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눈앞의 즐거움이라는 함정 (2016081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15. 09:00

https://youtu.be/vxBGYXsG0qI

* 눈앞의 즐거움이라는 함정 (20160819. 대구)

 

오늘 오전은 「눈앞의 즐거움이라는 함정」 이라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제목 그대로 눈앞에 즐거운 거 하다가 함정에 빠진 거 많이 있죠? (예)

맛있는 거 많이 먹다가 배탈 날 수도 있고, 그래서 그렇게 간단한 거 같으면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

 

기본적인 것은 그렇습니다. 눈앞에 있는 이익이나 즐거움만을 쫓다 보면 그게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일들로 연결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눈앞에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금방 알 수 있는 거죠? 눈앞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그냥 시원하게 속에 있는 말 해야되겠다 싶어서 확 하고 나면 당장은 기분 좋은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라고 할 거 같으면 당연히 반대작용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눈앞에 있는 즐거움들에 빠져서 그 함정에 빠져서 돌아올 걸 생각하지 못한다는 그런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여기서 경계를 좀 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들은 눈앞의 즐거움이나 이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장차 더 큰 이익들이나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그 길을 가는 것이 더 낫다는 거라.

남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시원하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이 소리하면 저 사람이 싫어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얘기 안 하고 꾹 참고 있다가 좀 좋을 때 좋게 말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좋게 말을 하고 나면 오히려 그 사람도 ‘어, 그래 내가 잘못 생각한 것도 있구나’ 생각해서 또 뭔가 다른 방법으로 전해주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이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장차적으로는 이익이 생길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보통은 그렇게 하고 살죠? 보통은 그렇게 하고 살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적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할려면 중심되는 것들이 뭐냐면

"자신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 자기도 잘못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게 돼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됩니다.

자신이 잘나고 똑똑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냥 남에게 막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도 어떤 경우든지 항상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깨닫지 못한 하나의 범부중생일 뿐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도록 해서, 자신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그걸 고칠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런데 자신이 다 잘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설혹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정당화하기 바쁩니다.

 

주위에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특히 스님은 출가생활을 하다 보니까 출가한 스님들이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조그만한 잘못을 저지르면 내가 잘못했다 하고 참회해버리면 끝나버리는데, 어떤 경우에는 참회를 안 하고 "나는 그거 안 했어" 하고 자기를 자꾸 합리화할려고 그럽니다. 빠져나갈려고 할 것 같으면 합리화하는 사람은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속되게 막을 세워놔놓고 거기에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들을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면서 자기합리화하는 말들만 계속하게 되는데 그걸 어떻게 당할 거라?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럼 인제 사람들이 등을 져버리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참 많이 경험을 해왔는데, 그러면서 느낀 게 참 그래도 부처님이 잘 만들어 놓은 것이 요런 잘못을 저질러놨을 때는 요렇게 참회하면 된다. 또 요런 잘못을 저질렀으면 요렇게 참회하면 된다 하는 것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어서 그거는 참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걸 만들어놨는데도 하물며 그걸 발뺌하기 급해서 나중에는 더 큰 잘못을 범하는 경우들을 허다하게 봅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그러는데 일반 재가인들이야 아마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

얼마 전에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스님, 길을 가다가 돈을 주웠는데 처음에는 5천원짜리가 있고 그래서 돈 몇개 안 들어있어서 그거는 무심결에 주웠다는 거라. 그것도 줍는 것은 나쁜 건데 나쁜 건줄 모르고 그냥 주웠다는 거라. 그런데 떨어진 것을 가지려는데 저쪽에 돈뭉치가 하나 탁 있더라는 거라.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누가 큰 돈 쓸일 있어서 은행에서 찾았는데 그게 떨어졌던 모양이라. 그러니 자신도 그 순간에 이걸 집지를 못하고 그냥 그 돈뭉치를 향해서 손가락질만 하면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거라. 한참 동안 5분 동안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아무도 사람이 없었는데 한 5분 정도 있으니까 부리나케 사람이 쫓아오더라는 거라. 와가지고 아, 여기에 그 돈뭉치가 떨어져있다면서 집어가더라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가 느낀 것이 있어. "나는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을 모양입니다." 그러더라고. 나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작은 것 떨어진 것뿐 아니라 큰 게 떨어질 거 같으면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른 그걸 집어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안 했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한 개 두 개, 자기가 가질 생각 없이 그냥 떨어져있으니까 그냥 줍는데,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절대 안 줍습니다. 그런 것조차도. 자기 것이 아니면 그냥 그대로 놔둬버리지 그걸 줍지는 않습니다. 그건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쨌든 재가자들은 그렇게 줍는데 큰돈 떨어지면 차마 이걸 주울 생각을 못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크게 마음이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안 했던 거 같다. 그렇지만 조그만 거 하나라도 그거 네 거 아니지 않느냐. 그걸 왜 줍는 거냐, 그것조차도 잘못된 행위이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하고 얘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가인들은 그런 일들이 아마 태반일 겁니다. 남들이 모르면 자기가 눈앞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냥 가질려고 합니다. 이익될 것들은. 그것뿐 아니라 남을 속여가면서라도 자신에게 이익되고 즐거운 것들이 있으면 취할려고 할 거라. 그렇지 않으면 아마 사회 생활하기 힘들어지죠? 당장 남에게 10원짜리를 거기에서 합당한 금액으로 11원이나 12원 받고 팔려고 안 하고 15원이나 20원 주고 팔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달리 한번 생각을 해보자는 거라.

