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2016090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22. 09:00

https://youtu.be/Ttv29YzBUFA

*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20160909. 대구)

 

이번 주는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옛날에 교단 홈페이지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글을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20페이지 너머 됐던 거 같은데, 중간에 하다가 스님이 시간이 없었는지 중간에 그걸 그쳐버린 적이 있어요. 그거는 우리 수행교재 할 때 마음의 부분들을 정리해갖고 올렸고, 오늘은 그거하고 좀 비슷하긴 한데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하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겠습니다.

 

오래 전 일인데 누가 아들이 자살을 했다 해가지고 급히 스님을 부른 적이 있어요. 가보니까 아이가 목을 매어서 자살을 했더라고. 그전에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여자 친구가 교통사고로 한 달 전에 죽음을 맞았어. 그러니까 이 남자아이는 계속 마음에 고통을 받고 있다가 같이 따라간다고 이렇게 목을 매어서 자살했어요. 부모로서는 애들이 취직도 했고 해서 한달 뒤에 결혼하기로 해놨던 건데 날벼락을 맞은 샘이긴 하지.

그래서 그때 삼일간 스님이 병실을 지켜주면서 들었던 생각이 뭐냐면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 무관심하고 있다' 하는 걸 많이 느꼈어요. 실제로 죽음이 나한테 닥치면 특히 급작스럽게 그렇게 닥치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는 거라.

 

결국은 그분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거의 한 2년 지나고 나서 다시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고 하더라고. 능력이 있으니까 회사에 들어갔을 거고, 요즘 같으면 2년간 그렇게 쉬면 들어갈 데도 없지.

그걸 보면서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저렇게 시간이 걸리는데, 죽음은 찰나인데, 받아들이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오히려 2년간 그렇게 허송세월 보내면서 괴로워하고 술먹고 그렇게 자신을 해치는 짓은 안 할 건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살아있을 때 여러분도 죽음에 대한 걸 항상 생각을 좀 하고 있어야 됩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거 하나 얘기해드릴까요?

어느 날 남자분이 한 분이 와서 부인이 이혼하자고 그러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왜 이혼하자고 하는 거라? 무조건 자기가 싫대. 나는 특별히 잘못하는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무조건 싫다는 거라. 그래서 부인을 한번 데려오시오 하니까 데리고 왔더라고. 부인은 불교신자는 아니고 다른 종교를 믿는 분인데, 남편을 다른 데로 좀 가 있어라 하고 보내고, 남편이 왜 그렇게 싫으냐고 하니까 뭘 잘해줘도 싫고 못 해주면 더 싫고 이렇다는 거라. 모든 게 그냥 싫다는 거라.

그래서 뭔가 원인이 있을 거 아니냐, 왜 그러냐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라고 하니까 옛날부터 어려운 일 닥칠 거 같으면 자기편 안 들어주고 다른 사람 편을 들었다는 거라.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그게 가슴에 다 남아있었던 거라. 그래서 나이 들고 나니까 모든 게 싫어지는 상태가 된 거라. 이것도 젊었을 때는 한창 좋을 때니까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묻어두었는데, 실제로는 본인은 그걸 가슴에 그냥 묻어두고 있었지 그걸 버려버리지는 못한 상황이라. ‘내 편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라. 그러니까 내 편이 아니다 하니까 잘 해줘도 싫고 못 해줘도 싫은 거라. 그래서 그 부인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부인이 지금 당장 눈앞에 죽음이 닥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이혼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오히려 내가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되는 것이 먼저지, 자식이 있으면 자식들한테 뭔 유언을 하든지, 아니면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든지 뭐 딴 일을 하기 바쁘지, 지금 이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 부인이 그걸 이해를 못하더라고. 이해를 못한다는 것은 아직도 본인은 죽음에 대해서는 피하고 싶은 거라. 본인에게 닥치는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

 

그런데 스님은 숱하게 사람들 죽음을 봐왔습니다. 태국에서 가장 친한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이 하는 일은 그 선원의 물 관리를 하는 역할을 맡아가지고 했었어요. 그러니까 물 막혔으면 물 뚫어주고 그다음에 정수장 청소도 다하고 그렇게 했는데 실제로 그 스님은 수행한다기 보다는 그걸 수행삼아 했던 거라.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람들이 비상벨이 울렸어요. 정수장으로 빨리 오라고. 가보니까 그 스님이 정수장에서 물을 정수하다가 발을 헛디뎌가지고 빠져버린 거라. 빠져 죽어버렸어. 밤에 그래 놓으니까 누구도 몰랐던 거라. 새벽에 사람들이 그걸 발견하고 그렇게 된 거라.

