 앞에 존경하는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 존경하는 부처님에게 존경의 예를 나타내는 마음으로 청정한 삼보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내도록 그렇게 하면서 이 부처님 말을 대신하는 스님 말을 잘 듣도록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해하듯이 그렇게 존경하는 부처님! 참으로 큰 덕을 쌓고 지혜를 구비하신 부처님조차도 육신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당신 자신도 많은 세월 동안 당신의 육체를 의지해 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충분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내가 충분히 살아왔다고 생각을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처음에 내가 샀던 그릇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예뻤지마는 오래도록 사용하다 보니까 망가져버리고 깨지고 때로는 없어져버렸습니다. 내 육체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언젠가는 없어져버립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청년기를 맞이하고 이제는 노인이 돼서 이때까지 계속 변화해왔습니다. 그것을 인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조건지워진 상카라 그것이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조건이든지 아니면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신체적인 조건이든지 그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은 무아이며, 그 본질은 변하는 것이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모든 것들은 변하기 때문에 나도 이 늙음의 순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고 이해를 하십시오.

이것이 진리입니다.

 

내 몸을 한번 잘 보십시오.

쇠약해져서 곧 죽을 이 육신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것들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삿쩨 담마(sacce dhammā)라고 얘기했습니다.

이 육체는 진실한 것이고 이 진실한 것이 바로 진리다. 이 삿쩨 담마 진실한 담마는 상카라(saṅkhāra) 조건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늙고 병들어서 죽음의 순간을 맞아서 인제 곧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이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몸은 이제 곧 죽음에 이르지만은 마음은 평화롭게 고요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육체와 함께 마음이 갇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몸이 쇠약해져서 곧 썩을지라도 그것을 저항해서는 안 되고 마음이 육체와 함께 썩고 병들도록 또한 놔두어서도 안 됩니다. 마음을 여러분들이 이 썩어빠지고 늙고 병든 곧 죽음을 맞이할 육체에서 떼어내도록 하십시오.

그 마음에 에너지를 자꾸 주도록 하십시오. 육체는 반드시 태어난 이상 병이 들어 죽는다 하는 사실을 자꾸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이 육체로부터 마음을 떼어내는 것들입니다.

 

집에 홍수가 들어와서 집이 쓸려내려갔다고 해서 마음까지도 집과 같이 쓸어내보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다시는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불이 나서 여러분들의 집을 태워버렸다고 하더라도 마음도 같이 태워버려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오히려 더욱더 고요하고 침착하게 더욱더 노력해야만이 불타고 홍수에 휩쓸려간 집을 다시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늙고 병들고 곧 죽을 몸으로부터 마음을 자꾸 떼어내십시오.

 

당신은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눈은 많은 것들을, 많은 형태나 색깔들을 보아왔고, 귀로는 많은 것들을 들어왔습니다. 혀로는 또 많은 것들을 먹고 맛봐왔고 많은 경험들을 해왔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한 맛에 지나지 않았고 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형태를 본 것도 또는 간혹 추악한 형태를 본 것도, 귀로 매혹적인 소리를 들은 것도 귀로 귀에 거슬리는 아주 아름답지 못한 소리를 들은 것도 단지 그만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변화해온 것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지, 나이가 젊었든지 늙었든지, 아니면 인간의 몸이든지 아니면 동물의 모습이든지 그 어떤 것도 하나의 형태로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변화해왔고 바뀌어져 왔습니다. 그 소리들도 변화해왔고 아름다운 소리든 나쁜 소리든 변화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에 대해서 잘 생각해서 이 몸도 무상한 것이고 마음도 무상한 것인 것을 이해해서 몸도 마음도 자아라든지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몸도 마음도 일시적인 실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이 선원과 마찬가집니다. 이 선원이 여러분 소유가 아니고 스님 소유가 아닙니다. 명목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 계약기간이 끝나면 놔두고 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의 몸이 그렇듯이 여러분들의 재산도 여러분들의 소유물도 또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가족도 명목상 이름만 있는 여러분들 것일 뿐입니다. 사실은 여러분들 것이 아닙니다. 다 놓아두고 떠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법칙입니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본성이듯이 물이 흘러가는 걸 보고 어리석게 저기 물이 흐르는 위쪽에 가서 흘러간 물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서 그 강물이 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괴로워한다 할 거 같으면 누가 봐도 어리석은 사람이라 그럽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것이든 변화하고 어떤 것이든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는 것입니다. 지금 죽음에 이른 순간에도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해서 기진맥진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계속하십시오.