그 사람이 12원이나 13원 주면 정당한 가격으로 생각했는데 15원이나 20원 주고 사가는 사람들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버릴 경우에는 다음부터는 그 가게에 안 갑니다. 그것뿐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에게 그 나쁜 과보의 결과들은 또 돌아올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세상에는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뭔가를 내가 원인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것이 결과로써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우연히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이 사람은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나에게 뭔가 했다, 이런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잘 알고 있어야만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 ‘아, 내가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 정당하게 팔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또 자신도 그렇게 저지르는 것이 안 할려고 하는데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남들이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마음들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런 마음들이 먼저 생겨나지 않을 것 같으면 항상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방향으로 바른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힘들어져 버리는 거라.

 

대표적인 거 예를 들어볼게요. 「말하는 것」 경전에 비추어봐가지고,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누가 묻지 않으면 절대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누군가 물으면 그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합리화시켜서 조금만 얘기한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누가 묻지 않아도 그냥 입을 싹 닫아버리는 형태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두 번째는 자신이 잘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은 누가 묻지 않아도 말을 한다는 거라.

누가 물으면 오히려 뻥튀기를 한다는 거라. 더 크게 과장시켜서. 그런데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알긴 아는데 잘못한 것은 묻어버리려고 그러고, 잘하는 것들은 자꾸 드러낼려고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남의 잘못을 누가 묻지 않아도 그것을 드러낼려고 한다. 여러분들이 자기가 확인하고 한 것이 아닌데도, 남한테 들은 소리를 가지고 남들한테 막 전한다는 거라. 전하기는 것도 바로 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자기가 살을 붙여가지고 과장되게 말한다는 거라.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리하는데,

남이 잘한 것에 대해서는 누가 묻기 전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 사람이 뭘 잘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또 물어도 “아이고, 뭐 별거 아니다” 하면서 적게 얘기해버리고.

그게 이중적이라는 거라. 남과 나에 대한 것들 잘잘못에 대해서 이렇게 이중적으로 한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바른 사람이 아니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합니다.

 

적어도 바른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와 반대되는 경우들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누가 묻지 않아도 지가 스스로 허물을 드러내요.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드러내서 아,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잘못했다. 정확하게 그 사실을, 그 사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대로 다시 얘기합니다.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부러 얘기할 필요는 없지만, 남들이 그 사실을 물어봤을 때는 겸손하게 자기 자신이 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리고 남들의 마음을 생각해가지고 이걸 드러내야 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감안해가지고 얘기하고.

남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내가 설혹 그 사실을 확인하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묻기 전에는 그걸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확인된 사실이라 해도. 만약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남들이 물어봤을 경우에도 그 사람을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실을 얘기해야 되는 것이지 보호할려는 마음 없이 그냥 그 사실을 드러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인제 부처님이 부처님의 법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속하는지를 모르겠는데,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바르게 살아가는 참된 사람에 속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말하는 것도 그러는데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마음에 품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왜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들을 따져보자는 겁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이익들이나 자기 좋은 것들만 자꾸 그게 함정인 줄 알면서 거기 빠지게 될까?