보니까 밤에 빠졌는데 그 새벽인데도 몸은 몇시간 안 지났는데 퉁퉁 부어서 몸은 짓물러지고 있는 거라. 그래서 사람들은 가까이 가는 것도 싫어하고 그러는 거라. 그리하는데 누구 하나 그걸 돌아가신 분은 도반인데 도반을 꺼낼 생각들을 안 하는 거라. 그래서 내가 얼른 들어가가지고 그걸 꺼냈어요.

 

똑같이 스리랑카에 쓰나미가 닥쳤을 때도 그랬어요. 쓰나미가 닥쳤을 때 그때 마침 스님이 스리랑카에 있었어요. 막 닥쳐가지고 사람들이 죽어가지고 바다에 둥둥 떠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꺼낼 생각을 못하는 거라. 지금 자기 수습하기 바쁘니까. 그런데 대부분 그 주변에 있는 스님들이 다 거기 가가지고, 또 불교에서 방송을 했어요. 스님들 빨리 바닷가로 가서 수습하라고. 그래서 나도 달려갔지. 달려가서 둥둥 떠있는 그걸 직접 스님들이 거의 대부분 그 시체들을 다 끄집어냈어요. 그것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보고 왔으니까.

 

우리는 처음 출가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나서도 마음에는 그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죽음은 언제든지 앗차 하는 순간에 나한테 다가오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그래서 누가 죽음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랬을 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하게끔 되더라고. 그게 길이 들고나니까 한결 좀 수월해지는 거라. 그래서 급작스럽게 내가 나에게 만약에 죽음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 대수롭지 않게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고.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해야 할 일들을 내팽개치고 하는 일들은 없어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출가했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그런 면에서는 특권이 되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과연 그럴까? 주변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다, 아니면 죽음을 맞았다, 그러면 어찌 보면 그걸 피할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피할려고 하니까 그냥 그 죽음 앞에서 우는 거라.

동남아시아는 참 좋은 게 뭐냐면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삼일 장례를 치르는 것을 스님이 매일 주최하는데 가보면 우는 사람이 없어요. 관을 뚜껑을 딱 열어놔놓고 그 썩어가고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관 앞에서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치즈~" 하면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불교적인 영향을 좀 많이 받아서 그렇습니다. 항상 죽음은 내 가까이 있다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거라.

 

두 가지를 항상 가르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지금 살아있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거라.

그렇게 생각할 거 같으면 만약에 예를 들어서 지금 교수님이 부산대 교수님이면 학과장 경선에서 만약에 떨어졌다,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서 애닯아 할 이유는 없어져버리는 거라.

과도하게 소망을 가져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가지고 크게 뭐 하지를 않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명예라든지 아니면 건강이라든지 아니면 재산이라든지 아니면 존경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바라지도 않을 뿐아니라, 그게 나에게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냥 덤덤하게 맞게 된다는 거라.

 

언젠가는 죽게 되면은 가져가는 것은, 그것은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죽을 건데 그거 뭐 하러 소용있어? 그래서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뭐를 가져가져요? 이 몸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은 연속하는 겁니다. 찰나 간에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이 4가지가 다음 순간에 뭔가 자리를 잡을 곳을 찾게 되는 거라. 그래서 윤회를 하게 되는 거라. 다른 몸으로 받게 되는 거고. 물질적인 것을.