 

마음속에서 아,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환희심을 자꾸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그런 환희심이 일어나도록 해야 만이 이 기진맥진해가는 곧 죽음에 이르는 육체로부터 마음을 분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호흡에다가 집중하도록 하십시오.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 호흡에다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보십시오. 피로감이 느껴지고 집중력이 흐려지고 하더라도 자꾸 호흡에다가 집중할려고 해보십시오. 모든 생각을 중단하고 마음을 집중해서 호흡을 볼려고 호흡에다가 관심을 기울여 보십시오.

 

외부적인 것들 친척들에 대한 생각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손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마음은 호흡에다가 집중하도록 해보십시오. 호흡만이, 내가 지금 호흡을 인식하는 것만이 오로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고 생각하고 호흡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보십시오. 그러다 보면 모든 생각들도 떠나가버리고, 고통이 생겨도 그것도 소멸해가버리고, 호흡만 자꾸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친척이 찾아왔을 때 그 친척을 배웅하기 위해서 문밖까지 나갑니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집으로 돌아와집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똑같이 응시해야 됩니다.

호흡이 엉성하면 엉성한 것을 알아차리고 가늘면 가늘다고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호흡이 자꾸자꾸 미세해지면 미세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뒤쫓아가다가 보면 마음이 더욱더 활기가 있어집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호흡에 마음을 붙잡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여러분들은 부처님을 만난다 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부처님을 생각해서 부처님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완전하게 살아있는 부처님을 보듯이 그런 마음을 일으키듯이 호흡을 집중하다 보면 호흡으로 인해서 곧 이런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상태에 이르르게 되는 겁니다.

 

이제는 이렇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들은 모두 다 내려놓도록 하십시오.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도 소리가 들려서도 그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 어떤 것들도 붙잡을려고 하지 말고 과거 일이든지 앞으로 내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도 모두 놓아버리고 오로지 지금 혼자서 해야 될 것, 호흡을 알아차려서 태어나고 죽음으로부터 윤회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들, 그 길을 가야 되는 것이 지금 당신이 해야 될 것입니다. 정말로 노력을 하도록 하십시오.

 

가족들을 생각한다 해서 그 가족들이 언제까지 젊고 건강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족도 언젠가는 당신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영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해야 될 것은 그런 근심 걱정 놓아버리고 당신 자신의 일들을 하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일을 하도록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일을 하게끔 내버려두고 당신은 당신의 의무와 책임만 다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당신이 맡아야 될 것은 없습니다.

 

손을 놓고 당신의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당신에게 지금 부여된 임무 당신의 마음을 집중해서 마음을 지혜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이끌도록 해야 됩니다. 소리들리고 향기가 맡아지고 보이는 것들이 있고 하는 것들에 집중하면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다 맡겨두고 지금 내가 해야 될 것 호흡에만 집중하도록 하십시오.

 

죽음의 공포, 고통스러운 느낌, 불안해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다 놓아버리십시오.

나에게는 상관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고 담마, 이 호흡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계속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담마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을 하면 안 됩니다. 죽음이나 고통스러운 것들로 인해서 무서워하는 기분이 생기는 것들은 세속적인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두어버려서 그것이 지배하게끔 하면 마음은 흐려져서 당신의 마음은 담마를 볼 수 없게 됩니다.

 

마음에 무엇이 생겨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상한 것이며, 근심스러운 것이며, 무아이다 라고.

내가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괴롭습니다.

곧바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즉시 죽겠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근심일 뿐입니다.

 

자애의 법칙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육체의 본연의 법칙을 거스를려고 하지 말고, 육체 본연의 자세를 바꿀려고도 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에 하나씩 하나씩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나무와 벽돌로 홍수에 휩쓸려가고 불에 타버린 집을 짓는 거와 같은 겁니다.