행복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하고 싶다든지 고통받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고 행복하지 않은 길로 살아간다는 거라. 그걸 바랄 거 같으면 바라는 대로 행해야 되는데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살아갈 거 같으면 자기가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한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혼자 살아가는 것은 아니잖아. 출가한 스님은 오히려 그런 데서는 조금 더 자유롭습니다. 자기 혼자 수행하고 싶으면 혼자 토굴로 들어가서 수행하면 됩니다. 그래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크게 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고 그리할 것 같으면 무리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개개인에게는 항상 자기중심적인 겉치레하는 것이 항상 머리에 딱 박혀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이 세계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없을 겁니다. 없다는 말이라. 물론 죽고 나서 천상에 가고 아니면 극락에 가고 하는 것들은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후의 일이라고 치부를 해버리게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천상과 같은 삶을 누리라고 하는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이해할 거 같으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딱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들을 이해를 하고 생각할려고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고 싶지만 행복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신이 행복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요? 남들의 행복도 내가 거스르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나에게 이익이 있고 싶을려면 남들이 이익이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그것을 거스르지 말아야만이 나에게도 행복이 돌아온다는 거라.

 

혼자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틀림없는 법칙입니다. 내가 여기에 행복을 조금 뺏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뺏긴만큼 누군가가 그 행복을 채울려고 합니다. 그럼 그것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위험성은 언제든지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을 그냥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러더라도 자기 중심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남을 비추어가지고 자기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요렇게 말하면 남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걸 어떻게 판단하냐면,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내가 듣기 좋은가?" 자기도 듣기 싫다는 거라. 듣기 싫으니까 남들도 당연히 듣기 싫어. 자기가 이렇게 행동할 거 같으면 나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싫어. 그럴 것 같으면 남도 그 해코지하는 행동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바꾸어야만이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것으로 바뀌어져나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단순히 남에 대한 배려나 이런 것들을 자기를 희생해가면서 자기의 입장이나 이런 거 없이 무조건 남에 대한 배려만 할 거 같으면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 내가 뭐 하러 이렇게 살았을까’ 나중에 나이 들어서 아니면 그 일이 끝나고 나서 허무하게 돼버리는 거라.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야 되는데 자기 중심을 버려버리고 산 것이 그것이 결코 좋은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는 거라.

자신이 행복하고 싶으면 자신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을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것들을 하라는 거라. 그럼 자기 자신도 행복하고 남들도 행복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게 자기 중심적인 것들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왜 이런 근거들을 대느냐면 여러분들이 말을 하죠? 말을 하면 상대방이 듣죠? 자기는 안 듣습니까? 자기도 듣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보죠? 보면 그 대상은 보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은 안 보입니까? 똑같은 겁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것이지,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모든 것들을 나는 말을 하는데 나는 안 들으면서 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안 보면서 대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어차피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자기가 말하는 것을 자기가 듣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듣는 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좋은 소리가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말하는 게 부드럽고 좋은 소리가 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른 것들이라 해서 그것이 꼭 매끄럽고 좋은 방향으로 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법에 대한 것들도 그러한데 법 이외의 것들은 더더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아, 내가 이런 말을 해서 속시원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얼마만큼 내가 행복해지는가, 얼마만큼 내가 이익이 있어지는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하도록 해서, 자신이 이익도 있고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이익이 있고 행복해진다는 거라.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은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럼 눈앞에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할 거라?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참 많죠? 그래서 일화를 밑에다가 적어놨습니다. 아나따삔디까의 일화를 통해서.

 

아나따삔다까는 여러분이 알듯이 부처님에게 기원정사를 보시를 하고 그다음에 부처님과 상가 스님들 공양올리고 보시올리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뿐 아니라 말리까 부인이라든지 여러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참 많이 신경을 써서 했습니다. 당연히 그럴려면은 재산이 없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도 오늘 탁발을 올렸습니다. 그러면은 자기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올렸기 때문에 뭔가 금전적으로 손해가 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게 손해가 난 것인 줄 알면서 왜 보시를 한 거라? 왜 했어요? 누가 대답해봐요? 왜 한 거라? 스님 밥 먹어야 되니까 그냥 한 거라?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스님이 건강하고 이 세상에 계셔야 부처님의 법을 전해주지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보시 올리면 자기한테 어떤 좋은 공덕이 돌아갈 거라고 듣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도 얘기할 겁니다.

 

그럴려면 기본적으로 뭐가 밑바탕이 되어야 되요?

내가 조그만한 재물이 손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손해가 아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이 그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가 좋은 일을 행했으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 이 4가지들이 믿음의 기본바탕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보시를 행하고 또 선정을 행하고 또 지혜를 닦고 하는 것들이 불가능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그런 밑바탕이 완전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믿음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보시를 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금 당장 여러분들에게 눈앞에 보시한 만큼의 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이걸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더욱더 장려돼야 되는 겁니다. 아나따삔디까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신의 재물이 자꾸 없어져가지고 재산이 다 탕진하는 상태가 돼버렸어요. 그런데도 끊임없이 탁발 올리고 보시하고 이런 것들을 합니다.