그 마음을 다음에 가져가게 되는데, 가져갈 마음을 조금 더 바르고 좀 더 큰마음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 거고. 그래서 맨 처음 떠올려라고 하는 것이 「언젠간 반드시 죽는다.」 하는 생각을 항상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다음 두 번째 생각해야 되는 것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이 조금만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니가 옳니, 내가 옳니” 다툴 일이 있겠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하고 원수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이 죽는데 그 사람에 대놔놓고 내가 뭐라고 할 거라? 그럴 이유가 전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것뿐 아니라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라.

그래서 죽음에 다가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다고 합니다. 자기 일들을 회상하면서 잘못한 것들을 반성하고, 그전까지는 참 원수같이 지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잘못했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거고,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게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런데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저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죽기 전에 뭔가 할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게으르게 뭔가를 하고 악한 마음 나쁜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들을 차단시켜주게 됩니다. 나쁘게 해봐야 뭐할 거라? 지금 죽어가는 사람한테. 그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렇게 할 거라? 그 사람이 내 돈 빌려갖다 해서 내 돈 내놔라 한다고 해가지고 지금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거기다가 대놓고 악다구니를 칠 거라, 어쩔 거라. 그럴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것을 반드시 떠올려라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하는 거와,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적어도 죽음이 닥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자꾸 피할려고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부처님 가르침 따라 진리를 깨달을려고 할 것 같으면 고(苦)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고로부터 벗어나야 되는데 내가 지금 괴롭다고 해서 그걸 피할려고 할 것 같으면 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육체적인 괴로움이든 정신적인 괴로움이든 그것을 이해하고 그걸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만이 그 고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그걸 자꾸 피할려고 한다는 거라. 남 탓을 한다든지. 죽음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것은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되는 것이지.

 

하나 물어볼게요.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 몇 살 때 죽을지?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 삼개월 전에 “나는 삼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예언했습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내가 몇 살 때 죽는지 아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상태에 이르렀어요?

 

또 하나, 여러분이 병으로 죽을지 아니면 급작스럽게 무슨 사고로 죽을지 그걸 아는 사람? 또 병으로 죽는다면 어떤 병으로 죽을지 아는 사람? 급작스러운 사고면 어떤 사고? 차 사고? 아니면 배 사고? 아니면 집이 무너져서?

그런데 부처님은 또는 아라한들은 내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또는 내가 어떤 병으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병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래서 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여러분이 죽고 나서는 여러분 몸은 어떻게 될 거 같애요?

화장할 거 같애요? 아니면 매장할 거 같애요? 아니면 어떻게 죽는지 모를 것 같으면 까마귀 밥이 될 거 같애요? 그것도 모르죠?

 

또 죽고 나서 여러분이 어디 태어날 거 같애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거라? 아니면 천상으로 태어날 거라?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

 

아는 것 아무것도 없으면서, 죽음에 대해서 자꾸 피할려고만 한다는 거라. 그게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건데. 죽음은 반드시 또 일어나는 것들이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꾸 어떤 것도 모르면서 죽음에 대해선 자꾸 피할려고만 한다는 거라.

그래서 제목이 「삶은, 생명이라고 하는 살아가는 것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죽음은 확실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찾아오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게송을 보면

 

“지위땅 아니야땅, 마라낭 니야땅(jīvitaṁ aniyataṁ, maraṇaṁ niyataṁ)”

「삶과 죽음에 대한 게송」입니다.

 

생명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나의 생명은 불안정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정적하다.

나에게 죽음은 필연적이고,

나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난다.

참으로 생명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하다.

 

초대받지 않고 여기에 왔다가,

허락받지 않고 여기를 떠난다.

이와 같이 왔다가, 그와 같이 떠나는데,

거기에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나에게는 자식이 있다, 나에게는 재산이 있다

이렇게 어리석게 결박당한다.

실로 나 자신이 나의 것이 아닌데,

아들이 어디 있고, 재산이 어디 있는가!

 

이게 삶과 죽음에 대한 게송입니다.

 

통상적으로 예비수행법 4가지 중에 마라나눗사띠라는 것이 항상 들어있습니다.

어느 수행처에 가더라도 예비수행법을 했을 때 이것은 항상 들어가 있습니다. 붓다눗사띠, 아수바와나, 멧따바와나 그다음에 마라나눗사띠. 그런데 이 4가지 중에서 최고 사람들이 안 하는 게 이 마라나눗사띠라.