내 마음의 집을 하나씩 하나씩 짓도록 해야 됩니다. 세속적인 집들을 지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근심 걱정이라든지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으면 세속적인 집을 짓게 됩니다. 그 세속적인 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담마의 집을 짓도록 해야 됩니다.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와야 담미노.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떼상 우빠사모 수코.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모든 여러 가지 상카라-조건지워진 것은 무상한 것이다.

생겨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을 때 이런 상카라-조건지워진 것이 가라앉아버렸을 때만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상카라는 불안정한 것이고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든지 태어났으면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상카라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호흡을 보십시오.

들이쉬고 나면 내쉬는 것이 호흡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입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교대로 행하게 됩니다.

반드시 변화하게 되는 겁니다.

 

상카라는 이런 변화에 의존해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몸도 그렇게 변화해가듯이 숨도 들이마셨으면 내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마시지 않고 계속 내쉴 수만은 없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었으면 숨을 내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태어났으면 나이를 먹고 병이 들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보통의 일들입니다.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내가 조절할 수 없듯이 내 몸의 죽음도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의 가족도 도울 수가 없고 당신이 소유한 소유물들도 당신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스스로 노력해서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내 스스로 이것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내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아닛짜 둑카 아낫따(aniccā dukkha anattā)

모든 것들은 무상한 것이고 그것들은 근심스럽고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아낫따입니다.

 

아닛짜 와따 상카라(Aniccā vata saṅkhārā).

모든 상카라는 무상한 것이다.

 

이제는 그 무상한 것들을 버려버리고 내 가족들도 무상한 것이고 내 소유물도 무상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놓아버리십시오.

놓아버리고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그 상카라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제 마지막 인생의 순간에서 선택할 수 있고 취하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편안하게 내려놓도록 하십시오.

 

환자를 돌보는 사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크나큰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돌보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하고 친절함으로 가득채워져야지, 죽어가고 병들어 있는 모습이 혐오스럽다고 하는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지금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때까지 의지해왔던 부모님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돌아가시는 상황을 도와주어야 됩니다. 괴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친절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산란하거나 동요시켜도 또한 안 됩니다.

돌아가실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마음이 친절함과 자애로움과 덕성스러움으로 가득채우도록 하셔야만 됩니다. 전심전력을 다해서 이렇게 가족들은 돌아가시는 분을 도와야 됩니다. 여러분들을 만들고 키워준 생명을 부여해준 분이 여러분 앞에서 돌아가시는 것뿐입니다.

돌보는 사람들은 이 덕을 이제 돌아가시는 분에게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부처님은 '까딴뉴따(kataññutā)와 까따웨디(katavedi)'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빌린 것을 감사할 줄 아는 덕, 그것을 돌려주려고 하는 덕' 이 두 가지 공덕을 얘기했습니다.

돌아가시는 분이 우리들에게 해왔던 공덕을 알아서 그 공덕을 이제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전심전력해서 부모님을 도와주는 것, 부모님에게 받은 공덕을 알아서 그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을 '까딴뉴따 까따웨디'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화목한 가정 안정된 가족이 이루어지게 돼있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분은 그 공덕을 기꺼이 받도록 해야 됩니다.

영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병이 들고 죽음을 맞았을 때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담마를 받도록 하십시오.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을 설하고 있는 스님이 당신에게 건네줄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이 담마만을 전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담마는 바로 본질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 호흡을 관찰하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만이 바르게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고 보다 나은 삶을, 다음생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호흡을 관찰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은 무상한 것입니다.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호흡도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면 사라지는 것들도 사라진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호흡이 일어난 것들이 항상할 수가 없듯이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렸으면 사라지는 마음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서 아, 이렇게 호흡 조건지워진 상카라는 무상한 것이구나. 변하는 것이구나. 그에 따라서 내 마음도 변하는 것이구나 하고 알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끊임없이 호흡을 알아차리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이 상카라는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조건지워지는 것이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고요한 열반에 들게 됩니다.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와야 담미노.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떼상 우빠사모 수코.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모든 조건지워진 상카라는 무상한 것이다. 생겨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을 때 이런 상카라 조건지워진 것이 가라앉아버렸을 때만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