집 안에 머물고 있던 천신이 여신이었는데 그 천신이 봤을 때는 참 허무맹랑한 거라. 자꾸 재산이 없어지는데도 끊임없이 부처님이나 상가 스님들한테 계속 보시 올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아나따삔디까에게 인제 제발 좀 그만해라.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하라. 그러니까 아나따삔디까가 “나는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더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계속한다” 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천신을 쫓아내버립니다.

 

신들은 머무는 곳에서 쫓겨날 것 같으면 갈 곳이 없어져버립니다.

(수행자 : 사람이 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예!

그리고 천신들은 선한 사람들이나 또 출가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그곳에 머물지를 잘 않을려고 합니다. 머물더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머물지 해코지하기 위해서 머무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까라니야멧따숫따 같은 경우에는 천신들이 나무 위에서 머물다가 그 숲에 출가한 스님들이 와서 수행하게 되니까, 자기들이 스님들 머리 위에 올라와 있기 뭐하니까 내려와야 되니까 그럼 머물 곳이 없어지니까 스님들을 방해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같이 평화롭게 잘 지내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니까 그 천신들도 오히려 스님들을 도와주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쫓겨난 천신은 인제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아, 내가 지금 현재 당장 눈앞의 이익이나 즐거움만을 쫓는 함정에 내가 스스로 빠졌다’ 하고 알게 됩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먼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수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수행한다 해가지고 얼마만큼 큰 이익이 있을 거라? 지금 당장 도와 과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지혜가 확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수행을 왜 해?

한참 지나서야 그래도 아, 이것을 이렇게 하니까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고 마음이 좀 청정해지고 깨끗해지고 뭔가 도와 과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 지금 당장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지금 그걸 바라고 지금 현재는 아무 이익이 없지만 그걸 꾸준하게 해나가고 있다는 거라. 시간을 들여가면서.

 

바와나(bhāvanā)라고 하는 수행도 선한 일인 거고, 지금 여러분들이 지키는 계도 선한 일이고, 보시하는 것도 선한 일이 됩니다. 이런 열 가지 선한 일들은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들이나 행복이나 즐거움을 바라기 위해서 하는 것들은 아니라는 거라. 드러나면 드러나는 대로, 드러나지 않고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냥 묻어둬버리고 지금 내가 해야 될 것은 그와 같은 선한 일들이라는 거라.

그게 밑바탕이 뭐냐면 믿음이 밑바탕이 된다는 거라. 삼보에 대한 존경의 마음.

 

그런데 대구 우리 붓다야나 선원에서는 보면 항상 탁발을 하면 항상 음식물을 저렇게 보자기에 싸가지고 와. 싸가지고 와서 탁발을 올립니다. 대부분 다른 데 가면 보자기에 싸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반찬통이면 반찬통 그대로 올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저걸 보면서 스님이 생각을 하는 게 적어도 여러분들이 만드는 음식 아, 이것은 소중하다는 거라. 이걸 보호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마음과 동시에 스님에게 공양을 올릴 때 스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또 그렇게 싸가지고 오는 거라. 그런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그냥 보시 올리는 것들은 그냥 보시로써의 생각만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기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탁발 올릴 때 보시의 예를 들어볼게요.

첫 번째 믿음을 가지고 하라. 삼보에 대한 믿음,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들은 지금 당장의 즐거움이나 이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내가 선한 행위를 했으면 선한 결과를 받는다. 언젠가는. 이 믿음을 가지고 하라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 보시 올릴 물건 공양물, 그다음에 공양 올릴 스님 대상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라. 소중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이걸 올리더라도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적당한 시기와 적당한 방법이라는 겁니다. 오전에 올리니까 음식물을 올릴 수가 있는데, 오후에 여러분들이 음식물을 가져왔다면 스님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못 받습니다. 그럼 오후에 올 경우에는 그냥 의약품이나 아니면 필수품들 이런 것들이 돼야 되지 음식물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음식물을 올릴 수 있는 때가 있는 거라. 그리고 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툭 스님에게 “스님, 방에 놔놨습니다” 하고 탁 놔놓는다고 해서 스님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법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직접 전해주기 전에는 그것은 그 스님이 받은 것이 아니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스님이 터치를 해줘야 돼. 받아야 돼!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놔둬버리고 가버릴 거 같으면 그거는 먹을 수가 없어.