멧따바와나는 잘합니다. 행복해지니까! 괴로움이 없기를 바라고 행복해지는 거 하니까 그거는 잘 합니다. 또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하는 거, 부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라? 그거 하는 건 참 쉬워. 거기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하는 것이 아, 이 몸은 참 깨끗하지 못하고 부정한 것이다 하는 거 계속 떠올립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해.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안 할려고 하는 게 이 마라나눗사띠, 죽음에 대한 것!

죽음이 항상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을 안 할려고 합니다. 예비수행도 그렇게 안 할려고 하니까, 당연히 일상생활에서는 그걸 자꾸 피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어떤 4가지 예비수행보다도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그 4가지 중에서 맨 첫 번째가 멧따바와나부터 먼저 시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성냄을 가지고 화를 내고 하는 것들은 출가한 스님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멧따바와나를 지속적으로 시킵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멧따바와나를 시키고 나서,

그다음에 반드시 시켜주는 것이 이 마라나눗사띠, 죽음에 대한 훈련을 자꾸 시켜줍니다. 죽은 모습들을 자꾸 보여주고, 또 죽은 이들이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계속 수행들을 하게끔 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시켜줍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죽음에 대해서 공포스럽기 때문에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는 겁니다.

 

2페이지에 보면, 「공포는 어리석은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지, 현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수행을 할 때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망상’‘망상’ 하면서 망상을 제거해야 됩니다. 공포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이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실재하는 것 같으면 그 공포를 제거할 수 있지만 공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마음속에서 자기가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어리석은 일들이라는 거라. 그 공포를 가지는 것은.

 

공포를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스리랑카에 있을 때 스님이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에는 스님이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운전수가 항상 있습니다. 그날은 운전수 옆에 앉아가지고 운전수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누가 자전거를 타고 차가 지나는 길로 확 들어오는 거라. 요쪽에는 차가 한대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운전사가 미리 그걸 못 봤어. 나는 그걸 본 거라. 저쪽에서 자전거가 탁 뛰어오는 거를. 그런데 급작스럽게 탁 들어왔기 때문에 그걸 대체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바로 그냥 “스톱!” 하고 얘기했는데 운전수는 스톱 하기 전에 이미 사람이 와서 탁 부딪친 거라. 그러니까 얼마나 놀랬겠어? 그런데 이 운전수가 급하니까 그냥 핸들을 확 꺽드라고. 사람은 다행히 다치지 않았는데, 그러고 나선 한동안 멍한 상태였어. 운전수가 그 운전석에 앉아가지고.

급작스럽게 뭔가가 탁 나타났을 때 사람이 나타나는 게 보일 거 같으면 반드시 치인다는 생각 때문에 실제로 치기 전부터 이미 공포스러움이 탁 다가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늦게라도 브레이크를 밟을 거 같으면 적어도 세게 밟지는 않게 되는데, 또 공포스러움이 없을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대처할 능력이 생기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런데 스님은 그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차를 부딪치고 사람이 옆으로 해서 붕 떠갖고 가가지고 차가 지나가고 나서 저쪽으로 뚝 떨어지는 것까지, 나는 그대로 비디오로 보듯이 그게 착착착착 진행되고 그게 보인다고. 어떻게 떨어지는 것까지를 다 본 거라. 그래서 급히 차에서 내려가지고 그 사람을 안아 일으켰거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 같으면 또 뒤에 오는 사람 차에 또 받쳐버리게 되는 거라.

공포를 가지게 될 거 같으면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게 돼버립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와 같습니다. 실제 자살한 것은 아들인데, 두려움을 가지고 공포를 느끼고 실의에 빠진 것은 아버지라는 거라. 그러니까 2년 동안 실의에 빠져가지고 그냥 그 상태에 머물르게 되는 거라. 오히려 아들을 위해서 할 일이 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두배로 열심히 살면 될 거 아니라? 그게 해야 할 일인데 오히려 그 일을 방치해버리는 거라. 그 스리랑카의 기사와 꼭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거라. 여러분은 그런 공포가 다른 어떤 거보다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큽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이 닥쳤을 때 공포를 느끼지 않고 두려움 없이 지낼 수가 있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건 어리석은 일이라.

 

그래서 공포를 넘을려고 할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마음의 집합일 뿐입니다. 육체적인 이 몸이라고 하는 것과 정신적인 수·상·행·식 이라고 하는 것들이 모여서 나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나라고 하는 생각이 없을 거 같으면 공포를 일으킬 재간이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매번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럴 것 같으면 알고 있을 거 같으면 분명하게 죽음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공포가 일어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공포가 일어나는 건 왜 그러는 거라? 아직까지도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뭔가 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나!

 

조금 전에 그런 얘기를 하던데, 서울에서는 스님 법문 끝나고 하면 “사두!” 하는데, 부산에서는 안 하던데, 우리도 사두를 해야 됩니까?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거라? 하면 어떻고 안 하면 어때서? 그건 스님한테 물어볼 이유가 전혀 없는 거라. 그건 내 관할 밖의 일이라. 내가 할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은 나는 법문하고 수행지도 해주고 하면 되는 거라. 저 사람들이 사두를 하든 안 하든 그게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서?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 법문 듣고 나서 마음속에서 ‘아, 고맙다’ 하는 마음이 들면 그게 사두인 것이지 그걸 꼭 형식적으로 사두를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왜 자꾸 겉에만 가지고 이렇게들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뭔가 그렇게 틀이 만들어져 있어야 되는 거라?

여러분도 여러분이라는 하는 틀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 건데, 그것도 실체가 없는 것인데 뭐하러 그렇게 자꾸 형식적인 것에 자꾸 매이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공포에 대한 것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리고 병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도 「나」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병이든 죽음이든 그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병과 죽음」 돼있습니다. 그다음 뒤에 「영향력은 남는다」

그리하더라도 병들어 죽든 아니면 죽음을 맞든 그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건 오산이라는 거라.

영향력은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식으로 기억할지 나쁜 식으로 기억할지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게끔 돼있는 거고, 또 여러분 자신도 병으로 죽든 아니면 다른 것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든 죽고 나서 그게 영향력으로 인해서 다음생이 결정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래서 살아있을 동안에 마음을 더욱 더 증장시키고 빨리 해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영향력이 강해서 그것을 부서버릴 상태가 될 것 같으면 다음생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 영향력이 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 같으면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는 거고, 영향력이 적을 거 같으면 인간이 아니라 축생으로도 태어나게 되는 거고.

여러분이 지금 하는 행위들은 그대로 여러분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됩니다. 그것은 다음생이 아니라도 당장 다음 순간에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슬퍼하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들이 부처님의 제자다.”

또 “그런 자만이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라나눗사띵 아눗붓도 사마노, 사따낭 압빠마도 호띠." 그럽니다.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뇌이고 하는 자만이 사마노, 수행자와 같다. 부처님의 제자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는 그리고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수행자라고 할 것 같으면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 제자가, 수행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거라. 그런 자만이 적어도 사따낭, 사띠를 하는 자,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압빠마도, 방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할려고 하는 것들, 죽음을 생각해야만이 가능해지는 거라.

 

죽음의 순간에 영향을 미치는 두 번째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일으키는 임종의식,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어떤 게 영향을 미칠 줄 알아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는 적어도 알아차림을 지닌 채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적어도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을 거 같으면 마지막 순간에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불가능해집니다.

또 죽음으로부터 피할려고 할 것 같으면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유지할 것 같으면 죽음으로부터 피하게 됩니다. 살아갈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 호흡하면 됩니다. 끊임없이 호흡하면 됩니다. 그러면 안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으로부터 뛰어넘어서 해탈에 이를려고 할 거 같으면 끊임없이 알아차리면 됩니다. 끊임없이 호흡하는 것을 알아차리든 뭘 행동하는 것을 알아차리든 사띠가 끊어지지 않을 거 같으면 적어도 지금 현재 해탈의 상태에 이르르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와 같이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림은 항상 유지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적어도 사띠를 놓치지 않을려고 하게 됩니다. 설혹 내가 지금 마지막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크게 잘한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사띠를 놓치지 않을 거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 다음생에서 인간 이상으로 태어나서 다음에 해탈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띠를 놓쳐버릴 것 같으면 그럴 가능성은 훨씬 떨어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죽음은 오게 돼있다는 거라.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돼 있고, 태어났으면 누구든지 죽음을 맞게 돼 있는 것이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러니 여러분들은 항상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온다」 하는 걸 적어놨습니다.