어떨 때는 바쁠 경우에는 “스님, 거기 놔놨습니다. 드세요.” 이렇게 합니다. 못 먹어요.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방법을 몰라요. 시간적인 여유에 쫓기는 것도 있지만 그 방법을 자꾸 등한시 하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안 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올바른 시기와 방법에 대한 것들을 항상 유념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존경하는 마음을 지닌 채 탁발을 올려라. 법을 들을 수가 있고, 그 법 따라 나는 실천할 수가 있고, 나도 그와 같이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거 같으면 존경하는 마음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남편이나 아이들한테 존경하는 마음 없이 음식을 할 거 같으면 그건 독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으로 음식을 할 거 같으면 그건 독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을 지니고 ‘우리 남편 좀 더 잘살자, 애들이 바르게 잘크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그 음식을 내놓으면 그건 훌륭한 음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항상 지니고 음식을 내놓아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스스로에게는 내가 이것을 공양 올렸다는 생각들은 아예 내지 말아라. 그리고 여기에는 보시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라. 사정과 형편 따라서 하게 되는 것이지 지금 눈앞에서 그걸 안 한다 해가지고 그분이 보시를 안 한다고 누가 보장할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이 우쭐대지도 말고 남을 경시하려는 마음도 없이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자꾸 보시할려고 해야 됩니다.

 

이게 탁발 올릴 때 다섯 가지 부분입니다.

적어도 이 다섯 가지만 할 것 같으면 보시자와 보시물과 그리고 보시받는 사람들이 청정한 것이 됩니다. 이 3개의 합이 맞아야만이 올바른 공양 올리는 보시가 됩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의 보시를 올리더라도 지혜롭게 생각해서 보시를 올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생각하지 않을 거 같으면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이나 행복만 즐거움만 자꾸 쫓게 됩니다. 내가 이것을 바른 방법으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자꾸 유념해서 자꾸 되새겨봐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 2페이지 마지막 줄을 보면

「장사하는 입장으로부터 생각하면 보시는 재산의 낭비입니다. 세상 누구든지 그처럼 생각합니다. 지혜를 가지고 생각하면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확정하는 행위입니다.」

행복한 게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고 나도 행복해질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행복해지는 행위가 확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더 큰 이익이냐는 거라.

그래서 눈앞의 결과 눈앞의 이익이나 즐거움만 쫓는 것이 아니고 더 큰 것들을 생각을 하라는 거라.

눈앞에 있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실제로는 꼭 그렇지가 않다는 거라. 장래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이 더 큰 것이라. 아무리 지금 내가 행복하고 즐겁다고 하더라도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또 똑같은 일을 저질러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오히려 그것은 지금은 즐겁지 않고 내가 손해가 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일을 반드시 행하라는 거라.

그것이 바른 방법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냐? 하고 천신이 물어봤을 때,

부처님이 그때 "통찰지혜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거룩한 것이다." 잘 관찰해서 지혜롭게 생계를 유지해나가도록 하라. 그것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안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 마지막 페이지 이번 포인트를 보겠습니다.

• 잘못은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용서하는 마음은 매우 소중하다.

여러분들 잘못은 당연히 저지를 수 있죠? 그걸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걸 고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 할 수 있는 한 자기 중심적이 되지 않게 노력하면 잘못이 적어지게 된다.

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죠? 그렇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대비를 해보라는 거라.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듣기 좋은가? 이런 행위를 했을 때 내가 기뻐할 일인가? 그렇게 자꾸 마음을 먹었을 때 자기 중심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자기가 하는 행위들이 잘못하는 것이 적어지게 된다는 거라.

• 행동하기 전에 상대의 기분을 자신의 일로 보는 것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무리 맞는 거라 하더라도 시기와 또 그때의 장소나 상황이나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가 하는 것도 그런데 그것이 상대방과 연결됐을 때는 상대방의 마음을 항상 헤아려보는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로 보도록, 특히 기분 나빴을 때 안 좋았을 때 내가 뭔가를 얘기하더라도 나도 그 기분이 된다면, 들을 수가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자신은 당연히 그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 눈앞의 좋은 결과는 장기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의 원인이 된다.

눈앞의 좋은 결과만 자꾸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들은 바른 방법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1을 행했으면 1의 결과가 나온다고 얘길합니다. 그런데 1을 줬으면 1이 돌아온다고 얘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기브 앤 리시브"라고 얘기합니다. 1을 행했을 때 1의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내가 행한 1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는 거라. 그런 믿음들이 있어야만이 "기브 앤 리시브"가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눈앞의 즐거움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