그것을 부정할려고 할 것 같으면 슬픔이 오는데,

「슬픔의 원인」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으로써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집착이 있을 것 같으면 슬픔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대상, 아니면 그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자기의 마음,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착하고 있을 거 같으면 슬픔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죽음을 부정할려고 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죽음을 뛰어넘게 됩니다. 고(苦)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때, 고에 대해서 이해하게 될 때 고로부터 뛰어넘는 거라. 그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오온」일 뿐이다 하는 겁니다.

오온이 분해될 것 같으면 죽음을 맞는 것이고, 오온이 지금 뭉쳐져 있을 것 같으면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분해되지 않는 게 어디 있어요? 여러분 몸도 언젠가는 분해되게 돼있고, 이 컵도 언젠가는 분해되게 돼있습니다. 다이아몬드라고 하는 것도 언젠가는 분해되게 돼있습니다.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운동작용을 합니다. 물레큘이라고 하는 운동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겁니다.

실제 아주 미세한 현미경으로 보고 다이아몬드를 볼 거 같으면 다이아몬드는 단단해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거 같지만 끊임없이 그 물레큘이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생성운동을 통해서 그걸 딱 잡아주고 있다는 거라. 그것이 다른 거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좀 더 강한 돌인 거고, 그게 조금 더 약한 거는 약한 돌이 되는 거고 잘 부서지는 것이고.

 

그런데 그게 여러분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잘 부서지는 이 몸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이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뭔가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이 몸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밥을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 마음을 곱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 뭔가 영양분을 주지 않으면 이 몸도 유지가 안 되고, 뭔가 영양분을 주지 않으면 마음도 유지가 안 되게끔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분해되버릴 것 같으면 그것이 죽음을 맞는 것이고, 그것이 형성돼있을 때에는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뭐라 그래요? 생의 시작이다.

그래서 태어난 것은 죽음의 시작점이라.

그런데 왜 태어난 사람에게 다들 그렇게 좋아하고 기뻐해? 죽음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죽을 때 기뻐하고, 태어났을 때 슬프고 그래야 되는 거라. 아라한들은 죽음이 오는 것들을 그것들을 내가 일부러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오는 것들은 행복해한다는 거라. 기쁜 일이라는 거라. 왜? 다시 또 태어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은 실체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뭉쳐져 있는 것뿐이고 그 흐름일 뿐이라는 거라. 그걸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분해됐을 때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윤회」라고 부르는 겁니다.

분해되더라도 이 몸은 분해돼서 땅으로 가고 하지만, 마음은 그건 분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다음으로 이동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죽음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마지막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이 될 때" 그때를 마지막이라고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뒤에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초에 비유해가지고 양초 심지가 다 타버리는 것, 그것은 수명이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초의 심지는 아직 남아있는데 파라핀이라고 하는 납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졌다, 다 사라져버렸다, 그것만 다 타버렸다, 심지가 남아있는데 아직 그게 다 없어져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건 업이 다해버린 상태, 그러지만 아직은 존재하고 있는 상태라.

그다음에 파라핀과 그 심지라고 하는 것까지 다 사라져버린 상태.

그다음에 바람이나 이런 것으로 인해서 불이 꺼져버리는 상태.

이 4가지 중에 하나가 원인이 되서 죽음이 온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음이 오는 것은 그와 같기 때문에 여러분이 초가 완전히 파라핀이든 심지든 그것이 다 타고 없어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또는 바람이 불어서 아니면은 아니면 밖에 파라핀만 다 녹아버려서? 그것으로 인해서 슬퍼할 일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사실을 마주보라」 하는 거라. 사실을 마주보고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죽음이 오기 전에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반드시 있다는 거라.

일반적으로는 정리해야 될 건 다 정리하고 편한 마음을 가져야 되겠지만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그거보다는 더 큽니다.

마음을 좀 더 선한 마음을 자꾸 내어서 마음을 증장시켜 나가야 되는 거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가지고 빨리 해탈에 이르도록 해야 되는 거고, 그것이 죽음이 오기 전에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죽음은 다른 삶을 가져오게끔 되고 그 삶은 또 죽음을 가져오게끔 되고, 그래서 그런 윤회는 끊임없기 때문에 괴롭다는 거라.

 

그 윤회의 원인은 바로 「무명과 갈애」 이다 하는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를 끊어버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무상한 것,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 형성되어진 것은 무상하다 하는 사실,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을 자기 자신이 확인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서, 호흡이 변하고 있구나, 무상하구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무상하고 변하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러한 몸과 마음에 대한 것에 집착이 없어지게 될 때, 그것이 계속 연속될 거 같으면 해탈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거라.

 

그래서 「죽음을 관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가 살려고 하는 것들 그런 것에서 일어나는 공포를 넘는 것, 공포를 넘는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그래서 끊임없이 관찰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인생에 대한 견해나 태도가 바뀐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더 노력하고 더욱더 선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세 번째의 이유는 올바르고 온화한 방법으로 죽음에 접근하여, 그것과 마주보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았을 때 적어도 사띠하면서 죽도록 하라는 거라. 또 다른 외부적인 대상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이 죽음을 맞았을 때 그것을 담담하게 맞아서 해야 할 일들을 하라는 거라.

그것들입니다. 그것이 죽음을 끊임없이 관찰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음뿐 아니라 늙음, 병들음, 그다음에 나의 소유물과 친척들 그다음에 업에 대한 것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자꾸 관찰하라고 합니다. 대신 이 다섯 가지는 그래서 빳짜웩카나(Paccavekkhaṇā) 라고 얘기합니다.

 

항상 관찰해야 될 다섯 가지

나는 계속하여 늙음에 쫓기고 있다. 이 늙음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하여 병듦에 쫓기고 있다. 이 병듦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하여 죽음에 쫓기고 있다. 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소유물과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가야만 한다.

나는 업에 지배되고 있다. (행위)의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자꾸 관찰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죽음은 생의 일부」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해서 눈을 뜨고 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눈을 뜨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을 때도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래서 살아갈 때도 인생을 쓸데없이 살지 않도록 해야 되는 겁니다.

 

마지막 구절은 거기에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남긴 불교학자의 글입니다.

「죽음을 맞이해서 나는 인제 죽기 때문에 나는 이 육체를 지니고 있으면서 지니고 있었던 병, 병을 많이 앓고 있었는데, 병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되었구나. 그래서 죽음은 나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율을 잘 지키고 그걸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 세상에 나쁜 세상에 떨어지지 않게 되고, 그래서 나는 이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인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적어도 계를 잘 지키고 있을 때는 아, 그것으로 인해서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담담하게 맞아들이게 되는 거고, 죽은 후에는 나쁜데 떨어지지 않고 천상계나 인간계에 태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다시 노력할 수가 있다는 거라.

또는 수행해서 내가 나쁜 세상에 떨어지지 않는 수다원에 이를 거 같으면 ‘아, 나는 나쁜 세상에 떨어지지 않는구나’ 그럴 것 같으면 당연히 다음에는 내가 몇 번만 더 노력할 거 같으면 해탈에 이르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가르치신 계·정·혜라고 하는 것들을 자꾸 실천해가지고 그것들이 자기 것이 되었을 때 죽음을 담담하게 맞아들이게 됩니다.

또는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 병듦이라고 하는 것, 늙음이라고 하는 것, 업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나의 소유물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거라.

 

죽음은 여러분들이 그것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지, 피해야 되고 또 두려워해서 멀리해야 될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서 항상 관찰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왜? 삶은 불확실한 것이고 죽음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다시 한번 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다시 여러분들만 시작!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것을 잊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 부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